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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젊은 작가 한 분과 티 타임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느라 어둑해지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그런데 끝 무렵에 그가 한 말이 내 마음에 덜컥 얹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체기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작가가 되기 힘들 거예요.” 다음 말이 궁금해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면 삶의 고통이 다 하나님 뜻이라고 믿잖아요. 분노도, 슬픔도, 괴로움도 다 삭여 은혜로 치환해 버리지 않나요? 그래서 점차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부재가 생겨요. 그럼 어려워져요. 글쓰기가…”
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글쓰기에 치여 사는 목회자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설교, 성경 공부 원고를 쓰느라 정신없이 살아야 했다. 그 준비 과정이 너무 힘들어 내가 글쓰기라는 불치병을 앓는 환자 같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 봤다. 이런 상상력의 빈곤과 부재에서 오는 펜 끝의 머뭇거림을 벗어나려고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그러다 우연히 난 한 화가의 그림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져 그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빈센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그림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달리는 기차의 경적 소리, 뭉개 구름의 꿈틀거림, 노란 밀밭의 거친 바람 소리, 새벽녘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빈센트에게 가자고 속삭인다. 그런 그가 그립고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듣고 싶어 두 권의 책을 사고 말았다. Van Gogh The Life (Steven Naifeh, Gregory White Smith)와 The Complete Paintings Van Gogh (Taschen)이다.
냉정과 분노 그리고 열정
빈센트의 이야기는 그와 그의 어머니와의 해소되지 못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빈센트는 훗날 그의 어머니를 냉정한 여자라고 단정하였다. 빈센트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그녀의 차가움은 어디서 왔을까. 빈센트의 어머니 안나는 유럽의 잔인한 종교 전쟁들, 각지로 퍼진 혁명과 각종 전염병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은 가족의 생존자였다. 게다가 친언니의 간질 병력과 빈센트 사촌들의 정신 병력도 목격하였다. 이 불행은 곧 자기 자녀들에게도 나타났다. 첫아들을 바로 잃고 그 후로 낳은 6형제 중 빈센트를 포함해 4명이 정신질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는 평생 불행이 닥칠 것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처럼 살았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안나가 빈센트를 위해 한 최선은 종교적 통제였다. 빈센트가 목사관 (빈센트의 아버지는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밖에 나가서 가난하고 거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규칙을 정하여 의무화하였다. 그 규칙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자책과 회개의 기도를 하게 하여 용서를 받게 하였다. 이유 없이 평탄한 삶이 불편했는지 자주 빈센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삶이 아무 일 없이 잘되는 것은 신의 가호가 아니야. 그래서 이를 드러내어 기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지나친 염려와 통제로 애정이 결핍된 빈센트에게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자, 그는 자기감정을 격렬한 분노로 태워버리는 아이가 되어갔다. 어머니 안나의 차가움과 아들의 뜨거운 분노는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원색의 강렬함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빈센트를 교양 있는 지성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던 안나는 일곱 살의 어린 그를 가톨릭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예상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집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다가 아이들의 귀를 막아 버리거나 소리를 지르다 퇴학을 당해 버렸다. 빈센트가 열한 살이 되자 빈센트의 부모는 그를 다시 한 개혁 교회의 기숙학교로 보냈다. 이때 빈센트는 자기의 심정을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고 밤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리스도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역시 심하게 담당 교사에게 저항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빈센트의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이 있었다. 그는 자연이 드러내는 색채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의 그림에 꽃과 풍경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관심 또한 어머니 안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안나는 목사관의 정원에 각종 꽃을 심어 가꾸었고 그 꽃으로 집안을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빈센트는 안나에게 배운 정원 가꾸기, 꽃꽂이와 수공예, 실내 장식에 열정을 보였다. 좀처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목사관을 벗어나 들로 나가 온갖 풀과 벌레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전문가적 경지에 이르렀다. 주위에서는 빈센트가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거라고 할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훗날 그가 그림의 모티프를 얻기 위해 계속 따듯한 남부 프랑스를 옮겨 다닌 것도 역시 자연에서 강렬한 빛과 찬란한 색을 찾기 위해서였다.
빈센트는 자연을 보면 행복과 창의력이 샘솟아 먹는 것도 잊는다고 할 정도였다.
빈센트는 훗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란색과 푸른색, 붉은색과 초록색의 대비를 통해서 무시무시한 인간의 감정과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올 때마다 느껴지던 안나의 차가운 눈빛, 애정이 결핍된 아이 빈센트의 빈 마음을 따듯하게 채워주던 자연의 빛과 색채들은 훗날 들이 되고 꽃이 되어 작품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었다.
