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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지 후달리는 날입니다.
하지만, 4월 4일은 작년에도,재작년에도,10년 전에도,100년 전에도...1000년 전에도 있었죠!
무지 긴 글입니다.
제목 위주로 보시고...관심있는 부분은 자세히 보시고...^^*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간 오늘은...다시 역사가 됩니다!
시퍼런 HTS 쳐다보지 말고...
산책하면서 봄볕 즐기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
4월 4일 오늘의 역사
[1929년] 천문학자 조경철(趙慶哲) 출생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1953년 연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투스큘럼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를 하였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및 미시간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배웠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미항공우주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으며, 60년대 후반에 귀국한 조경철은 '아폴로 박사'란 명칭으로 유명해졌다. 과학기술정보센터 사무총장, 한국천문학회 회장, 한국우주과학회 회장,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희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1913년] 다형 김현승(金顯承) 시인 출생
〈가을의 기도〉를 비롯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를 많이 썼다. 호는 다형(茶兄)·남풍(南風). 제주도와 광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26년 전남 광주의 숭실학교 초등과를 마쳤으며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32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4년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어 1934년 〈동아일보〉에 암울한 일제시대 속에서도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새벽〉·〈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읍니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숭실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내일〉(민성, 1949. 6)·〈창〉(경향신문, 1946. 5) 등을 발표했고 1950년대에는 기독교적인 구원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전쟁 뒤에 오는 허무·상실을 노래했다. 1955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시인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1957년 첫 시집 〈김현승시초(詩抄)〉를 펴냈으며 한국문인협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조선대학교·숭실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6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뽑혔다.
두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1963)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종교적인 사색을 노래했는데 잘 알려진 〈가을의 기도〉 등 가을 연작시와 신적(神的) 세계질서에 대한 열망과 자유를 노래한 〈지상의 시〉 등을 실었다.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부이사장을 지냈다. 1968년 고독을 시의 주제로 삼은 〈견고한 고독〉과 1970년 〈절대고독〉 등의 시집을 펴냈다. 〈견고한 고독〉은 간결한 시 형식을 취한 데 비해 〈절대고독〉은 비유·상징과 어려운 말을 자주 쓴 것이 특징이다. 〈절대고독〉은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개별화된 현대인의 삶의 고독감을 노래한 것이다. 197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전집〉을 펴냈다. 1975년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하다가 고혈압으로 죽었다. 유고시집으로 〈마지막 지상에서〉(1975), 산문집으로 〈고독과 시〉(1977)·〈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4),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
188 로마 황제 카라칼라 Caracalla 출생
Caracallus라고도 쓰며, Marcus Aurelius Antoninus Caesar(196~198)라고도 함. 정식 이름은 Marcus Aurelius Sever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Septimius Bassianus(~196).
188. 4. 4 갈리아 루그두눔(지금의 리옹)~217. 4. 8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
198~211년에는 아버지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211년부터 217년 암살당하기까지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주요업적으로는 로마에 거대한 목욕탕을 짓고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발표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위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했으며 종종 로마사에서 가장 잔인한 폭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나중에 황제가 된 북아프리카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시리아인 율리아 돔나 사이에 난 아들로 애초의 이름은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루스의 대제사장이었던 외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바시아누스라고 지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을 쓰고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자기 가문을 유명한 안토니누스 왕조와 연결짓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198년 명목상 아버지와 동격의 지위를 갖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다. 카라칼라라는 별칭은 같은 이름의 새로운 망토를 그가 디자인했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라우타스라는 또 다른 별칭은 못 생기고 오만무례하며 잔인한 같은 이름의 검투사와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문헌에 나오는 그의 생애와 성품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예컨대 그가 소년시절에 사랑스럽고 너그러우며 감수성이 예민한 인물이었으나 나중에 나빠졌다고 하는데, 똑같은 자료의 다른 문맥에서는 그가 천성적으로 사나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카라칼라의 시리아 쪽 혈통을 그의 성품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요소로 강조하는데, 여기에도 적절한 주의가 필요하다. 