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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Scene 05. 빛바랜 오스만 제국의 개혁- 탄지마트와 입헌혁명
■ 탄지마트
- 179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가 두차례 이집트를 공격하고 카이로를 점령한 뒤, 영국과 오스만 연합군에게 쫓겨날 때까지 3년 동안 이집트에 머물렀다. 유럽의 군사력, 기술과 사상은 상상초월 높은 수준이었기에, 이집트인들은 이 기간 동안 이슬람의 우월성과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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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제국은 정체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유럽 국가들의 힘을 목격했다.
-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개혁 정책(1839~1886년) : 1839년 11월 3일 ‘귈하네(장미의 방) 칙령’
칙령의 핵심은 유럽의 국민국가들처럼 오스만 제국을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으나, 종교 공동체 단위로 자치권을 인정한 밀레트 제도 탓에 술탄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갖지 못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만 제국 내부는 반오스만 정서가 강해, 분리주의 운동을 무마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신민들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평등을 강조했다. 기독교나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까지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 탄지마트의 의도는 훌륭했으나, 무슬림과 비무슬림간의 차별을 없애겠다는 선언은 기득권 세력인 무슬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1840~185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 각 지역에서 종교 및 민족 간 충돌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 발칸 반도에서 많은 정교회 희생자들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정교회 신민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에 군사 행동을 개시해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이 개입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1856년 오스만 정부는 크림전쟁을 계기로 오스만 내정에 유럽국가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개혁칙령을 발표했다. 골자는 정부의 관직이나 교육 및 병역을 비무슬림 신민에게 완전히 개방한다는 것으로, 보수 이슬람 종교계와 무슬림 신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 차관에 발목 잡힌 개혁
- 이후 오스만 정부는 더 이상 무슬림 대중의 민심과 정면으로 위배된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개혁 추진 방향은 사상이나 제도 개선보다 경제성장과 복지 확대 등으로 바뀌었다.
- 탄지마트로 군비 지출이 증가하고 대규모 건설사업까지 추진하면서 정부가 엄청난 재정 압박을 받았다.
- 크림전쟁 중인 1854년 최초의 차관을 도입한 이래 16차례에 걸쳐 총 2억 2000만 파운드의 외채를 도입했다. 외채에 대한 부담은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결국 1876년 오스만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말았다. 이 부채는 훗날 터키공화국이 물려받아 1954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갚게 된다.
- 대외채무가 늘면서 오스만 정부는 서서히 외세에 잠식당했다.
■ 헌법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다
- 탄지마트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기존의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대신할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해 신식교육을 실시, 새로운 신문과 잡지, 서적 출판이 급증, 그 결과 과학지식과 계몽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등장했다. 지식인들은 헌법과 의회제도 등 강력한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 술탄 압둘아지즈가 지식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신식군대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 세력은 압둘아지즈를 몰아내고 무라트 5세를 새로운 술탄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무라트 5세는 질병으로 3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동생 압둘하미드 2세가 술탄이 됐다. 그는 청년오스만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입헌군주제 도입 요구를 받아들였다.
- 제1차 입헌혁명 : 1876년 12월 23일,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오스만 제국 최초의 성문헌법을 공포, 1877년 3월에는 오스만에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최초의 의회가 열렸다.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오스만 신민의 참정권과 평등권을 명시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권 최초의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다.
- 그러나 발칸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를 빌미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비롯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 슬라브 민족주의 독립군들과 전쟁을 벌여 크게 패하고, 발칸 반도를 비롯한 동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제국의 패배를 의회 탓으로 돌려 1878년 2월 14일 의회를 해산시켰다. 의회가 사라지면서 사실상 입헌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오스만 정부는 의회 해산에 저항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술탄은 다시 전제군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 폐허 속의 희망
- 엄청난 대외채무로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국가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전쟁에서 패하여 영토마저 줄어들었다. 북아프리카는 유럽 강대국이 차지하고, 이집트와 발칸 반도는 독립해 떨어져 나갔다.
