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14
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부활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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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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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NjxOEb0Eso (문세영 필립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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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길에 대해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인 고독과 침묵 기도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참된 나를 만나는 길인 동시에 우리 속에 감춰진 가장 큰 생명과 만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나 단둘이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를 때만이 그분께서 내 삶의 근원이 되고, 내 정체성의 유일한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바로 눈앞에 뵙듯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해야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아주 크고 사납고 나이도 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사는 것도 지루해 보이는 큰 개와 인형같이 작고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새끼강아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달려가서 놀겠습니까?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작고 어린 강아지 쪽으로 달려가겠지요.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잘 성장해서 체격도 이젠 당당하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와 어린 시절부터 못 얻어먹어 체구도 또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될 정도로 왜소하고, 자주 아프고, 늘 뒤처지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먼저 시선이 가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히 덜떨어진 아이에게로 시선이 먼저 가겠지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일까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업적 때문일까요? 우리의 성공, 승승장구해온 빛나는 삶 때문일까요?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결핍, 작음, 나약함, 연약함, 소박함...이런 단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우선주의 구호에 파묻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좁고 작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겸손의 삶을 일관되게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빠져들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가난과 소박함을 바탕으로 한 무소유의 삶, 영적 삶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을 총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오늘 우리의 묵상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작음과 겸손함, 한없는 자기 낮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빛나는 작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심을 통해, 당신 친히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정도(正道)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동시에 그 사랑을 몸소 체현(體現)하신 이유로 진리 자체, 진리의 화신이 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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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pj700Z2U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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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기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본성,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통역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을 이분은 그리스도라 확신하십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을 때 이분은 우선 출세와 정의 중, 어떤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부 독재와 그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지식인층,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들 부류에는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에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60, 70세가 되어도 인생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상한 환시 같은 것을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창밖의 노을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천아 봐라. 저것이 인생이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이리저리 공부한 후에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까지 된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교황님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신부는 교황님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교황님은 그 노을을 보며 예수회에서 살다가 간 위대한 성인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참 진리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정 신부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 신부는 그때 노을보다도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압도되어 온전한 길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분은 항상 도달한 분이 아니라 ‘도정’에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래야 부담 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직접 그 길을 가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봅시다. 얼마 전 이태석 신부의 제자인 토마스가 의사가 되어 유퀴즈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토마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고, 그리스도의 삶의 계시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와 같은 반대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아니, 길이고 거짓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알로이스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아이를 열등감의 길로 가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된 진리를 드러냈고 결국엔 자살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훗날 독일 수상이 되고 비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회수를 새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의 길이 되어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려면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알에서 태어나서 나뭇잎을 먹으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애벌레 탑을 올라갑니다.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둘은 경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탑을 오릅니다.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태로워 보이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그는 고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에게 그 고치를 만들고 있던 애벌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대상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같은 애벌레라는 것입니다. 나비는 애벌레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자라야만, 곧 내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그 사람을 이미 나비가 되신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파견하신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부족하게나마 걸어본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태석 신부가 되어 사는 것보다 이태석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토마스에겐 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로 가고 있는지, 거짓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리며 거짓으로 향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거짓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그 사람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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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6-14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청한 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 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고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이 다시 읽혀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고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하고 있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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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영광’을(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소망인데,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모습을 안 보여주실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을 때부터(창세 3,8) 시작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스스로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인간의 처지를 원상 복구시켜 주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아버지를 직접 뵙고 싶어 한 필립보 사도의 심정은 모세의 심정과 같습니다. 여기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ㄱ)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티토 2,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유일하고 참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0-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요한 3,34)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요한 5,19)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는 말씀은, 앞의 10장 38절에도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 말씀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마르 16,15) ‘내가 하는 일’은, 여기서는 ‘선교활동’을 뜻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규모와 범위가 더 큰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일하셨는데, 승천 후에 제자들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그보다 더 큰 일’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승천’을 뜻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루카 6,40) 그리고 예수님처럼 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이 말씀은, 당신이 시키신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약속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만 하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아무거나 다 청하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그것이 예수님 뜻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내 뜻’만 생각하면서 고집부리지 말고, 결과를 ‘예수님의 뜻’에 모두 맡겨 드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방법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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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에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배우, 언론인, 가수, 시인, 산악인, 교도관’처럼 직업이 다양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입니다. 그 성실함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기준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분들에게 신앙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2022년 4월 20일 지면에 소개된 교정직 공무원 정여경 헬레나 씨의 이야기는 작은 감동이었습니다. 수형자들이 삶을 돌아보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도관인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있어도 마음이 자유롭다면 새로운 날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감옥에 갇혀있으면 새로운 날이 찾아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와 필립보 사도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서는 12명의 사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역사와 성서의 기록에 의해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사도들의 뒤를 이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우뚝 서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사자처럼 용맹하지 않아도, 곰처럼 힘이 세지 않아도, 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않아도, 표범처럼 빠르지 않아도 인간은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켰고, 스스로의 힘으로 지구 넘어서 별을 향해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그 중심에 ‘신용’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폐’를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화폐경제의 핵심은 ‘신용’입니다. 신용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물물거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물거래를 하는 상황에서는 지금의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은 ‘화폐’를 이용해서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물건을 구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금융거래를 합니다. 이 또한 신용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용이 사라지는 곳에는 ‘대립과 갈등’이 자라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보복과 전쟁’은 아름다운 문명을 황폐하게 만들게 됩니다. 남과 북은 엉킨 실타래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 문화교류, 상호방문, 군비축소’는 남과 북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사랑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 그 자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중에는 칠삭둥이 같은 자신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가슴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토마사도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 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과 공기는 우리가 너무 쉽게 접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물과 공기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자주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교만’은 우리의 가슴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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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태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도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특히 사제성소의 길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자 숱한 질문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을 만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간절히 바래왔습니다.
