평양(平壤)의 말 뿌리
이
낱말만큼이나 많은 재야 사학자들을 괴롭혀 온 말도 없을 것입니다. 고조선의 수도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이 평양이 어디냐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이
좌우되고 따라서 우리 고대사의 가쁜 호흡이 이어져 왔던 것이죠.
아울러
선비가 중원을 차지하며 세운 수도도 평양입니다 그들의 평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요. 유방이 시골 마을에서
벼슬하던 곳도 평양이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지명에 나오는 평양은 재야사학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고구려의 '평양왕'에 이르면 가닥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평양(平壤).
한자로서는 평평하다는 뜻 말고는 도저히 다른 풀이가 될 것 같지 않은데. 그런 평양이 도대체 뭐길래 고조선과 고구려와 심지어 선비족이 그
이름으로 자신들의 수도를 삼았던 것일까? 이 평양이란 말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이
문제에 도전하기 위해 우리는 '평양'이란 단어가 여러 형태의 한자로 쓰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평양은 뜻글자가 아니라 그 어떤
발음을 가차로서 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평양이 '삘라' 또는 '펴라'라는 만주어의 음차이며 이는 큰 강가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대개 평양이라고 불린
곳 근처에 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쉽게도 단재선생은 근접하였으나 정확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결론부터
말한다면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평양은 지나인들이 알타이 기마민족들이 '피알라그'(piala-g)라고 부른 것을 받아 적은 것일 뿐.
그 '피알라그'는 유목 기마민족이 정착하기 시작한 요새, 또는 마을을 뜻했었던 것이지요.
세르게이
박사의 자료를 보죠.
Altai
Protoform: *piála-gV ==> 피알라-그 (원시알타이어)
Meaning:
fortress, group of houses ==> 요새, 부락
Turkic
protoform: *bialɨk
Mongolian
protoform: *balga-sun ==> 몽골어로는 '발가순'..카라 발가순(黑都)
Tungus
protoform: *palVga ==> 퉁구스어로 '팔가'
Japanese
protoform: *pái
Comments:
EAS 56, KW 31, Владимирцов 147-148, ОСНЯ 3, 91-92, Sinor 1981 (listing all forms
but considering the Turkic word to be borrowed from Ugric), Дыбо 15, Мудрак
Дисс. 194. Despite TMN 1, 216, 2, 258, Щербак 1997, 104 the Mong. form is hardly
borrowed from Turk. Jpn. *pá-i presupposes a form *pi̯ắl(a)-gV = TM *palVga
etc. Note that this is a case of monophthongization after *p- in TM (cf.
similarly *pi̯ari, *pi̯āki).
고대
알타이 기마민족에게는 성(城)이 없었고 그 대신 책을 쌓아 방어진을 만든 요새 '피알라그'(평양)안에 부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기마
알타이족의 전통이 있었을 고조선, 적어도 왕검조선 이전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의 모습은 방책과 유르트 들이 모여 군집을 이룬
'피알라그'(평양)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이
'피알라그'를 몽골어로는 '발가'라 했고 여기에 신성하다는 뜻의 '순'을 붙여 발가순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몽골 징키스칸의 옛수도 '카라
발가순'은 '검은 요새' 또는 한자로 黑都라 쓰는데 아시다시피 고대의 카라 (Qara)는 검다는 뜻과 함께 신성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몽골의 카라 발가순은 신성한 요새, 신성한 도시라는 뜻이 맞을 것입니다. 이 카라발가순이 징키스칸 이전에 백제의 또 다른 수도
'거발성'과 모종의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것이 저의 조심스러운 추측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고대 기마민족에게 피알라그는 초원을 떠도는 고단함이 멈추는 곳이요 정착을 통한 생산이 시작되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피알라그에는 칸이
머무르는, 즉 왕도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피알라그'는 단순히 요새, 부락의 뜻을 넘어 점차 수도를 뜻하는 쪽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요.
기마
알타이민족이 초원을 달리다 정착하는 곳 마다 붙은 '피알라그'라는 이름.그것은 지나인들이 보기에 기마민족의 터전이 시작됨과 함께 정복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겠지요. 그것을 지나인들이 '평양'이라고 음차했을 것이라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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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중원을 차지하고 세운 수도가 평양이라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어디에 실려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선비를 합병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 초기의 일입니다.
여기서 선비족의 발원지는 후한서 선비전에 알타이산맥과 우랄산맥 사이 선비산에서 기원한다고 실려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안원왕 때
장안성을 쌓고 평원왕 때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합니다.
덮붙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양은 장안이고 유경(은나라 도읍지)이며 호경(주나라 도읍지)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륙의 섬서성 서안이 곧 평양이자 장안이고 유경이며 호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수서에도 고구려의 수도로 장안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고구려가 어디 있었는지 대략 알수 있습니다. 섬서성 장안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있습니다. 그렇기에 고구려가 선비를 합병할 수 있었으며 또한 중앙아시아에 있던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중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원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선비나
돌궐이 느닷없이 한반도 북쪽 만주를 중심으로 있는 고구려를 칠 까닭이 없는 거죠. 나름대로
제가 이전에 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어봤습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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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수도로 한 집단은 우선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 유총의 前趙 들이 있죠. 고구려가
선비를 합병했다는 글이 있던가요?
평양이라고 불리우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을 겁니다. 아울러
평양과 비슷한 발음의 평로, 평량 등도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도시들이 지나와 기마족간에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던 곳이라는 거죠. 평양이
장안이고 유경이며 호경이라는 것은 아마도 산서성의 평양을 뜻하는
것이고 그곳은 전조의 유총이 도읍한 '평양'입니다. 고구려의
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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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선비를 합병했다는 글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삼국사기 유리명왕조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평양은 장안이고 유경이며 호경이다."에서 평양을 산서성 평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유경과 호경은
주나라 은나라의 도읍지로 그곳은 섬서성 서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서에 실린 평양이 산서성 평양일 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나라 주나라의 도읍지를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고구려 양원왕 때 돌궐이 침략했고 그 이듬해에 장안성을 쌓고 평원왕 (서기586년) 때 수도를 장안으로 옮긴 걸로
적습니다. 참고로 당시 돌궐은 중원 진출 전인 중앙아시아가 거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분명 장안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분명 평양에 대해 말하기를 장안이고 유경이며
호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평원왕 당시 패하(패수)라는 강으로 사냥을 갔다는 글이 있습니다. 대륙사서 수경주에는 패수에 대해 말하기를
황하의 수많은 물줄기 중 하나로 그것은 곧 섬서성 장안을 질러 흐르는 강이라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 평원왕 당시의 수도 장안 즉 평양은 섬서성 서안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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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보니 정말 선비족을 정벌한 일이 있었군요.
(유리명왕)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人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設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 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 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