- 탄지마트가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신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정교일치 사회의 한계를 인식하고,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전제군주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목표도 문명했다. 훗날 터키공화국 건국의 주역인 무스타파 케말도 그런 지식인들 중 하나였다.
-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장교들은 1908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에 입헌군주제를 도입해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해체될 때까지 입헌군주제와 의회제도를 유지했다.
- 오랜 기간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아온 아랍인들도 더 이상 이슬람권을 대표하지 못하는 오스만 제국 대신 아랍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또한 서구의 문화가 들어와 오염된 이슬람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런 요구를 구체화한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 안에서 가장 처음 일어섰다.
Scene 06.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근본주의 열풍- 와하비즘과 사우드 가문
■ 고집쟁이 신학자, 야심가를 만나다
-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1703~1792) : 그가 주장한 이슬람 종교개혁 이념,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초 철학이 된다.
- 와하브는 당시의 이슬람이 올바른 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 튀르크인들은 순수한 이슬람을 타락시켰다고 보았다. 와하브는 아라비아의 여러 지역을 떠돌며 자신의 주장을 열정적으로 주장했으나, 간통죄를 저지른 여인에게 돌로 처형하라고 판결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무덤을 순례하거나 그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일조차 우상숭배라며 금지하는 등 와하브의 과격함에 주민들은 등을 돌렸고 와하브는 이단으로 몰렸다. 우야이나 족장은 와하브를 마을에서 추방했다.
- 와하브는 1744년 디리야에서 사우드와 만났는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언약을 맺었다. “사우드는 와하브와 추종자들을 보호하고 종교적 사명을 받아들여 오직 신의 뜻대로만 통치할 것을 약속한다. 와하브는 사우드에게 통치의 정당성과 지배의 권위를 제공한다.”
■ 첫 번째 사우디 왕국 : 디리야 에미레이트
- 사우드와 아들인 2대 군주 압둘아지즈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네지드 지역, 동편의 알 핫사(걸프 지역)까지세력을 확장해 갔다. 와하비들은 정복 지역을 자신들의 사상인 ‘올바른 유일신교’로 물들여 나갔다.
- 1801년 카르발라를 공격한 와하비는 시아파를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시아파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시아파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맘 후세인의 무덤을 파괴했다. 1805년 히자즈를 완전히 손에 넣고 사우드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의 수호자라고 자임했다. 와하비들은 혼탁한 성지를 대대적으로 정화하기 시작했다. 울라마들을 추방하고 금욕적이고 엄격한 종교생활을 강조했다.
- 엄연히 아라비아 반도의 공식적인 주인인 오스만 제국은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상징성을 사우드에게 빼앗김으로써 칼리파라는 상징성마저 위협을 받았다. 술탄은 당시 이집트에 세운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사우드를 토벌하고 히자즈를 되찾으라고 명했다. 히자즈 주민들은 와히비들의 극성스러운 통치에 반발하고 있던 터라 무함마드 알리의 군대에 협조적이었다. 결국 사우드는 히자즈를 잃고 디리야로 물러났다.
- 1814년 사우드가 사망하면서 첫번째 사우디 국가는 빠른 속도로 내리막을 걸었다. 그의 아들 압둘라 빈 무함마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 이집트에서 온 무함마드 알리는 장남 이브라힘에게 군대를 내주고 디리야 공격을 명했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장교와 유럽 신식무기들로 무장한 이브라힘의 군대는 디리야의 구식 군대보다 월등히 앞섰다. 공격에 앞서 주변 부족들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디리야는 고립됐다.
- 1818년 압둘라 빈 무함마드는 이브라힘에게 항복했다. 사우디 가문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카이로로 끌려갔고, 압둘라는 이스탄불로 압송돼 처형당했다.
