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에게는 고유의 등번호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티비 중계를 볼 때 등번호를 통해 선수를 식별하고는 하지요.
그리고 등번호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런 등번호는 어떤 방법으로 채택되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축구가 럭비에서 분리된, 그야말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기의 축구 포메이션 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방에 8명의 공격수를 배치한 1-1-8포메이션입니다.
8명이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양 사이드 선수들은 짤려서 나오네요 ㅎㅎ
전선에 8명이 일렬로 배치가 되어 있고 센터하프 1명과 풀백 1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센터하프는 중앙 미드필더, 풀백은 최종 수비수 개념입니다)
현재 럭비에서는 여전히 이와 유사한 포메이션을 쓰고 있습니다. 축구가 럭비에서 처음 분리됐을때만 해도 축구는 발로 하는 럭비였으니 포메이션도 비슷했겠지요.
게다가 이 시기의 오프사이드는 럭비와 비슷하게 전진 패스는 무조건 오프사이드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축구는 드리블과 몸싸움의 향연이었죠.
허나 1925년도에 영FA는 새로운 오프사이드 룰에 대해 발표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전에도 공격축구를 위해 오프사이드룰의 개정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포메이션이나 전술적인 혁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1925년의 룰 개정은 축구 자체를 바꿔 버리게 됩니다).
바로 현대의 오프사이드 룰과 동일한 기준이 되는 공을 받는 선수 앞에 2명의 수비수가 있다면 그 선수는 온사이드다라는 것이죠.
이 룰은 현재에도 적용이 될 정도로 축구 역사상 혁신적이고도 대담한 룰 개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경기에 1골 정도밖에 나지 않아 지루하던 축구가 골이 3골이 넘게 터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클럽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최전방에 5명의 공격수만 남기고 풀백을 2명으로 늘리고 센터하프를 3명으로 늘리는 것이죠.
이런 전술이 유행하던 1920년대 티비의 보급으로 티비 시청자들이 티비로는 선수를 식별하기가 힘들다는 불만이 늘어가자 영 FA는 백넘버를 도입했습니다.
이 포메이션이 백넘버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백넘버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 당시는 단순히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코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백넘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특히 수비진에서요.
변화의 시작은 아스날 전설의 명장 허버트 채프먼이 개정된 오프사이드 룰에 대비해 세명의 센터하프 중 1명을 센터백으로 내리면서 축구 전술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감독의 것이 아니라 영국의 위대한 공격수 찰리 버컨의 공이긴 하지만요, 후대의 요한 크루이프와 비슷한 캐릭터인데 이 사람은 수비적으로 좀 더 강조를 한 사람이지요)
물론 부족해진 중원 숫자를 커버하기 위해 5명의 공격수중 8번과 10번을 아래로 내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M-W 전술입니다.
8번과 10번이 최전방에서 약간 뒤로 쳐저 미드필더와 공격을 연결해 주면서 종횡무진하게 되자 이 인사이드 포워드들이 팀의 에이스라는 인식을 사람들은 가지게 됩니다.
(특히 오른발 잡이가 많은 상황에서 인사이드 포워드가 가장 활동하기 좋은 포지션이 10번이었죠. 8번은 오른발 잡이가 하게 되면 고립되기 쉬운 포지션이었다고 합니다)
채프먼의 혁신은 그대로 매직 마자르로 일컬어지는 헝가리 대표팀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적인 백포의 기본 토대가 되는 백쓰리를 선보이게 됩니다.
포메이션이 이상해 보이실지 몰라도 실제 저 당시 6번(자카리아스)이 미드필더 겸 센터백적인 움직임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리베로의 초창기 모습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백3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백4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백4의 초기 형태라고 봅니다.
실제 매직 마자르의 백넘버는 제가 그린 포메이션도와는 약간 다릅니다. 잉글랜드의 선더랜드가 위장 백넘버로 재미를 보기 시작한 이후 위치를 나타내던 백넘버의 개념이 약해지고
선수 개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번호가 부여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죠. 그래서 백넘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글의 일관성을 위해 백넘버를 위치에 따라 부여하겠습니다.
