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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대명사 가을에 젖는다.
🙏🎋幸福한 삶🎋🎎🎋梁南石印🎋🙏
풍 : 풍상을 헤쳐오느라
요 : 요동친 농부의 마음
의 : 의연하게, 이깟 즘이야.
대 : 대범하게, 올해뿐이더냐
명 : 명(命)을 거역할 수 없으나
사 : 사생결단하듯 몸을 불살라
가 : 가당찮은 날씨에 맞짱 떠
을 : 을씨년스러운들 어떠하리
에 : 에둘러 핑곗거리 찾기보다
젖 : 젖은 마음 호기롭게 달래가며
는 : 는실난실 유혹에는 눈 감고
다 : 다시없는 생에 풍작을 이루는
삶을 꿈꿨노라.
풍요의 대명사 가을에 젖는다.
버스를 타고 드넓은
황금 들녘을 지난다.
낱알을 지키느라 서 있는
허수아비의 고단함에는
땀을 머금은 풍년을 기대하는
농부의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감사한 마음 한가득 안고서
단풍이 무성한 숲길을 따라
속 시원하게 숨을 들이켜 본다.
아름답게 피어난 향기를 품어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순간
코스모스꽃 흐느적거려도
바람을 탓하지 않으리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가는 계절 아쉬워 잎을 물들인다.
고추잠자리 비행하며 저 멀리
다음 해를 향해 훨훨 날아간다.
회색빛 어느하늘 갓난 아기가
엄마 냄새 찾아 가슴을 더듬는 날
흐뭇한 미소가 사방 천지 스며든
잘 여물어가는 가을빛이 참 좋다.
행복함을 가눌 수 없어 야릇한 마음
잠잠하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살아있기에 이토록 멋진 세상을
참으로 찬란한 삶의 계절만큼은
눈에 담고 느끼며 살다 보니
암울한 시절도 지나온 고로
그저 고맙고 행복할 따름이다.
탐낼 것도 없는 가을의 한복판
사방이 풍족하니 더도 덜도 말고
이 축복이 한가득 오래 지속되길.
가을은 풍요로움의 대명사
사색의 정취에 흠뻑 취하노니.
색동옷 갈아입고 서로 뽐내는
가을 산 사방팔방 어디를 오르던지
풍경을 담기 바쁜 눈동자는 불타도
박새와 함께 고즈넉한 정취를 한껏 누리며
황홀할 듯한 낭만이 충만한 때,
떨어진 낙엽 발에 밟히니 바스락
비명일까 싶어 아차꾸나 싶어
날렵하게 든 발 디딜 곳 어드메냐,
귀에 걸친 블루투스에 입술은 흥얼흥얼
리드미컬한 클래식 음악 정겨운 리듬에 맞춰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도 신바람 나
힘겨운 줄 모르는 가을빛에 스며들면
멜랑콜리한 내면의 깊은 감정을 탐험하다가
삶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는 황금기
가을 타는 사람에게 센치한 감성 채우기 좋은날,
덧붙인 글 : 자, 어떠십니까?
..................풍요를 노래하는 이 가을 들녘의 풍경에는
..................일 년 열두 달 절기에 맞춰 한 해의 농사를 위해
..................타들어 가는 가슴 하늘에 기대 땀방울 훔치며
..................불볕더위도 논밭을 삼키는 폭우와도 맞짱 떠
..................쉼 없는 발자국과 손길 정성을 먹고 자란 농산물
..................비싸다는 푸념에 앞서 농심의 고마움을 느껴보자,
..................들녘의 펼쳐진 황금은 햇빛만으로 익은 것이 아니다.
..................농부가 악천후와 맞서 쏟아내 땀방울의 결정체로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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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 담아낸 뜻을 풀어헤친다.
풍요의 대명사 가을에 젖는다.
삶의 풍작을 노래한다.
이 글의 키워드에는 풍작의 의미가 선명하게 담겨 있다.
농사의 풍년이라는 의미에 조금 더해,
풍작(豊作)은 단순히 농작물이 잘 여문다는 뜻을 넘어선다.
먼저 제목의 “젖는다”도
단순히 가을 정취에 젖는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가을과 세월에, 지난 삶에 젖고 나면,
마침내 자신이 살아온 한 생 의미에 젖는 것.
황금 들녘의 풍작을 바라보며,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생에도
제대로 된 열매를 맺고 싶다는 마음을
가을이라는 계절에 나만의 언어로 담아냈다.