■ 두 번째 사우디 왕국 : 네지드 에미레이트
- 이집트 군대는 디리야에 일부 병력만 남겨둔 채 히자즈 지역에 주둔했다. 이때 디리야 에미레이트의 통치자 압둘라 빈 무함마드의 아들이자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의 손자인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가 사우드 일족이 포로로 잡혀갈 때 빠져나와 2년간 숨어지내다 디리야가 무주공산이 되자 사우드 가문을 빠르게 재건하고 다른 부족들과 연합해 네지드 지역 내의 잔존 이집트 세력을 몰아냈다.
- 1823년 투르키는 리야드를 수도로 사우디 국가를 다시 세웠다. 네지드, 알 핫사를 정복하고 과거 할아버지가 거느렸던 왕국의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올바른 유일신’을 가르쳤으나 너무 극단적인 행동인 삼갔다. 무리한 금욕주의, 이슬람 성인들의 무덤을 파괴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종교적인 열정을 자제한 덕분에 새로운 사우디 국가는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1834년 투르키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네지드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 투르키의 아들 파이잘 이븐 투르키 알 사우드가 쿠데타를 진압해 왕위를 계승했다.
- 카이로로 끌려갔다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관직에 오른 칼리드 이븐 사우드는 그의 왕위 승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 국왕 압둘라의 동생이자 사우디 왕국을 세운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의 아들이었다.
- 이집트 정부는 사우드 가문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1836년 칼리드를 리야드의 통치자로 임명해 많은 군대를 주고 아라비아 반도로 파견했다. 이집트 군대와 사우드 군대 간의 대결이자 사우드 가문 내부의 권력투쟁이기도 했다. 이집트 군대는 쉽게 네지드를 장악했고 파이잘은 이집트로 끌려가 수모를 당했다. .
- 1843년 파이잘이 이집트를 탈출해 아라비아로 돌아왔다. 리야드 북부 하일 지역의 통치자 라시드 가문의 도움으로 리야드를 탈환했다. 1865년 파이잘이 사망한 후 11년 동안 무려 여덟 번이나 통치자가 바뀌는 혼란의 시대가 이어졌다.
- 사우디 왕국의 힘이 약해지자 이제 하일의 통치자 라시드 가문이 네지드를 위협했다. 사우드 가문은 카심 지역의 손을 잡고 라시드 군대에 맞섰으나 1890년 무함마드 알 라시드는 이들을 물리치고 하일, 카심, 네지드 지역을 통할하는 중앙 아라비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사우드 가문의 지도자 압둘 라흐만은 쿠웨이트로 달아났다. 이 압둘 라흐만의 아들이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다.
■ 세 번째 사우디 왕국 : 사우디아라비아
- 1902년 27살 청년 이븐 사우드는 사우드 가문을 따르던 알 핫사로 내려가 부족들을 규합해, 라시드 가문이 임명한 리야드 수령을 살해하고 과거 사우디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를 손에 넣는다.
- 이븐 사우드는 계속해서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네지드와 알 핫사를 완전히 평정할 무렵,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편에 섰다.
- 독일에 맞선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영국은 히자즈 지역의 유력자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샤리프 후세인)와 네지드 지역의 통치자 이븐 사우드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 대가로 독립 아랍왕국을 약속받았다. 이븐 사우드에게는 영국 말고도 든든한 지원세력인 이크완(‘형제’라는 뜻)이라는 베두인 전사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와하비즘을 받아들여 그 가르침대로 살겠노라 맹세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지하드가 선포되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전투에 돌입했다. 이븐 사우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크완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렸다. 따라서 이븐 사우드는 1924년 아라비아 지역을 두고 경쟁을 벌인 샤리프 후세인을 물리치고 히자즈 지역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자 더 이상 정복을 멈췄다. 아직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이 잘못된 이슬람에서 해방되지 못했는데 지하드를 멈추다니… 이크완은 사우디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국경을 넘어 이라크 지역을 공격했다. 이크완들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마다 이븐 사우드는 영국 측에 자신의 허락없이 저질러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이크완이 보기에 이븐 사우드 국왕은 변절자였다.
