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박상희씨(박정희 대통령의 3째형)에 대한 자료부터 찾아봤습니다. ‘박상희씨는 일제시대, 경북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고 있었으며, 항일운동가로 일경에게 여러 번 구속되는 등 정열적인 민족지도자였다. 이런 박상희씨를 어린 박정희는 무척 존경했다.’ (노사모에서 이 부분을 무척 강조하더군요. 그래서, 남로당에 가입했다고..그럼, 역으로 박정희 대통령도 항일정신을 갖고 있었던 게 맞겠죠. 형이 항일파인데 동생이 친일파?)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한 박상희씨는 46년 10.1일 대구사태 때, 구미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노사모들의 주장이죠.
’박상희씨는 10.1 대구사태 때, 구미경찰서장이 빨갱이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서 사택에 숨겼는데, 충청남북도에서 증원된 경찰들이 구미에 들어 오면서 숨어있는 그를 발견하고, 남로당으로 오인 사살했다. 사람들이 다친 박상희씨를 누님 집에 업어다 줬는데, 곧 사망했다(46.10.2).’— 여기까지는 체험적 기자론(남기욱 저, 나남출판사. 2001년 9월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46년 박헌영 수배령이 내려지자, 남로당은 46. 9월 전국적으로 철도파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대구철도 근로자들도 파업을 일으키게 되는데, 대구에 와있던 남로당들은 10.1일 노동자 수백명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며, 관공서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리고, 폭동은 10.2일 대구에서 달성군으로 확산되었다가, 10.3일 완전히 진압되어 소멸됩니다. 그럼 박상희씨에 대한 의문은 1. 남로당원이면 왜 다른 당원들과 함께 선동을 위해 미리 대구로 가지 않았나? 2. 구미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박상희씨는 홀로 구미에서 죽었는가? 3. 그리고, 박상희씨가 남로당이라면 당시 이승만 정부의 철저한 반공신문을 배부하나요? 오히려 조선노동당지를 배부해야 하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즉, 박상희씨는 남로당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이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알아봅니다. 과묵한 그분은 평소에도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협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소령은 서울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전혀 비굴해하지도 않았고 시종 의연한 자세로 조사를 받았으며, 김창룡과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남로당 혐의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들이 자진해서 구명사유서를 작성해 백선엽장군으로 하여금 미 고문단에 제출하게 합니다.
백선엽 장군은 이외에도 중국에서 귀환한 동포 20여명이 청원한 박정희 대통령의 만주에서의 경력(공산당과 싸운건지 내용은 알수없음)과 함께 서명을 받아 미 고문단에 제출하죠. 그리고, 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석방됩니다.
‘박정희소령은 구체적인 남로당 활동을 한 것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자신이 아는데로 수사에 협조하였으며 또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구명여론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고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완룡씨는 말합니다. 사실 그때 당시 최소한의 간첩 증거만 있어도 처벌하는 시대 아니였습니까?
* 이재복 – 목사였으나, 1918년말 공산당에 입당. 1924년 남한으로 들어와 당조직에 협조. 남로당군 총책. 박상희씨와 친분이 있었다는 증거없음. 박상희씨의 친구였다며 적극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접근함.
‘46.12월 육사(2기)를 졸업하고, 춘천 8연대에서 근무하던 중(47년) 이상진 등에게 포섭되어 가입하였다’라는 주장은 ‘춘천 근무 후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48년), 이재복이 접근하여 가입을 유도하였다’라는 주장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가입 자를 또 포섭합니까?
그리고, 47년 춘천에 있을 때(동료들과 수시로 술자리에 갔다고 하는데-포섭할 기회가 많았겠죠)는 코박이도 안 보이던 자(이재복)가 육사에 갔을 때는 아는 척하고 나타납니까? 기타 다른 주장도 앞뒤가 거의 맞지 않아 생략합니다.
위인들이 말하기 하루에 세번씩 반성하고 고치라고 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이 남노당원이 었다고 하나 남노당 활동한 일도 없고.또 자기의 노선이 틀린 것을 알고 노선을 변경한 것은 잘한 일이지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만이 성공합니다.만일 장발장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 좀 도둑이지요.
첫댓글 이글은 박사모가 출처입니다.
박상희씨가 구미에서 숨진 이유는 당시 군경집압부대가 대구를 평정하고 반란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란군은 대구 구미를 지나 일부는 선산까지 달아났었으니까요.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장은 박상희씨와 학창시절부터 친구로 알고 있습니다.
위인들이 말하기 하루에 세번씩 반성하고 고치라고 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이 남노당원이 었다고 하나 남노당 활동한 일도 없고.또 자기의 노선이 틀린 것을 알고 노선을 변경한 것은 잘한 일이지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만이 성공합니다.만일 장발장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 좀 도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