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가끔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곤 합니다. 왜 사나? 우리 인간만이 해보는 질문이고 답을 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답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인류 공통의 답이 있습니까? 질문의 수만큼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가치관이고 인생관에 따라 천차만별의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다 하는 정답도 없습니다. 대체로 분류를 한다면 쉽게 돈 따라 사는 인생도 있고 명예를 지키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과 신념에 생명을 거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믿음 때문에 순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스페인 내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말 그대로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네스트 헤밍웨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잘 아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영화로도 나왔지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자기 나라도 아닌데 그 내전에 유럽의 다양한 나라에서, 더구나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우리나라 6.25 전쟁에도 많은 나라가 참전하여 지원해주었습니다. 이유가 뭐였나요? 한 마디로 돕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이념에 대한 신봉입니다. 우리나라 전쟁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항거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과 신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 이방 땅에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하며 목숨까지 바칩니다.
인종차별은 참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지고 발전해도 이 뿌리 깊은 의식은 사람들 가운데 잠재해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보다는 일단 거부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나는 아니야, 해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반응을 하곤 합니다. 깨닫는 순간 잘못을 인정하고 공정한 의식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무의식적인 느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의식화되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잘못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나서서 반대운동을 이끄는 것입니다. 한창 정의감에 불타는 시기에 흔히 목숨까지도 걸고 투쟁합니다.
잘 아는 대로 20세기 후반까지도 인종차별이 세상에서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남아공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나아가 철저히 무시하고 박대했습니다. 그 차별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회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그렇게 정해져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양쪽 모두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에 반대하고 대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힘을 모아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충돌이 발생합니다. 인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세력이 생겨나 기존의 질서를 위협합니다. 기득권자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사회정치적 권력과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종차별 저항운동에 백인 청년 두 사람이 껴듭니다. 그리고 결국은 경찰에 붙잡힙니다. 모두가 그 의식 속에서 살고 그렇게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재판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소위 엄벌에 처합니다. 그래서 형량도 문제겠지만 당시 매우 악명 높은 감옥소로 보내집니다. 두 젊은이의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사람 어느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이 사상범(?)들은 요주의 인물들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눈총을 받으며 감시를 당합니다. ‘팀’과 ‘스티븐’은 그렇게 수형생활에 임합니다. 12년과 8년,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디지요? 사실 그 기간이 끝난다고 끝날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어떤 빌미를 만들어 기간을 연장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어디서든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감옥이라고 악랄한 도깨비나 귀신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극악한 범죄자들만 있는 곳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바깥세상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뛰어들 용기는 없습니다. 함께 하기를 원했지만 스스로 포기한 장기복역수가 있습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미로보다도 힘든 그 길을 어떻게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문 하나하나를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긴장과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 사이 간수의 오가는 발자국 소리는 오금이 저리게 만듭니다. 고요 속에 찰그락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는 그야말로 천상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습니다. 그런데 실화랍니다. 아마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나무로 철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다니, 가능합니까? 나무의 특성을 잘 알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치밀하게 관찰을 하였습니까? 참으로 대단하다는 칭송이 절로 나옵니다. 탈옥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팀이 사랑했던 여인을 평생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기야 그 나라로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자 또한 자기 나라를 떠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에야 나라가 많이 바뀌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렀습니다.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를 보았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건 주말되세요
님에게도 복된 주말을 빕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