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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에서는 敬 자를 이렇게 표현을 해요. 위에 이렇게 뿔이 두 개가 난 사람이 있어요. 이 뿔은 이 사람의 직업을 가리켜요. 양뿔이어요. 그래서 양을 기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양을 기를 때 어떻게 해야죠? 양 떼를 몰고 갈 때 입으로는 우~ 하고 소리를 내야죠. 양이 어딘가로 도망을 가고 있는데 소리를 안 내면 제대로 양떼를 안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양떼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야죠. 그래서 이렇게 앞에 입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소리를 질러서 양들을 몰아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안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가끔은 못 가게 이렇게 줄로 쳐주기도 해야 돼요. 아프라고 때리는 게 아니고 엉뚱한 데로 가지 말라고 안전을 위해서 손으로 이렇게 채찍을 잡고 있어요. 이게 敬자예요. 이게 갑골문식 敬자의 해석이에요.
금문적인 해석은 다르죠. 목양을 하는 사람들이 늘 소리를 내서 양떼를 부르고, 양떼가 어디 갔을 때마다 빼지 않고 그리고 양떼가 벗어나려고 하면 채찍으로 못 나가게 또 잡아두는, 잠시도 채찍을 게을리하면 양떼가 벗어나서 늑대한테 물릴 수도 있고, 잠시 소리를 안 내면 양떼가 어디론가 딴 방향으로 갈 수도 있으니 그래서 양떼를 살피는 사람이 늘 양들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잠시도 딴 눈 안 팔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 그것을 敬이라고 그럽니다.
敬이라는 것이 아까 풀로 봐도 그렇죠. 풀이 1mm를 안 자라고 2mm를 자랄 수 없듯이, 순서를 다 밟아서 구조 짜듯이 하는 거죠. 자연물에서 오늘 자랄 부분을 조금이라도 빼면 내일의 성장이 없는 거죠.
어느 분 페이스북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있었는데,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하는데,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좀 안타까웠어요. 일일시호일의 뜻이 그게 아니어요. 일일시호일을 영어로 뭐라고 번역을 해두셨냐면 ‘everyday a good day’로 번역을 하셨어요. is를 빼버리고 하셨어요. 근데 비슷한 것 같은 데 아니어요. 그건 뭐냐면 날마다 오늘이어요.
왜 日日을 붙이냐 하면, 그건 ‘오늘의 오늘’이예요. 날마다의 오늘이예요. Every today ia a bonus day by yesterday. (혹은 of yesterday)예요. 어제까지 내가 살았기 때문에 오늘은 없을 수도 있는데, 어제 내가 산 대가로 오늘 주어진 보너스 날! 그런 의미예요. 따라서 이 일일시호일의 뜻은, “Everyday must be a good day.” 그러니까 must가 들어가야 돼요. 다르죠. 그러니까 어제까지 살았는데 그게 다예요. 내 인생이 다인데 오늘 깨어보니까 살아있는 거예요. 오늘은 어제까지 산 나의 모습에 대한 내 삶에 대한 보너스 데이이기 때문에 좋은 날이어요.
원래 good이라는 건 16세기까지는 그냥 god이었어요. 신이라는 의미죠. 이거는 뭐냐? 좋은 것이에요. 그 자체가 좋은 것이에요. 16세기에 와서 이게 이렇게 o 가 하나 더 붙으면서 good이 되죠. 무슨 뜻이 되냐면요, 어떤 사물이 있어요. 사물은 그냥 그 사물인데 그 사물에는 좋은 면이 있는 거예요. 그 사물 자체가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물의 좋은 면이라는 개념에서 good이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 보고 굿맨이다 그러면 좋은 면도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예요. 한자에서 말한 선인(善人)이라는 이야기가 아니어요. Good에 대한 원래 이 개념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보눔(bonum)이에요. 보눔이 보너스가 돼요. 이건 중성형이고, 여성형이 되거나 하면 보나가 되고, 남성형이 되면 보노가 되겠지만요. 오늘날 보너스라는 말이 상여금이에요. 보너스라는 건 뭐냐? 내 몫을 다 받았는데 추가로 주어졌어요. 그래서 좋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일일시호일의 好日은 보너스 데이예요. 나는 이미 어제까지 다 살았어요. 오늘 지금 살면서 내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산 게 아니고 그냥 살았어요. 살아서 피곤해서 잤더니, 죽음인 줄 알았더니 아침에 깨 보니 해가 떠 있고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거예요. 아! 오늘도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 거예요. 보너스예요. 그래서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자축하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지! 그러는 그 날마다는 병렬적으로 쭉 오고 있는 것이고 어떤 인과관계가 어제와 없는 것이죠. 일일시호일에 호일(好日)은 그런 인과관계가 있는 거예요.
우리 건물이야 대충 그냥 몇 개 빼먹고 지어도 두부 같은 집이 될지 몰라도 가능은 해요. 자연계는 그런 일이 없어요. 식물이 그만큼 자라고, 그만큼 자라고, 날마다 자라는 속도는 서로 다를지라도 이어져 가는 거죠. 내일 내 잎이 더 크는 것은 보너스인 거죠. 그 보너스가 또 다음 날에 보너스를 만들어내죠. 그렇게 가는 것을 금문에서의 경(敬)은 그렇게 풀었고요.