매직 마자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펠레의 브라질의 시대가 열립니다(1958~1970)
이 시기의 브라질은 헝가리의 변형 백4에서 더 발전된 플랫 백4 시스템을 선보이면서 현대축구의 근간이 되는 424 시스템을 선보이게 되죠.
그 유명한 펠레는 10번이었죠. 그리고 펠레는 단순히 최전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면서 필드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던 그야말로 슈퍼 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포인트는 유럽에서 사이드백, 즉 풀백들은 수비수였습니다.
어원 자체가 풀백(Full-back)이니 최종 수비수라는 인식이 팽배했었고 그 누구도 풀백을 공격적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브라질을 위시한 남미에서는 유럽의 풀백을 라떼랄(Lateral)이라고 부릅니다. 플레이 위치의 높낮이에 상관 없이 측면 요원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인식차이 덕분에 남미축구에서는 풀백의 오퍼래핑이 활발히 이루어 졌고 현대축구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 풀백의 오버래핑을 통한 중원에서의 숫적 우위를 점한다는 개념이 남미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죠.
브라질 사람들에게 카푸를 제치고 최고의 오른쪽 풀백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카를루스 알베르투가 이 시기의 라떼랄이었죠.
참고로 최근의 4-4-2는 브라질의 4-2-4에서 7번과 11번이 좀 더 후방으로 내려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들의 축구를 Jogo Bonito(Beatiful Game) 이라고 칭하기 시작했고 상대방을 그야말로 압살시키는데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던 시기였습니다.
(원래 Beautiful Game은 단순히 재미있는 경기에 그치지 않고 고양이가 생쥐를 가지고 놀듯 압도적으로 이기는 팀에게 붙여주던 찬사에서 시작된거죠. 요한 크루이프나 아리고 사키, 로바노프스키도 이 Joga bonito를 추구하면서 많은 찬사를 얻어낸 감독들이죠)
그리고 1974년 네덜란드는 이 4-2-4에서 한명의 공격수를 미드필더로 채우고 물흐르듯 이어지는 패스축구의 상징인 4-3-3(3-1-3-3)을 선보이게 됩니다.
현대축구의 혁명가 크루이프는 선수 시절에도 굉장히 특이한 기행을 보여주던 선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백넘버인데 보통 레귤러 멤버가 11번 이상의 번호를 다는것은 거의 없던 일이었는데, 자신은 9번의 자리에 뛰면서 항상 14번을 달았었죠.
그 이유는 아직 크루이프가 밝힌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크루이프는 일반적 통념, 고정관념을 깨버리기를 원하던 사람인지라 백넘버도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반하는 숫자를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14번은 유럽에서도 별 의미 없는 번호중 하나죠.
이 포메이션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한다면 스팔레티 감독이 최초로 썼다고 알려져 있는 무톱(Topless)전술을 이미 74년도의 선수 크루이프가 보여줬다는 점입니다.
선수 말년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지만 전성기의 포지션은 엄연히 최전방 공격수였죠.
포지션 파괴를 통한 상대 수비교란과 공간창출을 보여줬던 그야말로 대 혁신적인 선수였습니다만, 푸스카스의 헝가리와 더불어 가장 불운한 준우승팀의 에이스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W-M에서 시작된 혁명은 현대적인 4-2-4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4-4-2와 4-3-3으로 변형이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10번은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에이스의 번호로 이어졌고 7번과 11번은 기술좋고 드리블 돌파에 능한 사이드 요원을 뜻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번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뜻하는 말이 되었고 8번은 중앙 미드필더, 2,3번은 사이드백을, 9번은 스트라이커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실제 감독들의 인터뷰 원문을 보면 우리팀에 'No.9'이 필요하다, 'No.4'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합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것을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올립니다.
감독들의 선수 영입에 관한 인터뷰를 볼 때 참고하시면 재미있으실 겁니다. 지금은 해고된 아르헨티나 바티스타 감독이 코파때 부진하자 우리팀에 'No.9'이 필요하다고 했고 이를 언론들이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고 재해석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10번이 에이스인 경우가 많은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이스 번호는 전통적으로 7번이었죠. 이는 사이드 유나이티드가 전통적으로 사이드 의존도가 높은 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