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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1일
말씀: 갈2:20
제목: 십자가에서 죽음
계속에서 십자가 복음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저번 주에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으로 설교를 마무리했는데요, 바울의 고백은 십자가복음의 핵심 된 내용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이 말씀은 첫째 초대교회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두 번째 바울은 율법주의자였으며 당대 최고의 학벌과 배경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변화의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과 율법으로부터 단절된 복음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유대교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세 번째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전진해 가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이야 말로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화의 삶인데요, 십자가를 지는 고난과 자기를 부인하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임을 바울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입술로 죄를 고백하면 죄를 사해주시는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보혈을 의지해서 죄 용서함을 구하고 회개했는데 실질적으로 죄는 죽지 않고 반복해서 죄가 나타나고 또 죄를 짓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가 오늘날 거룩을 방해하는 요소이며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단이 없으면 삶이 늘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 따로 삶 따로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분명하고도 명확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간다면 이 복음은 불안전한 복음이나 능력이 없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고 하는 것이 반복되면 죄의 용서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죄를 끊지 못하니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삶속에서는 여전히 미워하고 다투고, 원망을 쏟아내고, 저주하며, 음란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자존심을 건드리면 견딜 수 없어하며,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회개는 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품어야합니다.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고 애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올라가서 같이 못박혀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합니다. 거룩이 우리의 본질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기 때문이요,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 되어야하는데 죄의 해결을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죄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죄가 해결된 곳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죄를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 죄가 완전히 죽지는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라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처럼 우리가 완전히 바뀌는 존재라고 했는데 염소가 양으로 바뀌는 것처럼 화학적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로만 가능한 변화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염소에서 양으로 바뀌는 역사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죽음이 동반되어야합니다. 그런데 모양은 양 모양을 하고 있지만 양가죽은 쓰고 있지만 염소로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모양은 성도인데 삶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도 속성이 염소이면, 속성이 육체로 그냥 있으면 그 속성이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속이 변화되지 않았는데 곁으로 변화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염소는 뿔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양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삶속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숨겨진 뿔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라는 말이지요. 아무리 혈기를 안내려고 해도 십자가에서 혈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다가 혈기를 내는데 참는 것은 자신의 인내와 인격에서 버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면, 의로운 자로 부름을 받고 예수님 부활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때 육체가 죽었으니까 나올 것은 영의 것, 거룩한 것입니다. 즉 양의 성품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니까 삶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삶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장하고 고집하는 육체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심령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거룩의 일에 신령함과 생명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육체의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할 마음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의필요성을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고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다는 뜻이며, 거룩과 진리와 생명에 관해서는 관심초자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거룩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도가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다가 함께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 십자가복음위에 세워질 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어디서 나타나느냐하면 예수님을 머리로 생각하고 지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위에 존재할 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배 때만, 기도 때만이 아니라 필요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안에, 그 생명의 피 값 안에 내가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 이미 믿은 자가 되었다면 예수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십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고후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기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고후 4:11에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옛 자아의 죽음은 한 번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자아의 죽음은 매일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악한 세력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트리기 위해 유혹하고 속이고 거짓으로 우리를 세상의 것을 늘 보장하려고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헌신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교회에서 훈련의 핵심은 ‘죽는’훈련입니다. 왜 우리가 죽어야합니까? 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합니까? 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합니까? 이것이 신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구원의 시작이요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장막과 같은 곳이요,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고 목적된 삶이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본토 친척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가 부름 받은 가나안 땅에 평생을 유랑하는 자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는 땅 한 조각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기업이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그가 가나안땅에서 얻은 것은 묘지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서 남겨 둔 것은 막벨라 굴이라는 묘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며,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신비함을 아십니까? 그는 나그네로 살았고 가나안 땅에서 떠돌이 같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막벨라 굴을 사겠다고 원했을 때, 그 곳 원주민들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뭐라고 칭찬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우리 중에 왕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원하면 가지십시오. 우리는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떠돌이고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기업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묘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말로 이 땅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를 반기는 자 하나님께 복을 받고 우리를 외면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뭐라 했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라’
우리의 인생이 고난 있고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이야말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고귀한 존재인 줄 확인하시고 늘 감사와 충성과 승리가 있는 자들입니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왜 우리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합니까? 왜 우리가 매일 십자가에 못 박혀야합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짐을 져야합니까? 이것만 아니면 믿을 만한데, 이 부분만 없으면 신앙생활 할 만한데, 이런 요구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스트레스 받고 왜 이런 요구를 합니까? 이것을 모르면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할 수 없고 거룩함에 동참할 수 없고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습니다.
요6:53-5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이것이 멸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 말씀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분명해집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올 때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무한정 나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셔야합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인해 우리의 필요가 무한정 나오는 은혜를 아는 성도,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57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내용, 그분의 삶의 목표, 삶의 가치, 삶의 방법, 능력 이런 것들이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라 는 말의 뜻인데요,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삶의 영역이 아버지로 인하여 이런 것이 내 속에 있고 내가 발휘하고 있고 내가 결실할 수 있고 내가 그 원리와 목표를 향하여 가는 이 값진 삶을 사노라 하는 뜻이 입니다. 이게 무엇과 연결되느냐하면‘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그러니까 우리가 사망과 멸망에서 벗어나 심판을 면하고 영원히 산다는 그 정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값진 삶, 고결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거룩하며 의와 진리와 생명과 영광과 복된 삶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하느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에 동참해야 이해되고 깨닫게 되고 보게 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14:11-13에서 이 모든 내용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는 그 분과 연합되어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이 말속에서 오병이어어의 기적적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이 엄청난 구원의 충만함, 영원한 생명, 신비함과 영광된 삶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아셔야합니다. 이것이 한 마디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요17:18-21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동시에 주님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여받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삶이 얼마나 대단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얼마나 신비한 것이고 영광된 것인가를 알아가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