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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가 아는 카페 Mon~Sun, am12:00~am12:00 원문보기 글쓴이: 내자산맡길수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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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새벽 6시,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 정류장.
자, 갑시다!!
생애 첫 해외 여행의 목적지는!!!!
일본 북해도, 삿포로입니다.
2011년 일본 원전 터지고 난 후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에서 '마냥 먼 이웃나라'로 바뀌었는데,
방사능을 두고 들끓던 여론과 세간의 관심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잠잠해지고 희미해져가자
덩달아 스스로가 그어놨던 경각심과 심각성의 기준선도 점차 모호해져 갔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고 망각의 동물이라고,
기회와 형편이 되니 슬금슬금 일본 여행에 대한 욕망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눈 쌓인 산중에서 즐기는 야외 온천]은 오래전부터 고수하고 있던 일본 여행의 로망이었는데,
현재까지 그것을 대체할 만한 아이템을 찾지 못한터라
에라 모르겠다~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란다. 이러나 저러나 갈 사람은 간다~
치졸한 자기합리화를 펼치며 결국 일본행 티켓을 손에 쥐었습니다.
로망의 첫번째 조건인 [눈 쌓인]의 초점을 맞춰 일년 중 3분의 1이 눈으로 덮혀있다는 북해도로 낙점하고
노보리베츠 온천 1박 - 오타루 온천 1박 - 삿포로 호텔 1박하여 총 3박 4일의 짧은 여정을 계획했습니다.
아침 8시, 인천공항 3층 대합실.
전날 여행 준비와 밤샘 근무로 근 스무시간 가까이 깨어있는 상태라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불면이 동반하는 두통에 눈밑이 꺼진데다 최근 독감까지 한차례 겪고 난 후라 코 밑은 헐고 뺨 군데군데엔 각질이 일어나
출발도 전인데 몰골은 이미 산전수전을 다 치루고 귀환하는 배낭 여행객마냥 초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했던 면세 인도장에서 어렵사리 전리품을 찾아 들고 돌아왔을땐 거의 반 실신 직전이었습니다.
3차례의 끼니를 거른터라 위장이 쑤실 정도로 배는 고팠지만 희한하게 음식을 봐도 식욕이 돋지 않았습니다.
- 그래도 뭘 먹어야지.
- 별로....입맛이 없어. 그냥 샐러드만 조금 먹을게.
그리곤 앉은 자리에서 닭가슴살 샐러드와 다이제스티브 한통, 샌드위치를 세개나 처먹고
부족한 광기를 채우기 위해 게토레이 두통도 가볍게 비워냈습니다.
입맛이 없어서 정말 간신히 먹었습니다.
아시아나, 땅콩항공을 제외한 외항사들은 별도의 탑승동에서 출국하는 관계로
셔틀 트레인을 타고 탑승동으로 이동합니다.
셔틀 트레인은 말 그대로 [셔틀]의 임무에 충실히 임하며 이용객들을 내려주고 다시 싣고를 반복하면서
탑승동 ↔ 여객터미널 구간을 5분 간격으로 종일 왕복합니다.
내 지난 학창시절이 오버랩 되면서 콧날이 시큰해지더군요.
교실과 매점과의 거리가 멀어 3년이 고되었던 빵셔틀의 추억이 또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두근두근, 어디로 갈까? -진에어 슬로건-
삼겹살 한근 600g이 만원, 두근이면 이만원, 두근이 두번이니까 4만원. 두근두근, 어디로 갈까? 삽겹살 네근, 내 입으로 카몬.
의식의 흐름으로 되도 않는 유모어를 떠올리곤 혼자 한참을 끅끅대며 밭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아, 들숨날숨들숨날숨~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려면 잠을 좀 푹 자야 되는데 계속 저 지경이라 큰일입니다.
이륙 후 벨트 사인이 꺼지자 승무원들이 출입국 신고서를 나눠주었습니다.
작성을 위해 접이식 테이블을 펼치려 세로 모양의 고정쇠를
앞으로 잡아뜯어도 보고 반대로 세게 눌러도 보고 앞뒤로 흔들어도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정쇠 고리와 테이블 틈새에 볼펜을 끼워 지렛대의 원리로 들어올리려는 찰나
보다 못한 일행이 조용히 팔을 뻗어 고정쇠를 옆으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곤 측은한 눈빛으로 제 얼굴을 한번 주시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치 '뭐지, 이 빠가사리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갓 태어난 침팬지도 저보다는 영리할 것 같습니다.
어서 눈을 붙여야 합니다. 상황 판단력이 눈에 띄게 흐려지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테이블을 펼치고 출입국 신고서의 빈칸을 꼼꼼하게 채워나갔습니다.
직업을 작성하는 칸이 있었는데, 괜히 뭔가 있어 보이게 아뤼스트(artist)으로 적어 내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형식상으로 적어내는거니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마는
신고서를 받아든 심사 직원이,
- 흠....아티스트?..................................................................해봐.
의 지랄맞은 상황으로 치닫으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므로 대충 회사원(worker)으로 작성 후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출입국 신고서도 적었겠다~ 간에 기별도 안가는 기내식도 먹었겠다~
이제 한숨 푹 좀 잘 요량으로 창문 덮개를 닫으려는데,
바깥 창문 틈새에 왠 머리카락 한올이 낑겨있었습니다.
출발전에는 뭔 검댕이가 묻었겠거니 대충 넘겼는데 이륙함과 동시에 지대로 촐싹맞게 나부끼더군요.
암만 생각해봐도 이 위치에는 머리카락이 낑길 수가 없는 높이와 구조인데.....................미스테리입니다.
높아진 고도와 기압으로 귀는 먹먹하고 눈알은 모래알을 섞은 것 마냥 까끌거리고
머리는 깨질듯이 아픈데 저 산만하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려면
불안정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뚜렷해지고, 이내 마음까지 평온해지면서 서서히~
잠은 절대 안오더군요. 앰뱅.
2시간 10분 비행 동안 한시간 정도를 저 쉼없이 팔락이는 멀크닥을 바라보며 너갱이를 날렸습니다.
머리카락과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천국이 이런 곳일까요? 어릴적 '천국'이라고 하면 막연히 흰 구름 위에서 뛰노는 천사들을 떠올렸는데
발전된 문명과 과학 기술의 힘으로 도달한 구름 위는 정말 무료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요하고, 고요하고, 마냥 고요했습니다.
천국은 아무래도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몇시간 뒤 지옥으로 가기로 합니다.
구름을 걷어내고 조금씩 아래로 하강하자 드디어 일본 열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크게 솟아오른 산이 보이면 '오~후지산! 후지산!'을 중얼거렸는데,
그날 비행기 타고 본 후지산만 한 열댓개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십여년 전, 서울 첫 상경하고 얼마 동안 한강 근처 고층 빌딩만 보면 반사적으로 '저게 63빌딩이제?' 하며
천진난만하게 웃음 짓던 어린 시절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스물네시간 머저리 같았던 스무살이었습니다.
지금은 한 스물세시간 머저리 같네요.
상공에서 내려다 본 미니어쳐 같은 북해도의 어느 마을.
낮 12시 30분, 신치토세 공항.
북해도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일반 구두나 운동화보다는
보온과 방수 기능이 있는 패딩 부츠가 걷는데 용이할 것 같아 큰맘 먹고 깔별로 구입해서 챙겨갔습니다만,
여행가는데 복싱화를 신고 왔다며, 일본에 누구 때리러 가냐는 핀잔만 잔뜩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제자리에서 몇번 스텝을 밟으니 누가 덤벼도 이길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습니다.
노보리베츠 온천으로 가는 방법은 JR 전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는 것과
고속버스를 타고 중간 IC에서 무료 셔틀 버스로 환승하는 루트가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것이 차비라고 주장하는 인간인지라
그나마 무료 환승이 가능한 두번째 방법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국제선 청사 1층으로 내려와 중앙에 위치해있는 인포메이션으로 가니 담당자는 잠시 부재중인지 자리는 텅 비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시련은 사람을 자주적이고 용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바로 곁에 버스 티켓 자동판매기가 있어 다가가 얼핏 보니 한자가 수두룩 빽빽합니다. 용감하지만 또 한무식합니다.
간단한 일상 일본 회화는 가능하지만 한자는 영 젬병이라 '오늘 갈 길이 멀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나와 같은 한문 까막눈을 위해 곳곳에 한글 패치가 있어 정차역을 읽는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목적지를 또박또박 읽으며 버튼을 누르고 막 지폐를 넣으려는 찰나
어느샌가 나타난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지상직 승무원이 내 귓가에 메이아이헬프유를 던졌습니다.
