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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진지한면이 있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진지잡수시다 언칠것 같네요^^
예술철학에 대해 저에게 강의를 하실건지~ 원~
넘하시네요~
제가 요즘 공부를 안한다고 서니..
읽기도 벅차서 그냥 훑어 봤는데요...
음~~
그런 의미로 예(藝)를 물으신거군요...
이런 질문은 거의 논술고사나
세미나감인데..
광란의 버스안에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건 쩜...어쩐지...(?????)
저 같은 소인배가 어찌 예(藝)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일생을 그것만 연구하는 사람도 허다한데요...
하지만,
저도 항상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나중에 시간을 갖고 올리신 글 찬찬히 보겠습니다...
-------------------------------------머리에 쥐나고 있는 행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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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버스안에서 예(藝)가 무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지요. 왜 도자기 학과가 아니고 왜 도예(陶藝)학과인지를 물어 본 거였습니다.
지난 고등학교 국민윤리에서 예(藝)에 대하여 배운 적이 있기에 물어 본r겁니다. 지금은 내용을 잊어버려 다시 책을 찾아 봐야 할거 같군요.
아래글은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인데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군요. 알고 있는 것을 찾으면 다시 올리죠.
<B>예술이란 무엇인가
조요한(숭실대 교수·예술철학)</B>
1. 예술의 기원과 미적 가치
예술은 '인간의 최초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이다. 어린이와 미개인의 정신활동을 주시하면 예술이 원초적 활동을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어린이는 성인보다도 즉흥적으로 시와 노래를 부른다. 많은 어린이는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고, 풍부한 표현의 그림을 그린다. 예외없이 모든 어린이는 상상으로 만들어놓은 영역에 거침없이 산다. 똑같은 것이 미개인과 원시인에게도 해당된다. 미개인들의 노래와 신화, 회화, 조각 그리고 무용들이 그들의 지식과는 균형잡히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다. 이렇게 예술이 "원초적 활동"이라고 해서 어린이와 미개인만이 예술가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높은 지성인이나 개화된 문명기에도 거기에 해당하는 예술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모든 정신활동이 상상의 기초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쉴러의 말대로 인간의 생명은 충동에서 출발한다. '문자 그대로 그가 사람인 한 그는 유희(놀이)를 하고 그가 유희하는 한, 그는 완전한 인간이다.'의 유명한 쉴러의 명제는 예술을 인간의 유희충동이라고 규정한다. 유희충동은 단지 감성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사태충동(事態衝動) 뿐만 아니라 불변의 자아를 포착하는 형식충동(形式衝動)만도 아니고 이 양자를 함께 지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삶도 아니고, 단순한 형태도 아닌 이 양자를 함께 지닌 생명있는 형태를 갖추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는 충동이다. 예술은 어떤 면에서 일종의 놀이이고 오락이다. 배우는 연극을 '놀이하고(spielen / play)' 상연한다.
음악가는 악기를 '놀이한다'. 그러나 무대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한 슬픈 주인공의 삶을 분장하여 사람의 슬픔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즐거운 전원의 한 풍경을 노래함으로써 자연의 본질을 생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원시인이나 어린이는 우리가 '예술적'이라고 말하며 기뻐하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단순한 목적을 위하여 모든 종류의 활동을 하였을 따름이다. 어떤 것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지는가를 의식하지 않았다. 다만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만들었다. 형태나 색조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어린이들이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연필과 종이로 간단한 선을 긋거나 낙서를 한다. 그 다음 그들은 종이에 그려놓은 연필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선의 운동에 마음끌릴 것이다. 그 다음의 현상은 선과 원의 율동적 조각들이고, 이것이 점점 복잡하게 되고 정밀하게 될 것이고, 드디어 그것이 선이 얽힌 펜 그림이 된다. 그러다가 돌연히 얽혀있는 이 선 속에서 틀림없이 어머니와 비슷한 얼굴을 발견하고, 다른 선의 교차에서는 지붕을 발견하여 두세 개의 선을 첨가하여 집을 만든다. 원시인들도 바위의 형태를 어떤 동물의 형태로 연상하고, 그 암시를 발전시켜 그들이 동물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마음의 이미지를 더욱 접근시켜 회화적인 표현에로 이끌어 갔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나타내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사실을 상징화함으로써 현실감이 더욱 높아진다고 느낄 때, 마음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원숙한 형태를 나타낸다. 허버트 리드(예술철학자)가 지적한 대로 '원시인은 알타미라 동굴 화가와 같이 시각적인 기억에서나 시각적인 감수성에서 직접적으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인 방법에 의하여 한 이념을 나타낸다.'