동양계 혈통이 고도의 로마적 기풍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율리아 자신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잘 알고 있었으며 자기 아들에게 가능한 최상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뛰어난 선생들을 고용했다. 그는 그리스 웅변가들과 비극시인들의 작품을 공부했으며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길게 인용할 수도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양과 교양 있는 사람들을 몹시 경멸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군대생활에 열정을 쏟은 탓일 수도 있다. 14세 때 세력가이며 야심가인 황실근위대장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인 풀비아 플라우틸라와 결혼했다. 그는 장인인 플라우티아누스를 미워해서 그가 황가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당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자기 부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나중에 살해하기도 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카라칼라와 그의 동생 게타 사이에 경쟁이 점점 심해진 것이다. 아버지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에 죽고(211) 카라칼라가 23세 생일을 맞이할 무렵 제국의 제2인자에서 1인자로 올라서면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어머니가 갖은 노력을 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카라칼라는 결국 게타를 죽였다. 게타는 어머니인 율리아의 품에 안긴 채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카라칼라의 소행이 포악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로서는 도덕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이 달리 없었다. 뒤이어 카라칼라는 게타의 친구와 동료들 대다수를 죽여 없애라고 명령하여 대단한 잔인성을 드러냈다. 아마도 다시 호감을 살 목적으로 그가 망명자들에게 사면을 내린 듯 하나 고대 문헌에서는 이 조치가 기만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카라칼라가 시행한 조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안토니누스 시민법'(Constitutio Antoniniana de Civitate)도 순전히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212(또는 213)년 게르만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게르만 동맹세력을 무분별하게 학살한 것이나 216~217년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원정을 벌인 것은 고대 문헌에 따르면 모두가 군사적 영예를 즐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원정 직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곳 주민들을 상대로 '학살극'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황실근위대장이며 그의 후계자인 마크리누스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카라칼라는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벌인 2번째 원정 초기에 암살되었다. 그의 성품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일시했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들이 그 위대한 마케도니아인을 찬양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으나 카라칼라의 경우에는 그것이 우스꽝스럽고 괴상한 강박관념으로 작용했다. 그는 의복과 무기, 행동, 여행로, 초상화 및 파르티아 제국 정복계획까지 모든 것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모방했다. 또한 '대왕'을 뜻하는 마그누스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마케도니아식 방진(方陣) 부대와 코끼리 사단을 편성했으며, 자신의 모습을 신격화하여 주화에 새겼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카라칼라가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법적 의식을 따랐으며 모든 제사 의무를 꼼꼼하게 지켰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했으나 그가 좋아한 신은 이집트의 사라피스 신으로 자신이 그 아들이나 동생인 듯이 행동했다. 통치자를 신과 동일시하는 이집트의 풍습을 받아들였으며 로마 황제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조상(彫像)을 파라오 모양으로 새겼다.
그를 그린 많은 초상화를 보면 격정적이고 잔혹한 모습이 뚜렷이 표현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런 인상을 강조하도록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퍼뜨리려 한 그의 허영심에 맞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체구가 작지만 체력이 뛰어나서 일반병사들과 똑같이 힘든 일을 나누어 했다고도 하고, 또 그와 정반대로 방탕한 생활 때문에 기력이 쇠약해져서 갑옷 무게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의 정신상태를 판단하는 데서도 이와 비슷한 불일치가 나타난다. 미친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고 예리하며 기지가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설도 있다. 신에게 바치는 무수한 명문(銘文)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건강의 신을 특히 편애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정신병을 앓았다는 설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카라칼라가 미치광이이거나 폭군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은 그가 제국을 다스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제국의 통치에는 율리아 돔나와 그를 둘러싼 위대한 법률학자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자기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 원로원에 압력을 넣어 그를 신격화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가 일반대중들에게 특별히 혐오를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 어쨌든 당시의 로마 제국은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에 탁월한 황제로서의 자질이 결여된 통치자 밑에서도 충분히 버티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F. P. Kolb 글
[1858년] 프랑스의 시인 구르몽 Gourmont, Remy de 출생
1858. 4. 4 프랑스 바조슈 앙울므~1915. 9. 27 파리.
