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친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귄다. 우리가 다른 친목 단체와 다른 건 우리 중심에 하느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서로 가까워진다. 우리의 친교는 예수님을 향한다. 둥근 원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각자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수록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진다. 사람이 되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 분,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배운다.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긴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준다(필리 2,3-4).” 교회는 겸손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거기에는 당신 우리에 있지 않은 양들이 있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유명한 코미디언이 자신이 바보처럼 행동해야 관객이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열어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우리는 바보로 위장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배운 대로 겸손해지는 거다. 실제로 그분을 생각하고 마음에 모시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거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무늬만 아니라 속까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다. 밥 먹을 때 성호경을 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해서 그리스도인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 배려 양보 봉사가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잘해주라고 하셨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여기서 보답을 받으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은 웬만하면 할 수 하다. 이웃 사랑에서 가장 어려운 건 ‘보답 없음’이 아니라 ‘보람 없음’일 거다. 봉사가 중독성을 지닌 것은 아마 보람 때문일 거다. 뿌듯함이나 자신의 존재가치가 높아진 거 같은 느낌말이다. 다시 십자고상을 올려다본다.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을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 도망쳤고, 무지의 고통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성모님도 그럴 수 없었다. 그 시간, 예수님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셨을 거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죽음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경험한 사람은 없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셨을 거다. 여기서 숨겨진 선행과 보람 없는 의로운 행위까지 다 보시는 하느님이 나중에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내 품에 담아 주신다고(루카 6,38)’ 믿는다. 믿을 건 이 말씀뿐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시켜 준다. 이렇게 예수님과 진정으로 친교를 이룬다.
예수님, 맛을 봐야 그 맛을 아는 거처럼,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하고 주님을 따라야 주님 마음을 압니다. 보람도 주님이 가져가셨다고 믿습니다. 나중에 백 배로 늘려서 되돌려주신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고요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며 아드님을 따르는 이들이 누리는 평화를 배우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