어린이와 원시인의 예술도 조잡한 현실을 최소한 이성적으로 다듬어 보려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지각된 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이상에 의하여 '교정된 현실'이다.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들, 즉 졸라(프랑스의 소설가,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목로주점> 등이 대표작)나 꾸르베(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의 자연주의 소설이나 회화에 있어서도 그 방식은 언제나 이상주의적이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을 덧붙인 자연'이라고도 하였다.
예술작품과 단순한 가공품 사이의 구별은 무엇인가? 예술적 걸작품으로서의 고려자기와 예술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 안성 유기나 김장항아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고려자기도 가공품이다. 그것은 원래 박물관에 소장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 아니고, 물이나 기름이나 먹물을 담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양자의 구별은 지니고 있는 미(美)라고 말할 것인데, 유기나 김장 항아리도 예술가들의 이른바 '좋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가공품의 경우 그것들이 보기 흉한 것은 아니나 미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비예술적이라기보다는 무예술적이다.
예술품으로서의 회화나 건축을 위한 그림 사이의 차이, 그리고 훌륭한 교향악의 음악과 싸구려 댄스음악과의 본질적 차이는 예술품과 공예품과의 관계와 같이 전자의 활동목적이 창조적인 데 있고, 후자의 그것은 제조적(製造的)인데 그 구별이 있다. 즉 예술품으로서의 항아리, 회화 그리고 교향곡에는 단순한 가공품으로서의 항아리, 그림 그리고 댄스음악에서와 같은 현실적인 계약이 무시되어 창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미적 판단은 개인적 제약을 주는 한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나 공예품은 주문에 의하여 전혀 '조작적인 노고'로서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유성 또는 자족성이 없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와 파울 3세의 위촉에 의하여 시스틴 성당에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였고, 모짜르트는 보수를 받고 그의 <진혼곡>을 작곡하였다. 그들은 청탁과 보수를 받고 이 대작들을 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청탁과 보수에 사로잡혀서 제작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적어도 제약과 규칙이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자유케 한다. 예술은 실로 그런 현실적인 매개가 계기가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자유정신에 의하여 창조된다. 엘 그레코(스페인의 화가)의 톨레토 대성당에 그린 벽화에 의한 재판문제나 지휘자 카라얀과 극장측과의 재판사태 등이 예술가의 자유문제의 예들이라 하겠다. 예술은 자유정신의 소산으로 작가의 주관세계가 표현된 것이다. 진정한 예술과 사이비 예술과의 차이는 전자가 '의미부여의 형식'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여기 '의미부여의 형식'이라는 말의 뜻을 충분히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저 프라이는 그것을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관념의 표현'이라고 규정하였다. 오늘날 예술은 쾌락적 경험이나 감각의 만족이라고 보는 견해보다는 의미부여의 현상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이 더욱 짙다. 그것은 현대 예술이 이른바 추함(醜)이나 불협화음을 사용하여 '불쾌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위대한 예술이 직접 감각에 호소하는 오락이 아니라는 것이 일치된 듯하다.
그러면 활동적 의미부여란 무엇인가? 가령 바다의 그림에는 물과 바위, 배와 제방이 있고, 정물화에는 귤과 사과, 화분의 꽃과 죽은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화폭 위에 그려졌다고 해서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산, 토끼, 포도, 또는 심지어 땅거미 때의 조각배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으로 회화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관념이 되지 않는다. 예술적 관념은 언제나 어떤 '보다 깊은' 개념이다. 예술이 만일 단순한 자기 감정의 표현이라면, 원시적인 즐거움의 외침소리나 슬픔의 고함소리를 가리켜 예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자기 감정의 전달이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대하여 전달함으로써 듣는 사람의 '공감적 감흥'을 얻는다. 그때 전달되는 공감의 내용이 곧 예술의 의미부여이다. 이러한 예술적 의미부여 내지 미적 가치는 관념형태로 보기에는 좀 더 동적이요, 비고정적인 것이며, 명상작용이라기보다는 좀더 의도적이요, 적극적인 것이다. 물론 예술 속에는 도덕적인 것도 종교적인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 가치는 예술의 중심적인 가치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고,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품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기준은 그것이 '의미부여의 형식'이냐 또는 아니냐에 있다. 그것이 예술의 핵심적인 미적 가치이다.