프랑스의 소설가·시인·극작가·철학자.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기의 매우 지성적인 비평가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상징주의 미학의 원리를 널리 퍼뜨렸다.
캉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81년에 국립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어 폭넓은 교양과 학식을 쌓았다. 그러나 1891년에 〈메르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라는 잡지에 비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가 남긴 50권의 저서는 주로 수필집인데 그 내용은 18세기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비교될 만큼 광범위하고 논조도 비슷하다. 그의 저서는 ① 당시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사해설인 〈에필로그 Epilogues〉(1903~13), ② 문학과 철학에 대한 수필인 〈문학산책 Promenades littéraires〉(1904~27)과 〈철학산책 Promenades philosophiques〉(1905~09), ③ 문체·언어·미학에 대한 연구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구르몽은 모든 진실은 상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했으며 평론가로서의 장점은 순전히 미학적인 기준에 따라 문학평론을 쓴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20세기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식스틴:정신적 삶의 이야기 Sixtine:Roman de la vie cérébrale〉(1890)와 〈디오메데스의 말들 Les Chevaux de Dioméde〉(1897)·〈한 여인의 꿈 Le Songe d’une femme〉(1899)·〈순결한 마음 Un Coeur virginal〉(1907)을 비롯한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을 실제 인간보다 지나치게 지성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동생인 장 드 구르몽(1877~1928)도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기고했으며, 몇 편의 시와 〈황금양털 La Toison d’or〉(1908)이라는 소설 1편을 남겼다.
[1904년] 이육사 (李陸史) 출생
1904. 4. 4 경북 안동~1944. 1. 16 중국 베이징[北京]. 개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본관은 진보(眞寶).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台卿).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생애와 활동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문학세계
그의 첫 작품은 1933년 〈신조선〉에 발표한 시 〈황혼〉이다. "내 골방의 커어튼을 걷고"로 시작되는 〈황혼〉은 향토색을 띤 목가풍의 서정시로, 겉으로는 민족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있으나 ‘골방’과 같은 시어을 통해 민족의 절박한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이어 발표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풍림, 1936. 12)에서의 ‘한 개의 별’은 ‘동방의 큰 별’을 가리키며 그것은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노정기 路呈記〉(자오선, 1937. 12)에서는 어둠을 뚫고 항해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노래했고, 〈연보 年譜〉(시학, 1939. 3)에서는 옥살이를 되풀이하면서 느꼈던 희생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뒤 시 〈청포도〉(문장, 1939. 8)·〈교목〉(인문평론, 1940. 7)·〈파초〉(춘추, 1941. 12) 등을 발표했는데, 〈청포도〉는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를 써서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정〉(문장, 1940. 1)·〈광야〉(자유신문, 1945. 12. 17)에서 보이듯이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비극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유작으로 발표된 〈광야〉는 저항시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체 3행 5연으로, 1~3연은 태초를 포함한 과거, 4연은 현재, 5연은 미래로 시상(詩想)의 질서가 잘 이루어져 있다. 〈광야〉·〈절정〉 모두 민족현실을 절감하고 피할 수 없는 극한상황을 노래하고 있으나 〈절정〉에서는 〈광야〉에서 보이는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가 없다. 그의 시에는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장중한 북방정서와 전통적인 민족정서가 함께 깃들어 있는데, 이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던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 외에도 시조·평론·시나리오 등에 관심을 갖고, 시조 〈춘수 3제 春愁三題〉(개벽, 1935. 4)와 평론 〈노신추도문 魯迅追悼文〉(조선일보, 1936. 10. 23~27)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 〈육사시집〉을 펴낸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으며,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 〈청포도〉로 바뀌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작품연보가 추가된 〈광야〉라는 시집이 발행되었다.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출범
← 1950년 5월 런던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사회 모습.
북미와 유럽 서방국간의 집단방위체제, 경제협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이 20년을 기한으로 1949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 국무성강당에서 조인됐다,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개최된 이날 조인식에는 서방 각국의 외교단, 상하원의원, 정부요원과 수백 명의 보도관계자가 참석해 이날 조인식을 지켜봤다.
