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연중 제13주일]
루카 9,51-62
살아있다는 증거: 살릴 수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 나라를 전하지 않는 이들이 죽은 이들이란 뜻입니다.
살아 있지만 사람이 영적으로는 이미 죽어있을 수 있습니다.
좀비 영화 ‘웜 바디스’(2013)에서 인간 세상은 ‘인간-좀비-보니’의 세 부류로 나뉩니다.
좀비들은 인간을 먹습니다.
죽은 존재들입니다.
보니는 그렇게 지내다 인간성을 아주 상실한 지옥의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좀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좀비를 두려워하면 이미 그도 좀비입니다.
이 영화에서 한 남자 좀비는 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좀비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니 심장이 다시 뛰고 피가 생겨납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를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먹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산 사람은 사람을 살립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03회에서는 중1 딸 금쪽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는 친한 친구와는 서슴없이 음식을 먹고 말을 하지만, 친하지 않은 친구가 있으면
함께 빙수에 숟가락도 담그지 못하고 말도 하지 않고 손짓으로만 합니다.
이 일을 당하는 친하지 않은 친구는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가려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했는데 보안관 선생님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여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왔어야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절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버스를 탈 때도 입과 몸이 얼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탔다가 다시 내립니다.
심지어 커피도 한 잔 주문하지 못합니다.
엄마도 속이 타겠지만, 사실 이것은 제가 볼 때는 엄마한테서 왔습니다.
엄마가 불안증이 좀 있었던 것 같고 아이를 살리려 하기보다는 나부터 생각하는 말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학교 가서 말 못하면 엄마가 제일 힘든 거야, 그래 안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이것은 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엄마가 살려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도 불안증이 있어서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딸은 겪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모든 것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게 되었고 그렇게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존감 없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좀비에게서 좀비가 태어납니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좀비로 시작합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 내 피를 흘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를 만들어 우리 본성을 상승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좀비에서 인간이 되는 방식은 좀비를 인간으로 만들려고 두려움을 무릅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이 되려면 인간에게 먹히시기 위해 오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전하며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살려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리려는 사람이 산 사람입니다.
드라마 ‘굿 닥터’에 자폐성 장애 3급,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박시온이란 의사가 나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토끼를 잃고 형도 잃어 죽음의 고통을 잘 압니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어가는 이를 살리려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실력파 교수인 김도한이 박시온을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박시온에게 형처럼 애정을 가지게 되자
그도 이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이웃을 살리려는 삶입니다.
복음은 내가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살려면 생명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이의 생명이 나에게 흘러들어옵니다.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마르는 우물처럼 나에게서 생명이 나가지 않으면 나는 썩은 물이 됩니다.
심지어 다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게 하면 그 우물은 마치 뱀이나 독충이 우글거리는 우물이 됩니다.
실제로는 죽은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산 우물이 됩시다.
다른 이들이 내 우물에서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그래야 산 사람입니다.
성장은 피 흘림의 두려움이 없는 분을 사랑함으로써 나도 이웃을 살리기 위해 흘리는 피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6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열왕기 상권 19,16ㄴ.19-21
갈라티아 5,1.13-18
루카 9,51-62
<한없이 그윽하고 맑은 눈길, 아버지로서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담긴 미소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교황님!>
교황 주일을 맞아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혼란 속의 이 세상, 그 안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가 바쁘신 교황님의 건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몇 년 전 찰라같은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아직도 그 순간의 감동과 기쁨이 생생합니다.
당시 제가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받은 느낌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연세의 다른 어르신들에게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었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깊이 느껴졌습니다.
한없이 그윽하고 맑은 눈길, 아버지로서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담긴 미소 앞에 저는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잠깐 사이의 만남이 제게는 치유의 순간이요, 은총과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면,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즉위 6주년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교회나 수도원이 담안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의 끝, 변방으로 나아가도록 부단히 촉구하셨습니다.
지난 세월 교회가 약자들에게 저지른 과오와 실책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셨습니다.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교황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고 탈권위적인 행보를 취하고 계십니다.
극단적 청빈의 삶을 몸소 사시면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교회와 사회 앞에 온 몸으로 저항하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올 11월 중에 일본을 방문하실 계획이랍니다.
평화의 전도사이신 교황님께서는 원자폭탄 피폭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실 것입니다.
평소 핵무장을 강하게 반대하고 계시는 교황님께서는 피폭지에서 세계를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실 예정입니다.
일본 정부가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일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하지 말고, 이런 의미 있는 기회에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세월 일본이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는지 가슴을 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 쉬쉬하고 있었던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생체 실험 문제 등등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머리숙여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자위대라는 명목하에 은근슬쩍 군사대국화하려는 시도를 당장 그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영적 아버지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 용기와 실행력이 존경스럽습니다.
오랜 기도와 식별 끝에 정답이라고 확신하시면, 그 누구의 눈치를 보는 법이 없습니다.
소신대로 하실 말씀을 솔직히 말씀하시는 교황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올곧은 예언적 말씀을 실제 당신 삶으로 사시는 교황님이시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이민을 감행하다 익사한 채 발견된 젊은 아버지와 딸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며
미국 정부의 지나치게 강경하고도 비인간적인 이민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틈만 나면 이라크 방문에 대한 희망을 강력히 피력하셨습니다.
교황님에게 이라크와 이라크 백성들은 늘 안스럽고 딱한 존재, 어떻게든 작은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싶은 자녀로 깊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쟁, 미국의 공습,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로 인해 80년대 이후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화약고 같은 이라크가 언제나 교황님 눈에 밟혔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사항들이 하나 하나 이루어지기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길 걷는 마음>
2022. 06. 26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루카 9,51-62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길 걷는 마음>
길을 걷고자 한다면
길에게 마음을 다할 일이다
길 위의 걸음 붙잡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 빼앗기지 않고
아직은 희뿌열지라도
끝 모를 길의
마지막을 향하여
한걸음 또 한걸음에
온 마음을 실어
오롯이 길을 느끼며
내가 길이 되어
길이 내가 되도록
비틀거리거나 머뭇거림 없이
길을 걷고자 한다면
길 걷는 나에게 마음을 다할 일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