- 1929년 3월 31일 ‘사빌라 전투’ 또는 ‘사빌라 학살’ – 리야드 북쪽의 사빌라 평원에서 결국 사우드 국왕과 이크완 간의 대결. 이크완 세력을 제압한 이후 사우드 가문의 왕권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 1932년 이븐 사우드는 히자즈와 네지드의 통합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바꾸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을 나누어 인위적으로 세운 다른 아랍국가들과는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스로의 실력으로 영토를 정복해 세운 아랍국가였다.
■ 와히비즘과 왕정
- 19세기 후반에 들어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겨우 주권을 유지한 오스만 제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조차 강력한 유럽 제국주의 영향 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 와하비들은 오스만제국을 비판했다. 탄지마트를 통해 이교도인 유럽 국가들의 문물을 들여왔고 알라가 계시한 샤리아를 버린 채 이교도들을 따라 헌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이슬람을 회복하려면 단지 서구 문물뿐만 아니라 현재의 타락한 이슬람까지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 와하비즘의 입장이었다
- 사우디의 와하비즘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이슬람주의 운동으로 확산. 이슬람주의란 현대사회에 걸맞은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면 국가 구성의 원리를 이슬람의 교리와 율법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종교적 정치적 이념)
- 사빌라 전투 이후에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 울라마들이 종교를 담당하고 사우드 왕가가 정치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국가 시스템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국가 역할을 담당했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규모 유전이 개발되면서 오일 달러가 유입되자 한동안 사우디 정부는 서구의 돈과 문물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정부의 종교적 사회통제도 느슨해졌다.
- 이크완 전사의 아들 주하이만 오타이비가 이끄는 일련의 무리들이 ‘사우드 왕가가 이슬람의 길을 버리고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메카의 카바 대모스크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를 진압한 후 와하비 울라마들의 비판이 확산될까 두려워 사우디 정부는 그때까지 펼쳐온 개방정책에서 방향을 바꾸어 매우 엄격한 종교적 보수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보수 회기 노선으로 사우디 사회가 정체되어 발전이 저조했다는 평가가 제기됐고, 최근 들어 사우디 정부는 다시 개방과 변화의 길을 모색 중에 있다.
사우디아리비아 국왕 계보(연도는 재위 기간) 1대 이븐 사우드(압둘아지즈 2세) : 1926~1953 2대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 1953~1964 3대 파이잘 빈 압둘아지즈 : 1964~1975 4대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 1975~1982 5대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 1982~2005 6대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 2005~2015 7대 살만 빈 압둘아지즈 : 2015~현재 |
Scene 07. 하심 가문, 영국과 거래하다- 아랍국가의 탄생
■ 오스만 제국의 패망
-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합세한 발칸 독립국들에 패해 발칸 반도를 포함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오히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협상을 체결했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5세는 중립을 원했으나 친독일파 인사 엔베르 파샤가 이끄는 내각의 압박에 밀려 독일과의 동맹을 수락. 독일은 오스만 제국이 참전해 함께 싸우는 대가로 군사, 재정, 물자 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 전선에서 영국과 아랍반란군에게 무너지면서 1918년 10월 31일 오스만 정부는 이스탄불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이스탄불은 영국군 점령 아래 놓였으며 모든 아랍어 사용 지역은 오스만의 통치에서 해방됐다. 전쟁의 승자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 후세인-맥마흔 서한
-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술탄 메흐메드 5세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 칼리파의 자격으로 전세계 무슬림을 향해 삼국협상 세력에 대항해 지하드를 벌이자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영국 정부는 메흐메드 5세의 지하드 선포에 맞설 방안으로 아랍인들의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 오스만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샤리프 후세인으로 하여금 메흐메드 5세의 지하드 선포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라고 압박했다. 야심가인 샤리프 후세인은 망설였지만, 일단 지지를 표했다.
- 1915년 7월 14일, 샤리프 후세인은 당시 이집트 고등판무관 헤리 맥마흔 경에게 편지를 썼다. 아랍어 사용 지역에 자신이 통치할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을 동의하고 오스만 제국과 별도로 아랍 칼리파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아랍인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이후 세워질 아랍의 독립왕국에서 영국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랍의 반란과 자신의 왕위를 맞바꾸려는 거래였다.
