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 대사, 미 대사 최초로 광주 국립 5.18묘지 참배
5월단체 등을 중심으로 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주한미대사가 5.18국립묘지를 예고없이 돌연 참배해 논란이 일고 있다.
크리스토퍼 R 힐 주한미대사는 지난 16일 광주를 방문해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돌아본 뒤 5.18국립묘지를 방문했다.
주한미국대사관측에 따르면 힐 대사는 이날 오후 5시 30분경 광주비엔날레 리셉션 도중 "숙소인 담양리조트로 가는 길에 5.18 국립묘지를 들러 참배하고 싶다"고 밝혀 이날 오후 6시경 망월동 5.18국립묘지를 전격 방문해 30여분간 참배했다.
힐 주한미대사의 이날 5.18국립묘지 참배는 비공식적이었으며 당초 광주방문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같은 급작스런 참배로 인해 광주시나 518묘지관리사무소측을 비롯해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조차 대사의 518묘지 참배계획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미국대사관측은 "대사의 방문계획은 일정에 없었으며 대사 개인적 판단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안다"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 대사로부터 이날 돌연 참배를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개인적 판단'이라는 이유로 답변이 어렵다고 밝혔다.
또 "광주 비엔날레에서 대사께서 리셉션을 하시다가 갑자기 오시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번 방문은 비공식 일정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518묘지관리사무소 이형오 의전과장은 "대사의 경호를 담당한 관할경찰서로부터 오후 5시 40분경 전화로 통보를 받았으며 오후 6시경 대사께서 도착해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둘러봤다"고 답했다.
이과장은 "당초 20분을 참배할 계획이었는데 와서 보니까 남다른 감명을 받은 듯 해서 안내해 드렸다"면서 "영문과 병기돼 있는 사진 전시회같은 곳은 매우 꼼꼼히 확인했다"고 당시 대사의 참배표정을 이야기했다.
[2002년] 삼성전자 ‘나노 메모리’ 세계최초로 상용화 발표
메모리 반도체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기술 일류화, 메모리 제품군 복합화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제2도약을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16일 호텔신라에서 메모리 사업관련 내외신 기자감담회를 갖고 메모리 반도체 기술에서 꿈의 기술로 평가되는 90나노 D램 양산기술을 확보하고, 업계 최초로 2기가 NAND 플래시메모리 시생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메모리는 물론 전세계 반도체 산업에 큰 영향을 줄 『 반도체 기가 시대, 나노 시대 』 를 본격화했다.
이 날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정기술에서 마의 벽으로 인식되어온 0.10미크론을 뛰어넘는, 90나노 기술로 NAND 플래시 시생산 성공과 D램 양산 기술을 확보했다고 밝힌 것은 메모리 산업에서 나노 기술의 상용화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가 금번 발표한 2기가 NAND 플래시메모리로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4기가바이트 메모리카드를 제작 가능하며, 여기에 기존 음악 CD 70장이나 영화 비디오 테입 4편의 데이터를 대체 저장할 수 있는 대용량이다. NAND 플래시 메모리는 현재 디지털 카메라, 게임기, 캠코더 등에 디지털기기에 채용되고 있는데 수요가 년간 2배 이상 급증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삼성전자의 표준 사양으로 휴대폰에도 채용되기 시작했다.
NAND 플래시메모리의 등장으로 카메라의 필름과 PC의 FDD(플로피디스크) 그리고 소용량 HDD(하드디스크드라이브)까지 사라짐으로써 IT관련 전자기기의 모바일화 및 멀티미디어화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1998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 사망 ←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이자 예술원 회원인 혜산(兮山) 박두진 씨가 1998년 9월 16일 오후 2시 20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1939년 ‘문장’지에 ‘황현’과 ‘묘지송’으로 문단에 데뷔한 박씨는 1946년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첫 시집 ‘청록집’을 낸 이후 이들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박씨는 해방 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및 한국문확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는 등 한국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연세대, 우석대, 이화여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교수 등도 역임해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저서로는 시집 ‘오도’를 비롯해 ‘빙벽을 깬다’ 등 다수로 이밖에 수필집 ‘시인의 고향’ ‘산문선집’ ‘햇살, 햇볕, 햇빛’ 등도 남겼다. 박씨는 지난 1995년 신앙시집 ‘폭양에 무릎 꿇고’를 내는 등 노환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문학적 열정을 보였다.
