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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TV시청을 하고 있는데, 오른 쪽 엄지발가락이 화끈거리며 쿡쿡 쑤신다. 그제야 낮의 일이 생각나 발가락을 만져보니 벌겋게 부어 있었다.
구월의 주말 날씨가 하도 좋아서 이불호청을 삶아 깨끗이 씻었다. 마당의 빨래줄이 주인 아주머니 키에 맞춰 있어서 내겐 너무 높아 몇 번 폴짝 폴짝 뛰면서 널었는데, 그 때 발가락 위쪽이 마당보다 좀 높은 댓돌의 옆면에 긁힌 것이다. 피가 나지는 않고 고춧가루 뿌린 듯 빨긋빨긋했다. 예사로 생각하고 다른 일까지 마친 뒤 목욕탕엘 다녀왔다. 소독약도 바르지 않고.
가족들은 서울에 있었기에 벽지점수를 얻어 대구시에라도 전입해서 아이들 교육에 신경 써야겠다란 생각으로 동해안 ㅇㅇ지역에 내신 신청을 하니 학교에서 말렸지만 기어이 신청서를 내어 발령 받았다. 대구에서 그 곳까진 급행버스로 4시간 걸렸다. 1년전만 해도 7시간 걸리는 오지였다. 아이들 아버진 기독교계통의 '숭실'에서 근무하다가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도 없고 이런 저런 이유로 평소 하고 싶었던 공장을 운영하겠다며 나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미련한 나는 "그라이소" 쉽게 대답한 것이 집까지 팔게 되었다. 나는 다시 복직해야만 될 처지였다.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따갑다. ... 이래서 아내의 현명한 내조가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싶다.
발은 점점 화끈거리고 발등까지 불그레하게 부어올라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화기도 없었고 약국이 어디 있는지 알아두질 못했다. 주인집에 부탁할까 생각도 했지만 주변머리 없는 맹한 내 성격이 그냥 버티었다. 몸에 열이 나며 고통스러워 누웠다 앉았다 하다보니 새벽 세시였고 이상하게 통증이 덜해서 잠이 들었었다.
다음날 아픈 티가 나지 않게 화장을 좀 짙게 하고 출근을 했다. 각 교실을 한 바퀴 돌고 조회도 마치고 1교시 수업이 없어서 보건소 다녀올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머뭇거리고 있으니 교감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류과장 어디 아프지?" 순간 나는 s눈물을 툭 떨어트린 것 같다.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니 그 지역 출신 여교사를 불러 나를 보건소로 안내해 주었다. 진찰을 마친 의사선생님은 병명은 이야기 하지 않고 대구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하시면서 손으로 무릎아래를 가리키며 "여기까지?" 다시 무릎위를 가리키며 "여기까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다리절단 부위를 암시하며 환자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모양인데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교감선생님은 아무 걱정 말고 빨리 가서 완쾌하고 오라며 서울보다 가까운 대구 가라고 권하셨다. 무서운 속도로 엄청나게 부은 발에 신발을 신을 수 없어 한 쪽 발만 신발을 신은 채 절름거리며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대구에 도착했다. 일단 친정으로 갔다. 어머닌 멀리 가셨지만, 아래채에 이모가 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모를 보자마자 한참을 흐느꼈던 것 같다.
이모와 의논하여 이름이 알려진 병원으로 가서 주사를 맞고 약처방을 받아 그날 밤엔 잘 잤다. 서울엔 연락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다. 잘 사는 둘째 시누이의 도움으로 변두리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으나 원료발주는 현금이고, 계면활성제등 방직공장용 제품값은 심지어 6개월 어음으로 받기도 하니 불안정한 상태인데. 또 내 병도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다음날 원장님께서 " 사실 어제는 상당히 위험했다. 패혈증이었는데, 오늘은 위험단계는 지났으니 걱정말고 내일 다시오라."고 하셔서 그때야 난 깜짝 놀랐다. '패혈증'의 위험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다리가 좀 이상했다. 살빛이 푸르팅팅하고 얼룩덜룩하여 흉칙하였다. 원장님께서 무척 당황하시며, 이건 주사쇼크라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으니 다른 종합병원엘 가보라며 내 얼굴을 피하시는 것 같았다.