가맹국 각 대표들은 미 해병대 밴드가 연주하는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멜로디에 따라 입장했고, 미국 대표 애치슨 국무장관의 사회에 의해 조인식이 시작됐다. 먼저 가맹국 각 대표들이 짧게 연설을 한 후, 이어서 각국 대표들의 서명이 이루어졌다. 벨기에 대표 스파크외상의 서명을 시작으로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등이 서명한 후 마지막으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서명함으로써 조인식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날의 조약은 서면의 약속에만 지나지 않았다. 조약 가운데 ‘가맹국에 대한 공격은 전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집단자위권을 발동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곧 대서양조약기구(NATO)軍 창설의 빌미가 되었다.
NATO군에 참여한 미국은 서독에 핵무기를 배치했으며, NATO와 바르샤바 조약국 사이의 냉전상태는 계속되었다. 1980년대 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부의 붕괴, 독일의 통일 등 국제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군사기구로서 NATO의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후 NATO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유지 작전에 참가하는 등 정치적 성격의 기구로 변화했다. 1999년 동유럽 국가인 체크·폴란드·헝가리가 가입함으로써 회원국은 그리스·네덜란드·노르웨이·덴마크·독일(서독, 1955~90)·룩셈부르크·미국·벨기에·스페인·아이슬란드·영국·이탈리아·캐나다·터키·포르투갈·프랑스 등을 포함해 19개국이 되었다.
[1929년] 가솔린 자동차 발명가 벤츠 사망
독일 자동차 발명가 칼 프리드리히 벤츠
오늘날의 가솔린 자동차 발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독일 기계기술자 칼 프리드리히 벤츠가 1929년 4월 4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염원했던 ‘말(馬)없는 마차’ 즉, ‘가솔린자동차’ 제1호를 완성한 것은 1885년 말, 1기통 4사이클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3륜자동차였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실용적인 가솔린자동차가 된 벤츠의 3륜차이며, 1986년에 세계가 자동차 100년을 축하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가 4륜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키잡이가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벤츠의 첫 작품인 이 자동차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 장래성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1888년에 개량한 모델인 ‘3형’이 독일 뮌헨 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 189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4륜용 조타장치를 발명하고 그 후 다양한 차종을 생산해냈다.
자동차 창시자로서 다임러와 함께 오늘날 추앙되는 그이지만, 그는 자동차시대의도래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이날 눈을 감았다. 1926년, 벤츠사는 최대의 경쟁자인 다임러사(차명-메르세데스)와 합병, 다임러벤츠사(차명- 메르세데스벤츠)가 되었다.
[1932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출생
1932년 4월 4일 태어남 / 1986년 12월 29일 죽음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 출신의 뛰어난 영화감독이다. 시인인 아버지와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성장했다. 22세 때 모스크바 영화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작품인 <증기 롤러와 바이올린 Katok i Skripka>(1960)으로 뉴욕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뒤이어 <이반의 유년시절 Ivanovo detstvo>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는 5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안드레이 루블료프 Andrei Rublyov>(1965)·<솔랴리스 Solyaris>(1971)·<거울 Zerkalo>(1975)·<밀렵꾼 Stalker>(1979)·<향수 Nostalghia>(1983)·<희생 The Sacrifice>(1986) 등 6편의 영화밖에 더 찍지 못했지만, 모두가 손꼽히는 수작들이다. 잉그마르 베리만은 "만일 영화가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타르코프스키라는 영화 예술가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극찬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향수>를 찍은 뒤 서방 세계로 망명했다. <희생>으로 칸 영화제 4개 부문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 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사망
부토와 그의 딸 베나지르 부토
1979년 4월 4일 파키스탄의 전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군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부토는 모하마드 아유브 칸 정권 시절 각료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부의 독재 성향을 비판해 투옥되었다. 파키스탄 국민당을 창설한 후, 1970년 총선에서 서파키스탄 지역의 높은 지지율을 얻었으나 동파키스탄 분리자치를 내세운 '아와미 동맹'에게 패배했다. 부토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모하마드 야히아 칸으로부터 서파키스탄의 정권을 인수받아 개혁을 단행했다.