박목월, 조지훈이 떠난 자리를 혼자 지키다 타계한 박두진은 격동기 한국사 속에서 60여 년 간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노래한 우리 시단의 거목이다./조선
[1983년]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 개통 ← 1983년 9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지하철 2호선 개통구간 노선도.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이 1983년 9월 16일 오전 10시 개통, 운행에 들어갔다. 이날 개통된 을지로구간은 을지로입구~을지로~왕십리~성수동을 잇는 8km로 1980년 2월 착공, 3년7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지하철 2호선은 총 48.8km가운데 동쪽 27.8km가 개통됐다.
을지로구간에는 을지로입구, 을지로3가, 을지로4가, 동대문운동장, 신당, 상왕십리, 한양대, 뚝섬역 등 9개역이 새로 들어섰다. 을지로구간 개통과 함께 시청앞~동대문운동장간 3.3km의 지하보도겸 지하상가도 동시 개통됐다. 지하보도에는 냉-난방시설과 환기시설이 완비됐으며, 수세식화장실도 갖춰졌다. 을지로구간의 도시가스 및 상-하수도관은 모두 지하에 매설됐다. 을지로구간은 모두 10개 공구로 나뉘어 10개 건설회사가 참여, 총공사비는 1천8백50억원이 들었다./조선
[1980년] ‘한국미술 5000년전’ 미국 보스턴에서 개막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우리 문화의 산물이 미국 보스턴에 선보이는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이 널리 알려지자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구미의 여러 나라들이 앞 다투어 우리의 문화재를 전시하고자 요청한 가운데, 우리문화의 전통과 우수성을 해외에 널리 알리고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재인식 시킴은 물론 국제 문화교류에 이바지 하고자 1979년 5월 1일부터 1981년 6월 14일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7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는 “한국미술 5000년전(5000 Years of Korean Art)”이 개최 되었다. 1976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의 도쿄[東京]·교토[京都]·나라[奈良]에서 전시 되었던 작품들을 토대로 미국인들의 관심과 미의식을 충족시켜 줄 뿐 아니라 우리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줄 금속공예 회화부분을 대폭 증강한 총354점에 이르는 소중한 미술 문화재들이 출품되었다.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시애틀, 시카고, 클리블랜드, 보스턴, 뉴욕, 캔자스시티 등 미국 7개 주요도시를 차례로 순방하였는데 현지 반응은 물론 외국 매스컴의 큰 반응을 이끌었다. 한국미술 5천년전을 찾은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한국미술의 우수함에 경탄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방의 작은 나라이지만, 대한민국의 5천년이 넘는 무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문화에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1977년] 마리아 칼라스 사망 ← 오페라만큼이나 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마리아 칼라스
‘오페라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리아 칼라스. 그가 1977년 9월16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54세로 쓸쓸하게 숨졌다.
후두부분에 생긴 피부근염이 사인(死因)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를 떠올렸다. 오나시스가 9년간에 걸친 칼라스와의 사랑을 접고 고(故)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1968년)한 뒤부터 칼라스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긴데다, 한때는 오나시스를 증오했지만 막상 그가 죽자(1975년) 은둔과 실의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그리스계 이민자의 딸로 미국에서 태어난 칼라스가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당시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제왕이었던 툴리오 세라핀의 눈에 들면서였다. 오페라광이면서 부호였던 30년 연상의 남편을 만난것도 행운이었다.