갑골문에서 경(敬)은 사람이 일을 하는데 잠시도 딴 눈 안 팔고 정성을 두고 있는 일! 그러니까 경사(敬事)라는 것은 공경해서 일한다 이런 의미보다는 정말 한눈 안 팔고 일하는 거예요. 딴 생각 안 하고, 딴 짓 안 하고 자기 일을 한다는 거죠. 이 경사라는 개념을 지금 잠깐 한 1분만 머리에 담아두십시오. 경사이신(敬事而信)! 이렇게 일을 해야 신뢰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지런히 하라! 아니어요. 열심히 하라도 아니어요. 일할 때는 적어도 딴 짓을 하지 마라!
그 다음에 절용(節用)이라고 그랬는데 얼핏 생각하면 ‘절약하다’ 이런 의미로 보여요. 절(節)자에 다른 뜻으로 쓰이는, 혹시 무협지나 사극에서 그런 용례를 들으신 적 있나요? 절부(節符)라고! 어떤 자기 신분의 표징으로 부절(符節)이나 절부라고 그러죠. 그런데 원래 節 글자는 节하고 비슷해요. 좌측 하단 艮(간) 비슷하게 쓴 것은 원래 없었어요. 나중에 생긴 거예요. 원 글자는 우측의 卩(절)만 있는 거예요. 어떻게 된 글자냐 그러면요. 이걸 알면 단순히 절약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절(卩)은 사람이 이렇게(弓)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이 앉아있는 모습이 이렇게 卩로 오게 된 거죠. 그런데 그 위에 죽간(竹簡)이 있어요. 대나무로 된 무언가가 있어요. 이건 무엇인가의 정체성이에요. 무언가의 내용에 해당되는 명실상부한 그 무엇이에요. 節이라고 하면 시간의 마디라는 개념보다는 그 시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춘분이라면 시간적으로 춘분이란 마디에 왔다가 아니라 그 시기는 춘분이라고 불러야 될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어요. 현실적으로 비슷하게 쓰일 수 있지만요.
그래서 節用(절용)이라 그러면 이 정체성에 맞게 쓰는 거예요. 교육비는 교육에 쓰는 것이고, 그 교육비 중에서도 초등학생의 교육비는 초등학생을 위해 쓰이는 것이고, 성인 교육비는 성인을 위해 쓰이는 것이고, 노년들의 교육비는 노년들을 위해서 쓰이는 것이고, 각각의 항목 절목에 맞게 쓰는 것이 절용이에요. 단순히 절약해서 아껴 쓰는 게 절용이 아니고, 많이 쓰는 과용(過用)의 반대가 아니에요. 과용의 반대는 소용(少用) 즉 과소(過少)예요.
이 절용은 절목(節目)에 맞춰서, 즉 주어진 항목에 맞게 쓰는 거예요. 여기저기 끌어당겨 쓰는 게 아니고, 없는 항목에 쓰는 게 아니고, 있는 항목에 안 쓰는 게 아니고, 있는 항목만큼 쓰는 거예요. 그 항목에 맞춰서 어떤 때는 논의해서 더 쓸 수도 있고, 덜 쓸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는 그 항목 자체를 폐지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항목에 맞춰서! 항목에 맞춘다는 건 뭐죠? 이미 항목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항목이 존재한다는 건 뭐죠? 이미 합의 봤다는 거예요. 합의 본 내용이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앞서 잠깐 敬事를 남겨놓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경사라는 것은 일이 이미 있다는 거예요. 일도 주어져 있어요. 그 일을 맡았으면, 그 일에 집중 좀 하라는 거예요. 집중 좀 하고, 그리고 어떤 절목(節目)이 있으면 그 절목에 맞춰서 쓰라는 거죠.
그리고 애인(愛人)이라 그랬는데요. 愛人이라고 할 때, 이것을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번역하면 안 돼요. 타인을 사랑하는 거예요. 애(愛)라는 글자는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있어요. 사람이 이렇게 편하게 놀아요. 그리고 그 노는 사람 밑에 그 심장을 하나 그려 놓아요. 이게 사랑할 愛자예요.
이 사랑할 ‘애’자가 나중에 여기에 이 夂를 하나 더 붙이면 이 愛자가 돼요. 오늘날의 愛(애)자죠. 이 심장 모양의 옛 글자가 가운데 心이죠. 이 밑에 온 것은 원래 글자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이 夂로 온 거죠. 그리고 갑골의 위는 爪로 온 거예요. 그런데 위에 있는 사람의 방향이 반대로 돼 있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똑 같은 데요) 그러면서 밑에 이렇게 마음(心)만 있어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이것은 실(悉)이라는 글자로 발전해요.