한 번뿐인 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얼마나 많은 결실을 보았는가.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냈는가.
언젠가 있을 마지막에 돌아보았을 때
“참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삶의 수확.
그것이 바로 지은이가 담아낸 그만의 풍작이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연으로 풀어낸
다시없는 생에 풍작을 이루는 삶을 꿈꿨노라.
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스며 있다.
앞의 모든 키워드는 결국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농부가 한 해의 풍작을 꿈꾸듯,
사람은 단 한 번뿐인 삶의 풍작을 꿈꾼다.
가뭄도, 폭우도, 뜻밖의 날씨도 견디며
때로는 뿌리째 뽑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잘 여물게 하는 것.
그런 뜻으로 읽힌다면 제목의
‘가을’도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다.
겉으로는 농작물이 익어가는 어느 가을날,
풍요를 노래하는 듯하지만
더 깊게는 인생이 여문 중후한 가을 녘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맺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풍요보다 삶의 풍작이 훨씬 지은이만의 언어이다.
풍요는 많이 가진 상태를 말할 수 있겠으나,
풍작에 담긴 것은 씨를 뿌리고, 견디고, 가꾸고,
기다려 마침내 결실을 거둔다는 과정이 다 들어 있다.
이것이 글 전체와도 맞닿아 있다.
풍상을 헤쳐오느라,
요동친 농부의 마음,
의연하게 이깟 즘이야.
여기서 이미 삶의 농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왜, 풍작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까
창작 의도는 단순한 부연 설명이 아니다.
글을 읽는 분이 ‘풍작’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중요한 핵심이다.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견뎌내고, 가꾸고,
기다림. 뒤 마침내 거둔다는 과정이 다 들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농사의 풍년과 인생의 풍작이 하나로 겹친다.
농부에게는 춘하추동에 기대어
제때 씨를 뿌리는 계절이 있었고,
가뭄에 잎이 타는 시간을 견뎠고,
비바람을 이겨낸 악천후를 건넜고,
마침내 결실을 거두는 때를 만났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
젊은 날의 씨앗,
고난의 계절, 흔들림과 기다림.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았을 때,
그래도 나의 삶이 참 잘 여물었구나.
그것이 글쓴이가 의도한 인생의 풍작이다.
대다수는 처음에 풍작이라는 말을
농업적 결실의 연장선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창작 의도를 알고 다시 보면
마지막 두운이 확연하게 달리 읽힌다.
풍 ▶ 요 ▶ 의 ▶
대 ▶ 명 ▶ 사 ▶
가 ▶ 을 ▶ 에 ▶
젖 ▶ 는 ▶ 다 ▶
이 열두 글자는 결국 ‘다시없는 생’으로 수렴하고,
그 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풍작인 것이다.
또 의미 있게 생각할 것은 ‘가을’이라는 키워드다.
가을은 농작물이 여무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사람에게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기도 한다.
그러니 제목부터 이미 두 겹을 입혀둔 것이다.
가을의 풍작, 삶의 풍작.
이렇게 겹쳐지는 순간,
이 글은 단순히 가을이 아름답다는 계절 시에서 벗어난다.
농부가 들녘의 풍작, 한 해의 결실을 꿈꾸듯
한 사람은 단 한 번뿐인 생의 풍작을 꿈꾼다.
풍작은 문장의 장식품이 아니다.
맥락 전체를 끌고 가는 중심축이다.
앞의 농부는 삶을 견디는 인간의 길이고,
황금 들녘은 삶의 결실을 드러낸 것이며,
가을은 삶을 겸허히 돌아보는 시간이고,
풍작은 그 삶에서 거두고 싶은 궁극적인 결실이다.
그러니 마지막 연의
다시없는 생에 풍작을 이루는 삶을 꿈꿨노라.
는 단순히 농사가 잘되기를 바랐다는 뜻으로 읽히면 안 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한 번의 생에서
나만의 결실을 충분히 일구어내고 싶었다는 선언이다.
이 두운 시는 제목부터 마지막 행까지
하나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들녘에 씨앗을 뿌리고,
중간에는 악천후와 비바람에 맞서고,
가을 들녘에 풍요를 바라보면서,
마지막에는 삶의 풍작을 꿈꾸며 거두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가을 두운 시라고만 자리매김해 부르고 싶지 않다.