- 아랍측의 동맹세력을 찾던 영국정부는 샤리프 후세인을 적임자로 판단했다. 10통의 서신교환.
- 샤리프 후세인은 자신이 요구하는 독립 왕국의 영역을 아라비아 반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대시리아, 이라크 지역으로 제안했다. 서아시아의 아랍어 사용 지역 대부분을 요구한 것이다.
- 그러나, 동맹국 프랑스가 시리아 연안 지역을 요구하고 있었다.
- 영국 정부는 시리아 연안 지역의 주민들 중에는 아랍인이 아닌 인구의 비중이 높다는 이유로 독립 아랍왕국의 영역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샤리프 후세인은 끝까지 대시리아 전 지역을 요구했다. 후세인과 맥마흔 사이의 서신은 이 문제를 나중에 협상하기로 어정쩡하게 매듭지었다. 양측은 아랍반란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 영국의 대중동정책
- 사이크스-피코 협상 : 영국은 중동 지역의 오스만 영토를 프랑스와 분할하기로 별도의 비밀협상을 진행.
영국은 이라크 지역을,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은 국제공동관리구역으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러시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사이크스-피코 협약에 동의했다.
사이크-피코 협약을 1917년 알게 된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의 신뢰에 의문을 품었지만, 영국과의 동맹을 파기하지 않았다.
- 밸푸어 선언 :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운다는 공약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 시기, 영국은 이를 통해 유대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며 이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새로 건설될 유대인 국가가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권리나 지위를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편지로 전했다.
■ 좌절된 시리아 독립
- 1916년 6월 10일 샤리프 후세인은 오스만 요새를 공격했다. 9월까지 아랍반란군은 메디나를 제외한 모든 히자즈 지역을 점령했다. 1918년 아랍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1920년 3월 8일 시리아 의회는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잘을 시리아의 국왕으로 공식 선언했다.
- 그러나 국제연맹은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를 결정했다. 이후 26년간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 놓였다. 파이잘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추방돼 영국으로 망명했다.
■ 아라비아의 패권을 두고 사우드 가문과 겨루다
- 네지드 지역에는 하심 가문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동맹을 맺은 사우드 가문이, 역시 아라비아의 왕이 되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이 아랍 지역에서 물러가자 마자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두 가문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 1918년 6월 네지드와 히자즈의 접경 도시 알 쿠르마에서 첫 전투 결과는 이크완 전사들의 발군의 기략으로 사우드가의 승리
- 영국은 중재하려 했으나 후세인이 말을 듣지 않고, 1919년 사우드의 군대를 공격- 결과는 참담한 패배
사우드가의 군대는 계속 진격해 메카를 함락시켰다. 알리와 하심가의 군대는 메디나에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1925년 12월 결국 사우드군에게 항복하고 이라크로 망명.
- 이븐 사우드는 스스로를 ‘네지드의 술탄이자 히자즈의 왕’으로 선포. 아라비아 반도의 주인이 결정되었다.
■ 요르단과 이라크에 세워진 하심 왕국
- 샤리프 후세인은 약속을 어긴 영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 영국은 하심가와 아랍인들의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해 지정학적 덜 중요한 지역(트란스요르단)에 하심 왕국을 세우도록 했다. 1921년 4월 샤리프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사실 압둘라 국왕도 시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 시리아의 민심이 동요하자 시리아를 위임통치하는 프랑스는 영국에 항의했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 압둘라 국왕을 압박했다.
- 1920년 4월 국제연맹이 산레모 협정을 통해 이라크를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공식 결정하자 이라크의 아랍인들은 뭉쳐서 저항했다. 영국은 이라크 주민들의 강력한 반감을 확인하고, 이라크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아랍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간접방식으로 통치 방식을 바꿨다.
