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이 만들어낸 주름의 아름다움 - 들뢰즈와 렘브란트
바로크에는 있고 고전주의에는 없는 것
사람의 피부에는 주름이 있다. 사람의 신체 부위 중에서 주름이 제일 많은 곳은 대개의 경우 얼굴과 손바닥일 것이다. 그만큼 많이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든 잠을 자든 심지어 명상을 하든 언제나 손은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고 있다. 손금이라고 부르는 손바닥의 주름은 서로 비슷해보여도 제각기 다르다. 하나의 큰 선으로 보이는 주름도 무수히 많은 미세한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믿는 손금도 알고 보면 무수히 많은 작은 주름들이 중첩된 것이다.
얼굴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순간, 음악을 듣는 순간, 사색에 잠긴 순간, 심지어 격렬한 동작을 취하는 순간에도 매 순간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주름의 모양은 다르다. 미세한 표정이나 움직임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 예술의 특징은 이러한 무수히 많은 주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바로크 화가 중의 한 사람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06~1669)의 〈자화상〉이 갖는 위대함은 자신의 얼굴에 내재한 삶의 굴곡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는 점에 있다. 이 굴곡은 다름 아닌 주름이며, 이 주름은 하나의 뚜렷한 실선이 아닌 무수히 많은 미세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린 〈자화상〉에는 뚜렷한 실선으로 구획된 실루엣보다 삶의 애환을 담은 주름의 중첩만이 발견될 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담긴 렘브란트 자신은 하나의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이때 무한한 존재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삶의 무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무게에 짓눌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과 같은 세계의 모든 속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 근접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무한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초월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무한의 존재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Self-portrait, 1659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자기 얼굴의 주름, 즉 삶에 내재된 굴곡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미세한 선들로 이루어진 주름의 중첩은 렘브란트를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 같은 세계의 모든 속성을 내재한 무한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들뢰즈는 이런 바로크의 주름이 내재적 무한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바로크에 대한 찬양은 바로크가 이러한 내재적인 무한 존재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의 실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주름들의 발견이 곧 바로크의 실체인 셈이다.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le baroque, 1988)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크는 무한한 주름의 작업을 발명하였다. 문제는 주름을 어떻게 유한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무한하게 이어나갈 것인가이다. 즉 주름을 어떻게 무한히 실어 나를 것인가가 문제다.”
들뢰즈에게 바로크의 주름은 내재적인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바로크적인 주름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라는 개념과 연관 짓고 있는데, 모나드란 바로 무한한 속성을 지닌 사물의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이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은 이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주름으로 겹겹이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모나드란 제각기 무수한 속성을 지닌 내재적 무한성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찬양하고 있는 바로크의 시각은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매우 이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서양의 지적 주류는 바로크가 아닌 고전주의이다. 고전주의는, 미술에서는 주름보다는 분명한 실선을 중시하는 데생의 강조로 나타나며, 음악에서는 미묘한 리듬보다 수학적이고 체계적인 화음의 우위로, 철학에서는 모호한 감성이나 직관보다는 개념적 사고의 우위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크의 현대적 부활은 곧 서양의 전통적 주류에 대한 폄하와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크 음악만이 지닌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계속저음(basso continuo, 통주저음, through bass)’의 사용이다. 통주저음이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음부를 말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록 음악에서 기타 소리에 묻혀서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베이스 기타 음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하지만 꾸준한 베이스 소리가 있느냐 없느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크 음악에는 마치 심장박동 소리처럼 잘 들리지는 않지만 긴장감을 유발하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저음이 깔려 있다.
바흐의 〈요한 수난곡〉 악보에 나타난 통주저음통주저음은 바로크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크 음악의 모나드일지도 모른다.
고전주의 음악은 바로 이러한 통주저음을 없애버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마치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진행되는 저음의 반복이 곡의 서사적 완결성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심장박동 소리는 긴장감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형식을 갖춘 음악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고전주의 음악이 정착시킨 제시부-발전부-재현부라는 매우 체계적이고도 완결적인 소나타 형식을 고려해볼 때 이렇게 비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저음의 소리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정서적 강도(intensity)를 유발하는 음의 긴장감은 화음과 선율의 형식에 의해서 밀려나고 만다.
이는 근대 서양음악이 얼마나 자기완결적이며 거시적 체계와 형식에 얽매여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근대 음악에서는 멜로디가 분명한 두 개의 주제들 그리고 그것의 형식적인 변형과 이탈, 다시 대단원의 화합으로 이어지는 형식적 스토리에 대한 집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좋은 음악이란 매우 복잡하고도 치밀하게 짜인 거대한 체계이며,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화성을 이탈하지 않는 거시적인 구조물이다. 음악은 마치 치밀한 설계도면 위에 세워진 건축물과도 같다.
특히 계속저음은 숫자표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숫자표저음은 이후의 고전주의 음악에서와 달리 저음 위에 숫자로 음을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숫자표저음은 악보에 주어진 저음 외에 연주자가 임의로 음을 더하여 연주를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이는 곧 연주자에 따라서 혹은 동일한 연주자라 하더라도 때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연주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같은 곡이라도 매번 다른 곡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고전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자 한다. 하나의 곡은 정해진 악보에 의해서 작곡자가 표기해놓은 그대로 정확하게(?) 연주되어야 한다. 작곡자는 연주자가 임의로 연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사항을 악보에 표기한다. 정해놓은 대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연주자의 미덕이다.
고전주의자에게 악보는 마치 항상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언어적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 혹은 개념이 있다면, 고전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을 다양한 뉘앙스로 발음하여 말의 여러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동일한 의미로 개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념의 동일성이 지니는 권위 앞에서 차이는 질식하고 만다. 들뢰즈에게 바로크적인 것이란 바로 개념의 동일성에 깔려 죽은 차이의 복원이다. 그에게 바로크의 현대적 부활은 동시에 차이의 부활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로크에는 있고 고전주의에는 없는 것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