모두 실(悉)자와 사랑 애(愛) 자는 원래 같은 글자예요. 이게 모두라 그러듯이, 안 빼는 마음, 다 주는 마음! 우리가 이걸 사랑이라고 번역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이 아니라 우리 말로 적절하게 번역하면 ‘고임’이에요. 주는 거예요. ‘Give and take’가 아니고 ‘All give’예요. 오고 말고는 관심 없는 거예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받았으면 줘야죠.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줬을 뿐이에요.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고이다! 우리가 ‘고임’이라고 그러죠. 고임이라는 것, 누구한테 고임받는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올렸으니까 주는 게 아니고, 또 줬으니까 온 게 아니고, 그냥 일방적인 거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형제 간에 사랑하듯이 그것이 愛자의 원래 의미예요. 지금 현재 사랑이라는 것은 이 호(好)에 더 가까워요. 이 好는 상대방이 딱 있잖아요. 대등하게 주고받죠. 이 사이에서 늘 문제가 있잖아요.
타인을 사랑할 때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리(利)라고 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내게 남는 플러스잖아요. 그런데 익(益)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보태 주는 거예요. 기브앤테이크가 없어요. 홍익인간(弘益人間)이지 홍리인간(弘利人間)이 아니에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니고, 홍익인간은 널리 다른 이들에게 삶을 보태주는 거예요. 관계를 통해서 더해주는 것이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면은 전혀 다른 번역이에요.
널리 인간에게 보태어 주며! 그러면 돌아오는 것도 저절로 있겠죠. 햇빛이 지구로 오고, 수성으로 가고, 목성으로 가고, 금성으로 가는데 그 햇빛으로 말미암아서 지구에서, 금성에서, 수성에서, 목성에서 되돌아오는 게 없다면 태양은 금방 폭발할 거예요. 태양은 그냥 줬지만 받고 있어요. 그냥 줬지만 안 받는 건 없어요.
아무튼 그 얘기를 합니다. 절용(節用)! 용도에 맞게 절목에 맞게 쓰고, 절목 따라 쓰고, 그렇게 쓸 때 즉 그 쓰임새의 의미는 타인에게 보태 주는 것이다!
사민(使民)이라고 하는 것은 이때 사인(使人)이 아니잖아요. 使人이 되면 누군가를 부려 먹는 거예요. 使民은 어떤 집단이 그쪽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사람은 부릴 수 있으나 민중은 부릴 수가 없어요. 개별적 퍼스넬리티 가진 존재는 부릴 수가 있으나 民은 부릴 수 없어요.
民은 부릴 수 없고 그럼 人도 생각을 해요. 民만 못 부리냐? ‘나’라는 개인도 못 부리게 서야지! 라틴어에 그런 개념이 있어요.
누군가에 의해서 부림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개인! 그걸 ‘알투스 인디’라 그래요. ‘알투스’는 고품격이라는 뜻이고 동시에 독립체라는 얘기예요. ‘누구에 의해서 부림 받지 않는이’라는 뜻이어요. ‘내’가 나의 주인인 존재라는 뜻이어요. 어쨌든 그건 동양에도 있습니다. 어쨌든 民은 부릴 수 없어요. 人이 그렇게 되려면, 민이 가는 방향과 자기의 삶이 일체화가 되면 못 부리겠죠.
어쨌든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라 여기에 사민(使民)이라고 그랬잖아요. 民은 결국 이끄는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민 속에 있는 누군가, 즉 개인이 이끌 수도 있고, 그 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이끌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다른 조건이 이끌어줄 수도 있어요. 꼭 대장이 이끌어가는 건 아니어요. 아무튼 민은 흐름 따라 이끌어져 가는데 그때는 상황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여야 된다!
이시(以時)는 時에 적중하게, 상황에 맞추어서 움직여야 된다! 가령, 상황은 전쟁 상황인데 이상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든가, 거꾸로 평화로운 상황인데 전쟁을 끄집어낸다든가, 이게 아니라는 거죠. 가을이면 가을에 맞게, 여름이면 여름에 맞게, 농사 지으면 농사에 맞게, 그리고 반대로 어업을 하면 어업에 맞게! 그렇게 다 상황 상황에 맞게 사람들이 살도록 해준다는 것! 또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 이게 이제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천승(千乘)! 제법 큰 나라가 살아가려면, 그 나라의 구성원들이 일을 할 때 그 일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어야 된다! 그 버릇이 그 나라에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신뢰를 만들어 온다!
일을 하는데 저 사람이 제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면 어떻게 신뢰가 생기겠어요? 敬事해서 국가의 신뢰가 생기고 공동체의 신뢰가 생기는 거죠. 공동체의 신뢰라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공동체의 약속으로, 주어진 일에 각자가 좀 집중해 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남은 시간에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는 거죠.
