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어이없는 이별 > ........................... 마광수
“아니, 이럴 수가……! ”
김달중씨는 자기도 모르게 거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전에 등기우편으로 배달되어온 한통의 편지를 읽고나서 갑자기 얼빠진 얼굴이 되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눈동자의 초점은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서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헤벌어진 입술은 도무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절망과 분노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그의 감정 상태는, 그의 얼굴 근육 전체를 씰구럭씰구럭거리게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흡사 기괴한 외계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편지지를 쥔 그의 손가락들이 버들버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한테 지난 7년 동안 쏟아부은 온갖 정성과 아첨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김달중씨는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다음, 다시금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혹시 자기를 놀리려고 농담조로 쓴 편지는 아닐까 하는 실날같은 희망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쫀쫀하게 뜯어 읽어봐도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숙은 그녀 특유의 야무진 필체와 논리적인 문장력으로, 김달중씨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데 대해 구구한 이유 같은 것을 달고 있지 않았다. 그저 다만, 이젠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으니 제발 신사답게 물러나달라고만 씌어 있었다.
김달중씨는 편지를 내동댕이쳐버리고 나서 허탈한 가슴을 안고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는 자기 나름대로 미숙이가 변심하게 된 이유를 추리해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도무지 그 까닭을 추측해낼 도리가 없었다.
김달중씨가 지금 있는 곳은 미국의 뉴욕이다. 1년 전에 그는 그가 다니던 회사의 미국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 김달중씨에게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이 하나 있었다. 이미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야무지고 또랑또랑하게 생긴 직업여성이었다. 그녀는 Z대학 의상학과를 나와 어느 꽤 유명한 브랜드의 기성복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지금은 독자적으로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김달중씨를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서른살 노총각이었던 김달중씨는 금세 그녀에게 반해버렸고, 그녀 또한 김달중씨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시나브로 데이트를 계속한 지 3년 만에 서로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김달중씨는 이미숙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결혼해버리자고 졸랐다. 그러나 이미숙에게는 미리부터 계획해온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학졸업장을 썩히지 않고 당당한 직업여성으로 홀로 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회사에 취직하여 경험을 쌓고 난 다음에 자기가 직접 의상실을 하나 차리고 싶어했다.
그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김달중씨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럴 때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사업에 차질을 빚기 쉬우므로 미숙은 결혼을 조르는 김달중씨에게 1년만 미루자고 부탁했다. 연애할 때는 남자 쪽이 아무래도 훨씬 더 저자세가 되게 마련이다. 김달중씨는 할 수 없이 그녀의 말을 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가 절대로 마음 변치 않기로 굳게 맹세를 하고서 헤어졌다.
김달중씨는 미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미숙에게 매일 편지 한 통씩을 꼬박꼬박 써서 부쳤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딴생각을 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린 김달중씨로서는, 그가 그동안 고이고이 간직해온 보물덩어리인 미숙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매일매일의 저녁시간을 낑낑거리며 편지 쓰는 데 소모했고, 그래서 동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같이할 시간조차 변변히 없었다. 평소에 별로 글을 써본 적이 없던 김달중씨로서는, 매일 다른 화제를 가지고, 그리고 가장 낭만적이고도 달콤한 어투로 시적(詩的)인 문구들을 나열해야 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숙이도 답장을 해오긴 했다. 그렇지만 차츰차츰 김달중씨가 써보내는 분량의 반도 못되는 분량으로 줄어들어갔다. 김달중씨는 그녀가 새로 차린 가게일로 바빠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짧은 분량이었을망정, 미숙이가 써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로 시종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돌연히 절연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김달중씨는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 미숙에게 그 이유를 따져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근무해야 할 날짜가 꽤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미숙의 의상실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손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붉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김달중씨를 보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을 마치고 나서 제가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기로 하죠.”
그래서 김달중씨는 손님들이 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이 나가고 나자 의상실 안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김달중씨는 씩씩거리며 따지듯 대들었다.
“그래……, 대체 나와 헤어지겠다는 이유가 뭐야?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되는 거야? 미숙이는 양심도 없어?”
“물론 양심은 있지요. 그래서 그동안 저도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달중씨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남자가 제 앞에 나타났는 걸요.”
김달중씨는 자신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추락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정신이 혼미해졌다.
잠시 후 김달중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다시 이미숙에게 물었다.
“그자가 대체 누군데?”
“달중씨가 들으면 아마 기가 막혀서 놀라 자빠지실 거예요.”
“놀라 자빠지지 않을 테니까 빨리 말해봐, 도대체 그 작자가 누구야, 응?”
“……우편배달부예요.”
김달중씨는 정말 기가 막혔다. 아니, 미숙이가 그토록 반해버렸다는 사내가 고작 우편배달부라니…….
“우편배달부? 아니 그게 정말이야? 그럼 이 달중이가 한낱 우편배달부만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우편배달부가 대체 어때서요? 사람을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그분은 아주아주 건실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대학을 못 나와서 그렇지, 얼굴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당신보다 백 배 나아요.”
김달중씨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이미숙의 뺨따귀를 한 대 때려줄 뻔했다.
두 사람은 긴 시간 동안 계속 입씨름을 벌였다. 그러나 김달중씨가 아무리 애원, 협박, 설득을 되풀이해도 미숙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김달중씨는 드디어 맥이 풀려버려서 오늘은 일단 퇴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미숙의 결심을 돌려놓을 자신은 없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는 몇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그가 측은해 보였던지, 의상실 문을 나서는 김달중씨를 보고 미숙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발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당신한테도 책임은 있다구요. 왜 매일같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보내셨어요? 사실 그게 저는 좀 부담스러웠다구요.. 그건 저를 못 믿어서가 아니었나요? 그래도 편지를 보통우편으로 부쳤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편지를 꼬박꼬박 등기우편으로 부쳤어요. 모든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당신의 지나치게 세심한 성격 탓이었겠죠.
……아시다시피 등기우편물은 우편배달부가 수취인의 도장을 받아가야만 해요. 보통우편물은 배달부가 그냥 문틈으로 밀어넣고 가버리기 때문에 우편배달부의 얼굴을 대할 기회가 거의 없지요. 그런대 당신이 편지를 꼬박꼬박 등기로 부치시는 바람에, 저는 매일 한 차례씩 그 우편배달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구요…….”
(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