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화를 하나 뽑으라면
사람들은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1668년경 작 <돌아온 탕자>를 뽑는다.
그러나 이 성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다.
이 성화는 루카복음 15장 11-32절이 그 배경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탕자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기 유산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 없이 그냥 준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갔다.
아버지를 떠난 먼 곳이란 과연 어떤 곳일까?
방탕한 생활을 하는 곳이다.
창녀와 술이 넘치는 곳이다.
살기가 어려워 배고픈 곳이다.
거지처럼 사는 곳이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제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그의 옷과 신발은 누더기가 되었고,
그의 머리는 죄수의 머리처럼 짧다.
그는 알거지가 되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그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것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이다.
그 칼로 인해 그가 귀족 가문임을 나타내 준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간다.
반쯤 장님이 된 아버지는 몸을 낮추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화가는 아버지의 속옷과 아들의 옷에 동일한 색상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깊은 유대감을 묘사해준다.
이 성화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이다.
그 손에 모든 빛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 손에 화해와 용서와 치유가 있다.
그분은 아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안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시는 어머니이시다.
그래서 화가는 탕자를 끌어안는 손을 그릴 때,
아버지의 손과 어머니의 손으로 그렸다.
그리고 아버지 배에 고개를 파묻은 탕자의 모습도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의 모습으로 그렸다.
우리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
탕자처럼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체험하고 새로 태어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마치 큰 아들처럼 그런 아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덜대지는 않는가?
죄인과 의인을 똑같이 대접한다고 투정하지는 않는가?
사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사람은 큰 아들이다.
긴 수염과 붉은색 겉옷을 물론이고 얼굴의 광채마저 닮았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긴 지팡이를 들고 두 손을 포갠 채 마치 심판관처럼 꼿꼿이 서 있다.
그의 자세가 너무나 올곧아 싸늘한 느낌마저 든다.
하느님의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곳이다.
오늘은 우리가 심판관의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죄인의 통회하는 무릎이 되어야겠다.
우리도 돌아온 탕자처럼 무릎 꿇고 고백하자.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껴안으며 말씀하실 것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그런데 돌아온 탕자가 노년이 된 렘브란트의 삶과 흡사하단 게 놀랍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았고,
낭비로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아내와 세 자녀는 젊은 시절에 잃었다.
그리고 노년에는 파산을 한 뒤 외아들 티투스마저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화가는 이 성화를 그린 다음 해에 하느님 품으로 갔다.
우리는 과연 언제나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회개하는 사람의 무릎이 그리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