그리고 또 공동체적으로 미리 쓰여진 절목이 있다면 그 절목에 맞추어서 예산을 써야 된다! 없는 절목이었는데 막 만들어내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절목대로 쓰고 절목대로 쓰는 그 목적은 타인에게 베푸는 거예요. 國人들에게 베푸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집단으로서의 사람들 또는 그 집단체의 의미에서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나라는 길을 찾은 것이다! 아무튼 그런 간단한 원칙들이죠. 할 얘기는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제자입즉효(弟子入則孝), 이 ‘제자(弟子)’는 젊은이죠.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높일 수 있고, 집 밖으로 나와서는 순서를 지키고 그리고 근이신(謹而信)입니다, 신(信)은 또 나오는데, 앞에서 경사(敬事)해서 신(信)이 됐고 이번에는 근(謹) 해서 신(信)이 됐어요. 근이라는 게 삼가 할 ‘근’이라고 그러지만, ‘삼가다’라는 뜻의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요. 마치 ‘고맙습니다!’ 혹은 ‘좋습니다!’처럼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요. 앞에 말씀 언(言)은 나중에 붙었겠죠. 글자상 言을 빼고 뒤에 있는 이것 근(菫)만 글자죠.
이 근(菫)도 금문과 갑골의 글자가 달라요. 금문에서 이 근(菫)은 위에 것이 꽃이고 그리고 중간의 것이 꽃잎이고, 아래는 꽃줄기 혹은 꽃부리에 해당합니다. 이래서 꽃이 피는 것, 나무에서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꽃이 시간을 지켜서 피는 것이죠. 아까 경사(敬事)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사물 특히 식물적으로 푸는 거죠. 계속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서 줄기가 커 올라가고 잎이 나더니 꽃이 나고, 이렇게 순서대로 성장해 가는 모습, 자연계의 그 성장의 모습이야 말로 근(謹)이다! 이렇게 그 금문은 풀어요.
갑골은 또 다르게 풀어요. 오늘도 갑골을 선택하겠습니다. 갑골은 위에 무언가 있어요. 위에 무언가 있고 사람이 있어요. 이게 근이에요. (위에 있는) 이건 뭐냐? 무언가의 대상체예요. 이렇게 갑골에서 네모나게 그려지면 이건 다 하늘이예요. 하늘도 이렇게 (위에 네모나게 하고 아래에 大 자를)해서 이렇게 그리잖아요. 이렇게 되면 이게 하늘 천(天)자예요. 이거 자체가 하늘이예요. 그러니까 갑골에서 네모가 나왔다 그러면 무조건 하늘이예요.
이 갑골 근(謹)자 위에 있는 것도 하늘이예요. 과거의 시대에 일단 하늘이라는 걸 뭘로 생각했는지는 우리가 여기서 알 바는 아니지만, (謹 자는) 하늘 앞에 사람이 사지를 오체투지를 하고 있어요. 빌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래에 있는 (선과 같은 것은) 빈 자리겠죠. 어딘가 자리를 깔고, 자리가 아닐지라도 자리를 잡고, 하늘을 향해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어요.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어요. 이것은 실제로 갑골 문화에서 은나라 초기에 은나라 탕왕의 고사를 가지고 만든 글자예요. 은나라 때 만들어진 갑골 글자이고 하나라 때 갑골이 아니예요.
갑골이 금문보다 덜 오래된 글자예요. 그런데 탕왕이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우고 나서, 이제 나라를 세우고 있는데 너무 가문 거예요. 3년 내에 비가 안 오는 거예요. 황화유역에 비가 안 온다는 건 이거 끔찍하죠. 그래서 결국은 견디다 못해 장작불 위에 검은 소 한 마리와 자기가 올라가서 불을 붙이라 그래요. “나를 태워서 기도하라!” 그러죠. 그러니 못하겠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나무로 단을 쌓고 거기서 엎드려 기도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거의 목숨이 다할 만큼 이렇게 빌었다는 이 고사 이 모습으로 글자를 만든 거예요.
이게 글자이고, 이때 발음 ‘근’은 의태어를 가지고 발음이 붙은 거예요. 여기서 와신상담(臥薪嘗膽) 할 때, 그 장작개비 위에 무릎 꿇고 앉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끙’ 소리에서 왔다고 그래요. ‘끙’이라는 중국어의 발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근’이 됐다고 하는데, 사실 솔직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게 ‘근’이예요.
그러니까 자신을 던져 무엇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거예요. 자신을 던진 사람에게만 신뢰가 생겨요. 자신을 안 던지고 자신을 요리조리 챙기는데 무슨 신뢰가 오겠어요. 그래서 어쨌든 간절하면 신뢰가 생긴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가 공동체 안에서는 또는 자기 집 안에서는 누군가를 높이고, 나와서는 양보하여 순서를 지키며, 그리고 하는 일들이 늘 진심을 다해 간절해서 마침내 신뢰를 세우고!
그러면서 범애중(汎愛衆), 무릇 특정인이 아닌 무리를 향해서! 여기선 민이 아니죠. 민은 일종의 집합 명사예요. 衆은 군집 명사이고요. 민중이라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이게 집합체인지 군집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민중이라 그러는데요. 그렇지만 民은 집합 명사로서 단수형로 하나이고, 衆은 여럿이 있는 하나의 군집명사예요.
그래서 여기는 군집명사로서 특정되지 않은 다수를 향해, 늘 다수를 향해 마음으로라도 보탤 줄 알며 그리고 더불어 살기를 체화한다면! 친(親)이라는 것은 체화하다는 의미예요. 자기 몸처럼 여긴다는 거예요. 더불어 살기 곧 인(仁)을, 공존을 자기 몸으로 체화한다면! 그러고 행하고 나서도 여력(餘力)이 있다면! 밥 먹고 배가 부른데도 남잖아요.
