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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의 마음 공부
“몸의 속삭임을 들어주세요”
스텔라 박
“ 몸이 속삭일 때 귀를 기울이면 비명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어요.”
- 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 속담 -
몸과 연결되어 있나요?
매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가를 가르친지 1년 반이 되었다. 매일 요가 수업을 한다니 “힘들지 않으세요? 하는 질문에 나는 “가르치는 대상 덕분에 제가 매일 매일 요가 수행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답니다.” 라고 대답한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연습도 매일 반복해 더욱 잘 가르칠 수 있어 감사함은 배가된다.
요가 수업 시간에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도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보세요.”, “몸에게 이 자세를 해도 되는지 물어보세요.” 일 것이다.
나 스스로도 요가와 명상을 수행하기 전에는 몸과 멀리 떨어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요가와 명상을 일상의 삶 속으로 가져온 이후와 이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매순간 몸과 연결되어, 몸의 필요를 알아주고, 몸과 대화하고, 몸을 도닥거린다는 것이다.
몸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과거
그렇다면 그전에는 어땠을까. 나는 몸이 내게 말을 하는지조차 몰랐고, 몰랐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았고, 몸이 비명을 지르면 윽박지르며 입을 다물게 했었다. 그래서 마음은 몸과 분리되었고, 현재에 머물지 못했으며 더욱 몸을 지배하려 했었다.
우리들의 몸의 본질은 의식으로 우리들 마음보다 똑똑하다. 우리들의 몸은 환경과 우리 주변의 다른 몸들, 즉 현실을 탐색하고 그 정보를 우리들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진, 매우 감각적인 유기체이다.
우리들의 몸은 미묘한 에너지로 말한다. 이를 못 알아들을 때 몸은 소리를 낸다. 그런데도 몸을 무시하면, 몸은 결국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몸이 내는 소리를 고통이나 불편함으로 해석한다.
우리들이 몸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먹을 것이 너무 많은 21세기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식욕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먹지 말 것인지를 몸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지배한다. “무엇이 몸에 좋다더라” 하면서 그것만 먹던가, “이 음식은 살찌는 거야.” 하면서 먹지 않던가,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몸과 연결되지 않다 보니 현재 느끼는 배고픔이 진짜 배가 고파서인지, 감정적인 배고픔인지도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데이트 하던 대상으로부터 속칭 차였을 때, 거절받은 느낌과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기 보다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박박 긁어먹는 것이다.
감정도 몸으로 느낀다
감정적 배고픔 외에도 몸의 불편함이 진정 몸으로 인한 것인지, 감정의 억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감정 역시 우리는 몸을 통해 느낀다. 수치심, 죄의식, 그리고 박근혜 전대통령으로 인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 새삼 인식하게 된 ‘자괴감’ 등의 감정 역시 몸으로 느껴진다.
불안감, 걱정, 두려움의 감정이 밀려올 때도 가만히 몸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심장이 팔딱거리는 것이, 심장이 배꼽 아래로 수직하강하는 것이 느껴진다. 증오와 애증, 원망, 질투, 짜증, 불쾌감, 권태감, 한의 감정이 강렬하게 느껴질 때도 몸으로 돌아가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쁨, 즐거움, 호기심, 기대감, 설렘, 행복감, 사랑 등 우리들이 긍정적이라고 이름한 감정 역시 몸으로 느껴진다. 가슴이 확장되고, 가슴이 활짝 열린 듯한 느낌, 비로소 숨이 탁 트인 것 같고 가슴 속에 약간 간지러운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최초의 기억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몸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을 외면해왔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화기의 속도가 느려진 것과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달라진 것을 감지하는 것에 훨씬 민감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우리들의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까.
그것은 전생에서부터의 기억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일 수도 있으며 자아가 형성되기 전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흙을 만지며 접지(Grounding)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가 무서운 얼굴을 하며 “지지, 더러운 것을 만지면 안 돼.” 라고 소리친다. 아이는 혼동스럽다. 이 즐거운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반복된 엄마의 훈육은 아이에게 접지의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고 아이의 내면에는 흙에 대한 포비아가 형성된다.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만지며 몸을 탐구하던 아이는 “지지, 거기 만지면 안 돼.” 하는 엄마의 호통에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우리들의 가슴을 닫고 보호 모드로 들어가게 한다. 그렇게 우리들의 몸은 자물쇠로 잠근 듯 닫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몸을 즐겁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가 볼록 볼록 올라가고 내려가는 단전호흡을 잘 한다. 성인이 되면서 제대로 호흡하는 법을 잃어버린 우리들은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들의 몸을 즐겁게 하는지를 완전히 망각했다.