미성도 아니고 어딘지 쉰듯한 목소리를 가진 칼라스가 ‘세기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까지에는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집념과 노력이 뒷받침됐다. 칼라스는 무대를 위해서라면 몸무게를 30kg 이상 줄이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준비가 미흡하면 욕을 먹으면서까지 무대를 포기했던 완벽주의자였다. 한 연출가는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오페라 역사에서 기원전(BC)이었다는 말로 그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1975년] 파푸아뉴기니, 호주로부터 독립
말레이어(語)로 ‘짧은 머리털’을 뜻하는 파푸아는 1526∼1527년 뉴기니섬 해안을 항해한 포르투갈인(人) 탐험가 J. 메네세가 뉴기니 남해안에 붙인 이름에서 유래한다. 당시 원주민은 파푸아인과 멜라네시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두 원시적 농경에 종사해 문명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166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한 이래 18세기에는 유럽 열강들이 앞을 다투어 이 해역의 조사에 나섰다. 1828년 네덜란드는 뉴기니섬의 서부를 병합, 192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특별주로 만들었다.
19세기 말에는 독일도 이 해역에 진출, 1884년 이 섬의 나머지 동반부 중에서 북부를 병합하였다. 영국은 이에 대항하여 같은 해에 남부를 병합한 뒤, 1906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준주(準州)로서 파푸아라고 개칭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구독일령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이 뉴기니섬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일본의 패전 후 194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UN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1973년 12월에는 전지역이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1975년 9월 영국연방 국가로서 독립하였다. 1977년 6월 독립 후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된 바 있다. /naver
[1965년] 작곡가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사망 ← 안익태의 초상화
애국가를 작곡한(1936년) 안익태가 1964년 9월 16일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사망했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국립음악학교서 첼로를 전공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대와 신시내티 음대서 첼로와 작곡을 배웠다. 193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서 사사했다. 1940~1950년대 유럽과 미주 각 지역의 200여개 오케스트라를 지휘, 명성을 떨쳤다.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스페인 국적을 얻어 말년에는 주로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1957년 귀국해 마지막 작품 '애(哀) 강상(江上)의 논개'를 지휘했고 1961~63년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했다. 오늘날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안익태거리가 있다. /조선
[1950년] 국군ㆍ유엔군 낙동강전선 총반격 ← 북한군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왜관철교를 끊어버리고 낙동강을 사이에 둔 채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미 제5기병연대의 전초병들(1950. 8. 5.).
6ㆍ25 발발과 함께 후퇴를 거듭해온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은 8월5일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한 북한군은 부산까지 점령할 태세로 8월8일부터 총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은 왜관∼창녕∼마산선을 담당했고 한국군은 왜관∼낙정리(의성군)∼영덕선을 지켰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치열한 전투에 이어 9월4일부터는 영천에서 밀고 당기는 대혈전이 시작됐다. 영천은 대구ㆍ포항ㆍ경주ㆍ안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로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영천이 뚫릴 경우 미군이 한국군 2개사단과 민간인 10만명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계획을 극비리에 세워놓을 만큼 영천전투는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그러나 9월13일 우리 군이 마침내 영천을 점령함으로써 계획은 취소됐고 대역전극의 발판이 마련됐다. 절체절명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날, 7만5000명의 유엔군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9월15일 인천으로부터 낭보가 전해지자 유엔군과 우린 군은 총반격을 시작했다. 9월16일이었다./조선
[1950년] 게이츠(Henry Louis Gates, Jr.) 출생 ← Henry Louis Gates, Jr.