네이티브에 가까운 그녀의 발음에 한자에 이어 영어 울렁증까지 극심한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대답했습니다.
- 엄~~엄~~ 위 거잉 투 눠붜리붸츄 언쉔~~ 엄~ 티켓 플리즈...................(에라이ㅋㅋㅋㅋㅋㅋㅋㅋ)
발음과 추임새는 반 미국인인데, 구사하는 문장 수준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었습니다.
지상직 승무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버스 티켓을 발권 받고 66번 정류장으로 나왔습니다.
탑승 시간은 12시 50분입니다.
10여분 정도 시간이 남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타국의 설경을 눈 안에 담습니다.
눈이 잔뜩 쌓인 것에 비해 기온은 크게 춥지 않았는데,
싸다귀 바람 휘몰아치는 서울의 혹한을 헤치고 날아와 그런지 여기는 오히려 봄 날씨처럼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해 떠있을 때 생각이었고,
해가 지고나서부터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지 아주 혹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고 쌓이고를 반복하다보니
이곳에선 눈이 1미터 높이로 쌓여 있는 광경은 지극히 익숙하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진 색감은 좀 우중충하게 나왔는데 실제로는 쌓인 눈과 진흙이 묻은 눈의 위 아래 색의 대비가 극명해서
두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셔벗을 포개어 놓은 것 마냥 매우 식욕 돋구는 비쥬얼이었습니다.
아랫 부분을 퍼먹으면 진한 초코맛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진흙 묻은 눈을 보며 한참 입맛을 다셨습니다.
이런 괴기스런 행위에 중간에 잠깐 공항 안전보안팀에 끌려갔다 나오면 아무래도 료칸 체크인에 늦을 것 같아
미련없이 시선을 거두고 반대편 차선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마침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무로란행 도난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달려 노보리베츠 IC에서 내립니다.
내릴때 기사님이 노리끼리한 색깔의 종이 조각을 나눠주시는데
찌라시 쿠폰으로 넘겨 짚고 버렸다가는 나중 셔틀버스 타고 내릴때 얼굴이 노래지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꼭 챙기는게 좋습니다.
종이의 정체는 노보리베츠 온천행 셔틀 이용권입니다.
처음엔 한자를 몰라서 '뭐야, 이거. 내 욕하는거야?' 활자가 품은 뜻을 방과 후 도전장 쯤으로 해석했는데,
[샤토루]라는 가타카나를 보고서야 대충 내용을 짐작하고 소중하게 두손으로 모셨습니다.
IC에서 이미 시간 맞춰 대기하고 있던 셔틀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으니
셔틀 버스 기사님이 차내를 돌면서 승객들의 료칸 목적지를 물어보며 인원을 체크하였습니다.
15분 정도 달려 노보리베츠 온천 마을에 도착, 료칸 앞에 버스가 서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겨 후다닥 내렸습니다.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가 세상밖으로 나오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신세지게 될 하나유라 료칸입니다.
료칸 숙박은 태어나 처음이라 다른 곳과 비교하여 좋고 나쁨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처음 묵게 된 료칸 치고는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초반에는 밋밋한 외관과 주변의 한적함에 조금 실망했지만
날이 어둑해지니 오히려 그 고즈넉하고 괴괴한 분위기가 더 운치있고 질박해보여 좋긴 개뿔,
석식때 술먹고 바로 뻗어 버리는 바람에 사실 밤 분위기가 어쨌는지는 기억이 잘 안납니다.
한국에서도 웬수였던 술은 일본에서도 웬수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웬수입니다.
료칸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합니다.
체크인 담당 직원이 매우 아담한 사이즈라 제 키가 결코 큰 것이 아님에도 (162cm)
마주하고 서 있으니 괜히 위협적인 상황으로 보입니다.
형식상으로 묻는 신원 확인이나 요구 사항, 주의 사항 등을 안내할때도
그들은 특유의 과도한 친절과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듣는이가 황송스러워서 어찌할 줄 모르게끔
허리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자세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무릎 꿇는거 완전 자신있다!]의 각오로 저 역시 목소리 노~라이 뒤집어서
그들의 말 끝나는 마디 마디 마다 추임새 격으로
- 하잇! 하잇!
간신배 충만한 음성으로 과한 리액션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라 두세개는 거뜬히 팔아먹었을 정도로 간사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액션에 담당 직원은 이 인간이 지금 뭘 알고 대답하고 있는건지 의뭉스럽다는 눈빛으로
살짝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그랬습니다. 절반은 뭔소린지 못알아먹었습니다.
4002호, 배정받은 룸은 바닥이 다다미로 꾸며진 화실이었습니다.
방 내부를 찍었어야 했는데 급박하게 샌드위치 출산하느라 패스했습니다.
건강한 녀석들로다가 순산했습니다.
석식-카이세키는 6시로 예약을 하고 근처의 관광 명소인 지고쿠다니로 향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지옥계곡 정도로 해석하면 되는데, 약 만년전의 분화구 흔적으로
지면 곳곳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며 매분 3000리터 정도의 열탕이 솟아나오는 골짜기로 유명합니다.
언뜻 보면 산을 깍아놓은 채석장같기도 한데 군데군데에서 올라오는 희뿌연 수증기때문에 그로테스크한 장관이 연출됩니다.
게다가 화산 지대라 그런지 계란 썩은 냄새와 비슷한 유황 가스도 사방에서 진동을 하는데,
야심한 새벽 이불 안에서 자주 맡는 냄새라 크게 불쾌하고 역겹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직은 제 것의 가스가 더 독하기에 쓸데없는 자부심까지 조금 느껴봅니다.
거대한 비둘기똥을 연상케하는 언덕과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으며 흐르는 유황 온천입니다.
양말 빨래를 이곳에서 하면 세탁과 삶음 기능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어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난과 빈곤은 사람을 시도때도 없이 궁상스럽게 만듭니다.
지옥계곡의 수려한 경치를 카메라로 부지런히 담아내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방문 기념으로다가 수족 오그라드는 셀카도 몇장 남겨보기로 하였습니다.
수증기 덕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뭔가 뽀샤시한 효과도 나고,
거기다 그날따라 왠지 각도도 좋고 자연광도 좋고 배경도 좋아 과감한 표정을 지으며 촬영 버튼을 눌렀습니다.
기대를 하며 결과물을 확인해봅니다.
지옥행 프리패스상이었습니다. 지옥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상이었습니다.
면접도 보기 전에 1차 서류만으로 수석 합격입니다.
일본에 도착한지 채 4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버스 티켓 뽑고 편의점에서 생수 한통 샀더니 점퍼 주머니 안은 어느새 100엔 동전들로 가득차
걸을때마다 각종 소지품과 뒤엉켜 아주 쟁그럽게 짤랑거렸습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천원짜리들인데 화폐의 형태가 동전이다 보니 100엔이 자꾸 100원처럼 느껴지더군요.
품고 있는 돈의 가치가 하찮게 보이는, 한국에선 상걸뱅이 주제에 단 몇시간만에 만수르 돋는 금전 감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카드만 쓰는 인생인지라 동전 부자가 되니 무척이나 성가신 기분에
동전 소진을 목적으로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찾았습니다.
한국에 가면 친구들이랑 회사 팀원들에게 나눠줘야지~
기념품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는 그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개추접스런 생색을 낼 상상을 하며)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눈에 띄는 몇가지를 추려 제 2차 평가에 들어갔습니다.
이쁜데 실용적이지 않아! (=비싸다)
저건 일상에서 유용할 것 같은데 디자인이 별로다. (=비싸다)
흠, 딱히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 없다. (=다 비싸다)
오우!! 이거는 뭔가 좀 독특하면서 쓰임새도 굉장히 다양할 것 같은데............받는 이가 좀 부담스러워 할 것 같다. (=개비싸다)
스미마셍, 토이렛와 도꼬데스까. (=여기 너무 비싸서 조금 지렸다)
해서 결국 손에 쥐고 나온건 자판기에서 뽑은 우유 한병이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목이 굉장히 말랐습니다.
북해도 하면 양질의 우유 생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니 이 지역 우유를 꼭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음료 자판기 때문에 기념품 가게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기념품이 비싸서 우유 한병만 달랑 사들고 나온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성팀 정답!!
우유에 소량의 흥분제가 들어있었던게 분명합니다.