1973년 신헌법을 채택했고, 1977년 다시 총선을 실시해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야당의 선거부정 시비가 일면서 육군 참모총장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하자, 부토는 정적 암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9년 4월 4일 형이 집행되었다.
[1994년] 서재필 박사와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영정 환국
서재필과 전명운
미국으로 간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 1884~1947)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87년] 경기도 광릉(光陵)에 첫 산림박물관 준공
국립산림박물관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蘇屹邑) 직동리(直東里)의 국립수목원 안에 있다. 연건축면적 4,616㎡ 전시품종수 1만 4300종(1989년 현재). 1985년 10월 25일 착공, 1987년 4월 5일 개관하였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에 산림자원과 기술, 제2전시실에 산림과 인간, 제3전시실에 세계의 임업, 제4전시실에 한국의 임업, 제5전시실에 한국의 자연에 관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 밖에 임업사료실(林業史料室)·학술표본실·특별전시실·시청각실 등이 있다.
[1983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제1호기인 컬럼비아호는 1981~1982년에 걸쳐 4회의 실험비행(STS 1∼4)과 1회의 실용(상업)비행(STS 5)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그 뒤를 이어 챌린저호가 3회(STS 6∼8)의 실용비행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제1차 비행(STS 6)의 챌린저호는 1983년 4월 4일 플로리다주(州)에 있는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이 비행은 미국 스페이스 셔틀의 6번째 비행이자 STS 5에 이은 2번째 실용비행이다. 승무원은 P.J.와이츠(기장), K.J.보브코(조종사), S.머스그레이브(전문가), D.H.피터슨(전문가)의 4명이었다. 챌린저호는 인공위성 TDR-A(대형의 인공위성 추적용 데이터 중계위성)를 궤도에 올리기 위해 발사하였으나, 정지궤도(靜止軌道)에 오르지 않아 실패하였다. 또, 4월 7일 머스그레이브와 피터슨이 이 비행의 임무 중 하나인 새 우주복의 성능과 궤도상에 있는 인공위성을 보수(補修)하기 위한 능력을 실험하고자 우주유영(宇宙游泳)을 4시간 동안 실시하였다.
챌린저호는 5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4월 9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1968년] 마틴 루터 킹(King Jr., Martin Luther, 1929~1968) 목사 피살
1968년 4월 4일 저녁,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시 로레인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모텔 밖의 군중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킹이 쓰러졌다. 갑자기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이 목을 관통한 것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청소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범인으로 체포된 제임스 얼 레이는 당초의 자백을 곧 번복하며 자신은 단지 ‘거대한 음모’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FBI와 군부 배후설 등 온갖 음모론도 제기됐지만 레이는 결국 9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난 1998년 감옥에서 숨졌다.
킹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은 미 전역 168개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46명이 사망하고 2만1000여명이나 부상했다. 불이 난 곳도 2600여곳이나 됐다. 존슨 대통령은 연방정부 건물에 반기 게양을 지시하며 죽음을 애도했다.
시신은 1억2000만명의 미국인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조지아주 애틀랜타 묘지에 묻혔다. 사람들은 묘비에 적힌 “자유롭게 되라. 자유롭게 되라… 나는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라는 5년 전 워싱턴 대행진 때의 연설 구절을 보며 그때를 떠올렸다.
1963년 8월 28일, 킹은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30만의 인파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소리 높여 외치며 인종차별이 종식되고 “정의의 강물이 흐를 때까지…” 비폭력운동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1961년] 한국-네덜란드 국교 수립
네덜란드인(人)으로는 처음으로 조선시대에 J.J.벨트브레가 표착하여 귀화하였고,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H.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그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 파견되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1년 4월 4일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으며, 1968년 12월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설치되고 1969년 10월에는 주(駐)네덜란드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양국간의 협정으로는 특허 및 상표협정(1966), 사증 (査證)면제협정(1970), 항공협정(1970), 투자보장협정(1974년), 이중과세방지협정(1978), 경제 및 기술협력협정(1982), 해운협정(1995)이 있다. 1996년 총리 코크, 1999년 왕세자 윌리엄 알렉산더, 2000년 국방부장관 드 글라프가 방한하였으며 1999년 서울시장 고건, 2000년 환경부장관 김명자가 네덜란드를 방문하였다.
