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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어, 이모티콘 글은 소설이 아니다. (1) >>
(* *) 표시 안에 들어 있는 말은 이전 글과 비교했을 때 애매한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했다는 표식입니다. 전반적으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조금 완화시켜 단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게 다듬었음도 미리 말해 둡니다. 조금 과격하게 넘어간 부분들을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보강하거나 심하게 오해될 소지가 있는 부분은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더 강해진 부분도 있고 완화된 부분도 있을지 모르니 양해바랍니다.
- 이우혁 -
새로운 화제거리를 찾아 헤매는 속칭 '옐로우 저널'이 지어냈다고 보이는 "인터넷 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글들의 대부분은 소설이라고 보기 힘들다. 많은 분들이 외계어와 이모티콘의 사용이 한글 파괴적, 언어 파괴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도 그에 부분적으로 동감하는 바, 나는 그에 하나 더하여 소설가 라는 입장에서 이 부류의 글들은 소설 파괴적 요소 또한 내포하고 있음으로 소설의 잣대로 볼 때 아예 소설로서의 기본 자격이 의심스럽거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견해로는 소설이 아니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사족 : 소설이 아니다는 소설로서의 존재를 애초부터 부정하여 모든 연관을 끊어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설로서의 기본적 자격이나 근거를 획득하지 못하여 소설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순서를 좀 바꾸었습니다.)
우선 호칭부터 살펴보자. 가령 예를 들면 판타지 소설은 비록 순문학은 아니지만 그 형식과 구성 형태 면에서는 기존 소설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판타지"라는 내용적, 주제적 특색에 "소설"이 붙어서 "판타지 소설"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소위 '인터넷 소설'이라는 것은 일단 앞에 붙는 인터넷 이라는 말의 쓰임 자체가 이치에 닿는다. 이하 '인터넷 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작품군은 인터넷에 연재하거나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모든 작품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현재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작품 군을 의미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인터넷 소설의 작품성 여부를 여기서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인터넷 소설은 어원부터가 인터넷 연재를 했기 때문인지, 인터넷 혹은 인터넷에 흔히 사용되는 이모티콘 혹은 외계어등을 주 구성요소로 다루었기 때문인지, 혹은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세대에 의해 주창되어서인지 창시자가 불분명한 이상 그 근거 또한 불확실하다.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위에 언급한 3가지 요소가 대강 사람들에게 "인터넷"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불명확한 공상을 갖게 하며, 그러한 무책임한 단어를 널리 유포시키게 했다 본다. 그 3가지가 '인터넷 소설'이라 이름 붙을 수 있는 대별적 특색이 될 수 없거나 되기 힘든 이유를 제시하겠다.
첫번째, 인터넷 연재 자체가 소설의 특성이 된다고 보는 견해에는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인터넷에서는 비단 인터넷 소설이라 불리워지지 않는 정통적 형식의 소설들도 똑같이 연재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연재 혹은 인터넷 공간에서 씌여졌다는 단순한 사실이 소설의 형태를 구분짓는 어떠한 증거도 될 수 없다면, 이러한 명칭은 당연히 쓸 수 없다. 가령 **일보 신춘문예에서 등단한 소설들을 모조리 "**일보 소설"이라는 통칭적인 명칭으로 부를 수는 없다. 각 소설들에서 공통적인 출발점을 찾을 수 없고, 만약 소수의 소설 들 사이에서 무엇인가 유사성이 발견되어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지 **일보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인터넷을 이용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된 소설이 있다면 혹 인터넷 소설 이라 불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나와있고 인터넷 소설의 이름을 거는 대부분의 소설은 인터넷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안다. 아울러 이모티콘, 혹은 외계어라는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형식적 소재를 차용했다는 것도, 혹은 그 비중이 대단히 높다는 것도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물론 외계어나 이모티콘이 표면적으로 인터넷 상의 문화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다만 '그냥 옮겨왔을'뿐이다. '그냥 옮겨 온 것만으로도 대표성을 띈다 여기실 분이 있겠지만, 그 부분은 뒤에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나는 그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이다. 오프라인 상의 '인터넷 소설'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한계 때문에 지금은 점점 혁파되어가는 추세이다. 장점으로 인정되지 못하여 자체 내에서도 도태되어 가는 형식을 가지고 최소한 '인터넷 소설'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긴다. 더구나 그것들은 다만 '형식적 소재'로서만 쓰였다.
글이 가진 내용적 소재나 혹은 단순한 소재도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 소재는 소설의 특성을 규정할 수 없거나 극히 규정하기 어렵다. 외계어나 이모티콘은 내용적 소재가 아니라 단순히 형식적인 소재일 뿐이며, 형식적인 소재는 내용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어떠한 요소로라도 변형시켜 사용이 가능하다.