자그마한 우유 한병을 들이키고 나서부터 느닷없이 기분이 업되면서 한없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찍어줄 카메라 렌즈는 바로 앞에 있는데 옆동네 중국인들을 향해 시선과 포즈를 던지고 있습니다.
생판 모르는 처자가 쪼다같이 웃고 있으니까 카메라를 든 중국인들도 얼결에 셔터를 눌러주었습니다.
생면부지 타국인의 들이댐에도 쉬이 보듬어주는 포용력과,
남의 메모리카드를 축내고 있음에도 한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저 뻔뻔함,
이것이 바로 국경을 뛰어넘는 진정한 글로벌 화합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옥계곡을 둘러보고 료칸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번들 하나와 주전부리용 간식 몇개를 사서 냉장고에 채워 넣었습니다.
일본 음식은 밍밍하거나 또는 반대로 너무 담백해서 느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입가심 용으로
동치미 느낌의 국물이 자작한 채소 샐러드도 하나 챙겨왔는데,
김장시 숨을 죽이기 위해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 이파리를 생으로 뜯어먹는 기분이었습니다.
타국에 와서 좋은 음식 놔두고 왜 이런걸 돈 주고 사먹고 앉아있는걸까.
고민과 회의는 씹는 내내 이어졌습니다.
뭐, 이런 것도 다 추억이고 경험이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짜기만한 절임 배추를 말없이 오랫동안 씹었습니다.
편의점에서는 익히 아는 음식만 사먹자고 굳게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녁 5시 50분이 되자 방 안에 비치되어 있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습니다.
하잇, 삼베삼베~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지하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오라는 전언이었습니다.
보통 방안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카이세키 요리를 직접 날라다 세팅해주는데,
이 료칸에서는 석식을 위한 별실이 따로 마련되어져 있어 그곳으로 이동하여 카이세키 요리를 즐깁니다.
카이세키는 비프와 해산물 두가지의 코스 요리가 있는데 체크인시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끔 선고지를 합니다.
방사능의 여파로 가급적 해산물은 멀리하라는 지인들의 충고가 떠올랐지만
이미 일본땅으로 넘어온 이상 거의 모든 식재료는 도긴개긴이다 싶어
기왕이면 본인의 취향대로 즐기자 하여 서로가 좋아하는 해산물 코스로 통일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후 거의 모든 여행지에서의 먹방은 해산물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별실에 도착하니 테이블에는 이미 에피타이저가 세팅되어 있었고,
우리가 자리를 잡자마자 미니 화로냄비에 불을 당겨 코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위 사진의 요리는 키조개 껍데기에 관자와 약간의 채소 그리고 걸쭉한 소스를 한데 넣고 끓여서 먹는건데,
껍데기를 지탱하고 있는 아래의 은박지 뭉치가 열기로 인해 모양이 변형되자
조개는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픽 하고 무너졌습니다.
뾰족한 부분으로 무게가 쏠려 그곳을 통해 소스가 바닥으로 주르륵 쏟기자
소리없이 요리를 나르던 직원이 그 참상을 발견하고
- 억! 슴마셍~슴마셍~슴마셍~혼또니 슴마셍~
광속으로 샤샤삭 다가와 뜨거운 조개껍데기를 맨손으로 집어 고정하는 투혼을 발휘하였습니다.
음식물이 쏟아지는거야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거라 어쩔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측에서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대접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서비스 품질에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을 한건지
지나칠 정도로 사과를 하고 유난스러울 정도로 과도한 친절함을 보였습니다.
다음 요리 서빙을 위해 잠시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은 조개 껍데기마저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었습니다. 유행이여 뭐여.
- 세워세워세워!
석고대죄도 불사할 것 같은 직원의 행동 패턴을 떠올리곤
우리는 서둘러 보수 공사에 들어가 젓가락으로 은박지를 그냥 납작하게 뭉게버렸고,
다행히 슴마셍 직원이 들이닥치기 전에 재건에 성공하였습니다.
요리의 가짓수는 이보다 더 많았으나 카메라로 다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정신없이 먹부림하다 그만 순백의 데세랄 위에 시커먼 춘장 소스를 흘리는 바람에
카메라의 신변 보호를 위해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때의 그 춘장소스는 아직도 데세랄 바디 한쪽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는데,
그 흔적을 볼때마다 일본에서의 즐거웠던 기억과 함께 분노가 치솟습니다.
왜 안나오나 싶었을겁니다.
맥주 맛에 크게 연연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맛에 차이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즐겨먹는 카스와 비교했을때 삿포로 맥주는 목넘김이 부드럽고 끝맛이 미세하게 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소같으면 맥주병이 예닐곱개는 쌓여야 슬슬 취하기 시작하는 정도인데
부족한 수면에, 알게 모르게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맥주 단 두병으로 만취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물론 중간에 맥주 가격을 알아버리고 술이 잠깐 깨기도 했습니다. (한병에 700엔 = 약 7000원)
주사를 펼칠 기력도 없어 앉은 자리에서 실없이 해롱거리다 물잔 두번 엎지르고 나서야
일행의 손에 이끌려 강제 퇴거 조치되었습니다.
2시간 남짓의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돌아오니 전에 없던 두툼한 이부자리가 모양 좋게 깔려 있었습니다.
직원들의 귀신같은 서비스에 혀를 내두르며, 테라스에 널어놓은 속옷과 때수건 따위를 서둘러 걷어 치웠습니다.
엄청난 피로함에 거의 졸면서 씻고는 바로 이불 위로 쓰러졌습니다.
바닥에서는 다다미 특유의 구수하면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오고
두툼하고 푹신한 이불에서는 볕에 바짝 말린 햇빛 냄새가 콧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을 제대로 만끽도 하기 전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장장 35시간만의 수면이었습니다.
새벽 5시.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 잠에서 깨어나 나갈 채비를 서두릅니다.
퉁퉁 부은 얼굴에서는 떨쳐내지 못한 졸음과 숙취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조금은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곳을 찾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설경 속 야외 온천의 로망을 이루기 위해선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2일차]
로망 실현에 앞서 몸을 새로이 단장키 위해 주사와 잠버릇으로 구겨진 유카타를 벗고
옷장에 구비되어 있는 여분의 새 유카타를 찾아 입었습니다.
게다조리를 신는데 적합하게 디자인 된 일본식 양말도 있었지만
발가락 이산가족 만들기 싫어 맨발 차림으로 룸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모습을 보니 일본 사무라이 느낌도 나궁~ 매국노 느낌도 나궁~
대욕탕은 2층에 위치해 있는데 휴게실을 지나니 남탕이 먼저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청색 가림막에 거칠게 휘갈긴 男이라는 글자가 잠시 저의 발걸음을 묶어놨습니다.
한자 까막눈이라는 허울 좋은 설정으로 남탕으로 잘못들어가
'데헷~실수해버렸다~'
개진상을 떨고 싶었지만 일행의 강력한 거부로 쓸쓸히 여탕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이른 시간탓인지 탈의실은 텅 비어있었는데 금일 첫개시는 아무래도 저인것 같았습니다.
전세낸 기분으로 폭풍 탈의 후 욕탕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습니다.
- 우왕~ 아무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다~ 다~아~
잇힝~ 잇힝~ 잇힝~ 이힝~ 이힝~ 힝~ 힝~
슈레기같은 콧소리는 슈레기같은 에코 울림으로 돌아와 탕 내부를 가득 메웠습니다.
새벽부터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잽싸게 샤워를 하고 주저없이 야외 노천탕으로 향했습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라 밖은 야외 조명에 의지해 사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발과 연신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돌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고,
미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형태를 가늠키 어려울만큼 어둡고 음침했습니다.
구석에서 뭔가가 웅크리고 있다가 확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서느런 분위기에
온 전신에 소름성 닭살이 돋았습니다. 로망이 호러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자리에서 소금기둥 마냥 굳어있다가 영하의 날씨를 헐벗음으로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도 체크고 나발이고 허겁지겁 노천탕에 입수하였습니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한동안 허벅지가 못견디게 가렵고 따끔따끔거렸습니다.
'마그마가 보통 놈이 아닐텐데 온천수는 못해도 80~90도는 가볍게 넘을거야, 암~' 하고
막연하게 [온천수 = 끓는 물]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 체험한 노천탕은 우리네 목욕탕 온탕 수준으로 적당하게 뜨거웠습니다.