"나는 나 자신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만족스럽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프리카 문화 연구가이면서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연구가이기 때문입니다. " - 헨리 L. 게이츠
게이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의 영향력 있는 대변자이자 학자이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키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0~71년 대학의 장학금을 받아 아프리카 15개 나라를 두루 여행했으며, 1973년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에서 석사학위(1974)와 박사학위(1979)를 받았다. 그는 클레어 칼리지에서 나이지리아 작가인 올레 소잉카의 지도를 받았는데, 요루바 문화에 대한 소잉카의 관심은 그후 게이츠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대학의 교수를 거친 뒤 1991년 하버드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아프리카계 미국인학과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게이츠는 19세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잊혀진 글,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들이 쓴 노예 이야기를 발굴한 '문학적 고고학자'로서 처음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이론으로서의 '말장난' 개념을 도입해 아프리카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을 검토했다. 그는 흑인과 흑인문학에 관한 이론과 연구가 담긴 평론집을 출간하는 한편, 힙합 음악이나 정치 등을 다룬 비평도 다수 발표했다. 주요 평론집에 <흑인 문학과 문학이론 Black Literature and Literary Theory>(1984)·<'인종', 글쓰기, 차이 'Race', Writing, and Difference>(1986)·<흑인 읽기, 페미니스트 읽기 Reading Black, Reading Feminist>(1990)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36년] 소설가 심훈 사망 ← 심훈 선생
소설가 심훈이 그의 영원한 대표작이 된 <상록수>의 출판관계로 상경했다가 1936년 9월 16일 불의의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01년 서울 노량진 흑석동에서 아버지 청송 심씨 상정(相珽)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다. 1919년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항저우[杭州]의 즈장[之江]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1930년 신여성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1932년)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생활에 전념한 결과 <영원한 미소> <직녀성>(1934) 그리고 <상록수> 등 세 장편을 내놓았다.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고,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심훈 선생을 2001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소설 <상록수>의 작가인 고 심훈(본명 심대섭・1901〜1936) 선생이 모교인 서울 경기고에서 제적된 지 86년 만에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경기고는 2005년 7월 4일 “고인이 독립운동가와 문학가로서 높은 업적을 남긴 점을 높이 평가해,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명예 졸업장 수여식은 6일 경기고에서 열린다. 1915년 경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에 입학했던 심 선생은 4학년에 재학하던 중 졸업을 한달 가량 앞두고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시위에 앞장섰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으며 학교에서 제적됐다./한겨레
[1893년] 헝가리의 생화학자 센트 죄르지(Szent-Györgyi, Albert, 1893~1986) 출생
1937년 세포에서 일어나는 영양소의 산화과정에서 작용하는 특정 유기화합물, 특히 비타민 C의 역할을 밝힌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27, 1929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928년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있는 마요 재단에서 연구를 했다. 그는 식물의 즙과 부신(副腎) 추출물로부터 자신이 헥수론산(지금은 아스코르브산으로 알려져 있음)으로 명명한 유기 환원제를 발견·분리했다. 그는 4년 뒤 헝가리 세게드대학교(1931~45)에서 1907년 A.홀스트와 A.프뢸리히가 발견한 항괴혈성(抗壞血性) 비타민인 비타민 C와 자신이 발견한 헥수론산이 같은 물질임을 입증하는 데 기여했다. 그후 그는 탄수화물의 분해생성물을 이산화탄소, 물, 그리고 세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른 물질들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기화합물로 연구 방향을 전환했다. 그의 연구는 2년 후 한스 크렙스가 탄수화물이 완전히 분해되어 다른 물질로 전환되는 크렙스 회로를 설명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근육의 작용에 관한 생화학적 연구에 몰두하여 근육속에서 그가 액틴이라고 하는 단백질을 발견했으며, 액틴은 근육단백질인 미오신과 함께 근수축에 관여한다는 사실과 아데노신삼인산(ATP)이라는 화합물이 근수축이 일어날 때 필요한 직접적인 에너지원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1947년 미국으로 이민한 후 바로 매사추세츠 주의 우즈홀에 있는 근육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세포분열과 이를 통한 암의 원인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베트남에서의 미군정책에 관한 격렬한 반대자로 〈미친 유인원 The Crazy Ape〉(1970)이라는 시사평론을 썼는데 이것은 세계 정치지도자들 및 인류생존의 전망에 관해 비판적이고 염세적이었다. 과학저서로는 〈산화, 발효, 비타민, 건강과 질병에 관하여 On Oxidation, Fermentation, Vitamins, Health, and Disease〉(1940)·〈신체와 심근수축의 화학생리학 Chemical Physiology of Contractions in Body and Heart Muscle〉(1953)·〈분자생물학 입문 Introduction to a Submolecular Biology〉(1960)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88년] 핀란드의 작가 실란페(Frans Eemil Sillanpaa) 출생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실란페(1888.9.16~1964.6.3)는 핀란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헬싱키대학교에서 자연과학을 배우다가 문학으로 뜻을 바꾸어 귀향한 후, 1916년 S.M.살로메키와 결혼하고, 그해 처녀작 “인생과 태양, Elama ja aurinko”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핀란드 독립선언에 잇달아 일어난 내란에서 취재한 “경건한 고뇌, Hurskas kurjuus(1919)”로 지위를 굳혔으며, 다시 “요절(夭折), Nuorena nukkunut(1931)”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은 시골 고가(故家)의 병약한 소녀 시리아가 슬픈 운명을 감수한다는 줄거리로, 자연과 심리를 목가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핀란드 문학의 독자적인 낭만적 사실주의에 청징(淸澄)한 효과를 더하였다. 1945년 발표한 그의 마지막 작품 “인간의 미와 비참”은 그의 특성을 집대성한 종합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핀란드인 다운 자연관조와 사실주의, 신비주의의 합체(合體)라는 관점에서 국민적 작가의 대표자이며 또 동시에 M.발타리(Mika (Toimi) Waltari, 1908. 9. 19 ~ 1979. 8. 26)와 더불어 국제적인 작가로 유명하다.