결핍을 채워준 지성과 신앙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그의 열정은 사실 지나친 집착에 가까운 병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좌절과 희망의 끝을 잡고 살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의 열정은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온전치 못한 정신을 달래며 10년 동안 900여 점의 작품과 1,000여 점의 스케치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의 지성 때문이었다.
그는 독서와 글 쓰기에도 광적인 열정을 보였다. 그가 글을 몰랐을 때부터 빈센트의 어머니는 그를 책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이 시절 그의 어머니가 자주 읽히고 외우게 했던 안데르센의 동화 ’‘The Story of Mother’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다.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죽음으로 잃는다. 그 어머니는 죽음이 데리고 간 아이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난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고 두 눈을 빼 주고 검은 머리까지 백발로 바꾸는 희생으로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를 데리고 간 죽음의 신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이 살리기를 포기하고 그 아이의 죽음을 택하고 만다. 죽음의 신이 보여준 아이의 미래가 너무나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빈센트를 향한 어머니 안나의 불안한 애착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책으로 어머니는 자기 마음을 보여주고 빈센트 역시 그 텍스트를 이해하여 글과 그림으로 해소해 내는 지적인 작업을 할 소양이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빈센트의 글쓰기를 보면 그의 독서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자기의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들은 매우 간결하고 자기만의 창의적 문체로 쓰였다. 이 편지들은 대체로 두세 문장을 넘어서지 않는다. 길게 늘어놔야 할 내용을 새로이 단어를 조합하여 더 이상 가감이 필요 없게 글을 써냈다. 자기 그림에 대한 설명도 간단하다. 자신의 상상력들이 어떻게 색으로 입혀져 붓의 터치로 발현되었는지 시처럼 보여준다. 빠르고 두터운 그의 붓질처럼 그의 편지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 같다. 이런 그의 글이 담긴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가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하니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가 지성인이었다는 근거는 분명하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작가가 150여명이나 되고 언급한 책도 300권 정도 된다. 책에서 인용한 문학적 표현은 800여개나 된다. 그는 고전에서 당대의 작가들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어 나갔다. 러시아, 유럽, 미국 문학가들의 시와 소설 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 서적도 탐독하였다 . 따라서 시대의 흐름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밀 졸라, 볼테르, 빅토르 위고, 모파상, 찰스 디킨즈 등의 근대 문학을 통해 절대적 신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계몽 시대 조차도 저물어 세속화로 가는 역사적 흐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상파 화가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흐름도 이론적으로 잘 꿰뚫고 있었다. 당시 자연을 그대로 그리거나 자연이 주는 인상만을 표현하던 기교적인 화가들 너머 화폭에 자기의 감정과 정신을 담아 내려 한 것도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현대적 지성 때문이었다. 그의 단순하고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질, 그리고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색과 선을 단순화 시킨 것을 보면 이미 야수파, 입체파 화가들의 설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현대 화가들의 선배 화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빈센트의 지성보다 더 압도적으로 그를 지배한 것이 있었다. 신앙이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세월을 앞서 갔지만 신앙만큼은 오히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왜 그랬는지 그가 탐독했던 책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가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성경이었다. 특히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속 예수의 삶을 심히 동경하여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또 르낭의 예수전,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존 번연의 천로역정 같이 지난하고 원시적인 제자도에 관한 책들을 읽어 나갔다.
결국 주를 향한 지나친 헌신이 그를 사로잡아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의 눈에 산업혁명 이후 비참하게 살아가는 런던의 도시 근로자들, 시커먼 탄광의 광부들, 가난한 농부들이 어른거려 사치스런 그림 거래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급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의 이런 점을 단지 무모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가 자연에 자기 마음을 불어 넣어 화폭에 담은 상상력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는 역시 약자들의 고통을 자기의 마음에 그려 넣을 줄 아는 공감의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캔버스에 그려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그의 신앙은 그의 결핍을 채우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밀어주었다.
슬픔과 기쁨의 싸움
빈센트는 17세 이후 파리와 런던에서 꽤나 잘 나가는 그림 거래 상으로 지냈다. 미술사와 비평에 해박하여 매우 인기있는 상인이었다. 그런 그가 직장에서 쫓겨난 이유는 갑자기 생긴 목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때부터 간질과 발작, 분노 그 뒤에 찾아오는 참담한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갔다.
