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흙의 사랑법
-이정원(1954~ )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칫독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독안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네
▶ 첫눈
―박성우(1971∼ )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 눈이 오지 않는 나라
ㅡ노향림(1942~ )
아직
눈이 오지 않는 나라
이쪽에는
침엽수들이 언 손을 들고
쩔쩔맸다.
창문이 덜컹댔다
열어놓은 꿈속으로
눈이 들이치고
사람들은 스스로 녹았다
저마다 가슴 안에 감추어 둔
뜨거운 속말을
스스로 녹은 언어를 흘리며
사람들은 깊은 잠 들었다
잠 속에는
머리와 머리를 맞댄 눈들이
몰려 있다
내일 혹은
그 다음날 새벽에 내릴
첫눈을 위하여
▶ 밥상 앞에서
―박목월(1916∼1978)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예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
▶ 12월
(박재삼 1933-1997)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 冬天(동천)
서정주(1915~2000)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북치는 소년
김종삼(1921~84)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1961~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카페 게시글
詩 읽 는 행 복
다시 읽고 싶은 詩 ▶ 흙의 사랑법 외
청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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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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