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 여자와 데이트 같은 걸 해왔지만." 그 남자는 말했다. "솔직히 그쪽처럼 못생긴 상대는 처음이군요." 디저트를 먹고 나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삼 초나 사 초쯤일 것이다. 너무 돌연한 발언이었거니와 무슨 의도인지 가호가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자는 그렇게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말을 입에 담으면서 미소를 띠기까지 했다. 그것도 거의 우호적이라고 해도 좋을 온화한 미소다. 그렇지만 거기에 유머의 기색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이 남자는 농담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로 가호의 머릿속에 우선 떠오른 건 무릎 위에 펼쳤던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옆 의자에 둔 핸드백을 움켜쥐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레스토랑을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 그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이다. 하지만 가호는 그때 왠지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았던 건- 나중에 생각해보면 말이지만- 하나는 순수한 놀라움 때문이고, 또하나는 호기심이었다.
(1장:가호와 모터싸이클 남자.9-10쪽)
"요즘 그림 작업은 잘되는 거야?" "응, 지금은 새 그림책을 그리고 있어." "그림책 좋지. 글자도 적고." "그래도 그림만 있는 건 아니고 이야기도 같이 들어가거든." "이야기는 나도 좋아해. 뭐랄까, 그게 좋은 이야기라면 말이지." 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은 이야기...... "그런데 좋은 이야기라니, 구체적으로 이를테면 어떤 이야기 말인데?" "좋은 이야기에는 반드시 어떤 유용성이 포함되어 있지." 삼촌은 다소 격식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누군가가 한 말이야?" "발터 벤야민."
(3장:가호와 흰개미여왕. 163-164쪽)
"가호는 오른쪽 손바닥을 살며시 자루에 대고 어머니의 가슴에 그 예리한 칼끝이 파고들게 했다. '칼 가는집' 주인이 일러 준 대로 손을 얹고 있는 것만으로, 혹은 얹는다고 의식한 것만으로도 날붙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어머니의 가슴 속으로, 그 모양 좋은 둥근 가슴 옆으로 빨려들어갔다. 자루와 맞닿은 언저리까지 깊숙이. 어머니가 눈을 활짝 뜨고서 거칠고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몸이 뻣뻣해지며 날카롭게 경련했다. 그러고는 들이켰던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썰물 빠지듯 경련이 서서히 멎고 눈꺼풀이 다시 감겼다. 입은 벌어져 있었다. 그곳에 영혼의 출구가 잠시 마련된 것처럼. 가슴에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저 날붙이가 뿌리까지 깊숙이 꽂혀 있을 뿐이다.
첫댓글
1997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매료되었었지요.
소설 '가호'
"좋은 이야기에는 반드시 어떤 유용성이 포함되어 있지."
올려주신 덕분에
'유용성'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유용성(有用性)
쓸모가 있고 이용할 만한 특성.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개개인(個個人)의 '삶'이
좋은 이야기가 되기를 꿈꾸지 않을까요?
살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삶'이 직업인 우리 모두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고
치유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또한 좋은 이야기를 수용하고 변주하면서
개인의 서사를 완성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가호'가
세번째 '미소라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늘 앉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는 문장에 감동했어요.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 이야기의 결말은
스스로를 알아가고
제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판별하고 영속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