노보리베츠는 아이누어로 '하얗고 탁한 강'이라는 뜻으로
그 명성에 걸맞게 이 지역의 온천수 색깔은 우유를 섞은 듯 뽀얀빛을 띠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흰색의 부유 물질이 둥둥 떠다니는데,
언뜻 매상 대박친 워터파크의 폐장 직전의 수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몸에 좋은 유황 성분으로
신경통과 근육통에 탁월한 효능이 있고 피부에 누적된 유해물질 해독에도 우수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온천욕 후 간단한 샤워만 하고 나왔을 뿐인데
케토톱으로도 안잡히던 관절염의 통증이 조금 무뎌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얼굴에 광이 나면서 전반적으로 피부결이 고르게 정리되는 기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한국 귀국과 동시에 피부는 본래의 가뭄과 기근의 상태로 돌아와주었습니다. 이런 염병같은 피부를 보았나.
날이 밝으면서 서서히 눈발이 잦아들고 미미하게 쌓였던 눈은 온천수의 열기로 금세 녹아버렸습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온천욕을 즐기고 싶었는데 마냥 아쉬운 기분이었습니다.
노천탕은 고여있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온천수가 유입되도록 설계된 탓인지
물은 영하의 기온에 조금은 식을 법도 한데 거의 적정 수온를 유지하며 희뿌연 김을 내뿜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돌처럼 생긴 수온계를 들고 다니며 온도를 측정하는 직원분의 숨은 노고가 있었습니다.
이용객이 없는 틈을 타 또 로망실현 인증 찍겠다고 사족 곱아드는 포즈를 취하며 셀카 촬영하다
수온 체크하러 소리없이 등장한 직원분과 마주치곤 쩡~!!하니 얼어붙었습니다.
나이 서른 넘어서 귀여운 척 하겠다고 체면불고하고 수줍음반 공기반 넣어
볼때기를 부풀리는 등의 주접을 떨던 중이었습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팔을 내리고 천천히 물속으로 몸을 가라 앉혔습니다. 이대로 숨지자.
제 할일을 마친 직원분은 가벼운 목례을 끝으로 금방 사라졌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마냥 한동안 먼산만 바라보며 콧구멍만 벌렁거렸습니다. 부끄루와.
직원분의 습격으로 한번 놀라고, 나중 촬영한 결과물을 보고 두번 놀랐습니다.
인증셀카 속 인물이 '천년의 사랑' 되게 맛깔나게 잘 부르게 나와더랬습니다.
좀 더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고 싶었지만 조식을 오전 7시 반으로 예약해놓은 상태라
아쉽지만 야외 노천탕에게 작별을 고하고 대욕탕으로 돌아왔습니다.
초반, 자리마다 엎어져 있던 바가지들이 드문드문 주인들을 맞아 부지런히 온천수를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때타월을 챙겨왔지만 일본에 와서까지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가볍게 샤워만 하고 나갈 요량으로 때깔 찬란한 형광 연두색의 때타월은 목욕 가방으로 퇴장시켰습니다.
그 순간 건너 건너 옆자리에서 샴푸를 하시던 아주머니 한분이
제쪽을 바라 보며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들어올렸습니다.
느껴지는 시선에 저 역시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틀었습니다.
잠시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가고, 곧 이어 진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시간대에 대욕탕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 투숙객이었으며,
한국을 떠나온지 다들 기껏해야 2~4일 정도이거늘 타지에서 헐벗은 상태로 마주하니 괜스레 서로가 반갑고 애틋한 기분이었습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여행 일정에 관련된 얘기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 등
아주 짧고 얕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다 식사 시간 임박되자 칼같이 헤어졌습니다.
오전 9시 50분에 삿포로까지 실어다주는 무료 송영버스를 타야 되므로 조식을 조금 서두르기로 하였습니다.
1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내려가니 입구에서부터 대기타고 있던 직원분이 룸넘버를 확인하곤
지정된 좌석으로 우리를 인도하였습니다.
인원수에 맞게 구색을 맞춘 요리가 어느정도 세팅되어져 있었고, 앉자마자 곧 곡기와 메인 메뉴가 날라졌습니다.
식당 양쪽의 셀프바에는 다양한 종류의 스시와 소세지, 스프, 빵, 과일, 커피, 음료 등등
자잘한 요기 거리가 별도로 마련되어져 있었는데,
본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이드 메뉴부터 접시 가득가득 퍼와 날라댔습니다.
다 먹지도 못할 것을 과하게 가져왔다는 타박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 먹었으니까~
지난 석식의 화로 퍼포먼스가 키조개 껍데기였다면 이번 조식에는 가리비 껍데기를 활용하여 조갯살과 버섯을 조리하였습니다.
고체 연료에 불을 당기자 금세 보글보글~ 귀가 즐거운 소리로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희한하게 건더기를 다 건져먹었을 즈음의 타이밍에 맞춰 불씨가 사그라들었습니다.
전날밤 조개 껍데기로 인한 트라우마로 또 중간에 붕괴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는데
다행히 어제와는 다른 안정적인 구조의 화로라 그런지 큰 해프닝 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룸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쓰레기를 분리하고,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등
한국인의 선진 시민의식을 보여주겠다며 사부작사부작 몸을 놀렸습니다.
그러다 어제 저녁에 사다놓은 캔맥주를 해장 개념으로 마시니 마니 투닥거리다
창밖 너머에서 쏟아지는 눈보라를 보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점퍼를 꺼내 입었습니다.
송영버스 출발전까지 한시간 가량 여유가 있어 노보리베츠 온천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료칸 주변을 가볍게 산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기로 하였습니다.
전날 방문했던 지옥계곡을 한번 더 오를까 하다 (도보로 10분 거리)
한번 눈에 담은 유명지보다는 평범한 동네의 풍경을 감상해보자 하여 반대의 방향으로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도시 마을 특유의 아기자기하면서 소박하고 정감있는 거리를 기대했지만
인근이 온천 관광지다보니 띄엄띄엄 세워져 있는 료칸 건물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었습니다.
조금은 싱거운 기분이 되어 목적없이 무작정 앞을 향해 걷고 걸었습니다.
손가락 끝이 얼얼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산중의 앙상한 잔가지들이 소란스레 몸을 떨며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휘파람 같기도 하고 묵직한 뱃고동 같기도 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곱아졌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뚜렷하게 들리는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
소복한 눈입자가 빠득빠득 밟히는 소리,
걷는 동안 너무나도 귀에 익어버려서 정적과 구분지을 수 없게 된 개천이 흐르는 소리,
간간히 스치고 지나는 차량 배기음 소리에....나른한 상태가 되어 실없는 웃음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방에 쌓인 눈 외에는 특색 없는 경치였지만 그 잔잔한 무미(無味)가 오히려 더 깊은 인상과 긴 여운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런 한적함과 호젓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것이 여행자의 참 자세며 여행의 진정한 묘미가 아니겠는가.
세련됨과 화려함만을 뒤쫓다가는 자연의 이 수수하고 광대한 아름다움을 점차 경원시하게 되고 말거야.
아련한 눈빛으로 쉼없이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팔자 눈썹을 만들고는 또 콧구멍을 벌렁거렸습니다.
미침의 정도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전날 자판기 우유에 이어 북해도에서 내리는 눈에도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소량의 마약이 함유되어 있는게 분명합니다.
혼자만의 휠링에 취해 '지금 이 소리는 바로~ 자연의 소리' 타령을 하며 KBS 2TV 영상앨범 산을 촬영하다,
무의식 중에 혼잣말로 뱉은 '모닝떵 신호가 왔다.' 개소리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엉망진창 시궁창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셀프바에서 베이컨과 소세지를 그리 주워먹더니 이 사단 날 줄 알았습니다.
혹한의 추위에 뷰파인더가 먹통이 된 카메라를 점검하는 잠깐 사이
료칸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자세를 연습해봅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자세에 저는 9점 드리겠습니다.
어쩌다보니 하나유라 료칸에서의 시작과 끝은 순산과 순산으로 매듭 짓게 되었습니다.
훗날 또 노보리베츠에 방문하게 된다면 다른 료칸으로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방문하게 될 료칸에게도 미리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최초 숙박 예약시 송영 서비스를 신청하면 삿포로 ↔ 노보리베츠온천의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즐긴 온천욕과 동네 산보에서 겪은 정신 이상 증세로 에너지 소모가 컸는지 버스 탑승 직후 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정차 지점은 삿포로 TV탑 앞으로 약 한시간 반 정도를 달렸습니다.