위험한 상태임을 직감하고 깊은 생각끝에 한의원을 찾기로 했다. 상당히 유명한 'ㅁ'한의원으로 가서 원장님 특진을 받으니 '수풍'같은데 상처부위에 물이 들어가지 않았느냐 하셔서 목욕탕엘 다녀왔다고 하니 한약을 한 재 먹어야 한다기에 돈 준비가 되지않아 다음날 오겠다하고 집에 와서 궁리를 했다. 우선 초등하교 동기인 고향친구에게 전화로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깜짝 놀라며 "아이구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노? 좀 기다려봐라 내가 선이한테 알아볼게 가가 잘 아는 한의원 있다.그리 용하단다." 좀 있다 연락이 되어 함께 선이네 집에 갔고, 선이는 한의원에게 연락해서 집에 와 계셨다.
진찰을 마친 한의사는 "걱정 마이소. 내가 꼭 나사 드리겠습니다." 하시곤 내일 아침 일찍 우리집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고 가셨다. 내게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온갖 수다를 떨었고 선이는 냉장고 안의 맛있는 음식을 꺼내어 점심을 든든히 먹여주었다. 그날 그 맛있던 통배추 김치.
다음날부터 치료가 시작되었는데, 꽃꽂이용 침봉같은 큰 침을 꺼내어 좀 아플 겁니다 하더니 다짜고짜 내 발등을 찍었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방에 튀었고 나는 소리소리 질렀다. 바깥에서 들으면 돼지 잡는 소리 딱 그소리였을 거다, 몇 번 더 내리 찍더니 솜으로 닦고 찍힌 발등 위에 약쑥을 수북이 얹고는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예상밖의 치료였고 사전에 주의말씀도 없었는지라 미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의사의 레이저를 쏘는 듯한 눈이 무서워 나는 온 몸을 비틀며 음-음=신음소리만 질렀고 곁에 서 있던 이모도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이튿날 다리를 보니 신기했다. 환부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즉 가운데로 줄어들고 있었다. 한의사는 이대로 이삼일 더 치료하면 낫습니다. 하시기에 찡그리는 건지 웃는 건지 스스로 발을 내밀었다. 그 날은 전날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또 소리를 지르니 중간방에 있던 네 째 동생이 잔인한 연설을 했다. "누부야 ! 나이 몇 살이고? 아프지 당연히 아프지 이순신 장군도 화살 맞은 것 스스로 뺄 때 안 아파서 태연했다고 생각하나? 아이구 참! 마음먹기 달린거야. 뒷집에 다아 들리겠데이." R.O.T.C 장교로 제대하고 취업준비 중인 동생은 아직 군인 자세로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고 매정스런 얼굴!
치료 마지막 날은 나에게 약속을 해달라고 했다. 다리는 피부색이 회복되었고 환부는 발등위에 깎은 밤톨만한 크기로 몰려서 딴딴했다. 그 부분은 이제 칼로 수술해야 하는데, 당시 한의사는 수술하면 위법이니 치료에 대한 누설을 하면 치료해 줄 수 없다고 하셔서 약속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마취도 않고 번개같이 환부를 갈라 힘껏 썩은 피를 짜니 그 고통도 사람 잡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꽉 물고 있었다. 이 번에도 그 위에 약쑥을 한 줌 얹어 태우며 흉터는 거의 안 질 겁니다.라고 할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내가 이 순 신 장군의 후손이 되어 있었던 거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면서 그만하면 참 잘 참았다고 칭찬해주신다. 나도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약속한 치료비만 드리고 올케는 마침 외출중이라 차 한 잔 대접 못하고 또 사례인사도 없이 보내드렸다. 가끔 그 일이 기억나면 등이 오그라지며 부끄럽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더니. 그래도 하느님께 그 분을 위한 화살기도는 바친다.
