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고향과 문씨 집안 (1)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문준경(文俊卿) 전도사가 태어난 곳은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이다. 암태(巖泰)라는 말은 큰 바위란 의미에서 그 이름의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또한 돌이 많은 섬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현재 암태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해 있고, 2개 읍과 12개 면 가운데 암태면에 위치한 섬이다.
암태도 수곡리는 섬 중심에 위치한 가장 큰 산인 승봉산 자락에서 흐르는 물이 풍성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1760년 해남에서 이주해 온 장택 고씨에 의해 시작되었고, 1770년대에는 남평 문씨 문경행, 1791년에는 남평 문씨 문발원이 이주하여 마을이 확대되었다.
▲신안군 섬 지역 지도
이곳에서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문재경(文在經) 씨의 3남 4녀 중 세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문진현은 당시 진사(進士)로 학구열이 남달랐다. 진사는 원래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혁 속에서 진사는 유학을 공부하는 학식자로서 백성들의 지도자 격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시설 관리 등의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진사 할아버지의 동생 문태현은 일찍부터 농업과 제염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문씨 가문이 훗날 암태도와 그 주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문태현에서부터 시작된 경제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 자기 소유의 염전과 토지,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곡식을 선상에 실어 날랐다. 다시 돌아올 때에는 생필품을 싣고 와서 판매하여 수익을 남겨서 그 수익을 토지 집적(集積)에 투자하였다.
19세기 후반 개항에 의한 열강과의 통상무역은 농산물의 상품화를 한층 더 촉진시켰고, 유통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환경 변화에 문씨 일가는 암태도의 지리적 특수 조건과 향촌 사회에서 중간계층이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이용하여 지주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문태현의 아들 문재철(文在喆)은 암태도와 자은도, 지도, 비금도 등지의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통해 그는 1941년 4월 28일 목포에 호남 지역 최초의 사립 중학교인 문태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아 문씨 가문은 교육적인 면과 더불어 경제적인 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암태도 사람들의 신앙
▲신안 암태도 송곡리 매향비
문준경 전도사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 후기로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할 때였다. 1882년 5월 미국과 가장 먼저 국교를 맺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최초의 정주(定住)선교사로 입국하게 되었다. 전라남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온 시기는 문준경 전도사가 태어난 다음 해인 1892년이었다. 그해 11월에 남장로회 테이트 선교사 남매가 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1925년 심장병 악화로 귀국하기 전까지 다양한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초창기 호남 지역은 전주를 시작으로 해서 군산, 목포, 순천, 광주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 군산은 전북 해안 지방으로 확산을 꾀했던 선교 거점지였고, 목포는 전남 서해와 도서지역, 순천은 전남 남해와 섬진강 유역을 선교활동 범위로 확산시켰다.
문준경 전도사가 태어난 이 시기는 아직 섬 지역에까지 선교활동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신안군 섬 지역 사람들은 불교사상과 유교, 무속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으나, 1897년 10월 목포가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개항되면서 육지와의 접촉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선교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목포에 왕래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암태도창교회
기독교 불모지였던 암태도에는 이미 불교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불교 유적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1982년 7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 연구소 주관 도서지방 공동학술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매향비가 그 증거이다. ‘매향’은 불교신앙과 관련해서 미래에 다시 태어날 소원을 담아 향나무를 땅에 묻어 단단해지고 굳어지면 나중에 향으로 사용하는 침향을 만드는 일이었다. 현실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과 매향이 접목되어서 불교의식 때 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침향을 만들 때 사람들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매향비였다.
암태도 매향비는 1405년에 세워진 것으로 판명이 났다. 당시 왜구 침략이 많았던 해변 지역의 불안과 민심을 매향을 통해 치유하려했던 것이었다. 이렇듯 암태도에는 미륵을 기다리며 향나무를 심었던 불교신앙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이었다. 문준경 전도사가 태어난 땅 암태도는 기독교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던 복음의 불모지였고, 섬사람들은 불교신앙, 그리고 유교신앙, 민간신앙에 기대어 그들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훗날 문 전도사를 통해 복음화되는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게 된다. 문 전도사가 가족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로 암태도창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암태제일교회, 암태중앙교회가 세워져 그 땅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http://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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