북해도 여행시 삿포로와 노보리베츠 방문 일정이 있다면
첫날 노보리베츠 1박 후 송영 버스를 이용해 삿포로로 이동하거나
또는 출국 전날 삿포로에서 송영버스를 이용해 노보리베츠 1박 후
익일 공항으로 가는 루트를 짜는 것도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송영 서비스를 시행하는 료칸에 한해서만 예약 후 이용이 가능합니다.
삿포로 역시 노보리베츠와 매한가지로 허리까지 오는 눈더미와 빙판길로 폭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빌딩과 차량이 내뿜는 열기와 수없이 오가는 유동 인구 덕분인지 산중의 온천 지대보다는 한결 견딜만한 추위였습니다.
셔틀버스 기사님께 삿포로역의 위치를 확인받고는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2일차는 오타루에서 1박이므로 삿포로역에서 JR 노선을 타고 오타루역으로 가야합니다.
우리나라같은 경우 좁은 2차선이나 차량 통행이 적은 곳은 신호등 없이 횡단보도만 그려진 곳이 많은데
삿포로 시내는 도로폭의 좁고 넓음과는 상관없이 거의 모든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
1~2분 걷다 멈추고 기다리고, 빌딩 하나 지나고 기다리고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건널때에도 시각장애인과 차량주의 의식을 환기하는 목적으로 보행 신호음이 나오는데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삿포로와 오타루에서 맞닥뜨린 횡단보도에서는
항상 [뻐~꾹! 뻐뻐꾹! 뻐~꾹! 뻐뻐꾹! 뻐~꾹! 뻐뻐꾹!] 새소리 돋는 신호음이 울려퍼졌습니다.
우리 나라도 위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현재의 단조로운 멜로디나 밋밋한 부저음이 아닌
지역 특색을 살린 보행 신호로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파란불이 점등됨과 동시에 스타트의 신호로 민속악 굿거리 장단이 퍼지다
점멸되는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심장 쭬깃해지도록 빠른 자진모리 장단으로 변환되게끔 말입니다.
우리네 가락의 흥겨움과 정겨움을 일상에 접목하여 쉽게 즐기고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함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나아가 비주류로 인식되던 우리 고유 전통가락과 장단을 부흥시켜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가 아닐까하고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ㅋㅋㅋㅋ않았다고ㅋㅋㅋㅋㅋ
사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멍때리고 있었습니다.
창조경제고 나발이고 제 앞가림하는 것도 힘든 형편입니다.
북해도 최대 중심가인 삿포로시의 삿포로역입니다.
셔터 타이밍과 구도에 얼마나 무심해야 여기가 삿포로역인지 경기도 수원역인지 당최 분간이 안갈 정도로 찍을 수 있는걸까요?
이동 중에 얼결에 눌렀나 싶을만큼 어중간한 컷입니다.
뭐 어쨋거나~ 이용객이 많아 그런지 역전 부근부터는 제설작업에 더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오는 내내 진창 눈밭을 구르던 캐리어가 이제 좀 한숨 돌립니다.
출퇴근의 러쉬시간대를 비껴난 어중간한 점심때라 역전은 물론 역 내부 역시 전반적으로 한산했습니다.
본격 티켓 발권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볍게 심호흡을 해봅니다.
우리나라 수도권 전철 노선과는 비교도 안되게 세분화, 광역화, 요금 드럽게 비싸, 민간화되어 운영되고 있는
일본 전철을 떠올리자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여차하면 역무원에게 매달리겠다는 각오로 자동 발매기 앞에 섰습니다.
다행히 영어버전으로 변환이 가능한 버튼이 있어 알파벳들을 조합하여 행선지에 맞는 요금을 선택하고
그에 준하는 돈을 기계에 넣었습니다.
초반 우려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손에 쥐어진 티켓에
타는 곳 플랫폼으로 오르는 내내 '나 천재인 듯, 브레인이 섹시한 듯, 한국의 미래인 듯' 우쭐거렸습니다.
티켓 발권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순탄하게 일이 풀려서 그런지
2일차의 일정도 조짐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오타루로 향하면서 마주한 바다입니다.
전철 창문의 숭악한 청결상태 덕분에 이리 멋진 때국물 돋는 바다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폐품으로 내다놓은 안팔리는 여행 잡지의 한페이지 같습니다.
바다와 철도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워 날씨가 험하거나 파고가 높을 땐
워터파크 못지 않은 스릴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먼 바다에서부터 몸집을 키우며 다가오는 파도의 크기에
식겁한 기관사님이 전속력으로 후진을 하는 모습도 상상해보았습니다.
또는 반대로 이 열차의 최고 속력을 시험해볼 때가 왔다며 모험심 쩌는 기관사님이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에 승객들을 몰아넣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철도와 바다가 접해 있는 이 진귀한 장관 앞에서
이딴 감상 밖에 내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오타루역입니다. 평범한 여느 소도시의 간이역 같은 느낌입니다.
북해도의 유명 관광도시로 손꼽히는 것 치고는 지극히 조용하고 아담한 인상이었는데,
오히려 그 소박한 맛이 오타루만의 차분하고 낭만적인 특색을 더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3박 4일의 짧디 짧은 기간 속에 오타루 방문 일정을 계획한 것은
수많은 북해도 여행기에서 자주 언급되며 추천되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방문 목적은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가 되었던 오타루의 그 이국적이고 고요한 정취를 느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렇다고 영화를 촬영한 장소를 죄 찾아가 장면 장면마다의 감흥을 느껴보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아니고
그냥 눈이 많이 오던 오타루의 작은 마을을 찬찬히, 느리게 걷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밋밋한 소망은 오타루에 예약한 료칸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이루게 됩니다.
체크인은 3시인데 두시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역 주변을 하염없이 배회해야만 했습니다.
노보리베츠 유황온천으로 완화한 관절염을 반나절만에 재발시키는 성과도 이룩하였습니다.
95년작인 러브레터는 몇년 뒤 일본 대중 문화가 본격 개방 되면서 한국으로 유입되었고,
일본의 문화 콘텐츠가 생소하던 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현재까지도 겨울 영화, 순정 영화하면 러브레터를 먼저 꼽을만큼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때는 2000년 고1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테잎을 빌려 처음 이 영화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극적인 사건이나 사고의 위주가 아닌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쫓으며 진행되는 잔잔한 전개 방식이라
당시 가졌던 영화의 초반평은 지루하다는 거였습니다.
'누가 누구여? 머리도 둘이 똑같이 만들어놔가지고서리.'
흥미를 잃고 집중하지 못하니 영화의 주요 키 포인트를 놓쳤고 중반에 가서는,
'그래서 후지이 이츠키 그놈은 언제 등장하는데?'
스토리의 흐름을 파악하기보다는 어서 결판부터 짓자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하던 엔딩에게 다다라서는
'뭐야? 끝이야?'
당황스러움과 시시함에 신경질 가득한 손놀림으로 테잎을 꺼내 빼들었습니다.
삭막하기 그지 없는 17세의 봄이었습니다.
한창 감수성 넘쳐야 할 시기에 욕정이 더 크게 넘치는 바람에
그 명작을 보고도 당시에는 큰 임펙트 없이 머리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강산이 한번 바뀌고 나서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다시 접한 러브레터는
17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주요 장면을 편집한 영상과 그 장면이 품은 뜻을 해석해주는 나레이션의 음성에
어릴적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리고 공감하지 못한 먹먹함과 애잔함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날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영화의 잔상을 떠올리느라 쉬이 잠들지 못했습니다.
직진으로 가면 료칸에 15분만에 도착하니까 한 블럭 한블럭을 리을(ㄹ) 모양으로 걷기로 합니다.
눈과 빙판으로 다져진 길에 캐리어만 또 죽어라 고생입니다.
가는 길에 커다란 돔 형식의 시장을 발견하고 냉큼 들어가보았습니다.
규모가 좀 있는 시장이었는데 시장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기억이 나질 않으니까요.
체크인을 하려면 아직 한시간이나 넘게 남았기에 허기나 덜 생각에 시장내 위치한 라멘 가게로 발을 들였습니다.
한국의 작은 분식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테이블과 의자 역시 김밥천국 간지로 오래 앉아 있을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직원분은 부피가 큰 캐리어를 통로쪽에 주차시켜주시곤 메뉴판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눈에 익숙한 활자가 박힌 한글 메뉴판이었습니다. 가게에 들어오고나서 뱉은 말이라고는 의자에 털썩 무너지면서
자그맣게 읊조린 '아이구야~' 밖에 없었는데 눈썰미가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미소라멘(된장라면)과 교자(만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목이나 축일겸 맥주 한병을 시켰습니다.