[1879년] 독립운동가 정이형(鄭伊衡) 출생
1879(고종 16). 9. 16 평북 의주~1956. 12. 10.
일명 원흠(元欽)·이용현(李用賢). 호는 쌍공. 1922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했다.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발전될 때 사령장 신팔균(申八均)의 부관이 되었으며, 1924년 제5중대장을 겸임하여 일선에서 활약했다. 1925년 3월 김석하(金錫夏)·김정호(金正浩)와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했는데, 그는 대원 6명을 이끌고 여해주재소(如海駐在所)를 습격했다. 1924년 11월 대한통의부가 의성단(義成團)·광정단(匡正團) 및 지방자치단체들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로 조직되자 사령장 지청천(池靑天)의 부관 겸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1926년 3월 지린[吉林]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독립운동의 핵심체를 조직하기 위해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석회의가 개최되자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고, 4월 5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조직되자 위원이 되어 정책수립 및 군사활동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7년 3월 1일 군자금 모집을 위해 지린 성 창춘[長春]에 거주하는 황도종(黃道宗)을 방문하러 가던 도중 하얼빈[哈爾濱]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9년간 복역하다가 8·15해방으로 출감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46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 김대건 동상
1846년 9월 16일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교 신부인 김대건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순교하는 등 그는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랐다. P. 모방 신부에 의해 조선인 성직자 양성 대상자로 선정되어 라틴어 등 기본소양을 쌓았으며, 1836년 12월 2일 한국을 떠나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다. 1844년 8월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를 통해 입국했다. 그는 다시 한양으로 잠입해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으며, 1846년에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1846년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인 신부를 처형한 사건을 따지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크게 놀란 조선정부가 그의 처형을 결정함으로써 김대건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하나로 선포되었다./브리태니커
[1810년] 멕시코 독립운동 선포
1810년 9월 16일 멕시코의 돌로레스 교구 사제인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스페인에 대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이달고는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톨릭 사제로, 스페인 식민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비밀계획에 관여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스페인 당국에 발각되었지만 즉각 이에 대응했다. 그는 사람들을 무장시킨 뒤 격려연설에서, "과달루페의 성모여, 영원하라! 나쁜 정부와 가추피네스('말에 박차를 가하는 놈들'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면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산미겔에서 시작한 독립운동에 수천 명의 인디언과 메스티소들이 동참했으며, 이는 곧 상층계급에 대한 일반대중의 사회적·경제적 전쟁으로 번져나갔다. 그들은 곧 수도 점령을 목전에 두었으나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1811년 1월 17일 칼데론에서 패한 이달고는 미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북쪽으로 몸을 피하던 중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달고의 이름은 대부분의 멕시코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돌로레스의 외침'이 있었던 9월 16일은 멕시코의 독립기념일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745년] 러시아의 군사령관 쿠투조프(Kutuzov, Mikhail Illarionovich) 출생 ← 쿠투조프
1745. 9. 16 ~ 1813. 4. 28
본명은 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을 격퇴했다. 14세 때 하사로 러시아군에 입대해 폴란드(1764~69) 및 투르크(1770~74)와의 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다. 크림에서 6년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1784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1774년 심한 머리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1787~91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 이후 여러 가지 외교·행정직을 맡았으나 1802년 불신을 받게 되자 고향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3년 후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대항한 제3차 동맹에 가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다시 불렀다. 1805년 11월 11일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알렉산드르의 압력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12. 2)에 가담해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곧 그를 몰다비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투르크에 몇 차례 패배를 안겨준 뒤 1812년 5월 28일에는 러시아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 - 투르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부던레부쿠레슈티 조약).