더 못 먹는 게 여(餘)예요. 잉여에서 잉(剩)과 여(餘)는 달라요. 잉(剩)은 못 먹게 해서 남긴 거예요. 餘는 먹고 남는 것이에요. 근데 剩하게 시켜놓고 나서도 餘라 하고, 자기가 다 못 먹고 남겨놓고 나서도 다 못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은 거라 그러고 이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잉여라는 게 구분은 안 되지만 剩은 남겨지게 된 거예요. 그냥 餘는 그냥 남은 거예요. 그래서 여(餘) 즉 그러고 나서도 남아 있는 힘이 있다면 그때 여러 가지 문채(文彩), 여러 가지 상형된 구호들이라든가 글이라든가 이런 걸 배워도 된다!
그러니까 5장은 어떻게 보면 공동체 차원에서 교언영색이라고 하는 3장을 보강한 셈이에요. 그리고 6장은 2장을 재보강했어요. 결론을 내릴 때는 절대적으로 공자의 말을 써서 보강을 해요. 앞에 이런저런 사실을 늘어놓고 이야기를 펼 때는 공자 제자의 이야기를 갖고 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동일한 건데 여기서 딱 부러지게 결론을 내릴 때는 꼭 스승인 공자의 말로서 정의를 내려요.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7장은 다시 제자 이름이 왔죠.
자하왈(子夏曰) 현현역색(賢賢易色). 현(賢)은 이제 이렇게 쓰죠. 밑에 이건 조개 패(貝)여죠. 이 조개는 뭐죠? 화폐예요. 처음에 돈이 금속으로 찍어낸 게 아니라 조개가 화폐였잖아요. 보배 보(寶) 할 때도 밑에 늘 이 조개(貝)가 붙잖아요. 재물(財物)할 때 재(財)도 이게(貝) 붙잖아요. 전부 조개를 화폐로 인식했고, 이게 재물이죠. 이 재물이 생겼을 때, 위에 있는 건 신하 신(臣)자잖아요. 신하 臣자이지만 또 다른 뜻이 뭐죠? 그게 달 월(月)예요.
그리고 달이 다시 시작돼요. 그럼 뭐죠? 월초(月初)죠. 그러면 재물을 월 초에 어떻게 쓸지? 그렇게 살펴놓는 게 현명한 거예요. 그냥 닥치는 대로 막 쓰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재물을 왜 생각했을까?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니어요. 그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굶주림을 막기 위한 거죠. 어느 순간에 탕진하면 굶겠죠. 굶으면 굶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시대에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 누구에겐 가는 폐를 끼치겠죠.
월초에 다 써버리고 29일 동안은 내가 굶든 말든 간에 누가 도와줄 일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하면 상관없죠. 과거에는 한 마을에 살아요. 굶는 거 어떻게 해요? 일단 여덟 집이 똑같이 비슷하게 정전제(井田制)로 아홉 등분을 해서 나눠 가졌어요. 가운데는 공용으로 하고요. 어느 한 사람이 월 초에 자꾸 다 써버려요. 그럼 나머지 일곱 명이 보태 주거나 공동체의 것을 쓰게 하거나 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공동체와 공동체의 벗들에게 폐를 안 끼치기 위해서, 월 초에 기획해서 쓰라는 거예요.
새 달마다 또 달마다 재물을 쓰라는 거예요. 그게 현명한 거예요. 현군(賢君)이다 현주(賢主)다 그러면 그게 별게 아니라 국가 살림을 그렇게 쓰라는 거예요. 요즘은 당연히 그렇게 돼 있죠. 1년 예산 다 짜져 있죠. 그래서 그렇게 쓰는데요. 이 현(賢)의 뜻이 나중에 우리가 생각할 때 현명하다! 밝다! 이런 의미가 되잖아요. 이게 밝은 것(明)이다! 이 조개 패(貝) 자는 어떤 면에서 이 명(明)자가 되고, 나중에 다 이 명(明)이라는 글자로만 생각해요. 원래 그림 그려지는 모습, 달마다 기획을 해서 쓴다! 이 개념은 사라지고 그냥 이게 현명하다는 의미밖에 없는 그런 글자가 됐을 때, 이 글자의 뜻을 한 번 더 강조시켜주는 셈인데요.
이렇게 하는 것을 현명하다 여겨라! 현(賢)의 글자에 담겨 있는 본래의 의미를 행하는 것이 현명함이라 여겨라! 그게 현명한 것이다! 저도 이것을 다르게 해석한 적 있어요. “현명한 사람을 현명하게 대하라!” 그러는데, 그림이 안 그려져요. 그림이 그려져야 된다는 거죠.