가볍게 '목만' 축이자는 초반의 취지가 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민 계산서에는 5병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두번째 미스테리입니다.
맥주와 함께 나온 과자의 모양이 상당히 눈에 익었지만 과자명이 기억나지 않아 모양과 맛을 근거로 하여 추적에 들어가봅니다.
해산물의 형태와 맛이 나니 바다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며
피쉬깡, 문어칩, 상어밥 등등 기존의 품명들을 교묘하게 표절한 오답들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다 부산과 관련된 지명이었던 것 같다는 꽤 정답에 근접한 의견이 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해운대, 태종대, 남포동, 적기 뱃머리(본인 살던 동네 이름), 조방 앞 등등 기상천외한 오답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게를 나오고 하루 일정이 끝날때까지 과자명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가
불끄고 누운 이부자리에서 일행의 입을 통해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 아~자갈치!!!
- .............................치도리.
끝말잇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교자가 먼저 테이블을 접수합니다.
한입 베어 무니 찜으로 익힌 만두를 팬에다 구워낸 모양새와 맛을 냈는데,
마치 찐만두가 먹고 싶어 찜기에 올렸으나 갑자기 군만두도 먹고 싶어지는 바람에 조리법을 급선회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뭔말을 하려는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일본식 교자는 대체로 '무시야키'라고 해서 구우면서 동시에 찌는 방법으로 조리된다고 합니다.
여튼 한쪽면은 고소하고 그 반대는 쭬깃쭬깃한 식감에 자연스럽게 맥주 한병을 추가로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맥주 5병의 실마리가 조금씩 잡히는 느낌입니다.
이어서 미소라멘이 도착하였습니다.
삿포로 라멘은 후쿠오카의 하카타 라멘과 더불어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특히 된장을 사용한 미소라멘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라는 내용을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긁어왔습니다.
조리되어 나온 미소라멘은 한국 분식집 라면의 1.5배 정도로 상당히 푸짐하고 건더기도 실했지만
웬만한 맵고 짠 음식에는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본인의 입맛에도 국물이 너무 짰습니다.
국물의 양은 넉넉한데 육수를 너무 진하게 우려낸건지 먹는 내내 얼음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곁들여 먹는 찬이 없다보니 되게 짠데 또 묘하게 심심한 맛을 느끼며
'미소라멘은 내 입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끝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바닥을 보이고 있는 그릇엔 다진 파 몇개만이 덩그마니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언행불일치의 훌륭한 예을 보고 있습니다.
적당한 취기로 세상 무서울 것도 없겠다~ 체내 나트륨 수치도 한껏 올렸겠다~가게를 나와 다시 거리를 걷습니다.
방향을 잡기 위해 지도앱를 켜니 현지점과 료칸과의 거리가 상당했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며 규칙적으로 지그재그로 꺾었어야 했는데 스스로의 감을 믿고 대충 되는대로 꺾었더니
너무 멀리까지 떠내려왔더군요. 스무살 이후부터 시작된 제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지름길로 가기 위해 대로변을 벗어나 일반 주택이 즐비한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제설 작업과 차량의 열기로 매끈한 대로변과는 다르게
지나는 이들의 신발 밑창으로 다져진 골목의 지면 상태는 작은 헛디딤에도 쉽게 중심을 잃을 정도로 질척하고 미끄러웠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진창길에서 캐리어 끌랴, 스마트폰으로 방향 잡으랴 정신없는 와중에
부지런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위태롭게 비틀거렸지만,
중간중간 닥쳐오는 자빠링의 위기는 김흥국도 울고갈 호랑나비 춤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육신은 괴로울 망정 차라리 시원하게 넘어지는 것이 맘 편한, 흉하기 그지 없는 발버둥이었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 참는 소리에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그냥 눈이 많이 오던 오타루의 작은 마을을 찬찬히, 느리게 걷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가슴 시리고 애잔한 추억 밟기가 호랑나비로 얼룩지고 있었습니다.
2시 50분, 오타루에 도착한지 만 2시간여만에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노보리베츠를 떠나온 이후로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몹시 험난하고 가파른 산을 넘어온 것 마냥 지나온 장면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반짝 스치고 사라집니다.
남들 죽기 직전에 잠깐 본다는 주마등을 뭔 졸업앨범 열람하듯 시도때도 없이 찾고 앉았습니다.
이 내 몸 뉘일 곳에 다다르니 긴장이 풀리면서 또 다시 격한 요의가 느껴졌습니다.
앰뱅, 짐승도 아니고 낯선데만 오면 왜 자꾸 영역표시부터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습관될까 무섭습니다.
뭐, 라멘집에서 맥주와 물을 지나치게 들이붓긴 했습니다.
오타루 후루카와 료칸입니다.
오타루 운하가 코 앞에 보이는 곳에 세워진 온천 여관으로 전날의 하나유라 급의 고급료칸은 아니지만
운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탁 트인 전망과 오타루역과의 접근성을 생각하면 이곳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료칸은 가급적 일본식의 다다미방(=화실)을 선호하지만 오타루 운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방은 죄 양실(침대)로 꾸며져 있어
본인의 기호도를 관철시킬 것이냐~ 눈이 즐거운 전망을 택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후자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룸키를 받아들었습니다.
체크인 후 룸을 오르기 전 로비에 마련된 접견실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기로 하였습니다.
숙박 바우처와 여권 따위를 정리하며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자 직원분이 다가와 가벼운 음료를 권하셨습니다.
따뜻한 차와 와인이 있는데 어떤걸로 하겠냐는 정중하고도 깍듯한 물음에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나. 항상 마시던 걸로~ 거만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 와따시와 와인!! 구~돠사이.
작은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한모금 입안에 털어놓고는 맛을 음미하듯 혀로 크게 굴렸습니다.
소믈리에에 빙의한 듯 눈을 반쯤 감아뜬 채 오물오물~ 진지하게 시음을 하다 조용히 평을 내렸습니다.
음~~이 와인은 지극히............................빨간색.
사실 와인에 대해 쥐뿔도 모릅니다. 맥주파라 그런지 무슨 맛으로 먹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눈깔을 허옇게 뒤집으며 와인으로 가글하고 앉아있는 온전치 못한 한국인의 모습에
저런거 로비에 두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직원분이 서둘러 다가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하셨습니다.
저 역시 황급히 동공을 내려보내고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습니다.
배정 받은 룸은 5층으로 운하의 시작과 끝을 한눈으로 길게 훑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았고,
잠들기 전 침실등 끄려고 머리맡 침대 협탁에 붙어있는 버튼 하나 눌렀다가 심박정지 오는 줄 알았습니다.
꺼지라는 등은 안꺼지고 '쿠구구우우우웡~~~~~' 난데없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전면부의 암막 커텐이 움직이는데
거대괴수 쳐부수러 뭔 예거 출격하는 줄 알았습니다.
기껏해야 '위이이잉' 또는 '지이이잉~' 수준일거라고 여겼는데
더없이 고요한 순간에 발생된 느닷없는 굉음이라 적잖이 놀라며 자리에서 튀어올랐습니다.
버튼 누를때마다 [쿠우우우우우웡엉엉~] 어찌나 오질라게 생색을 내는지
'전자동이 뭐 그 대수라고~' 보복심 다분한 손놀림으로 열림-닫힘 버튼을 번갈아가며 눌러댔습니다.
쿠구구우우우웡~~~~착!
쿠구구우우우웡~~~~착!
쿠구우웡~착!
쿠구우웡~착!
쿠우웡착!
쿠우웡~
결국 잠자코 누워 있던 일행이 소매를 거칠게 걷으며 출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멱살 잡히기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창가에서 내려다본 운하의 시작과 끝입니다.
훗카이도의 거점 무역항의 중심지였던 오타루는 1980년대 까지는 운하를 이용한 활발한 교역과 탄광의 하선 작업으로
급성장을 이루었으나 이후 어업의 쇠퇴로 운하의 물길을 막고 산책로를 조성하여 역사가 남긴 관광지의 형태로 재정비를 하게 됩니다.
운하와 나란히 뻗어있는 산책로는 걸어서 10분 정도면 시작과 끝을 찍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었고,
사람 키높이 만큼 쌓여있는 눈더미로 산책로의 폭은 사람 두명이 겨우 지날수 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습니다.
추천 명소로 자주 거론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 치고는
솔직히 대낮의 오타루 운하는 가슴 벅찬 감흥이나 깊은 전율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인상이었습니다.
