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성전과 사도직 그리고 사회교리
1열왕 8,1-13; 마르 6,53-56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5주간 월요일); 2024.2.5.
연중 제5주일이었던 어제 우리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이 이끄는 데 따라서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복음 선포의 수단인 사도직에 대해서 묵상한 바를 전해드리면서, 사회교리에 대해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풀려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삼백여 년 만이었고,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의 지붕을 금박으로 둘러 놓아서 외국 디아스포라에 살다가 이 성전을 순례하러 오는 유다인들이 멀리서도 햇빛에 반사되는 금박 지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이 성전의 맨 안쪽에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至聖所)를 두었습니다. 두터운 휘장으로 가려 놓아서(탈출 26,32-33)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속죄제사를 봉헌하는 사제들만 혼자 들어가 분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 중 속죄일에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레위 16,32-33), 평소에는 레위 지파의 사제들이 당번을 정하여 분향하는 것이 사제직의 관례였습니다(루카 1,8-9).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을 거두실 때 이 두터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르 15,38). 그 뿐만 아니라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으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습니다(마태 27,51-52). 이러한 두 복음사가의 증언은 대단히 상징적인 메시지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동한 사제들과 이들이 장악했던 유다교 성전 질서가 모조리 무너졌다는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공생활 초기에 일으키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하여 성전의 시대적 사명이 종식되었음을 밝히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사도 바오로는 대단히 상징적인 이 사건 속에 담긴 계시적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그리스 이방인으로서 신자가 된 교우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1코린 3,17; 6,19). 그러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고자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는 성령께서 살고 계시면서 신자들을 기도와 행동을 통해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계신다는 진리를 가는 곳마다 일깨워 주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성전은 단순히 전례가 거행되는 건물로서의 공간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의미는 축소되었습니다. 즉 어디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상대화된 것입니다. 그 대신에,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전 신학이 신약에 와서는 공동체 신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입니다.
신자들을 공동체로 모이게 하는 기회는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해 주는 성사는 신자들을 세례와 견진, 고해와 성체, 혼인과 성품 그리고 병자 성사 등으로 구별됩니다. 이를 통해서 사람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성장하며, 화해하고 일치하며, 가정과 교회의 일치를 이룰 일꾼을 탄생시키고 마지막으로 병고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을 받습니다.
성사의 은총을 내면화시키는 기회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혼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염경 기도,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 기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네 영혼이 생기를 돋우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사는 전례라는 예배 형식 안에서 거행되는데, 이 전례에서 거행되는 모든 성사는 하느님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로써 시작되고 마무리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기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입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일어난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게 해 주는 성모송과 그리고 이를 주요 수단으로 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관상하게 해 주는 묵주 기도도 신자들에게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을 공동체로 일치시켜주는 외적 기회가 성사요 내적 기회가 기도라면, 새로운 성전인 신자들의 공동체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처럼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도직 활동을 실천하는 삶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의 직무로서, 예수님께서 살고 일하신 대로 복음선포 활동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고 싶어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활동을 계승해야 할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도직 활동이 과연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대고 싶어 할 정도로’ 사회적 매력이 있는지, 또 ‘손을 대면 다 구원을 받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도직 활동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자리잡아야 하고, 또 이 현존을 지속적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을 위해 반포된 교황교서 ‘아시아 교회’ 문헌에서 열 가지의 공동선 과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만, 그 첫 번째가 가톨릭 사회교리를 알리고 실천하는 사도직 활동이었습니다.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 전체를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사회 교리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발전을 위하여 투신하는 신자들이 교회 가르침의 이러한 귀중한 요체에 대하여 확고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복음 전파 사명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리하여 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은 교회의 사회 교리 분야에 대한 굳건한 준비를 신자들에게 ─ 모든 교육 활동 안에서, 특히 신학교와 양성 기관들에서 ─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 특히 공적인 생활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남녀 평신도들이 복음의 누룩으로 시민 사회와 그 구조들에 영감을 주고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이러한 가르침 안에서 올바르게 양성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인간 발전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행동 노선들을 제시할 것이며, 인간의 인격과 인간 활동에 대한 거짓된 개념들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32항).
이 대목에서 근거로서 제시된 교회 문헌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를 강조한 41항이었습니다.
“(복음화의)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회 교리’를 이용한다. 오늘처럼 어려운 상황 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제시하는.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을 더욱 정확하 게 의식하고 이것이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된다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규정하는 데에도, 그것을 최선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점들이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라는 것이 보이고, 개발 자체의 문제에 관한 분석이든 현재의 곤란을 타개하는 수단이든 이 본질적인 차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산주의 사이에 낀 ‘제3의 방도’가 아니며, 서로 상충되는 해결책들 사이에서 덜 극단적인 차선책은 더욱 아니고, 자기 나름의 범주를 갖는다. 하지만 또한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니, 그보다는 인간 실존의 복잡 다단한 현실 들을 사회 안에서 또 국제적인 차원에서, 신앙의 빛과 교회 전통의 빛 안에서 주의 깊게 고 찰한 결과를 면밀하게 형식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그 중요한 목표는 이러한 현실들을 해석하 는 데에 있으며, 인간과 그의 소명, 지상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소명에 관한 복음의 가르 침의 노선에 그런 현실들이 상합한지, 아니면 위배되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그 목표는 그리스도교다운 행동의 지표가 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영역 이 아니라 신학의 영역에, 특히 윤리신학의 영역에 속한다.
사회 교리를 가르치고 널리 펴는 일은 교회 편에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에 지표가 되는 데 목적을 둔 교리이므로 당연히 이 교리는 ‘정의에의 투신’을 유발한다. 물론 이 투신은 각 개인의 역할과 소명과 환경에 입각하여 발생하기 마련이다. 악과 불의에 대한 단죄 역시 사회 분야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 봉사직의 일부이며, 교회의 예언적 역할의 한 측면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점은, 선포가 단죄보다 언제나 더 중요하다는 것이며, 후자는 전자를 무시한 채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선포야말로 참다운 연대성을 간직하고 더 고상한 동기에서 온 힘을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회칙 ‘사회적 관심’, 41항).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사회적 매력을 발산하고 구원적 효능감을 체험시켜주기 위해서는, 식물이 뿌리와 줄기를 거쳐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확고히 뿌리 내리고 근대 이후 교회의 역사적 체험에서 형성되고 검증된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회교리는 부활의 사회적 행동을 지향하는 교회의 가르침으로서 우리의 사도직 활동에서 사회적 매력을 발산하고 구원적 효능감을 제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