2. 예술과 재현
원래 보는 눈이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보는 눈이 없어도 산수도 매화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산수와 매화는 보는 눈을 얻어 비로소 그 존재가 인간에게 확인받는다. 매화의 아름다움도 그 꽃을 보는 일에서 비로소 이루어지고, 산수화가 산수를 보는 일에서 성립되는 것을 주의하지 않고서는 매화가 비로소 성립될 수 없고, 산수가 그대로 산수화가 되지는 않는다. 보는 일이란 주관화된 세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눈이 대상을 제작한다는 것도 잘못이지만, 눈의 망막이 대상을 받아들이면 아름다움이 형성된다는 것도 잘못이다. 졸라에 있어도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기질을 통하여 본 자연의 일부였다. 예술은 자연물 앞에 세워놓은 거울과는 다르다. 따라서 예술은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재현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다시 구성하는 표현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주제가 내용으로 구체화되면 그 주제는 불가피하게 어떤 변형을 가져온다. 작품에 있어서 현실의 사물과 꼭 같은 형태나 색조를 요구하는 것은 박물표본도나 상황보고서라면 몰라도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작가는 상상력에 의하여 새로운 감정으로 다시 배열한다. 기록문학, 초상화, 음악연주 등 재현을 조건으로 하는 재현예술의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거울과 같이 기존물을 수납적으로 반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를 가진 하나의 구성적(構成的) 재현이다.
유이즈망(프랑스 철학자)이 기술하는 대로 완전히 사실주의적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주체가 말살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순연하게 자연 속에 있으면, 무대도 없으며 낮에 전등이 켜 있을 수도 없다. '자유극장'의 지난 역사에 있어서 앙뚜완느 극장과 같이 배우가 관객에게 등을 향하여 연기를 한다든가, 또는 정오를 알리기 위하여 열두 번 시계가 울린다하여 그 장면들이 현실로 화(化)할 수는 없다. 그런 생활의 단편은 인생 그 자체가 아니고, 인생이라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가장 현실주의적인 연극도 결국은 현실과 다른 것이다. 만일 그것이 현실이라면 예술은 예술인 것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로댕의 조각을 보아도 그 역상, 색조, 운동, 힘 등이 일종의 초현실로 표현되어 있다. 즉 현실이 괄호속에 삽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조각들이 물질적인 현실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진실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설명한 것인데, 조각은 주형보다 진실이고, 회화는 단순한 사실보다 진실이다.
그 까닭은 정신화 내지 사유가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술의 표현성이 있다
얼드리치는 재현과 표현에 대하여 미학적 분석을 기도하여 철학적 미학에 결여되어 있는 분명한 구별을 지었다. 그는 이 말을 기술적 묘사의 구별로써 그 뜻을 밝혔다. 한 장의 항공사진이 폭격을 예상하고 있을 때 그것은 건축가의 청사진과 같이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기술적 묘사이다. 이 사진은 용무가 끝난 후에는 단지 옛날을 회상시킬 뿐이다. 이 기술적 묘사에 맞서 표현적 묘사란 주어진 같은 대상을 놀랄만큼 자유롭게 미적 대상으로 구체화한다.