[1905년] 멕시코 이민 1천 33명 인천항 출발
멕시코에서 한인의 역사와 규모
1905년 구한 말 고종황제 치세 시, 날짜는 4월 4일, 1,033명의 우리 조상들이 멕시코 남단, 유까딴 반도에 이주하였다.
당시 유까딴 반도 메리다 지방(Merida, Yucatan)에는 스페인이 마야 부족을 정복한 곳으로, 에네깬이라는 선인장으로 닻줄을 만들어 부를 누리는 유명한 노예농장들(Hacienda)이 있었는데 백인들은 한국인이 부지런하고 정직하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인 브로커를 통하여 서울, 인천, 부산 등지에서 4년 계약으로 부와 황금을 안겨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인천항을 출발, 선상에서 2명을 죽여 수장하고 또한 선상에서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1,032명이 드디어 1905년 5월 15일 오아하까주 살리나끄루스(Salinacruz)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사역하는 오아하까(Oaxaca)는 우리 민족이 맨 처음 발을 디딘 멕시코의 첫 번째 땅이 되었다.
이렇게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은 기차를 타고 목적지인 메리다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25개 이상의 노예농장에 분산수용되면서 학대를 받으며 중노동과 노예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꿈과 성공, 이국에 대한 희망을 따라 지구의 반대편까지 온 우리 조상들은 한 달 사이에 그들의 운명이 바뀌어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야 말았다.
1909년 5월 12일 계약이 만료되면서 일부는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농장에서 풀려나왔으며, 나머지는 당시 멕시코 혁명 세력이 인디안 노예해방을 선포함으로써 노예 농장에서 풀려나왔으나 당시에 한일합방으로 자기가 돌아갈 조국조차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들 우리 조상들은 멕시코 전국으로 흩어져서 행상으로부터 시작하여 혼혈 등 멕시코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메리다 지역에 생활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1909년 5월 9일 메리다 한인회를 결성하였으며 1921년에는 그 일부가 쿠바로 이주하여 아바나(HABANA)등지에서 성공을 하였으나 카스트로의 공산혁명 이후 부르조아로 몰렸기 때문에 대부분이 미국 플로리다(FLORIDA)로 이주하였다.
현재, 멕시코에 흩어져 살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코라는 약 3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1970년 초 우리나라에 미국 이민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멕시코는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고야 말았다. 즉 멕시코에 관광객으로 왔다가 미국 국경을 밤에 넘어가는 식이었다.
필자가 1983년 초 멕시코의 관광비자를 받을 당시만해도 주한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이 "목사님, 한국인들이 멕시코 간다는 핑계로 미국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곧 관광비자가 금지될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와 같이 1960년 말부터 멕시코에 우리나라 교포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미국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만 하였기 때문에 1980년 말까지지 불과 교포수가 200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살리나스 대통령이 반미정치 노선을 청산,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을 만든 이후 중남미에 있던 교포들이 멕시코에 들어왔고, 낮은 인건비, 면세 투자법 등 좋은 조건을 보면서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멕시코에 진출하면서 갑자기 멕시코는 한국이민의 노른자 위로 떠오르고 있다.
[1785년] 독일의 작가 아르님(Bettina von Arnim, 1785~1859) 출생
본명은 Elisabeth Katharina Ludovica Magdalena von Arnim. 결혼 전 성은 Brentano.
1785. 4. 4 프랑크푸르트암마인~1859. 1. 20 베를린.
근대 독일 문학사상 탁월한 여성 작가로서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품에서 드러난 독특한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작품은 표면상의 주제와는 달리 본질적으로는 그녀의 자화상이다.