철학가와 작가의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작가가 쓴 글은 웬만하면 그림이 그려져요. 안 그러면 작가로서 도태돼요. 특히 화면이 있는 방송으로 가면 어떻게 누군가가 보여줄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원작이 그러면 그런 방법을 작가는 또 만들어내야 돼요. 작가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너무 부호화시키고, 그림이 없는 영역으로 만들어 놓은 곳에서 다시 그림을 찾아내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그 그림을 잘 끼워 맞추고, 그림 속에서 그림 없는 것이 느껴지게 끔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철학가나 사상가는 그림 있는 데서 그림 없는 걸 뽑아내는 사람들이잖아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아무튼 여기 현(賢)과 관련된 두 가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는 그냥 그림 없는 것과 하나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데, 그림에 맞춰 사는 게 이게 본질이다! 이런 겁니다. 賢의 원래 모습대로 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날 쓰고 있는 현명하다는 말의 진짜 뜻이니까 그렇게 쓰고요.
역색(易色)! 역색이라고 쓰기도 하고, ‘역색’이라 하고 풀이를 했는데요. 오늘은 ‘이색’으로 바꾸겠습니다. ‘현현이색’으로요. 제가 평생 그렇게 읽은 적이 없어요. 옛날 같으면 배우는 대로 발음하니까요. 자기 얼굴색을 편안히 두라는 거예요. 억지로 하지 말고요. 그냥 얼굴색은 나오는 대로 하라는 거죠. 원래 뜻대로 하면은 그냥 얼굴에 힘을 줄 필요가 없죠. 나오는 대로 그대로 있으면 되죠. 현현이색하고! 얼굴에서 그냥 원래 하는 대로 쭉 하고 있으니까, 그 얼굴빛이 그대로 나오고!
사부모 (事父母), 부모와 관련된 일을 할 때는 모실 事자라고 억지로 해석할 필요 없이, ‘부모에 관계된 일을 할 때는’이라고 해석하고요. 능갈(能竭), ‘갈’이라는 것은 다하다는 뜻이에요. ‘갈’이라는 것은 우리 말 ‘갈다’와 같은 거예요. 갈아내는 거와 같은 거예요. 능갈기력(能竭其力), 그 힘을 다하고!
사군(事君), 여기선 그냥 지도자라고 하죠. 지도자와 관련된 일을 할 때는 능치(能致)하고! 치(致)는 지극하게 하다는 의미예요. 이를 때까지 끝까지 가는 게 치(致)예요. 도달할 도(到)자와 같은 의미예요. 기신(其身), 육체가 아니고 자기가 해야 되는 처신을 최대한 하고!
그리고 동료들과 사귈 때, 여붕우교(與朋友交)할 때는 언이유신(言而有信)하고! 앞에 나왔던 표현이죠. 다시 번역할 필요는 없고요. 그렇다면 수왈미학(雖曰未學), 그가 안 배웠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람이 반드시 배웠다 할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이라는 게 기본이 중요한 것이, 배움에서부터 기본을 세우는 게 아니고, 서까래를 먼저 넣고 대들보를 걸 수 없듯이, 기둥을 먼저 세우고 주춧돌을 깔 수 없잖아요. 주춧돌만 깔려 있으면 난 배웠다 할 거다! 아무리 기둥이 화려해도 주춧돌이 안 깔려 있으면 난 배웠다고 안 할 것이다! 주춧돌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또 하죠. 주로 1편들이 이런 이야기들이예요.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8장입니다. 오늘 왠지 빨리 나갑니다. 9장과 10장에 엄청 글이 많으니까요. 자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부중(君子不重), 참 자주 쓰는 말의 중(重)이죠. 경중(輕重)할 때 쓰는 건데 무거울 重자라 그럽니다. 重 자는 이렇게 쓰잖아요. 딱 느껴지죠. 살 쪘죠? 이렇게 그리니까요. 상형 비슷하게 썼는데도 나오죠.
그러니까 전체적인 균형에서 이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빵빵하게 찐 거예요. 그리고 균형점이 가운데 있죠. 이게 옛날 발음이 ‘듕’이에요. <광운성계>에 의하면 당나라 때 발음이 ‘뚱’이에요. ‘뚱뚱하다’의 ‘뚱’과 원래 같은 음가이며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만 글자로 이렇게 표현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묵직하다라는 의미예요.
묵직하다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여기 이 상형문자에서는 보이죠. 이게 바로 중심이 잡히는 거죠. 한 가운데 중심이 딱 있는 거죠. 그래서 한가운데에 있다! 군자가 스스로 묵직하다는 의미는 뭐냐? 자기가 바라보는 자기 삶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위 군자라고 불리는 사람 혹은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중심을 잡고 있지 않다면 그거는 위엄이 없다!
‘君子不重則不威’라고 그랬는데, 원 <논어>에서는 이 ‘위(威)’자가 없었어요. 威자가 아니었어요. 이게 공자 후손이 살았다고 하는 옛 벽을 헐고 나온, 이른바 ‘공벽(孔壁)’ 논어에서는 이게 위엄한 威 자가 아니고 이룰 성(成)자였어요.
그러니까 더불어 살고, 우주와 같은 자강불식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언제든 자기 스스로 자기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성(不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게 맞아요. 공자라는 사람이 威자를 썼을 가능성이 굉장히 드문 게, 공자라는 사람이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언어학자에 가까운 아니 거의 언어학자 또는 그 이상의 언어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있었기 때문에 <시경(詩經)>을 편찬할 수 있었어요. 그게 없으면 운율이 강한 시경을 편찬할 방법이 없었죠.