다빈치의 표현대로 화가에게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산, 폐허, 바위, 나무, 대평원, 언덕과 골짜기로 장식된 신선한 풍경'을 그 대상 안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이 경우에 미적 구체화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만도 아니고, 그 성질을 보고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것에서 생기를 주는 것이 된다. 이것이 표현적 묘사이다. 예술의 매체 속에서 본래의 대상에서 희미하게 분간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분명하게 구체화되어 생기를 띠게 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술은 재현을 의도하는 기술적 묘사가 아니고, 대상에 생기를 주는 표현적 묘사를 뜻하지만, 그럼에도 이 표현적 묘사 안에도 재현적인 양태와 비재현적 양태의 두 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품은 유사(類似)이다. 주제와 작품의 내용으로서의 매체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 사실주의의 작품이 대상이 유사하고, 추상주의의 작품이 관조자의 정신의 유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떻든 표현적 서술 속의 재현적 양태란 유사성이 내재한다. 그러나 사실주의 예술이 대상의 재현이라는 말은 아니다. 매체 속에 주체를 표현하는 이미지 내용이 사실주의와 추상주의 어느 것에도 재현적 양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 정서 내용은 결코 재현적일 수는 없다. 예술은 세계를 보는 방식이고, 보는 것이라 함은 망막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서내용은 표현적이다. 정상적인 지각력에 주어진 이미지를 재생시키려는 사실주의와 현상적 이미지를 채택하지 않고, 개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려는 추상주의와의 차이는, 전자는 생의 유기적 과정에 대한 신뢰와 공간의 표현이고, 후자는 유기적 원리를 신뢰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의 창조적 자유를 긍정하는 불안의 표현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의 표현만이 아니다. 때로는 미적 관조를 방해하는 반미적(反美的)인 것, 즉 추한 것을 표현할 경우가 있다. 질서, 비례, 균제, 조화를 표시하는 고전주의에 맞서 반역, 모순, 감정, 불균형을 기도하는 낭만주의가 예술의 물결을 이루었고, 특히 현대에 와서 광기, 무의미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와 불안, 부조리, 생의 어두운 측면을 표현하는 실존주의는 미보다는 추한 것을 표현하였다.
위에서 고찰한 사실의 묘사는 행복감의 가치이지만, 저 기괴한 정신적 공간공포라고 부르는 추상충동이 있다. 그것은 추에 관여하는 쾌적, 비극에 관하여는 기쁨이라는 심리적 요구에 의한 것이다. 침묵이 때로는 하나의 위대한 발언인 것처럼, 아름다움의 부정인 추함이 어떤 것에 생기를 주는 표현적 서술일 때가 있다. 추함이 아름다움의 배경 또는 둘레가 될 뿐만 아니라, 직접 미적 존재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뱀장어는 흙탕물 속에서 자라고, 연꽃은 늪에서 자란다. 생활의 양지에서 볼 수 있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빈곤과 불행의 응달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있다.
3. 대표적인 예술관
1) 모방설 :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모방으로 본다. 플라톤에 있어서 지상의 실재물들은 참된 실재의 모방 즉, 이데아(idea)의 모방인데, 예를 들면 지상의 침대는 참된 이상의 침대를 모방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침대를 만드는 자는 셋이 있는데 하나님의 공장인(工匠人)과 화가가 그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것을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자연 속에 하나의 침대, 더도 아닌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침대가 지녀야 할 것, 그 자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장인은 그 침대를 만드는 (두 번째) 사람이고, 화가는 그 침대를 그리는 세번째 사람이다.'고 한다.
이 플라톤의 예술관을 토대로 하여 발전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것이요, 또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모방을 잘 하는 동물이요, 처음에 이 모방에 의하여 배운다.'고 기술한다. 그는 <시학> 첫 머리에서 '서사시, 비극시, 희극시, 바커스(술의 신) 찬송가인 디트람보스 등의 예술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의 방식이다.'고 규정하고, 이 모방도 모방의 매개와 대상 그리고 양식이 다르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색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음성에 의하여, 또는 율동에 의하여 즉, 상이한 매개재료를 가지고 모방하고,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선(善)한 사람을 모방하고 어떤 경우에는 악(惡)한 사람을 모방한다. 그러나 이 때의 모방이 곧 복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방자의 주관이 개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진지하다.'라는 말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사건을 말하는 역사보다 시로 보편적인 진리의 새로운 구체화를 의도하였다. 그의 모방설은 똑같은 것의 생산이 아니고, '사물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상태'임을 말하였으나, 이상적인 '자연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다음에 기술할 상상설과 대조되는 것이다.
그리이스 철학의 이 모방설은 18세기 전반까지 면면히 내려왔다. 즉 로마의 시인 호하티우스의 '시는 그림과 같이'라는 이론에서 16세기에 시작한 신고전주의와 19세기의 자연주의 계열이 이 모방설의 주장에 연원되어 있다.
