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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추워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눈도 아니고 비가. 지난 한 주간 마치 봄을 맞으려는가 싶을 정도로 따스한 겨울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간을 청산하려는가 비가 내립니다. 글쎄, 비 그치면 추워질까요? 큰 추위가 예보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역시 기후변화 탓인가요? 아무튼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겨울이 겨울다워야지 벌써 끝내고 봄을 맞아서는 안 됩니다. 하기야 이제 겨우 반이 되었습니다. 남은 반이라는 기간 속에 어떤 추위를 맞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난 12월 정도의 추위는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야 몹쓸 것들 냉동시켜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도 얼어버리면 쓰겠는데 ----
다음 주에는 설날 앞이네요. 올해는 빠릅니다. 이왕 먹을 것 빨리 먹지요. 그런데 올해는 여태 먹던 나이를 줄여준다고 합니다. 정부가 뭐 이런 선물까지 챙겨주지요? 먹든 말든 우리끼리 하도록 그냥 내비둬도 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뭐 돈 내고 받는 것이 아니니 받아두지요. 나이 줄여준다고 주름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노령연금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좋아할 일도 아니지요. 아마 정년퇴직을 한 해 연장 받는 사람들은 반가운 일이겠네요. ㅋㅋ 덕에 70대 꺾는 것을 한 해 연기했습니다. ㅎㅎ 자 명절을 앞둔 한 주간인데 건강하고 즐겁고 평안하기를 빕니다.
더불어 오늘도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1월 14일 김종우 목사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잠언 13 : 12)
<3000년의 기다림>
소원 세 가지를 대십시오. 생각해봅니다. 나에게 이런 혜택이 온다면 무엇을 구할까? 이야말로 일생일대 인생역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입니다. 마치 로또 한 장 사놓고 주말까지 꿈꾸는 기분입니다. 소원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나, 세상에! 어쩌면 나이마다 사람마다 다른 소원들이 나오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업 성공, 대학 입학, 환상적 애인과의 만남, 연인의 마음 얻기, 취업, 신기술 개발 등등 얼마나 많습니까? 연예인이라면 또 다른 소원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연말의 연예 대상을 꿈꿀 수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주연상이나 작품상, 감독상을 바랄 수도 있겠지요. 세상 살면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소원이 한두 가지입니까?
희망은 절망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저러한 소원들을 만들며 지냅니다. 어린 시절의 소원과 청소년 때 그리고 자라서 바라는 것들은 당연히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형편이 좋든 나쁘든 소원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런 사람이 무슨 소원이 있겠어? 하지만 의식주 걱정 없다고 해서 인생 종치는 것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꿈을 꾸며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사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소원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룬 소원보다는 이루지 못한 소원을 안고 살다 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소원을 가지는 것이 무용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이야기 속에서나 보던 정령(精靈)을 만납니다. 상점에서 어찌어찌 얻은 호리병의 입마개가 깨지는가, 했더니 그 안에 갇혀 있던 정령이 연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감사의 대가로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 합니다. 하기야 그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줌으로 해서 자신도 완전히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정령도 자유를 희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아무튼 갑작스런 사태에 이것을 믿어야 하는지 현실인지 그리고 도대체 이 마당에 무슨 소원을 말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단 시일을 미룹니다. 글쎄 소원을 말하는 것도 기한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중년의 작가 여인과 정령의 만남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갑니다.
소원 세 가지 내놓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평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거나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선택하기 어렵겠지요. 반대로 평소 이렇다 할 꿈도 없었다면 이 또한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뭘 말해야 하지? 본인 스스로 당황할 것입니다. 그럴 일이 행여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면서 소원 몇 가지는 품고 살아야 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구태여 그렇게 많이 꿈꾸지 않아도 몇 개는 가지고 추진해보는 것도 삶을 힘차게 만들 수 있는 동기가 아닐까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은 만들지 말아야지요. 본인도 힘들 것입니다.
시간이 천연되면서 정령 ‘지니’는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기는 이야기 좋아하는 알리테아가 그렇게 유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이야기 소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3천 년의 숨겨진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출발은 그 유명한 솔로몬 왕입니다. 시바 여왕을 좋아해서 찾아갔답니다. 세상에! 성경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원본 훼손 소송을 걸지는 않으실라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왕을 좋아하던 지니가 막강한 연적을 만났습니다. 지혜의 왕을 상대하다니, 결과는 뻔합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그만 정령이 되어 호리병에 갇혀 버려집니다. 지니의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참 뒤에 한 여인의 손에서 밖으로 나옵니다.