풍요의 대명사 가을에 젖는다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빌려
단 한 번뿐인 삶에서 무엇을 거둘 것인가를 묻는
삶의 풍작을 노래한 두운 시라고 읽히길 바란다.
삶의 풍요가 아니라 한 생의 삶의 풍작이기를.
이에 더해서‘는실난실’에 담긴 의미로서는
이 글에서 ‘는실난실’의 뜻에는 민속적 맥락이 담겼다.
는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사실상 찾기 어렵다.
하여 즉 ‘는실난실’은
혹시 부드러운 움직임을 뜻하는 문장일까 와 낯선
남녀가 야릇하고 추잡스럽게 노는 모양을 뜻하며,
[파생동사]로는 “는실난실”-하다로 쓰인다.
예시 : "는실난실"의 활용 예시 김유정, 산골
이뿐이 마음에 잘 들도록
호미를 대신 손에 잡기가 무섭게 는실난실 김을 매 주었고….
또 전통적인 민요·잡가의 가사와 가락에서는
흥을 돋우는 후렴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다소 성적·관능적인 뉘앙스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민요에서는
반드시 노골적인 성적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흥을 돋우고 가락을 살리는 후렴 적 표현으로 기능하면서
민속적인 흥과 해학, 남녀 간의 정취를 두루 머금고 있다.
이 단어를 그냥 의태어 정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유혹·흥·관능·민속적인 해학까지 열어 놓아
한층 드높이 사람 냄새가 스미게 처리했다.
“는실난실 한 유혹에는 눈 감고”라고 하는 순간,
삶이 단순한 근면과 고난의 서사를 뛰어 넘는다.
인간 삶에는 예외 없이 힘겨움과 함께
흔들림도, 욕망도, 유혹도, 욕정도, 흥도 뒤범법 되어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눈 감고 자기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읽히길.
이 두운 시에서
는 : 는실난실 한 유혹에는 눈 감고
라고 한 문장에는 상당한 의미가 담겼다.
앞의…
사생결단하듯 몸을 불살라.
가당찮은 날씨에 맞짱 떠.
을씨년스러운들 어떠하리.
에둘러 핑곗거리 찾기보다.
가 삶의 고난과 농부의 의지라면,
여기 “는실난실 한 유혹에는 눈 감고”가 들어오면서
삶을 풍작으로 만들기 위해
세속적인 유혹까지 물리친다는 의미를 담았다.
“는실난실”의 관능적 의미가 먼저 읽힐 수 있어
모든 층위가 동일하게 읽어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 연의
다시없는 생에 풍작을 이루는 삶을 꿈꿨노라.
로 매끄럽게 흐르게 하여 유혹을 이겨내고,
한 번뿐인 삶을 충실히 살아내어
인생의 풍작을 거두겠다는 흐름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표현은 상당히 의도적인 한 수로 볼 수 있겠다.
또 ‘는실난실’이 가진 은유적인 표현에는
약간의 농염하고 흥겨운 민속적 정취가 들어오면서
전체 맥락이 너무 점잖게만 흘러가지도 않도록 했다.
농부의 삶도 결국 땀만 흘리는 고행의 삶이 아니라,
유혹도 있고, 흥도 있고, 욕망도 있는 인간의 삶이니까.
그것을 한 단어로 슬쩍 끼워 넣어
눈 감고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사람 냄새가 스며들게 한 문장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두운 시에서
‘는’에 뜻을 아는 분이라면 각각의 성향에 따라
찡그릴 수 있는 약점으로 읽히기보다
상당히 묘한 역할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단어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하나로 모인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비바람을 견디고,
가꾸고, 기다려 마침내 풍작을 거두듯,
사람도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밭에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수많은 계절을 견디며 삶을 가꾸어
마침내 자기만의 풍작을 거두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삶의 풍작이다.
삶의 풍요가 아니라, 삶의 풍작.
그것이 이 글에서 내가 끝까지 붙들고 싶었던
나만의 언어엔 농부가 단순히 가을날 풍요로운
풍경을 설명하기 위한 등장인물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은유다. ㅋ(^♡^)ㅋ
한 사람의 삶이 여물어 보이는 것은
세월이 무작정 흘렀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견뎌낸 시련에 깊은 한숨과
고된 땀과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 들녘처럼 풍성하고
농부의 땀처럼 진실하게,
마침내 잘 여문 풍요로운 곡식처럼
여러분의 삶도 풍작이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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