독일 낭만주의 운동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아르님은 바로 이들과 같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낭만주의자였다. 그녀는 기인에 가까울 정도로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제멋대로였으나 남편에게는 충실한 아내(1811년 아힘 폰 아르님과 결혼)였으며 7명의 아이들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또 민감하고 열정적이었으나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잃지 않으려 했으며, 어떤 일에 헌신할 정열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성격을 예찬하는 데 몰두했다. 아르님은 이러한 성격상의 모순을 작품에 투영했다. 가장 잘 알려진 3편의 작품은 그녀가 괴테, 카롤리네 폰 귄데로데, 오빠 클레멘스 브렌타노와의 편지 왕래를 각각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괴테가 한 아이와 나눈 편지들 Goethes Briefwechsel mit einem Kinde〉(1835)·〈귄데로데 Die Günderode〉(1840)·〈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받은 봄의 화환 Clemens Brentanos Frühlingskranz〉(1844) 등이다. 이 작품들은 원래의 편지들을 다시 정리하고 손질하여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자유롭게 허구와 사실의 기록을 특이하게 혼합했다. 그녀의 어머니 막시밀리아네(결혼 전 성은 폰 라로슈)는 결혼하기 전부터 괴테와 친구사이였으며 결혼 후에도 계속 우정을 유지했으나, 이 관계는 남편의 질투심으로 인해 갑자기 끝나버렸고, 35년이 지난 후 그녀의 딸인 아르님이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 괴테와의 관계를 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괴테를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으며(아르님이 괴테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57세였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의 어머니 집으로 자주 찾아가 괴테의 어린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괴테는 후에 자서전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을 쓰는 데 아르님이 적은 이때의 기록을 이용했다. 아르님은 계속해서 괴테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나 1811년 괴테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네와 다툰 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괴테가 아르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났다.
혜택받지 못하는 계층에 대해 동정적이었던 아르님은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위해 특별히 쓴 〈이 책은 왕의 것 Dies Buch gehört dem König〉(1843)·〈악마와의 대화 Gespräche mit Dämonen〉(1852)에 나타냈다. 또 조각과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다. 다재다능하면서 여러 방면에 두루 관심을 가졌던 아르님은 독일 낭만주의 정신의 이정표로 여겨지던 보편성을 보여주었다.
[1889년]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출생
← 폰 아르님의 지휘 차량. 이스트버른 리다우트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독일어: Hans-Jürgen von Arnim, 1889년 4월 4일 ~ 1962년 9월 11일)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이다. 그는 직스트 폰 아르님(Sixt von Arnim. )의 아들로 1889년 독일의 엠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은 1907년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까지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양쪽에 모두 참전했다. 전쟁 후에 육군에 남은 아르님은 정예 부대인 베를린 주둔 68 보병연대의 지휘관까지 승진했다. 나치의 등장과 함께 그는 1938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폰 아르님의 지휘 차량. 이스트버른 리다우트1939년, 폴란드와 1940년 프랑스를 침공했을때 아르님은 52 보병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1940년 10월, 폰 아르님은 17 기갑사단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그는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휘하에서 중장으로 있었으나, 개전 직후 며칠 안 되어 심각한 중상을 당했다. 1942년 11월까지 39 기갑군단을 지휘했고, 북아프리카에서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집단군 예하 5기갑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롬멜의 튀니지로 철수하겠다는 요청을 거절했을 때 폰 아르님은 상급대장으로 승진했고(1942년 12월 4일 승진), 아프리카 기갑군과 실질적으로(de facto)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1943년 3월부터 영국군의 인도인 부대인 4 인도 보병사단의 포로가 될 때까지 지휘했다. 폰 아르님은 전쟁의 남은 기간을 영국군의 전쟁 포로로 보냈으며, 1947년 7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1962년 9월 1일, 바트 빌둥엔에서 사망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폰 아르님의 슈타이어 1500A 독일 아프리카 군단 참모용 차량은 이스트버른 리다우트 요새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758년] 영국의 초상화가 호프너(Hoppner, John, 1758~1810) 출생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에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초기 양식을 모방했다. 그의 부모는 독일 태생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왕궁의 시종이었다. 어린시절 그는 왕궁 예배당의 성가대원이었으며 1775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778년 실물 데생으로 은메달을 받았으며, 1782년에는 역사화를 그려 왕립 아카데미의 최고상인 금메달을 받았다. 1780년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처음에는 풍경화에 관심을 가졌지만, 형편상 재정적으로 보다 유리한 초상화 쪽으로 관심을 돌려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을 거둔 그는 생애 내내 최상류층의 부유한 사람들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으며 궁정화가인 토머스 로렌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특히 그를 후원했으며, 그래서 그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들 중 상당수는 세인트 제임스 궁의 호화로운 방들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 작업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었다. 바로 초상화를 그리러 온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아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한번은 당시 최고의 음악가오 소문난 하이든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왕실에서는 귀족들에게 칭송이 자자한 호프너를 불러 하이든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마침내 하이든과 마주한 그는 하이든에게 필요한 자세를 말한 뒤 스케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고령에 접어든 하이든은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있기 힘들어 졸기 일쑤였다. 호프너는 어떻게든 하이든의 밝고 생기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하이든에게 모델로서 주의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하이든은 알았다고 해 놓고서 또 꾸벅꾸벅 졸았다.
