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온 그리스도교는 11세기 서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갈라졌고 오늘날까지 숙제로 남아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방 가톨릭 교회는 그로부터 약 500년 후 가톨릭과 개신교로 다시 갈라졌다.
서방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로마이고 그 언어는 전통적으로 라틴어 였으며, 수장은 로마 주교, 즉
교황이다. 반면 동방 정교회는 그리스어를 쓰는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황제의 통제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교회 내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플) 총대주교가 동방 정교회
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공식적 분열은 1054년 성령에 대한 신학적 논쟁으로 발생하였지만,
사실 이 두 그리스도교 세계가 나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로마 제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내의 신학적 이견들을 조정하여 통일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추구하였다.
단일 제국, 단일법, 단일그리스도교 신앙의 이상을 꿈꾼 것이다. 그런데 그는 330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고, 이후 라틴어를 쓰는 로마와 그리스어를 쓰는 콘스탄티노플은 필연적
으로 언어·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느낄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누가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가 되느냐하는 문제는 로마 주교와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대립을
야기했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써 그 역사적 상징성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써 "새로운 로마"라고 불리면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무었보다도 황제가 거처하는 수도였기에 그가 임명한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높은 권위를
지녔다. 언어·문화적 이질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지역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고,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느냐는 문제로 결국 서로 등을 돌린다. 이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교회 지도자 150명은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
시며"라고 선포하면서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다(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 지역 교회에서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나온다고 언급되
기 시작하였고, 1014년 로마 교황 베네딕도 8세가 381년 공의회 고백문에 성령이 성부뿐만아니라
"성자에게서(Filioque)"나온다는 문구를 공식적으로 삽입하였다.
동방 정교회는 교부들이 합의한 신앙 고백문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로마 카톨릭의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54년 7월16일 교황 대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성소피아 성당 미사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파문하였다.
이 날 이후 라틴 로마 서방 교회와 그리스 콘스탄티노플 동방 교회는 완전히 갈라저 오늘날까지
갈라저있다.
서강대 종교학과 강사 / 캐나다 매길대 이슬람 연구소 박현도
첫댓글 좋은지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