그래서 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하는 대신, 몸이 불편함을 느낄 때 담배를 물거나, 술잔을 기울인다. 초콜릿 브라우니와 설탕 덩어리인 도우넛을 집어든다. 진통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한다. 몸과 멀어진, 사랑 없는 섹스를 한다.
문제의 핵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자극을 창조할 때 우리는 몸의 고통을 아주 잠깐 동안 잊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세포 속에 억눌려 있다는 것이다.
현재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봐요
명상을 한다는 것은,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그냥 존재하기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작용
(Mind), 생각을 쉰다는 것이고, 그것은 현재 몸의 감각에 비판 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그때, 즉 우리의 마음이 고요해질 때, 비로소 몸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손바닥의 간지러운 느낌, 음식이 소화되는 화학작용, 뇌로 피가 전달되는 전기작용, 심장의 고동, 장의 움직임 등이 조금씩 커튼 걷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희열이 일어난다. 감각은 늘 변한다. 변하는 것을 그냥 변하게 둘 뿐, 그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은 붙잡는 것, 그러니 그냥 놓아버린다. 삶의 경험이 몸을 통해 왔다가 간다.
방석 위에서의 연습을 이제 삶의 모든 부분으로 확장시켜 본다. 몸이 있어 하고 있는 이 다양한 경험에 대해 좋다, 싫다 하는 비판을 멈추고 그냥 허용하고 느껴준다. 슬픔도, 분노도, 수치심에 대해서도 “이건 나쁜 감정이야. 나는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돼. 빨리 내보내야돼.” 라는 저항감 없이 그냥 느껴준다. 감정(Emotion)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에너지(Energy in Motion)일 뿐이다. 그렇게 느껴주면 억압되는 것이 없고, 억압되지 않으니 자연스레 물처럼 흘러간다.
느껴주지 않은 감정은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렇게 허용되지 않은 감정, 충분히 느껴주지 않은 감정은 우리의 몸 깊숙히 저장되면서 느껴질 기회를 호시탐탐 찾게 된다. 그래서 삶은 계속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경험들(메신저)을 우리 앞에 가져온다.
이제까지 귓속말로 속삭이던 몸은 점차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들은 그 몸이 하는 대화의 시도를 무시한다. 결국 흐르지 못하게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은 우리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폭발하는 분노일 수도 있고, 몸의 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라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정신의학에 관한 인식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만성질환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정표현을 있는 그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패를 모두 드러내보이는 것이고, 그럴수록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삶의 경험이 점점 감정표현을 잘 하지 못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감정 불감증 환자들이다.
몸의 속삭임을 듣는 연습
어떻게 하면 몸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 몸이 귓속말로 소곤소곤 하는 말을 들으려면 우선 몸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는 제아무리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던지더라도 감지되지 않는 법이다. 반면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에는 아주 작은 조약돌을 던져도 그 파장이 저 멀리까지 전달된다. 몸의 긴장을 빼고 지구의 중력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매일매일 반복할 때, 몸의 속삭임을 듣는 우리들의 능력은 점점 커간다. 당신이 연습하는 바, 반복하는 바는 강화되기 때문이다. 요가의 사바사나(시체 자세), 바디 스캔, 명상이 바로 이런 연습들이다.
그렇게 몸을 편안하게 했으면 다음 단계로 몸이 우리에게 해주는 노고를 알아차려본다. 내가 먹은 음식들이, 즉 이 우주가 결합돼 이 몸을 이루고 있다.
자연인 몸은 이 성격 고약한 나를 만나, 팔자에 없는 개고생을 하고 있다. 먹여줘야 할 때 안 먹여주고, 쉬어야 할 때 안 쉬어주고, 재워줘야 할 때 안 재워준다. 슬픔을 느껴야 할 때도, 기쁨을 느껴야 할 때도 꾹꾹 억누르고 있다.