호프너는 생각 끝에 왕실에 부탁해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하이든 옆에 앉히도록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잠시도 의자에 바로 앉아 있자 못하고 졸던 하이든이 눈을 반짝이면서 너무도 즐겁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호프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상대를 배려해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 낸 이런 태도가 최고의 화가라는 영광을 안겨준 것이다.
[1758년] 프랑스의 화가 프뤼동(Prud'hon, Pierre-Paul, 1758~1823) 출생
《황후 조제핀》
클뤼니 출생. 디종의 아카데미에서 배운 후 파리로 나가 주로 판화가 밑에서 제작에 종사하였다. 1784년(일설에는 1782년) 이탈리아로 가서 라파엘로, I.코레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1787년 귀국하여 판화의 밑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장중한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한때 G.다비드에 사사하였으나 작풍상의 영향은 크지 않다. 후에 나폴레옹의 두 황후의 애고(愛顧)를 받아 사회적 명성도 얻었으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였다. 궁정을 위해 많은 가구 ·집기를 디자인하였으며, 실내장식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황후 조제핀》(1805, 루브르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그밖에
2005 강원도 양양 대형산불
2003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갈등 빚은 초등학교장 끝내 자살
2003 가짜 CNN 사이트에 속아, “빌 게이츠 총격피살” 오보 소동
2000 국내 최초로 용광로 설치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별세
1999 80년대 물가안정 이끈 주역 신병현 전 부총리 별세
1997 만화 ‘광수생각’ 조선일보에 연재 시작
1980 쿠바인 1만여명이 아바나 주재 페루대사관에 몰려 들어 망명 요청
1974 한국-터키 문화협정 체결
1969 도입 일본쌀 6,600톤중 25%이상 불량미로 판정
1961 한국-네덜란드, 국교 수립
1960 한국 대일본무역 재개
1952 광무신문지법 45년 만에 폐지
1951 국군 개성 입성
1947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발족
1944 이탈리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1941 이라크에 쿠데타 발생
1938 조선도로령 공포
1933 미국 에이크런 비행선 뉴저지해안 추락 73명 사망
1909 태프트 미국 대통령 취임
1899 중학교 관제 제정 공포
1843 헝가리 지휘자 리히터 출생
1841 미국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사망
1806 이탈리아 극작가 고치 사망
1794 로베스피에르, 당통 처형
1756 암행어사 박문수 사망
1498 영안도를 함경도로 개명
1481 동국여지승람 편찬
1392 정몽주 선죽교서 피살
1292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사망
첫댓글 히유!! 겨우 다 읽었음~~
ㅎㅎㅎㅎㅎㅎㅎㅎㅎ애쓰셨슴요
스크롤 한다고 한 참 걸렸슴; 4월4일---1.사!사!--마구 사라는 날? @@, 2.死死? --모두 주거써!의 날 ㅋ ^^.
추천2
히유~~저두 이제야 겨우 다 읽었슴 ---;;;
달님은 학구파이신듯...따라가기가 버거워...헥헥
암튼...4..4는 시로..ㅠㅠ
좀 읽다 스크롤^^ 지송요
고마워유~~
적님 빠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