하느님만 아니 예수님만 아니 성모님만 아니 성인 중에 한분만이라도 만나기를 바라면 그러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나의 삶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과 신앙을 구별하여 생각하고 생활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의 결여로 인하여 갈등과 혼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바로 삶이라는 삶이 또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신앙의 확신을 얻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곤 합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또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함께 생활해온 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직접 그분께 묻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또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숱한 조상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하느님의 사람. 곧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이신가하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여러 조상들이 하느님께 받으려 했던 그 큰 선물이 지금 자신들에게 와 있는지를 묻는 대단한 질문이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오늘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또한 허탈함마저도 느껴집니다.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의 답은 바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청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는 목적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마쳐갈 무렵에 제자들을 앞에 두고 확신을 주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오늘 복음으로 읽고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갖는 삶의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날 희망을 갖고 사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시기에 가져야 할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할 줄 안다면, 부활시기를 지내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어떻게 준비하며 사십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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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병덕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아십니까?>
오랜 기간 연애를 하다 결혼한 부부나 중매로 맺어진 부부가 “결혼하고 나니 몰랐던 점이 너무 많다”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사실 평생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도 그리고 제 속으로 낳은 자식마저도 그 속마음을 다 알지 못하며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이유는 자기의 관점을 강조하고, 자신의 눈높이로만 상대방을 바라보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에게 내 생각만을 말하고 요구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면 상대방에 대해서 알기란 불가능한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도 언제나 부탁만 드리고 내 입장만을 호소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그리고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이웃에게 행하고 있는 이기적인 태도를 주님께도 똑같이 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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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그러자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4,8) 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진정, 우리도 그분 뵙기를 열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 그러니 이는 보고 깨닫고 믿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보고 깨달아 알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 ‘보는 것’을 먼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믿음이 그분을 뵙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알게 하고, 보게 할 것입니다. 결국, 믿으면,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저에게서 결코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해 주십시오.
오늘 그 믿음으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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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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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떠남과 남음>
요한 14,6-14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떠남과 남음>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요한 14,12)
늘 함께하던
당신은 떠나고
나는 남습니다
당신은
나를 남겨놓고
떠나십니다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남습니다
당신의 떠남은
남겨지는 나에 대한
당신의 믿음입니다
나의 남음은
떠나시는 당신에 대한
나의 믿음입니다
떠나시는 당신은
남겨지는 나에게
희망입니다
남겨지는 나는
떠나시는 당신에게
희망입니다
당신은 떠나심으로써
남겨지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남음으로써
떠나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떠나셔도
나와 함께
남습니다
나는 남아도
당신과 함께
떠납니다
당신의 떠남과
나의 남음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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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지면>
일반적으로 세상의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자유를 얻게 됩니다.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 준 분은 모세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만나를 내려 주신 분보다는 만나, 즉 빵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육적 배고픔을 없애주는 음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빵과 물고기라는 표징 너머의 사랑을 깨닫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외에는 보이는 게 없는 군중에게 스스로 빵이 되겠다는 일종의 ‘눈높이’식 깨우침을 주시고자 당신이 빵으로 접근하셨습니다. 빵이 주는 생명과 생명의 빵이 주는 영원한 생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현세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투신해야 합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영생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비워내야 하며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께 맡기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하자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하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를 느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허기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이십니다. 과거에 한때 주신 빵이 아니라 지금 내려 주시는 빵입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주실 것입니다.’ 빵이 아니라 빵을 주시는 분에게 시선의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오직 순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목이 뻣뻣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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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또는 교의 신학적으로 그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태어난 지 단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자로,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아온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온전히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씀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생애를 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분노에 찬 이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다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성인의 삶과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또 그분의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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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성령의 힘!>
필립보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14,10)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아직은 죽음의 때가 저 멀리 있는 것 같아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듭니다.
입과 머리와 생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믿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어렵고, 조건없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너무 힘듭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힘들까?
오늘 복음 안에서 보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보여주심)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를 탓해서도 안 되고, 하느님의 부재 상태인 나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도 참으로 힘들지만 ㅎㅎ
"하느님, 필립보와 야고보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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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분의 말 습관 중에 “아니죠”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심하다 싶게 “아니죠”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점점 이 분과 함께 하는 자리가 힘들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얼마 뒤 다른 분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앞의 분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제 말에 “맞아요.”라면서 맞장구를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분과의 대화는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지나간 것 같았습니다.