뭔가 잘 되어 가나보다 했는데 그 여인은 사랑에 환장(?)해서 지니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직전 그만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렇게 경고해주었음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입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세 번째 소원을 목숨이라고만 말했어도 길이 생겼을 텐데 말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지니는 다시 자유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또 호리병에 갇힙니다. 몇 번의 기회는 될듯하면서도 무위로 그칩니다. 드디어 긴 시간을 흘러 알리테아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갇힌 정령이 이야기꾼을 만난 셈입니다. 제대로 된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또 다른 연애가 됩니다.
세상을 다니며 강의를 하는 서사학자가 운 좋게 기나긴 역사의 이야기를 안고 있는 대상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짝이 잘 맞을까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에 따른 화면 또한 잘 따라주고 있으니 이야기를 그림, 그것도 움직이는 그림으로 봅니다. 재미가 배가 됩니다. 음향효과도 좋습니다. 좀 기발한 생각입니다. 사전지식도 없이 시간에 맞게 보았는데 별난 세상을 구경하고 나온 기분입니다. 물론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는 합니다. 만들기 힘들었겠지요. 영화 ‘3000년의 기다림’(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을 보았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
우리가 배운 하나님을 정리하면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존자이십니다. 출 3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있다 없다 해서, 계시고 안 계시고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이 그냥 계신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 1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즉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때문에 우리 인생들의 육안으로는 뵐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영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좀 다르게 자주 사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렇게 감히 고백할 수 있는 근거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지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소개하시며 처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 3 :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마 22 :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시니” 아멘! 뭐라 하시지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산 자의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다는 말인가 의아하지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수천 년 전 사람들입니다. 죽어서 장사되어 그 몸이 썩어 없어졌어도 진작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 자의 하나님이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더구나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유독 그 세 사람을 언급하시는 이유가 뭐지요?
성경 창세기는 잘 아는 대로 창세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열릴 때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체 50장을 나누다 보면 1 - 11장까지는 아담과 노아 시대의 이야기이고 나머지 거의 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즉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 3대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 비중으로 본다면 창세기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을 본다면 ‘창세기’ 즉 창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길게 나올듯한데 그게 아니라 한 가족 3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이 아닙니다. 첫째는 당신의 백성이고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불러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 생명을 주고 그들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지요.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의 가족사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창세의 비밀이 밝혀지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그 후 제자들을 통하여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비로소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말씀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찾아보면 우리는 그 비밀을 읽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로 그 비밀 가운데 하나를 찾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여행이 되리라 기대가 됩니다.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창 12 : 1 - 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0년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부부 나름대로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즉 첩을 얻게 되지요. 오직 자식을 얻으려 하갈을 아내로 맞이해 결국 아들을 얻습니다. 그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리고 또 10여 년 세월이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창 17 : 15 - 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약속하신 아들을 주기 전 아브라함 부부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사래에서 사라로. 그 이름들 속에는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아브라함 부부를 사용하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지요.