아직 발등이 다 아물지 않았는데도 학교일이 걱정이 되어 조급해졌다. 당시에는 임시교사제도가 없어서 한 사람이 결근하면 동료교사와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직장으로 되돌아가기 전 명수와 선이에게 고기 한 번 굽겠다고 연락했더니 명수가 말했다. " 고기는 무신 고기. 우린 고기 자주 먹는다. 우리 사이에 쪼매 남은 정마저 띨라카나. 네 발 다 낫고 겨울방학 되거들랑 대구 오너라. 실컷 만나자." ...그랬어도 그 때 만났어야 했다.
막상 내 일상으로 돌아오고 휴가기간엔 서울의 가족에게 다녀오느라 몇 번의 방학을 그냥 보내고 간신히 어느 예식장에서 명수를 만나 선이의 소식을 물었다. 선이 남편이 도박에 빠져서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자랑스럽던 아들 요절하고 숙대 나온 며느리도 남 되고, 조그만 식당 운영하면서 근근이 산다고 할 때,나는 잠깐 정신이 아득하였다. 나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아보여 내가 소홀했는지. 사는게 뭐라고 일상을 핑계로 은혜갚는 일을 다음 다음으로 미루었는지. 그 날로 식당엘 찾아가서 대신동 좀 높은 지대의 그 집에서 밥 한 그릇 팔아준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날도 동그란 눈, 우리가 미국코라고한오뚝한 코, 꽃잎같은 입술로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모든 슬픔을 꼭꼭 감추고.
몇 년 전이던가 당시의 교감선생님 전화번호를 겨우 알아내어 안부인사를 올렸더니 무척 반가워 하셨는데, '독일병정'이란 별명 답게 카랑카랑하고 논리적인 간결함은 사라지고 부드럽고 푸근한 할아버지상이 떠올랐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와 내 앞의 일을 말끔히 해결하여 주는 분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정확한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래전에 젊은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서 하늘 나라로 떠난 지 며칠 후에 발견된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난다.그녀의 방문 앞에는 "남은 밥(음식) 있으면 저의 문앞에 놓아 주세요."라고 쓴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꼭 나같은 성격이구나 중얼거리며 저렇게 극한상황을 호소하는 글귀를 무심히 보는 세상!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 란 말은 적극적인 요청을 하란 뜻일 게다. 그러나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더욱이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살던 시절엔 부탁하지 않아도 눈치를 채고 상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도우려는 사람이 지금시대보다 더 많았지 않나 싶다. 오래전 영화 '빠삐용'에서 빠삐용의 마지막 탈출 장면은 지금도 감격스럽다. 수 없이 실패를 하면서도 자유를 찾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같이 수감된 죄수 '드가' 라는 길동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명수에게 요즘 내가 대구 내려와 있으니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수술한 다리가 다시 시원치 않아서 절룩거리고 허리도 많이 아파 외출하기가 불편하니 집으로 오란다. 젊은 날 나들이 하기를 좋아하던 그녀였는데. 이젠 내 차례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주변을 살펴 봐야 한다. 지난날 그들처럼.
첫댓글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친구분들과 지혜로운 대처로 잘 회복하셨군요. 그 당시는 정말 많이 놀라고 힘드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건강관리에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참 명의를 만나셨습니다.무서운 폐혈증,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도 놀랐겠지요. 아팠던 지난 세월들을 회상하면서
참 장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할때도 있답니다. 주위에 좋은 친구분들께 정신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네요. 홀연히 옛날 생각을 하면서 써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단편소설을 읽듯이 잘 읽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세월이 가면 그 힘들던 시련의 시간들이 가슴 아픈,
때로는 잘도 참아낸 자부심으로 자신을 다지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 좋은 친구에 좋은 명의를 만나서 참고 견디는 인내심으로 패혈증을 극복 하셨군요.
세월이 더 흐르기전 그립고 고마운 친구들과 만나 정을 나누시면 합니다.
요즘도 패혈증 무섭습니다.명의를 만나는것도 선생님의 운이고 쌓은 음덕이라 생각됩니다. 선업의 결과라 여겨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패혈증으로 고통 받을 때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던 한사람 한사람 모습이 떠오릅니다. 패혈증으로 인하여 걲은 여러가지 정황들이 잘 묻어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길동무'라는 글제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내 이야기에 너무 치우쳤습니다.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