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세밑에
김 난 석
해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모든 일 제쳐놓고
시골 고향에 들리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고향의 모습도 예전과 달라
이젠 조용한 산간에 숨어들어
외로움이나 고독을 자초하는 게 습관처럼 돼버린 지 오래다.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부모님이나 고향 촌장들의 당부를 안고
고향을 떠나 생활하다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귀향하게 되면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곧 보람이었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분해로 고향을 잃은 지 오래고,
그래서 자랑할 데도 없지만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이
오늘인 것 같아 씁쓸하다.
하늘을 우러르거나 땅을 굽어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라면
군자가 누리는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하늘이나 땅이야 겁내하지 않은지 오래이니
현대인들은 오로지 불안한 타인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만만히 살아내다가 문상(問喪)을 해보면
갑자기 숙연해질 때가 있다.
생활에 지쳐 짜증이 날 때 문병(問病)을 하노라면
사치스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던가.
남의 처지와 바꾸어 생각해보고 위안을 하거나
위안을 삼아보라는 뜻이리라.
그런가하면 남의 횡재나 성공사례를 보고 부러워하거나
욕심을 낼 때도 있다.
이것 역시 남의 처지와 바꾸어 생각해보면서
그와 대등한 처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 연유하리라.
우리는 이렇게 좋으나 궂으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연계의 평형원리가 인간관계에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것이 좋은 뜻으로만 작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류의 사회적 성격을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
전통적 모럴이나 규범을 좇아 수치심을 느끼며 생활한다는
전통지향형이나
절대자나 양심에 귀 기울여 죄의식을 느끼며 생활한다는
내부지향형 외에
타인지향형은 수치심도 죄의식도 아닌 타인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인류의 성격이라 한다.
타인이 보지 않으면, 그리고 타인과 의기투합하기만 하면
아무런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일 테니
얼마나 불안하고 고독한 심리인가.
우리는 왜 고독한가?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없거나
노인에게 자식이 없거나 남녀에게 짝이 없어 홀로 쓸쓸함을 말한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땅이 있으라 하시고
광명이 궁창에 있음에 그 빛이 땅에 비치라 하시니
그리 됐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있으매 보기에 쓸쓸하여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하나를 더 만드시고
이를 이브라 하셨다고 하니
태초부터 하늘과 땅이, 아담과 이브가 서로 조응하여
조화를 이뤄나가라는 뜻이었으리라.
어디 성경에서 뿐이겠는가.
그리스 신화에서 땅의 신 가이아가 하늘의 신 우라누스와 결합해
거인세계를 생성했다 하고,
동양사상에서도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의 생성 변전을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회학자의 말을 빌 필요도 없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태어남도 타인과의 관계요 성장하는 것도 타인과의 관계요
일상생활을 해나가거나 자아를 실현해 내보이는 것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나 남녀가 짝을 지어 가정을 이루는 것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럴진대 그 관계가 원만하게 형성되지 않거나
아예 형성조차 되지 못했을 때 또한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절대자에 귀의하거나 형이상학적 이상을 추구하거나
로맨티시즘을 찾아 희열을 느껴보려 하지만,
그 외에 현실적이거나 물질적인 향락에
빠져보려는 욕망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이상
또는 정신적 가치를 힘주어 부르짖는 게 아니던가.
이상 또는 정신적 가치와 현실 또는 물질적 가치의 우열을 말하기 전에
인간관계를 쉽게 설정했다가 버리거나
물질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음도 자주 보는데,
이웃과의 우정관계나 사랑관계도 그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어 관계를 영원히 유지하고 싶어 하는
주변상황은 어느 것 하나 고정불변의 것이 없으니
여기에 비극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항성이라 하는 태양은 은하계를 초당 이백삼십 킬로미터로 공전한다 하고
지구는 그 태양을 초당 삼십 킬로미터로 공전한다고 하며,
이런 현상은 우주의 극히 일부분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니
하물며 인간사에 있어서야 항구 불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여, 현대인들은 휴대폰에 입과 귀를 대고 하루에도 여남은 번씩
상대방을 향해 관계를 확인해보는 것이리라.
한번 맺어진 우정이나 사랑의 관계야 항구적으로 지속돼야 하겠지만
나 아닌 남이 변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강제력이 없는 일편단심의 약속이나 절개나 신의에 의지하다가
눈물만 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현실 속에 태어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현실이라는 것은 무리를 지어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요 시간이요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따라서 운명을 바꿔나가는 것은 영장류인 인간의 소명이라 할 것이나
도도히 흐르는 물결에 거스르는 것이므로
이것 또한 고독한 자의 행군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실을 외면한다면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주먹질 해대는 꼴이요
세상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 또한 고독한 몸짓이라 하겠다.
생각이 이에 이르면 신중한 관계를 설정해나갈 일이요
한번 맺어진 관계는 소중히 품어나가되,
남의 뜻에 의해 그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이라면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안고 조용히 물러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게 현실에 충실한 삶이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의 설정이야
천번 만번 변화하는 인간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분신을 만들어가면서 일생을 함께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삶으로 역사적 위인들은 고독을 달래가면서도
인류사에 큰 흔적을 남겨왔으니
인간이 아닌 학문이나 예술을 인생의 반려로 삼거나
희생적 삶을 살아가는 것도 보람된 삶일 것이다.
나는 왜 고독한가?
결국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타자와의 관계에 너무 집착하는 데에도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하겠다.
자신의 것일 수 없는 남의 사랑(이를 불륜이라 하자)이나
명성(이를 허욕이라 하자)에 집착하는 것 또한
그 이치가 마찬가지리라.
산간의 밤은 깊어 가는데 통나무집은 불을 밝히고
어둠과의 관계를 손짓하는 것 같아
고독을 자초한다는 게 헛말인 것만 같다.
자자. 불 끄고 어서 어둠으로 들자! (지난날의 단상 중에서)
이젠 외로움이나 고독을 자초한다는 게 객기란 생각만 든다.
멀리 떠날 것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전화나 메일을 보낼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손이 닿고 마음이 가는 이웃에게 말걸기나 해야겠다.
어제는 오랜만에 탁구 동호회에 나가봤다.
아무도 외로움이나 고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똑딱 똑딱
라켓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제일 좋더라.
임인년 마지막 하루가 저물어간다.
나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것들 모두 치워버리고
책상 달력도 치워버리고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계유년이여~
2022. 12. 31.
첫댓글 아무도 밟지않은 밤새 내린 눈처럼
하얀 새 공책을 곧 받게 되네요.
그 공책엔,
땅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지하수처럼
투명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들을
소복소복 눈 내리듯
적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보드랍게 보드랍게
아름다운 사연들을 적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임인년 한 해를 보내면서,
석촌님의 사유에 마음을 얹어 봅니다.
금의환향 한다는 것은 옛말이고
고향 집은 비어 있습니다.
돌아가서 뵈올 어른들은 계시지 않고
그리워 할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지금만 아는 사람들이어서
서로가 고독한 사람들이지요.
밝은 한 해,
癸卯年 새해를 기다립니다.
올해도 내내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석촌님
건강한 한 해 기원드립니다.
네에 올해도 내내 평안하시기 바라요.
새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산뜻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건강 잘 유지 하세요.
네에 그럽시다
날 풀리면 한번 봐요
오랜만에 석촌님 글 읽어봅니다.
펜션에서 연말을 보내셨군요. 눈이 덮인 펜션에 켜진 등불이 인상적이네요.
새해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잘 지내시지요?
날 풀리면 또 뵈어요.
새해에도 지금처럼 늘 건강하시고
건필 하시길 소망합니다.
네에 나무랑 님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