물론 옛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는 벽돌창고나 산책로에 심어진 가스등은 이국적인 흥취를 더하긴 했으나
'운하'에 초점을 맞춰 감상한 [오타루 운하]는 마을을 끼고 수로가 흐른다는 지리적 특색 외에는
지극히 단조롭고 심상한 경관이었습니다.
뭐 엄청난 기대와 환상을 품고 찾은 곳은 아니라 크게 실망했다거나 낙담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첫번째 사진 참조)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만 촬영하고 서둘러 대절한 관광버스로 이동하는 관광객들을 보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하의 풍광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가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때 정면으로 보이는 창고입니다.
후루카와 료칸에서 묵는 동안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접한 풍경으로
휴식을 취할때면 침대보다는 창가 앞 흔들의자에 몸을 묻고 바깥 거리를 구경하였습니다.
지붕과 길 위를 소복히 덮은 눈더미와 한국과는 반대의 차선으로 달리는 차량들,
잔물살을 일으키며 유유히 흐르는 운하와 바로 옆 산책로를 따라 캐리어를 끌고 줄지어 이동하는 여행객들 등
평소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생경한 광경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정말 떠나왔구나. 여행을 하고 있구나.'
새삼 딛고 있는 땅의 낯섦과 새로움을 깨닫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고정된 시선을 올려 좀 더 높고 먼 곳으로 시야를 넓히면....
바다가 보입니다.
보일듯 말듯 구불거리며 물결치는 바다와 자로 잰듯 고르게 쭉 뻗은 수평선,
방파제 하나로 미묘하게 색이 다른 바다와 게 중 더 먼 쪽과 맞닿은 푸르른 하늘이 눈 안에 가득 차는데
운하 전망에 이어 바다 전망까지 덤으로 얻은 기분에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습니다.
-우~~와~~우~왕~우~~~황~
감탄사에 멜로디만 끼얹으면 곧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나오겠네요.
창고에서 삐죽이 솟아난 옥탑 형태의 지붕 구조는 바다를 배경으로 두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창고 지붕 위에 터를 잡은 또 하나의 작은 어촌 마을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날이 조금만 더 맑게 개었다면 쾌청한 하늘 아래 훨씬 뚜렷한 바다를 볼 수 있었겠지만
겨울의 오타루는 오후 4시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잠잠하고 고적해보이기까지 하는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타국의 해넘이까지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0분도 안되어 따분해져서 미련없이 창가에서 벗어나 침대에 드러누웠습니다. 당 떨어져서 피곤했습니다.
쓰나미 발생되면 가장 먼저 사바세계 광탈하는 위치이긴 했지만
좋은데 와서 판 깨는 생각말자~하며 찐득하게 들러붙은 불경함을 가볍게 털어내곤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료칸 내 비상대피도를 달달 외우기 시작하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남은 인생, 가능한 구질구질하게 오래 살다 가고 싶습니다.
밤의 오타루 운하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자취를 감추자 오타루 운하는 대낮의 얌전했던 가면을 벗고 두번째 단장에 들어갔습니다.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산책로에 심어져 있는 가스등에 빛이 점화되고
그 휘황한 빛과 거리를 고스란히 머금은 수면은 이따금씩 부는 바람과 눈발에 잔 파동을 퍼뜨리며
뒤집어진 세상을 잘게 흔들어댔습니다. 기가 막힌 야경이었습니다.
산책로와 수로 틈 사이에 설치된 조명 기구는 맞은편 외벽을 향해 빛을 쏘아 올리며
자칫 운하의 화려함에 뒷전이 될 수도 있는 창고를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운하의 야경을 보기 위해 근처를 서성거리는 관광객들은 낮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수치였지만
그 적은 수가 모든 다리 위 난간 부근을 점령하고 있었고
다들 반짝이고 있는 운하의 야경을 눈으로, 카메라로 담아내느라 부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운하를 배경으로 기념 독사진을 남겨보자며 순서를 기다리다
적당한 때에 구도를 잡고 번갈아 카메라를 받아 들었습니다.
야간촬영의 특성상 초점이 흔들리고 핀이 엇나가는 사태가 자꾸만 반복되어
조리개의 값을 변경하고 셔터 스피드를 조절하고는 다시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짧은 여행기에서 최고의 걸작이 탄생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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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근시가 안경없이 보는 세상을 주제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다들 로그아웃 부탁드립니다.
오타루 운하를 배경으로 4장 찍었는데 게 중 그나마 뚜렷하게 나온게 저 모양입니다.
일본 오타루 운하 방문을 기념하며 찍은 독사진인지 서울 한강에서 찍은 범죄자 인권보호 사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런 결과물이 나왔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카메라를 받아들며 '이제 맥주마시러 가장~' 해맑게 웃었습니다.
문득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
그러고보니 오래전 수능시험을 치루고 나서도 비슷한 말을 꺼내며 싱글벙글 웃었더랬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이모냥 이꼴인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오타루에 와서 운하의 낮과 밤의 전경을 모두 감상했으니 더이상 이곳에 미련은 없다~ 이제 하산 할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리를 빠져나왔습니다.
마인드가 왜 저렇게 쓸데없이 극단적인건지 모르겠습니다.
의무적이고 형식적이었던 관광 투어를 마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냄새와 소음의 근원지를 쫓아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관광지 정비와 그에 따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창고는 외적인 형태는 그대로 보존한 채
내부만 레스토랑이나 찻집, 공예점으로 개조되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중 구이를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굉장히 크고 오래된 가게 같았는데 상호명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또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요.
근래 들어 구구단도 잘 안되는데, 서른 초반에 알츠하이머 타이틀 얻게 생겼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후각을 위협하는 매캐한 연기와 탁한 공기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구이집이니 어느 정도의 각오는 했지만 숨 쉬기가 괴로울 정도로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맵고 후텁지근한 잿빛 연기의 압박에
순간 나갈까 하는 생각에 조금 머뭇대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중 연기 속에 묻어나오는 바다내음과 큼직한 테이블마다 뚫려있는 대형 화로를 보고는
주저하던 마음을 물리고 전장 속으로 유유히 걸어들어갔습니다.
초반에는 그 갑갑하고 숨이 막히는 상태를 오래 견딜 자신이 없어 후딱 먹고 나가자는 입장었지만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면서 공기가 정화되고 뿌옇게 시야를 흐리던 연기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창고의 높은 천장 구조 덕분에 자욱했던 연기들이 모두 윗동네로 옮겨간 탓이었습니다.
물론 이미 인간 훈제가 된 상태였지만 말입니다.
순진한 뜨내기처럼 굴지 말자. 뭣도 모르는 관광객이라고 만만하게 보이면 그 즉시 작업들어가는 게 요즘 세상이다.
타국에서 눈탱이 맞는것 보다 더 억울하고 화딱지 나는 일은 없다. 품위와 고상함을 지키자며 혼자 열변을 토했습니다.
어릴적 외국인에게 크게 뒷통수 맞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용천지랄이었습니다.
그래놓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소스병을 들었다놨다~ 접시를 뒤집었다 깔았다~
앉은 자리에서 불안하게 엉덩이를 들썩이는 등 혼자 제일 수선을 피우며 어설픈 외국인 이미지를 마구 어필하였습니다.
이런 뜨내기 신호를 캐치한 직원분이 멀리서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접해 본 일본 음식은 밍밍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짜고 기름기가 많아
이번에는 인위적인 향이나 조미료가 일체 들어가지 않은, 생 날 것의 상태를 직접 조리해 먹어보자 의견을 모으고
우리를 수비하러 오신 직원분께 이 가게의 인기 메뉴가 무언지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산물 모듬 구이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마침 잘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습관적으로 메뉴판 내 조그맣게 찌끄려져 있는 가격을 훑었습니다.
방정맞게 상하로 움직이던 고개가 삐걱대며 작동을 멈추었습니다.
고장난 듯 콧구멍만 발랑거리고 있는 내 모습에 테이블 위는 잠시 정적과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이내 썩은 표정은 갈무리하고는 샤방한 얼굴로 손가락 세개를 펼쳐보였습니다.
이왕 온거 가격 생각말고 푸짐하게 즐기자며 모듬구이 3인분을 주문하였습니다.
새우인지 대하인지 모르겠으나, 뭔가 대하가 좀 더 있어보이니 대하로 명하기로 합니다.