2) 상상설 : 모방설의 최후의 옹호자 바뙤에까지도 모방설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즉 '예술은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개념이 대상을 복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가? 대상을 변형시키는 일 없이 미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드디어 레이놀즈는 18세기 후반에 <예술에 관한 여러 논문>에서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모방이라기보다는 확대'라고 선언하였다. 즉, 논문에서 그는 '예술이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하에서 예술을 지시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의 모든 이론은 그릇되고, 만일 상상력이 감동되면 결론은 올바로 인도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 추론은 그릇되게 마련이다. 인생의 교섭에 있어서와 같이 예술에 있어서도 올바른 이성과 모순되지 않고, 또 우연한 실행보다는 월등한 총명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연역의 느린 과정을 기다림이 없이 일종의 직관을 나타내는 것에 의하여 결론에 곧장 이르는 것이다. … 모든 예술의 중요한 목적은 상상력과 감수성 위에 하나의 인상을 이루어 놓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 때로는 이 일을 맡아 주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것이 그 일을 맡는다. 따라서 내 생각에 모든 예술의 참된 검증은 그 제작물이 자연의 정확한 묘사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러운 인상을 가져오게 하는 예술의 목적을 충족시켰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라고 기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만으로는 한 발도 마음대로 디디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이른바 관습적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 이론적으로 숙고하지 않으면서도 무난히 처리해 나가는데, 이 '관습적 이성'과 '총명성'이 예술창조를 실현시킨다. 이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인상'이라는 집합적인 관찰의 양을 이루어 놓는다고 한다.
루소는 이 상상설의 강력한 추진자이다. 그의 <신(新) 엘로이즈>는 하나의 새로운 혁신의 힘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경험적 세계의 기술도 재현도 아니라, 감동과 정열의 분출'이었다. 야만인들도 이상야릇한 필치로 무서운 형태로, 또 거친 색채로 나무의 열매와 자기 자신의 신체를 만들었다. 이 형성적 성격은 예술의 본질인데, 괴테는 '질풍과 노도'의 물결의 영향으로 성격예술을 유일한 참된 예술이라고 보았다.
3) 상징설 : 예술이 아무리 상상의 세계이고, 우리들의 정신세계의 표출이라 해도, 모든 몸짓이나 소리지름이 예술 행위가 아닐 것이다. 정열에만 좌우되는 것은 감상이지 예술은 아니다.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커시러는 <인간론>에서 예술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그것은 깊은 통일과 연속을 나타낸다는 점을 강조, 예술은 상징적인 언어라고 정의내렸다. 즉 모든 다른 상징형식처럼 예술도 기성의 주어진 한갓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인간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에 이르게 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실재의 발견'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날마다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과학자에게 있어서는 같은 것이지만, 예술가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과학자의 추상화 작용은 실재를 빈곤화할 우려가 있지만, 예술의 구체화의 노력은 생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전달을 예상하는 '인간감정의 외화'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카시러의 의도인데, 이 사상을 이어 받은 수잔 랭거는 상징이 대상의 대리구실을 하는 기호도 아니고, 어떤 사태의 징후도 아니고, 대상에 대한 표상을 운반하는 의미체계라고 규정지으면서, 이 '의미'는 '정감을 일으키는 자극이 가지는 의미도, 그것을 알리는 신호로서의 의미도 아니고, 정감내용을 가지는 의미'라고 말하였다. 랭거에 의하면, 예술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정념이나 애정이나 동경이 아니고, 우리들이 그러한 감정을 갖고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들을 제3자에게 전가시키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파악하고 실감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직접 우리의 이해력에 현존시키는 것이다.' 예술이 나타내는 상상설에서와 같은 점감적인 반응이 아니고 통찰이라는 것이 랭거의 견해이다. 따라서 그는 '음악의 선물은 전달이 아니고 통찰이다.'라고 기술하면서 소박한 표현을 하면 '어떻게 감정이 움직이는가.'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술작품이 한 예술가 개인의 변덕과 흐트러진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보편적인 전달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카트는 '미적 오성'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논리적, 과학적 판단에 속하는 객관타당성과 구별되는 것이다.)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와 연극'에서 '음악은 대사를 말하는 등장인물의 감정이 아니고, 말하는 사람과 배우의 감정 즉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같은 상징형식 또는 의미체계로서의 예술은 세계감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반화 작용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