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짜장면은 중국음식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짜장면이 뭔지 구경조차 해 본 일이 없습니다. 화교들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한국에서 개발한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음식 조리법에 기초하여 중국사람들이 개발했고 중국집에서 팔기 때문에 짜장면이 중국음식이라는데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짜장면은 중국인을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니라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어 전적으로 한국 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제품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중국 상표가 붙은 한국 음식문화의 일부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각 나라 사람들의 미각에 맞추어 변형되는 중국음식의 다양성으로 짜장면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화교들에 의해 한국 음식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태리음식과 멕시코음식 등 다양한 외국 음식들에 의해 미국음식의 폭이 넓어지듯이 말입니다. 저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짜장면은 중국사람들에게보다 한국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화교 출신 중화인이 경영하는 버클리 <풍년> 식당에는 짜장면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인이 경영하는 오클랜드 <옛날짜장>에는 짜장면이 있습니다. 아마 세계에서 짜장면을 가장 많이 먹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짜장면이 한국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의 문화적 위치를 짜장면에 비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하고 서구에서 발전되어 한국에 전래된 외래 종교임이 분명하지만, 한국에 들어와 2백여 년의 역사를 지내는 가운데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 깊이 동화되어 이제는 서구의 기독교와는 매우 다른 독특한 한국 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가 한국 종교로 변한 것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자체가 기독교를 포함하는 서구문화에 의해 개항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한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문화가 급속도로 서구화하고 기독교가 급속도로 한국화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기독교’라는 독특한 종교현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니다.
저의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 중 하나는 서구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발견이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듯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라는 절대 가치에 한국이라는 상대적 또는 부정적 가치가 종속되는 교회교육과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유신교육으로 대변되던 어릴 적 학교 교육은 ‘민족’이라는 가치를 최상위에 두는 것이었고, 그것은 항상 교회교육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시켰지만, 오히려 ‘국외자’(marginalized)가 됨을 통해 기독교의 가치관이 강화되곤 했던 것이 어릴 적 저의 문화/종교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의 성장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이라는 강한 문화의식이 자라났습니다. 장신대 신대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86년 선후배 친구들과 함께 동양사상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저를 그 모임에 참가하게 만든 근본적 인식 중 하나는 기독교가 서양종교(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라는 ‘발견’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내가 기독교인인가, 한국인인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고민 속에 지내기도 했고, 한국인이 되겠다는 선택의 결과 한동안 신학 공부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제가 다시 신학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기독교가 이미 한국종교가 되었다는 발견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미국에 와서 미국의 기독교를 보며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한국적인가를 알게 됨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97년에 유학을 온 후,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장례식에 참석차 단 한 번 한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장례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기독교식 장례식’이 가진 문화적 양면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에게 교회의 장례식은 매우 ‘기독교적’입니다. 절도 안하고 곡도 안하고 스님도 안 오고 전통적인 여러 절차들이 생략되는 반면 찬송 부르고 예배 드리고 목사가 오기 때문입니다. 제 처가의 친척들은 대부분 비기독교인들입니다. 큰 사위가 목사라서 대놓고 반대는 못하지만, 장례식 과정에서 불만이 많았었나 봅니다. 장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속에서 급기야는 평소에 좀 말씀이 많으시던 아저씨 한 분이 술김에 처가 식구들을 향해 서운한 마음을 다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 그래,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앞에 큰 절도 못해?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앞에서 곡도 못해? 기독교인들은 정도 없고 눈물도 없냐?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너희가 믿는 신앙으로 용납이 안된단 말이냐?” 화플이는 처가 식구들을 향했지만, 아마도 사실은 목사인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 두 번 장례식에 참석한 경험이 있던 저에게 한국 교회의 장례식은 ‘너무나도 한국적인’ 예식으로 보였습니다. 미국인들의 장례 절차는 장례 전 날 관 뚜껑을 열어놓고 조문객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Viewing(한인들은 이것을 입관예배라고 부르더군요)과 장례 예배 그리고 입관예배가 전부입니다. 장례식 기간동안 빈소를 지키며 밤을 새우는 일은 없습니다. 유족들은 장의사(Mortuary)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집에 가서 푹 쉽니다. 한국의 장례식에는 “축제”라는 영화가 미학적으로 그리고 있듯이 역설적인 축제의 성격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미국의 장례식은 고요함 속에 고인의 시신을 마주 대함으로 그 슬픔을 극단화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장례식은 사흘 동안 가족들이 밤을 지새우고, 예배라는 기독교의 옷은 입혔을지라도 내용적으로는 전통 절차들을 대부분 따라하는 여전히 한국적인 예식입니다. (권수영 목사가 한국과 미국의 장례식을 비교한 재미있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직접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례식 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건축 과정에서 드리는 기공예배, 상량식 예배, 완공예배 등은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예식들입니다. 개업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같은 이름의 굿판을 벌이던 것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예배로 바꾼 것입니다. 한국의 설교자들은 새벽예배의 기원을 복음서의 예수님에게서 찾아내지만, 교회사 초기 길선주 목사로 하여금 새벽예배를 하도록 자극했던 것은 절에서 드리는 새벽 불공이었다고 하지요. 그 외에도 한국 교회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독특한 종교 현상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좀더 학문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만, 현대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이 결코 한국 기독교를 서양 기독교와 구분시키는 격차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보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순수한’ 문화/종교란 존재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저는 미국인들에게 한국 교회를 설명할 때, 시스템은 장로교가 지배적이고 (감리교에도 장로가 있고 침례교에도 장로가 있지요) 신앙의 내용은 오순절파(순복음교회)가 지배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뿌리를 찾자면 유교 문화가 시스템을 지배하고 샤머니즘이 영성 표현 양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천국과 지옥이라는 내세관은 극락과 지옥이라는 불교의 변형된 내세관에서 영향 받은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짜장면이 한국 음식이 된 것처럼 기독교는 이미 한국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 내용까지 담아내려면 아마 짜장면보다 ‘짬뽕’이 더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르겠군요.^^
과거 토착화신학은 복음의 원형에 한국 문화의 옷을 입힌다는 유비를 통해 설명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에 한국 옷을 입힌다기 보다는 한국 문화/종교에 기독교의 옷을 입힌다고 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앙고백의 내용은 “보수 정통”이 지배하고 예배 양식이나 복장은 서양보다 더 전통적이지만, 그 신앙의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앙 내용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않은 채, 아니 사실은 부정한 채, 그것을 배타주의로 절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가 생각해 봅니다.
제가 쓴 글에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달아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문화에 본질적으로 포함되는 권력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짜장면을 개발한 화교들은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았지만, 기독교는 지금 가진 자, 힘있는 자의 종교가 되었는데, 그것을 문화 혼종이라는 공통점만 가지고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두 번째, “우리의 것”이라는 규정이 “그래서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당연하게 수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한국 종교가 되었다는 말이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에게 적합한 종교라는 주장으로 당연히 이어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문화 정체성의 논의와 별개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문화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의 한국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작업에서 출발하여 그 문화적 현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즉 시간적으로는 역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한국 전통 종교/문화를 비교하는 작업이 신학의 한국화/아시아화를 대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전통 문화/종교는 오늘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으로 오늘의 한국인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할 때, 그 ‘한국’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