어쨌든 이 위엄할 威자는, 이렇게 그려요. 이거 도끼예요. 도끼가 있고 도끼 자루가 있을 것 아닙니까? 도끼를 세워 놓아야죠. 워낙 무거우니까요. 도끼 자루 밑에 도끼를 세워놓을 수 있는 게 있어요. 세워놓는 게 있고 사람이 그 앞에서 이렇게 무릎 꿇고 있는 거예요. 이게 威예요. 공자가 이런 글자를 썼겠어요? 그래서 이거는 오히려 이룰 成자로 보는 게 맞아요.
공벽 논어가 맞고, 한나라 때 재편성된 과정에서 위엄 있을 威로 바뀌었는데, 저는 다시 공벽 논어으로 가서 이룰 成자로 일단은 풀겠습니다.
우주 같은 더불어 공존하기를 지향하는 사람이 자기 중심을 잡지 않으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리 배워도 견고하지는 않다! 이게 맞죠.
그렇지 않고 속되게 풀면 군자가 이렇게 참 믿음직스럽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 이렇게 되겠죠. 그러니 그 다음 문장 學則不固(학즉불고)와 연결이 되죠. 배워도 견고하지 않다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견고하지 않고 금세 무너진다! 이렇게 되겠죠.
주충신(主忠信), 主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으로 삼다는 의미죠. 主忠信에서 충(忠)과 신(信)은 나왔으니까요. 충과 신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으라! 부중(不重)했는데 그 중의 의미는 뭐냐? 주충신(主忠信)이죠.
충과 신이 내 중심이다! 마음에 생각의 깃발을 세우듯 가운데를 뚜렷이 하라! 忠은 지향할 목표죠. 따라서 목표에 충실한 것이죠. 가치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그 충실함이 신뢰를 가지게 돼야 되고, 앞에 나왔던 信의 조건들이 여러 개 있었죠.
그리고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 벗과 사귐에 있어서는 무우((無友)하라! 벗하지 마라! 어떤 사람과?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향이 다른 사람과 벗하지 마라! 나만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어요. 그러면 세상의 벗은 아무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질서를 내세울 사람이 아니어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꼰대도 안 할 소리를 공자가 했겠어요? 구척장신이나 돼 가지고, 요즘으로 치면 198cm 되는 키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런 치사한 얘기나 했겠어요? 그럼 이 공자라는 사람이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어요.
공자가 다니면서 너보다 못한 애들 친구 삼지마라 이렇게 했겠어요? 우(友)라고 말씀드렸잖아요. 友는 삶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귀어서 되는 벗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동무가 아니라 벗이라고요. 벗이라고 하는 건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술 한잔 먹고 기분이 좋아가지고 친구 삼지 말라는 거예요. 지향하는 길이 같은 지 아닌지 봐서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친근한 건 친근한 것이고 友는 友라는 거예요.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에서 불여기(不如己)는 자기와 다른 사람,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 즉 그냥 디퍼 프람(differ from)이지, 못한 사람이 아니어요. 자기하고 다른 사람을 벗하지 말라는 거죠. 또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다 친하게 지내야죠.
뜻이 달라도 친하게 지내는 게 좋죠. 왜 전체적인 목적이 공존이고, 함께 나눠 쓰기이고, 평화롭게 살기이고 그러면서 잘 굴러가기 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지내야죠. 그러나 벗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벗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서로 뜻에 맞춰서 사귀는 것이다! 뜻이 안 맞는 사람끼리 사귀었어요. 나중에 어느 순간 같은 말을 쓰고 있는데, 말이 안 통하게 되어요.
단어 하나가 안 맞아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는 방향성과 생각이 다른데, 같은 얘기를 하는데 다 공허하게 들리는 거예요. 벗이 아니죠. 그래서 벗이여야 토론도 되고 서로 발전도 하고, 서로 또 점검도 해주고요. 물론 그 벗과 가장 친하란 법은 없어요. 어떤 땐 벗과는 약간 냉담한 관계일 수도 있어요. 소가 닭 쳐다 보 듯이요. 그걸 늘 벗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떤 사람하고는 그냥 놀기만 해요. 같이 당구치고 같이 낚시하고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이건 일반 있는 해석 그대로입니다. 그러다 보면 지나친 점이 나와요. 사람은 모자라면 잘못인 줄 몰라요. 過를 허물로 생각하는 이유는 뭐냐? 결과가 지난 다음에 알아요. 모자랐을 때는 잘못 가도 잘못인 줄 몰라요. 어떻게 알아요?
