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에
우리 어머니 삶이 이와 똑같으셨기에
우리 어머니도 글을 아셨다면 이런 말씀을 주시고 가셨을 것 같아
어머님 그리며 여기 옮깁니다.
瑞峰 최 태영 올림
시인 임 태주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아들 아, 보아라!
나는 원 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 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 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 판에 나가 돌 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 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 알이
통통하게 몰려 나올 때, 내가 조물주 인 것처럼 좋았다.
깨 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 꽃은 얼마나 환 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 꽃들이 무리 지어 넘실거릴 때, 나에게는 그곳이 천국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 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 탕을 끓여 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里長) 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어미를 용서 하거라.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 비가 들이닥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 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어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 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망을 덜면 봄 볕에 담 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 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 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 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 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 대로 순순 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 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 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 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 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 하지도 마라.
부질 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 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끝>
[출처] [좋은 글 시리즈 17]
임 태주 시인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작성자 일체유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