- 1921년 8월 영국은 파이잘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선포했다. 외형상 입헌군주제, 헌법과 의회도 갖추었다.
트란스요르단에 이어 두 번째 하심가 왕국이 세워졌다.
Scene 08.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무스타파 케말-터키공화국의 탄생
■ 패망과 독립운동
-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으로 훗날 터키공화국의 영토는 현재의 3분의 1수준에 머물렀다. 발칸 반도를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시켰고 북아프리카는 유럽 열강 등의 손에 넘어갔다. 아랍 지역도 영국과 프랑스가 관할.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승전국들이 공동으로 관리. 나머지 유럽 지역의 영토는 모조리 그리스의 차지가 됐다.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이즈미르도 5년 동안 점유하기로 했다. 오스만 제국 동부의 아르메니아는 독립, 남부 쿠르디스탄은 쿠르드인들의 자치권 허용. 아나톨리아 중부와 북부 지역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인정.
-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는 무스타파 케말을 감찰관으로 임명해 오스만 군대의 잔여 무장병력을 해산시키고 치안 확보 임무를 내렸다.
- 케말은 술탄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감찰 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들과 접촉. 1919년 9월 4일 시바스에서전국 민족주의 운동 대표들이 참석한 의회를 소집,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아나톨리아 및 루멜리아 민족권리수호협회’ –아나톨리아는 소아시아 지역, 루멜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역 영토인 이스탄불과 발칸 반도를 의미 – 즉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 모두 튀르크인의 영토라고 선포한 셈
-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12월 오스만 정부의 총선에서 하원의 다수당이 되고 이스탄불의 정국을 장악.
- 영국은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추방하면서 오스만 정부 내부에서 개혁을 통해 독립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났다.
- 무스타파 케말은 대국민의회 의장에 선출되고 이스탄불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부 구성을 의회에 제안.
- 1920년 5월 1일 대국민의회는 케말이 제안한 정부 구성을 승인. 앙카라 정부가 출범.
■ 터키 vs 그리스
- 터키와 그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계승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오스만의 지배를 당하면서도 그리스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국교인 정교회를 지켜왔다. 독립 이후 과거 비잔틴의 영토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아나톨리아 지역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 그리스가 포함된 발칸반도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19세기 초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독립 전쟁을 벌여 그리스 왕국을 탄생시켰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그리스는 자신들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기회로 여겼다.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 서부 도시 이즈미르를 점령.
- 앙카라의 대국민의회가 결성한 터키 국민군은 그리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전선을 구축. 1921년 7월 10일 전력의 열세에도 사카리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케말은 터키인들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 케말은 아직 비준되지 않은 세이브 조약을 폐기하려 했다. 새로운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고, 오스만 정부 대신 대국민의회가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의 독립과 완전한 자주권’을 반복했고 마침내 1923년 7월24일 로잔조약이 체결됐다. – 이 조약으로 터키는 승전국들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아나톨리아 전 지역을 되찾았으며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도 차지했다.
- 유럽 국가들은 이스탄불을 그리스에 넘겨주고 터키를 아시아 지역 영토로 한정 짓고자 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스탄불을 고수했다. 대신 에게 해의 섬들 대부분을 그리스에 넘겨주었다. 결국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이스탄불로 남게 되었다.
- 오늘날에도 터키와 그리스는 사이가 좋지 않다. 터키의 EU 가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나라는 그리스다. 두 나라간 A매치 축구경기는 치열한 승부로 유명하다.
■ 터키공화국 수립
- 1922년 11월 1일 술탄직이 폐지. 마지막 술탄 메흐메드 6세는 몰타로 망명. 1924년 칼리파 제도 폐지.
- 로잔 협정과정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민족국가를 수립하기로 결심. 터키인들로 이루어진 국가를 의미.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다종교로 국민들 중 터키인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늘리려고 노력. 아랍인들이 다수이거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인 지역은 과감히 포기. 터키인의 비중이 70%이상인 지역만 자국 영토에 포함. 그리스 정부와는 인구 강제 교환 협약을 통해 130만명의 그리스인이 떠나고 40만명의 터키인이 터키로 들어왔다.