알을 가득 품은 대하를 석쇠 위에 올렸습니다.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 기분이라 조금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중 노릇노릇~ 바삭바삭~하게 익은 대하의 비쥬얼을 보고는 태어나 처음으로 머리까지 해치우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탱탱한 육질과 고소한 식감에 껍데기까지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동공을 또 눈꺼풀 뒤로 올려보내고 있는데
새우와 바퀴벌레의 조상이 같다는 얘기가 화두에 올랐습니다. 카레 먹는데 똥 얘기는 하는 격이었습니다.
조상이 같아 언뜻 외적인 형태도, 맛도 비슷하다는 거였는데
포털창 지식인 검색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근거없는 설이었다는 얘기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통장도 비고 쌀통도 비었을 때 바퀴벌레가 출현한다면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존의 [잡아 죽일테다]에서 [우선은 잡을테다]로 말입니다.
원래 인류 문명의 흐름은 수렵과 채집사회를 거쳐 농경사회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쌀이 떨어지면 다시 잡아야죠.
대하의 스케일이 엄청납니다.
- 우와~ 진짜 크다~ 뭔 사람 얼굴만하네~ 대하가 커? 내 얼굴이 커?
- 니 얼굴
난투극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맛은...............사진에서 느껴지는 감흥과 같았습니다.
대하야 뭐 말할 것도 없었고,
버터를 올린 덕에 짭쪼름하면서 달짝지근했던 가리비.
색이 선명하고 살이 단단해서 더없이 담백하고 고소했던 연어.
앙투아네트 머리컬 마냥 굵직하고 탱탱한 웨이브를 자랑했던 소라 살,
휴게소 주전부리 비켜! 고속도로 맥반석을 위협하는 쫄깃한 육질과 야들야들한 식감에 세마리도 부족했던 오징어.
그리고 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던 알 밴 열빙어. 마지막 하나 남은 이 열빙어를 두고 테이블은 또 다시 적막과 엄숙함이 나돌았습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썸'은 남녀간의 귀여운 밀당질을 주제로 만든 곡이 아니라 사실은 영역다툼과 소유권 분쟁을 아기자기하게 표현한 곡입니다.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석쇠 위에서 고고하게 타고 있는 열빙어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눈치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아직은 무사한 열빙어의 상태에 안도하며 맥주잔을 집어드는 찰나 열빙어는 빛의 속도로 상대의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썸은 곧 쌈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2라운드입니다.
안나오면 섭한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입니다.
전날 마신 병맥의 삿포로 클래식 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쌉쌀함이 덜한 맛이었습니다.
료칸에서 짐을 풀고 3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나온 터라 컨디션도 최상이고 안주거리도 훌륭해서 그런지
잔을 부딪치기가 무섭게 맥주를 비워댔습니다. 덩달아 직원분들의 손발도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해산물 본연이 품고 있는 해수의 짠 성분 때문인지 크게 갈증이 일지 않는데도 연신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목을 축이게 되었습니다.
뻥입니다. 사실 해수 드립은 비겁한 변명이고 원래 잔에 술이 담겨 있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잔이 비어있는 꼴도 보지 못합니다.
크게 차지도 비지도 않게 누가 맥주잔에 링겔 좀 놔줬음 좋겠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술과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료칸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분좋게 느껴지는 취기에 옷도 벗지않고 침대에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곤 잔뜩 모양 낸 목소리로 맥주 찬양에 나섰습니다.
- 삿뽀로 비루~! 사이코우다눼~~~~헷헷헷헷헷헷헷
옆에서 들려오는 혀차는 소리에 고개만 살풋 들어 시선을 올리니 마주친 눈에서
'내 보기엔 니가 더 싸이코'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우~과찬이십니다~
하나유라 료칸의 실내복이 전통을 따른 유카타였다면 후루카와 료칸의 실내복은 죄수복을 모티브로 한것 같았습니다.
가슴께에 번호만 있으면 영락없이 무기수 간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죄인입니다.
죄명은...........뭇 남성들의 마음을 훔친 죄...............................지금은 분명 맨정신인데 맥주 사진보고 취한 걸까요.
오래 살아 장수하고 싶은데 요 주둥이가 항시 방정이라 중간에 맞아죽어서 생을 마감할 것 같습니다.
오타루의 밤을 이대로 그냥 넘기기엔 헛헛한 마음이 들어 결국 룸에서 조촐한 2차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창가에 놓여있는 테이블을 침대 사이로 옮겨와 노보리베츠에서부터 이고 온 캔맥주와
근처 편의점에서 봐온 간단한 주전부리들로 상을 차렸습니다.
편의점 봉투에서 정체불명의 무침샐러드가 나왔을땐 잠시 멈칫했지만 애써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뚜껑을 개봉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점 집어 먹고는 젓가락을 치워버렸습니다.
정말이지 망각의 동물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도 하였습니다.
전날 절임배추의 쇼크가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절임오이를 사들고 오는 무모함을 선보였습니다.
결국 우동과 삼각 김밥을 안주 삼아 맥주캔을 기울였습니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참 별볼일 없었습니다.
아침에 온천을 하고 삿포로로 이동했고, 거기서 30분을 달려 오타루에 도착한 뒤 점심엔 라멘과 맥주를 마시고,
료칸에 도착해 푸지게 한숨 자고, 저녁엔 느지막이 일어나 오타루 운하를 보고 또 맥주를 마시니 하루가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어찌보면 한국에서의 휴일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과였습니다.
첫 해외여행이니만큼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많이 경험하는 것이
단기여행의 본전을 뽑는 길이고, 다음 여행의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녀작인만큼 아마추어인 스스로가 꾸린 각본과 연출에는 미흡하고 부실한 부분이 많을테고
분명 그 허점들은 처음에는 문제되지 않다가 여행 중간 중간에서부터 하나 둘 발견되면서
맥이 끊어지고 뒤틀리면서 조급함과 스트레스, 아쉬움을 안겨다 줄것이 뻔했습니다.
휴식을 위해 떠나는건데 굳이 타국에서까지 치열하게 부대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열개의 목표치를 세워놓고 최소 일곱 여덟은 실현해보자가 아닌
한두개만 던져놓고 상황에 따라 살을 붙여나가는 것으로,
시간에 쫓겨 눈앞의 풍물을 놓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한 열차 플랫폼으로 뛰어가는 것 보다
느긋하게 구경하고 나머지를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하루에 방문해야 목적지들의 최단거리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었다놨다 하기보다
발 닿는대로 걷다 설령 잘못 든 길일지라도 신선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로 말입니다.
시계도 나침반도 크게 연연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2일차의 일정은 꽤 성공적인 하루였습니다.
서둘러 이동하지 않았고, 되는대로 걸었으며, 적당한 피곤함은 곧 휴식으로 풀어주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이었지만 지나온 흔적들을 곱씹으며 하나하나 나열해보니 이리 긴 글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주 형편없는 하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지나치게 허술한 계획과 루즈한 마인드는 3일차의 일정을 쌈빡하게 말아먹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데ㅋㅋㅋㅋ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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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력대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행 가고 싶다아아아아
북해도 가보고 싶네요ㅋㅋ2편도 오네가이고자루요~~
아 진짜 필력 대박ㅋㅋㅋㅋ!!! 저도 삿포로 가서 삿포로 클래식으로 링겔 맞고 왔습니다..☆ㅋㅋㅋㅋㅋ 이분이랑 같이 여행 가면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욬ㅋㅋ
필력 미친것같아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필력이 장난아니신데욬ㅋㅋㅋㅋㅋㅋ 평범한 여행후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다 진짜 일본가고싶다....꼭가고싶다....방사능이고뭐고 나도 저런온천....하 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글잘쓰신다..와
필력이 장난 아니신데 ㅋㅋㅋㅋㅋㅋㅋ 아... 여행가고싶다.... 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재밌게봤어요 ㅋㅋㅋㅋ
ㅌ다음편!!!!다음편!!!!
글보면서 일본다녀온느낌 ㅋㅋㅋㅋ 가고시퍼 나도 ㅠㅠㅠ
지고쿠다니 정말 좋았는데 ㅠㅠ 시간 여유가 안되서 오래 못있었던게 아쉬워요 ㅠㅠ 온천 하고 마시는 삿포로★맥주가 정말 최고였다죠..ㅠㅠㅠ
으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글에 몰입해서 읽다보니까 제가 다 여행한기분이예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홋카이도 진짜 평생에 한번은 가보고싶네요ㅠㅠ
아 여행가고싶어요 비행기타고싶어요...ㅠㅠ 2편은없나요?
일본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