6월에 나폴레옹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8월 9일 당시 육군원수였던 그는 전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날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군사력을 아껴두기로 결심하고 프랑스군 앞에서는 후퇴하면서 소규모 전투만 치르면서 전투를 제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큰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전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나 쿠투조프는 병력의 반 이상을 잃고 남동쪽으로 후퇴, 결국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락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실패하고,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10월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군이 비옥한 남쪽 행로로 가지 못하게 차단했고(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10. 24), 와해 지경에 있던 프랑스군을 침입 당시 그들이 폐허로 만들었던 길로 도주하게 함으로써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적을 몰락시켰다. 나폴레옹군이 베레지나 강을 건넌 뒤(11. 26~28) 그는 폴란드와 프로이센까지 추격해 들어갔고 프로이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브리태니커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영국 출발
메이플라워호는 무게 180t,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다.
1620년 8월 15일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으나, 같이 출항했던 스피드웰호가 누수(漏水) 고장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 같은 해 9월 16일 단독으로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였다.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灣)을 경유하여 11월 2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補給)을 받은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플리머스로 명명하였다. 이 선박은 이듬해 봄까지 플리머스항에 정박했다가 4월 5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naver
[1597년] 이순신 장군 - 명량대첩(鳴梁大捷)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왜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 ·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병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55척의 왜선이 서진(西進)하면서 전위(前衛)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야반(夜半)에 이순신이 진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적함대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병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병선 31척을 무찔러 적함대는 패주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제해권(制海權)을 회복하였다. /naver
그밖에
2004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전격 퇴진, 후진타오가 승계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종료
1998년 주한미군사령관에 페트로스키 중장을 임명
1993년 북한. 사정2천km 미사일 신형 ‘노동2호’ 개발
1982년 마르코스 필리핀대통령 미국방문
1982년 사브라-샤틸라 학살
1982년 북한 김일성 중국 방문
1981년 이집트, 소련기술자 1천5백명 추방
1980년 금성사, 국내처음으로 태국과 TV생산기술 수출계약 체결
1978년 이란 타바스 지진으로 2만5천여명 사망
1974년 검찰, 밀수보석 거래 상류층 부인 35명 기소
1974년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
1973년 34세 미국여인 6쌍동이 제왕절개 후 분만
1970년 양산군서 버스추락. 12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4년 7·29 태풍으로 조난됐던 어부 219명 북한서 송환
1963년 말레이지아연방 발족
1961년 美 '네바다'서 두번째 지하핵실험 실시
1958년 미국잠수함서 유도탄 발사에 성공
1955년 아르헨티나 육-해군 무장폭동
1950년 북대서양이사회에서 프랑스-독일의 재군비를 반대
1947년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
1945년 소련정치국 38선이북 군정 공표
1944년 소련-몽고 휴전협정 조인
1940년 미국, 선발징병법 성립
1939년 일본-소련 정전협정
1927년 중국 국민당 대동단결 성립
1908년 제너럴 모터스사 설립
1882년 박영효 수신사, 일본서 최초의 태극기 게양
1736년 독일 물리학자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사망
1402년 조선시대 신분 증명서인 호패제도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