이 두 만남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대화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 “아니죠.”라고 기도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기도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아마 나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만 늘어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맞아요”라고 하면서 기도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과 진정한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신나 하시며 이런 나와 함께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신만 따르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곧 진리요 생명이시니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 이론가로 통하는 필립보가 나서서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필립보를 향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간직하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도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향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없이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어떻게든 믿음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일상 삶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 “아니죠”라는 부정적인 말로 과연 대화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모든 일을 인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맞아요.”라는 말의 시작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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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화두와 같은 복음 말씀입니다. 이래야 중심을 잃고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 방황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 한 말씀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자 요약입니다.
정말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안에 예수님의 신원이, 예수님과 아버지와 긴밀한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이런 주님께서 친히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참삶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일치의 정도에 달렸음을 봅니다. 아버지의 생명에,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평생공부가 예수님을 알아가는 예수님 공부뿐임을 깨닫습니다. 길을 잃을 때 방황이요, 진리를 떠날 때 거짓된 삶이요, 생명에서 멀어질 때 죽음의 삶입니다. 그러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의 행복과 구원에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앎과 하느님께 대한 앎은 함께 감을 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뵙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뵙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두분이 얼마나 깊은 일치 관계에 있는 깨닫습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는,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도들이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토마스 사도 덕분에 이 귀한 예수님의 신원을 알게 되니 말입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필립보 사도 덕분에 우리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그대로 수십년간 아니 평생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우리 수도자들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필립보 사도와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르겠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늘 지내는 모든 신자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그대로 드러내시는 예수님과 늘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요!
필립보 사도 덕분에 우리 신앙생활을 다시 새롭게 공부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자기계시가 또 우리의 예수님-하느님 공부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새삼 기도와 고백, 믿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필립보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깨달아 배우게 됩니다. 저절로 믿음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 찬미의 고백, 감사의 고백,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을 드림이 얼마나 예수님과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청하면 주님은 다 이루어주겠다 확약하십니다.
과연 평생 매일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라는 공동전례기도를 참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사랑 가득 담아 바치는 우리들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아, 기도, 사랑, 희망, 믿음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영성훈련입니다. 참으로 평생 영성 훈련병으로 하루하루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야 할 ‘주님의 영성 훈련병訓鍊兵’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눈 앞에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잊고 지내는 무지한 우리들입니다. 늘 강조하는 바 모든 불행과 비극의 근원인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진심의 고백기도가 무지와 허무의 병을 치유해 주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뵙게 하며 주님의 빛속에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1서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되살아나셨다’는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케파 베드로에게 다음에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에게 또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바오로 자신에게 발현했다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얼마나 통쾌한 바오로 사도는 물론, 초대교회 신도들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고백인지요! 바로 이런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주님이요, 이런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에 날로 파스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함으로 참나를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끝으로 제 자주 바치는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주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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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아보기>
언젠가 이태리를 다녀온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이태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아교육방법(유치원)에 대한 체험을 그 친구가 이야기 해주었다. 그곳 아이들은 그냥 어떤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음악을 듣고나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맛을 보고 그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등 어린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무수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자세가 충격적이더란 이야기였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늘 우리의 경험안에 고정된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그 안에 숨어있는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나를 보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본 것이다>고 하신다.
우리는 자꾸만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감동적인지 별로인지, 거기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작 그분이 보여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못보게 되고 정작 그분이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 하느님을 몰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고 사제가 미사를 잘 드리는지, 제대에 꽃이 잘 어울리는지, 독서하는 사람은 잘 하는지, 해설자는 또박또박 잘 하는지, 사제는 강론을 잘 하는지, 마이크 상태는 좋은지... 이런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립보처럼 하느님께서 <짠!> 하고 당신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형제 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바라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색깔이 이쁘니, 모양이 이쁘니, 향기가 좋으니만 생각한다면 나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을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 꽃을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라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열려있는 시각, 즉 어린이들의 상상치도 못한 사고와 생각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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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ZI85cJTf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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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9)
무엇이 삶의
핵심인지를
묻게 되는
시간이다.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보아야
만날 수 있고
만나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세상적 가치를
버릴 때
복음의 가치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아집과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실천의 길이
복음의 길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
곧 참된 평화를
전하는 삶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만나는
새로운 기쁨이다.
인생 전체를
이끌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되시는 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버지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하기에
저마다에게는
가야만 할 길이
있는 것이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는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영원하신
주님을
따랐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을 수
있는 따름의
참된 진리이다.
행복의
출발점이
되시는
예수님을
다시 뵙는다.
예수님께서는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신다.
삶다운 삶을
하느님과
하나되는
진짜 행복을
만나게 하신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나고
있는 지를
묻게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행복한 오늘이다.
삶의 핵심은
삶으로 오신
삶이 되시는
우리 삶의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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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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