빈센트의 미친 듯한 열정은 목회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목회자가 되기에 필요한 라틴어, 그리스어 학습 과정을 견디지 못하여 정식 목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냥 바로 할 수 있는 벨기에의 탄광 지역에 무급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소원한 대로 헌신적인 목회를 하였다. 자기의 사택을 탄광 근로자들에게 내주고 먹을 것조차 나누어 최소한의 식량으로 살았다. 잠을 줄여가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부족한 수면과 영양 탓에 그의 정신은 더 나빠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를 파견했던 선교 단체의 감독관은 빈센트를 보고 도저히 선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품위가 훼손되었다고 보고 그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래도 목회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빈센트는 몇 번의 시도를 더 해 보지만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진 그를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난 후 빈센트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 그리기밖에 없었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화가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을 하며 인정받지 못하고 팔리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려가며 동생에 대한 채무감만 쌓이는 긴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하였다. 이 시절에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우울, 고뇌, 무력감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써 그의 심정이 어떤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독서와 목회에 미친 듯한 열정을 보였던 것처럼, 빈센트는 그림에도 온 힘을 다하였다. 정신이 온전할 때 힘을 내어 집중하여 빠르게 그림을 그려 내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 확신, 힘, 격렬함, 열정 같은 단어들을 써서 우울감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단호하게 표현 하였다. 이 좌절과 희망, 슬픔과 기쁨의 교차를 빈센트는 격렬한 고뇌, 적극적 우울 같은 상반된 단어들을 조합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파랑과 노랑을 대비시킨 그의 그림같이 슬픔과 기쁨의 양가 감정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는 지독한 우울감을 몰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마치 희망이라는 무기로 좌절을 무찌르는 전사 같았다. 빈센트의 삶의 모토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찾아오는 근심 속에서 의도적으로 기쁘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이런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에 몰두하였다. 화가 생활 10년간 이틀에 한 점씩 그렸으니, 그가 얼마나 쉼 없이 전쟁하듯이 그림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어두운 색을 쓰는데 찬란하게 빛나고, 그 붓질이 거친데 힘찰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찬란한 패배자
이 글을 쓰다 오래전 본 영화 Loving Vincent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다. “살아봐, 삶은 어떤 강한 사람도 무너뜨려 버려.” 또 가수 Don Mclean의 노래 ‘Vincent’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이제 난 이해해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을, 당신이 제정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최근에 한 종합 격투기 선수의 은퇴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그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 궁금했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선수는 종 칠 때까지 몰매를 피할 길이 없다. 그래도 ‘그래, 맘껏 더 때려봐’ 하며 더 투지를 불살라야 비참해지지 않는다. 신앙인은 삶의 고통을 피해 패배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는 선수가 아니라 맞을수록 삶의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폭력을 쓸 수 없으니 남은 무기는 신앙, 지성, 의지, 열정, 말, 눈빛 같은 맷집밖에 없다. 내가 본 그 격투기 선수는 사실 두 번이나 챔피언에 도전하여 무참하게 꼬꾸라졌다. 심지어 팔이 빠진 상태로 싸우기까지 하였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도 비참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를 감히 누구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했다. 찬란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그의 말년에 더 이상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생 레미 정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시절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끝까지 얼마나 잘 싸웠는지 보여준다. 빈센트는 정신 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 밤이면 찾아오는 죽음의 충동을 견디고 눌러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 것 같다. 그러다 슬픔이 걷히고 기쁨이 찾아올 때쯤 병원의 창문 너머 비치는 새벽녘의 그 빛나는 별들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밤의 좌절과 새벽의 희망의 골은 너무나 깊어 그를 지치게 하여 헤어 나올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빈센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을 스스로 마감하였다. 별까지 걸어가고 싶어 했던 그의 소망대로 말이다.
이제 글쓰기에 지친 나를 불러낸 빈센트에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을 큰 실패자라고 부르지. 평생 거절당하고 목회자로도 실패하고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하고(평생 그림 한 점 판매했다) 끝내 그렇게 갔으니. 그런데 빈센트 그대는 원하던 대로 살았어. 근심하는 자였지만 기쁨으로 이겨내려 하였고 가난한 자였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없는 자였으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떠났으니 말이야. 그대는 그렇게 살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했지.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다 빼앗아 버리셨다고는 하지 않을게. 그리 살면 얼마나 할 얘기도 많고 그릴 것도 많겠어. 나같이 메마른 사람들은 누구나 그대처럼 살아 보기를 꿈꿀 거야. 정말 고마워 빈센트, 어떻게 살아야 어떤 글이 써지는지 알려줘서. 그러고 보니 그대는 참 찬란하게 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