지나가야만 잘못인 줄 알아요. 길을 찾아가는 데서도 일정한 만큼 목표치보다 더 가야 잘못 왔네! 하고 알죠. 가는 초반에 잘못인 줄은 몰라요. 지나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무언가 일을 하다가 지나쳐버린 거예요. 지나쳐버렸다면, 그래서 그것이 원래대로가 아니었다면! 물탄(勿憚),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 나중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나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너무 그걸 못해요. 요즘은 더 안 해요. 뭐가 있어도 물어보기를 안 해요. 30년 전에 운전을 해가는데 손에 지도 한 장 있다고 옆에 사람 많은데 물어보지도 않아요. 꼭 지도만 보지 말고 나가서 잠시만 차 세우고 물어보면 정확한데 물어보질 않아요. 여성분들은 잘 물어봐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성분들은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교육이 준 긍정성이 하나 있어서 그래요.
제가 늘 말씀드리는 삼종지도가 있어요. 삼종지도는 여성에게 남성 중심으로 강요해서 잘못된 것이지, 그 자체 안에 숨어져 있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남자도 한다면!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하는 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해서 따르거나 따라 하고, 동료 세대에서는 옆에 있는 동료들과 따라하고, 나이가 일정하게 지나가고 나면 젊은 세대를 따라하고! 이게 삼종지도죠.
그런데 상대방을 뒤틀어 갖고 남녀를 또 하나 기준을 채택해서 문제인 거죠. 가령, 젊은 여자는 나이 든 남자를, 적당한 나이의 여자는 적당한 나이의 남자를, 나이가 든 여자는 어린 남자를 이렇게 되니까 문제인 거죠. 당연히 배워야 되는 거죠. 기성세대가 아닌 신진세대는 기성세대를 배워야 됩니다. 또 자기가 기성세대보다 중간적인 세대가 되면 같은 동료들끼리 배워야 되고, 나이가 더 들면 젊은 세대에게 배워야 하죠. 이게 삼종의 원 뜻인데, 그걸 남녀를 갖고 뒤틀어놨기 때문에 조선시대 삼종 지도가 문제가 되죠.
삼종지도에서 남녀 관계만 없앴으면 이건 지금 있어야 되는 윤리예요. 잘못됐지만 그 악습의 긍정성이 현대사회에서 없어진 다음에 나타나요. 여성들은 어릴 때 그래도 싸우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머니가 하는 거 잘 따라해요.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같은 또래들끼리 상의도 잘해요. 상의를 얼마나 잘하냐 하면 아무 내용 없는 얘기도 상의를 해요. 이게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40분 통화를 하고 끝에 그렇게 끊죠.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만나서 하자고 그러잖아요. 이게 정말 유의미한 거예요.
이렇게 사귄 사람들은 평생을 가요. 늙어 죽을 때까지 친구예요. 벗인지는 몰라도 친구예요. 남자들은 필요한 얘기만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 필요하다고 하는 기준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도 자기 옆에 없어요. 왜? 필요한 걸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오는 대로 떠드는 게 대화거든요. 필요한 것만 따지면 소통이 안 돼요. 협의를 하는 거지. 협의와 소통은 다르죠. 아무튼 고치기를 꺼려하지 마라 그러려면 마음을 열어야 돼요. 뒤집어서 볼 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지나치고 나면 뭔가 반드시 고쳐야 돼요. 이 지나갈 과(過)가 잘못이 아니어도, 지나가고 나면 지나간 만큼 내가 생각했던 걸 고쳐야 돼요. 꼭 허물이 있어야만 고치는 게 아니고, 허물이 없어도 내가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시간이 경과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고칠 게 있는 거예요. 고치기를 꺼려하지 마라!
냅둬! 이렇게 살다 가게! 저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빙의라고 표현을 해요. 귀신에게 빙의 돼야만 빙의 된 게 아니라, 지나간 현재에 집착하고 있잖아요. 현재도 아니죠. 따라서 이미 지나갔으면 개정하기를 꺼리지 마라! 허물이 있다 없다 따지고, 나 잘못한 것 없는 것 같은데! 나 안 고칠래!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나갔으면 반드시 고칠 바가 있다는 거예요.
주충신(主忠信)했고! 능치기신(能致其身)했고! 부모 없을 때 능갈기력(能竭其力)했고! 현현이색(賢賢易色)했고! 다 했어요. 아무리 봐도 자기 스스로 돌이켜 봤을 때는 잘못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반성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늘 고쳐야 되는 거예요.
고치기를 꺼려하지 마라! 그래서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고, 시간 시간에 맞춰서 익히는 거죠. 학이시습(學而時習)인 거죠. 고치기를 꺼려하면, 배우기만 해서 쌓아놓는 꼰대가 되는 거죠.
내 시간이 바뀌었으면 그 시간에 맞춰서 고쳐야 돼요. 안 고치는 것 자체가 허물이예요. 모든 지나간 것은 나에게 적어도 허물이예요. 잘 잘못의 문제가 아니예요. 과(過)라는 것이 공과의 문제로 나중에 뜻이 바뀌기도 하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별개의 영역이에요.
내 이 시점을 살아서 오늘보다 내일에 같다는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어요. 뱀이 잘못해서 벗는 게 허물이 아니잖아요. 지나가 살았던 그의 과거잖아요. 그걸 허물이라고 그러잖아요. 허물이 있다면, 내가 지나가서 내 삶의 상황이 바뀌었다면 그 상황에 맞춰서 바꾸기를 꺼려하지 마라! 이런 얘기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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