어쩌면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실제적인 장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과 언약하지 않으십니다. 창 17 :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에게 이미 아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아들을 약속하시고 결국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삭과 언약을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구원 사역의 비유입니다. 비밀이지요. 그래서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 말씀합니다. 하나의 가족사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을 당시 본인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 당사자에게 그런 숨겨져 있는 사실을 말씀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먼 훗날 이루어질 일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고 나서 이 가정에 분란이 생깁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해도 그 출생 신분은 전혀 다릅니다.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에게서 나온 아들이고 이삭은 여주인 사라에게서 나온 아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사람의 뜻대로 나온 종의 아들이고 반면 이삭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온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 둘 사이에 다툼이 생깁니다. 창 21 : 8 - 9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종의 아들이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논 것입니다. 표현이 순해서 그렇지 어떻게 보면 핍박한 것이지요. 왜 그랬습니까? 이스마엘은 알았습니다. 이제 장자권이 내가 아니라 이삭에게 갈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여태 아무 문제없이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지내왔는데 갑자기 정실의 소생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가 흔들리겠지요. 어쨌거나 자기는 첩의 소생입니다. 그러니 신경질이 나는 일입니다. 그 잔치가 기분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그것을 보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10절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그러니 아브라함의 마음 또한 편치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 또한 단호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이 사건이 비유이고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신약성경이 해석해줍니다. 갈 4 : 21 - 26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아멘! 이 사건이 비유라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두 언약이라는 것이지요. 즉 이스마엘은 첫 언약(구약)이고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새 언약(신약)이고 예수님 오셔서 전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초림 때 율법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은 결국 이방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의 씨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에게만 적용됩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두 예루살렘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전자는 육으로 난 자이고 후자는 영으로 난 자란 뜻입니다. 마치 율법으로 난 자와 복음으로 난 자를 비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새 포도주 복음이 왔음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묵은 포도주만 고집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만 고집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였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 죄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죄의 종노릇만 하였지 죄에서 해방될 생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갈을 허락하셨을까요? 당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비밀입니다.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나왔습니다. 실제적으로 처음 난 자입니다. 하지만 율법 아래 난 자는 종일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처음 택함 받은 자들이라 주장하지만 율법에 매여 있다면 종일뿐입니다. 결국 버림받을 것입니다. 이제 육으로 난 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영으로 난 자, 곧 약속의 씨만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8 : 11 - 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본 자손들이 누구입니까? 소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자손들이 영적인 자손들을 핍박합니다. 그것도 이미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갈 4 : 28 - 3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멘! 2천 년 전 이삭의 입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인들 사이에는 다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고 나서 상황은 변합니다. 유대인들 속에 소용돌이가 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은 성령으로 나신 자 예수를 핍박하고 나아가 육으로 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갈 3 :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즉 이삭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죠. 그리고 그 이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다시 한 군데 말씀을 봅니다. 롬 9 : 7 - 9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역시 같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삭을 통해서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근거하는 줄 압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혈통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삭을 이어 야곱의 시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가 있어서 그 씨가 나뉩니다. 반면 이삭은 아내가 하나입니다. 이번에는 한 아내에게서 난 두 아들이 나뉩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통하여 쌍둥이를 갖게 됩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복중에서 둘로 나뉩니다. 창 25 : 22 - 23 “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말 1 : 2 -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이 부분을 신약성경에서 설명해줍니다. 롬 9 : 10 - 13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서 장자권도 취합니다. 야곱은 이긴 자(이스라엘)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 편에 서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듯 이삭을 통하여 이어지고 야곱(이스라엘)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세상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자손들이 지금도 싸우고 전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 또는 기독교와 모슬렘의 대립 양상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세상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율법과 복음으로 갈라집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초림 때 유대교와 예수교입니다. 다음에는 한 배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또 나뉩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재림 때 이긴 자와 버려진 자입니다. 이긴 자 편에 서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그것으로 구원이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둘 다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그 둘이 나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예수 그리시도를 영접하였다 하여 이삭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때 나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거기에는 이스마엘도 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씨요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즉 그들만이 살았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보다 그들 편에 서야 생명과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 첫걸음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행 4 :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았다고 전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구원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삶을 지속할 기회가 없었다면 말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던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삶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당신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갈 시간이 남았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노정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계속 불평 원망 배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결국은 광야에서 자기들의 인생을 끝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천국으로 가는 노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 노정에서 불평 원망 배역을 행하면 역시 약속의 땅 천국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도 아니고 에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입장에 서면 구원은 완성되지 못합니다. 같은 씨를 받았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배에서 나왔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여전히 모세를 고집하고 복음이 왔는데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으면 구원의 여정은 끝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한 배를 탔다 하여도 배역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따른다고 믿었던 당시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주님은 물리치셨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목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들이 먼저 주님의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먹이는 양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초림 때 예언의 말씀을 무시했던 목자들이 망한 것처럼 오늘날 이 마지막 때에도 예언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목자들이 같은 운명을 당할 것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시대에 합당한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소경이라면 그가 주는 양식은 거짓입니다. 그런 목자를 따르면 함께 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24 : 45 - 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아멘! 때를 따라, 때에 합당한 양식을 주는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침에는 아침 양식, 점심에는 점심의 양식 그리고 저녁에는 저녁의 양식을 주는 목자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이루실 예언의 말씀을 주는 목자를 찾아가야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닫으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계 22 : 18 -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 말씀에 더하거나 빼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4 : 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 말씀을 가감하면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잠 30 :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행입니다.(계 2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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