- 쿠르드인 : 케말은 그들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고 터키 영토에서 쿠르디스탄을 제외하지도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쿠르드인들의 독립 열망은 터키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남아 있다.
-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수도는 독립운동의 거점인 앙카라.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 이슬람을 버리고 세속주의 노선을 가다
- 터키공화국은 중동 최초의 세속 국민국가
-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은 정교분리정책과 세속주의 노선 추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폐지, 유럽식 세속법정 도입. 일부다처제와 이슬람 종교학교인 마드라사도 폐지
- 1928년 헌법 개정 당시 ‘터키의 국교는 이슬람’이라는 조항도 삭제, 종교의 자유와 완전한 세속국가의 기틀을 다짐
- 이슬람력과 오스만력을 버리고 서양달력을 채택. 아랍문자를 차용한 터키어 표기에서 라틴 알파벳을 변형한 새로운 터키문자를 만들고, 성을 갖도록 의무화(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꾸란> 낭독은 아랍어로 진행해야 하나 터키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정책 변경. 반발이 거세자 설교만이라도 터키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으나 무슬림들은 지금도 예배의 모든 절차에 아랍어를 사용한다.
- 1925년 4월 집권당인 공화인민당은 의회에 <질서유지법>을 통과. 서구적인 모델인 공화정을 채택했지만 케말 정부는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독재정권이었다.
- 2대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도 독재와 서구화 노선 계승. 독재정치에 반발이 계속되자,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터키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 마련
- 지금도 터키는 세속주의와 이슬람 정체성 간의 갈등이 계속 진행중. 정치권 내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 Inside History 터키는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나?
Scene 9. 외세의 의해 쫓겨난 레자 샤-이란의 도전과 좌절
■ 러시아와 영국의 각축장이 된 페르시아
- 사파비 왕조의 몰락 이후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군부 실력자의 쿠데타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새로운 왕조가 나타났다 몰락하는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페르시아 중앙 정부의 힘은 약해지고 변방 이민족들은 독립하려고 했다.
- 당시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가 조지아의 독립운동을 진압하자 정교회의 수장국가라 자임하는 러시아와의전쟁에서 패한 카자르 왕조는 광대한 카프카스 영토와 동부 조지아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게다가 약 300만 파운드의 전쟁 배상금, 페르시아 내 러시아의 치외법권 인정 조약을 맺었다. 카자르 왕조를 통치한 파드 알리 샤는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로 평가
- 러시아도 호시탐탐 남쪽으로 진출하려 하면서 무력 분쟁은 계속 되었다. 카자르 왕조는 영국을 끌어들였으나, 결과적으로 영국과 러시아 모두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한 세력균형이 이뤄진 덕에 페르시아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알딘 샤는 탄지마트에 자극을 받아 페르시아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으나 영국과 러시아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페르시아 경제는 외세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 ‘로이터 양허’
- 정부의 재정은 악화되고 만성적인 경제난과 빈곤에 시달린 상인, 신학생, 울라마들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 위협을 느낀 샤는 1906년 헌법과 의회 설립을 허용하면서 입헌 혁명이 성공했다. – 헌법의 주요 내용은 입헌군주제, 인민주의, 법 앞의 평등, 시아 이슬람의 국교화 등
- 의회는 여러 차례 폐쇄됐다가 다시 소집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입헌혁명 때 제정된 헌법은 1979년 이슬람혁명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됐다.
- 페르시아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이에 페르시아인들의 민족주의 의식이 고양됐고 독립적인 근대국가를 세우려는 저항세력의 활동도 활발할 수 있었다.
■ 레자 칸의 등장
- 영국 해군은 독일에 대한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전함의 동력을 기존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면서 안정적인 석유 확보가 필요했다.
- 영국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르시는 1901년 페르시아에서 석유를 독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얻어내고, 페르시아 정부와 합작해 세운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는 66년간 독점적 개발 권리를 소유함으로써 영국의 주요 석유 공급원 역할을 했다.