이런 자각이 든다면 몸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 한 번쯤은 몸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당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껏 계절마다 보약을 해먹고, 홍삼 아니라 산삼 할아버지를 챙겨 먹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몸에게 완벽하게 떳떳할 수는 없다.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면, 몸을 껴안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자. 내가 몸에게 했던 것에 비한다면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은총을 우리들에게 베풀었다.
성격 급한 이 몸을 끌고 지구별 곳곳을 여행해준 두 발에,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인으로 인해 잠시도 쉬지 못하고 늘 일에 시달렸을 두 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밀어넣었음에도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는 위장에, 휘발유 뿌린 불처럼 자주 분노했음에도 아직 멀쩡한 간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몸에게 색깔도 예쁜 야채들로 꾸민 칼라풀한 밥상을 선사한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 다해, 온 감각으로 이 음식들을 꼭꼭 씹어본다. 치아가 해야 할 일을 위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통제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며, 몸이 음식과 함께 사랑을 나누게 허용한다.
이 나이에 무슨 성욕, 하면서 무시할 게 아니라 향기 나는 거품 목욕을 하며 몸이 원하는 에로틱한 느낌을 채워준다. 포근한 감촉의 파자마를 입혀주고, 가슴 앞에 양손을 교차해 도닥이며 몸의 필요를 알아준다.
아침 이른 시간에는 레몬과 민트 향, 늦은 밤 침대에서는 라벤더와 로즈메리향을 뿌리며 당신의 잠들어있는 후각기관을 자극해본다. 향기는 마법을 일으키며 당신으로 하여금 황홀경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우리들에게 조근조근 귓속말을 해왔던 몸은 오랜 세월을 인내심으로 버텨왔다. 그런 몸이지만 더는 못하겠다 싶을 때엔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친다. 몸이 고함을 치기 전, 속삭일 때에 들어주면 만사가 편하다. 하지만 주인이 이 큰 절규도 듣지 못할 때, 몸은 이제껏 잡아왔던 생명에의 밧줄을 놓아버린다.
몸은 나의 좋은 친구
처음부터 몸의 속삭임을 잘 들을 수는 없다. 왜?
당신은 이제껏 몸의 속삭임을 무시하는 것만을 반복, 연습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오직 몸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하거나, 삶의 모든 경험 속에서도 몸의 감각에 연결되는 것을 반복 연습한다면 점차 몸의 미묘한 속삭임에도 깨어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때 몸은 우리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연인, 삶의 동반자가 된다.
난 30대 초반부터 내 욕망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연습을 중점적으로 해왔다. 욕망의 그릇이 작으면 작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채워져 자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수행은 나름 지속가능한 행복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몸의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워주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몸은 기본적 욕구도 채워주지 않는 주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친절하게 말하지 않는다. 몸은 나와 의사소통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니 내 꿈이, 내 욕망이 현실의 삶에서 펼쳐질 리 없었다. “어차피 꿈이야. 그 내용이 어떠한 꿈이든,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라고 생각은 말하지만, 내가 몸을 형성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꿈이 꿈임을 알면서 그 꿈을 펼치는 것이었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표현했다.
이 필요와 욕구를 알아주지 않고, 그냥 누르며, 입다물라고 조용히 시킬 때, 삶에서 소외되고 억눌려진 욕구와 꿈은 밖에서 투사할 대상을 찾아내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복수한다. 그 굴절로 표현된 욕구에게 친절한 마음을 내어보자.
이제 잘 들리지도 않는 몸의 언어에 고요히 귀를 기울여본다. 처음엔 잘 안 들렸지만 시간이 지날수 록 조금씩 몸의 언어가 들린다. 몸의 필요를 채워준다. 몸이 드디어 억압된 욕망을 말하기 시작한다. 조용히 들어주고 도닥여준다.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 늘 똑같던, 지리한, 권태롭던 삶이 갑자기 활기를 띠며 황홀해진다. 매순간 단한 번도 같은 경험은 없었다. 늘 잠망경 안의 패턴처럼 변화무쌍한 삶의 경험을 감동과 감사함으로 대한다. 삶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우리들이 지금껏 가져왔던 그 어떤 것보다 멋진 관계의 시작이다.
“우리는 에너지가 넘치는 존재이고 육체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몸은 의식이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과
요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존중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 - 줄리 D. 메이요 -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 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 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디 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