- ‘다르시 양허’ – 불평등한 계약. 당시 페르시아 정부의 몫은 석유 판매 이익의 16%에 불과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페르시아 정부는 중립을 선언. 그러나 러,독,오 모두 페르시아로 진격해왔고 영국도 유전지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주둔했다. 페르시아는 외세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러시아는 물러나고, 독일과 오스만 제국도 제1차대전 패전국으로 물러났지만 영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의 군주 아흐마드 샤는 는 영국의 보호령 제안을 수용하려 했지만 전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철회. 영국 정부의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자신의 부관인 레자 칸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영국군이 철수하고도 친영 노선을 유지하기 위함.
- 레자 칸은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1921년 2월 21일 페르시아의 수도를 장악, 새 정부를 수립, 1923년 총리에 취임했다.
- 케말 아타튀르크를 본받아 페르시아 역시 세속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레자 칸 총리는 이제 레자 샤가 되었고 아흐마드 샤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카자르 왕조가 막을 내리고 팔라비 왕조가 시작되었다.
■ 레자 샤의 근대화 개혁
- 민족주의자였던 레자 샤는 친영노선을 취하지 않고 강력한 독재정치를 통해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페르시아를 근대화시켜서 서구 열강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다.
- 산업을 일으키고, 교통 인프라, 교육기관 확대, 강한 군대 건설에 초점을 맞췄다. 지역 부족의 반발에도 징병제를 추진, 유럽에서 탱크, 대포, 전투기 등을 들여왔다. 1920년대 이란 정부 지출의 약 40%가 국방비였다.
- 국민들은 부강한 자주국가 건설을 원했지만, 외세 개입 문제, 국가의 경제 사정도 나아지지 못했다. 이란은 반정부 시위가 끊일 날이 없었다.
■ 영국과 소련, 레자 샤를 몰아내다
- 레자 샤는 1930년대 독일과 군사적 경제적 협력을 함으로써 영국의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이란 정부는 중립 선언. 그러나 이란과 독일의 우호관계는 여전했다.
- 날로 가까워지는 이란과 독일의 상황을 우려한 영국은 레자 샤에게 이란 내 독일인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샤는 이를 거부했고 영국은 1941년 9월 소련과 함께 전격적으로 이란을 침공했다. 연합군은 테헤란을 장악했고 레자 샤는 강제로 폐위돼, 남아프리카로 망명했고 1944년 사망.
- 레쟈 샤의 퇴위는 환영받았다. 그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가 왕위를 계승했다.
- 전쟁이 끝나고 1946년 이란에서 외국 군대가 모두 물러났다. 카자르 왕조 이래 한 번도 외세로부터 자립해본적이 없는 이란의 근현대사는 이란 국민들 마음속에 하나의 콤플렉스로 자리잡았다. 이란 내 민족주의 정서와 외세에 대한 반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 영국 석유회사의 불평등한 이익배분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이란의 석유산업은 중동 최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르시 양허’에 묶여 대부분의 수익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가 가져가는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모사데그의 좌절
- 석유가 창출해내는 부의 정당한 몫을 되찾고자 이란 정부의 노력은 지속됐다.
- 1951년 이란 의회는 모사데그의 지휘 아래 석유 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으로서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를 빼앗긴 셈이다. 영국은 이란 정부를 궁지로 몰기 위해 국제사회가 이란의 석유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영국의 석유 기술자들이 모두 이란을 떠나 이란은 석유회사에서 일할 전문 인력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 이란 경제는 석유 국유화 이후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란 내 모사데그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이에 영국은 미국과 공모해 모사데그를 제거하기로 계획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를 체포한 후 정국을 장악했다. 모사데그는 반역죄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을 받고 1967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 모사데그를 몰아내는 데 미국이 배후에 있었음을 알려지자 이란 내부에서는 반미 감정이 크게 고조됐다.이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유발하는 배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