그때문에 형식적 소재를 소설의 규정에 넣어 생각하는 것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형식적 소재는 '그것이 소설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인 구분의 잣대는 될 수 있어도, 소설의 특성을 규정짓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가령 외계어라는 형식적 소재가 소설의 특성을 구분 짓는다는 것은 소설 자체가 가진 대별력이나 특성이 그만큼 적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그때문에 외계어라는 특성이 유달리 강조되고, 돌출되어 특징적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모티콘의 경우도 비슷하다. 만약 이유도 없이 그러한 요소들이 유달리 강조되어 '자신만의 특성'이 부여되었다면, 그러한 글들은 소설로서의 의미보다는 형식소재만 강조된, 기형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형식소재의 이름이 그대로 언급된다는 것 자체가, '그 것 외에는 마땅한 특성을 찾을 수 없는' 작품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더구나 그러한 소재의 사용이 정당한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소설로의 정당성을 획득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세번째,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세대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넷 소설'이라 불린다는 것도 실제로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 말은 인터넷을 전혀 모르는 소위 "인터넷 문맹"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이다. 인터넷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이 무슨 10대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10대가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장악하여 기성세대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한 마디로 무지의 소산이라 하겠다.
인터넷을 만든 것도, 이끄는 것도, 적어도 10대는 아니다. 10대 스스로도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고, 자료실을 연다거나 자료 공유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터넷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터넷을 구성하고, 가장 효율적인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10대가 아니다. 10대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도 많고 다른 세대에 비해 보다 많은 수가 인터넷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인터넷을 10대의 전유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10대에서 90대까지 다양하다. 인터넷은 하나의 마술상자나 특이한 권능이 아니라, 배우고 이용하면 편리한 도구에서 시작한다. (*이전 글에서는 이 부분에서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이 너무 급히 나왔는데, 천천히 제시합니다.*) 물론 인터넷 문화가 그 안에서 향유되어 가고 있기에 그러한 특성을 잘 나타내어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현재에 '인터넷 소설'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인터넷을 도구로 이용할 뿐, 더 이상의 전진이나 인터넷이 가지는 어떠한 문화적 특성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드러나거나 특성화 되지 못한 문화적 특성이 간접적으로, 안에 깊숙히 배어 있다는 말은 일종의 증명되지 못한, 피상적인 허구이다. 문화적 특성을 주도적으로 끄집어내어 표현할 수 있어야만 당위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인터넷은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글을 올리는 공간이 있고 (인터넷이나 통신이 새로운 등단 수단이 되었다는 데에는 동감한다.) 글을 보이는 과정이 출판과정을 생략한 직접 과정으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쌍방향성이나 독자의 의견 반영등을 예로 드는데,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유혹이나 선택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예를 들면 실시간 채팅을 통하여 작품을 만든다거나 (나는 94년에 몇 명과 함께 이 것을 시도해본 일이 있다.)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현재의 인터넷 소설은 거의 예외없이 작가가 스스로 집에서 컴퓨터로 작성한 글을 게시판에 올리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만약 온라인 상에서 직접 글을 쓴다해도, 글을 쓰는 도중에는 독자의 의견을 참작할 수도, 영향을 받을 수도 없다. 결국 인터넷 연재는 형식상으로는 신문연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물론 신문의 독자가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는 인터넷 상의 리플이나 메일이 훨씬 수월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원천적인 차이는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인터넷 상의 문화가 만약 소설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내용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 되어야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소설의 다른 장르가 생길만큼 영향을 준 예는 아직 보기 어렵다. 현재의 인터넷 소설 들의 내용에서 그런 것을 찾기 힘들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단 한가지가 있다면 외계어나 이모티콘 같은, 인터넷 상에서 사용되는 형식 요소들을 그대로 차용한 정도라 하겠다. 이 부분은 뒤에서 따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는데, 일단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가치적, 내용적 특색을 지니지는 않았다고 본다. 결국 인터넷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단순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릴만한 합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자. 운전을 배워 쓰면 편하지만, 그것은 단순 지식일 뿐이다. 자동차도 많은 시간을 사용자와 함께 한다. 그러면 소설들을 작가의 운전면허 유무로 구분하여 "운전자 소설", "비운전자 소설"로 구분할 것인가? 현재의 인터넷 소설에서 갖는 인터넷의 의미는 자동차 운전이 갖는 의미나 마찬가지이다.
10대의 대표성이라는 이유로 인터넷 소설이라는 근거를 삼는다면 그 근거도 부적절하다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소위 "인터넷 폐인"들을 보라. 그들이 10대인가? 그렇다고 인터넷 망을 유지시키고, 활동시키는 근간이 10대인가? 10대의 사용자 수와 다른 사용자 수를 비교하여, 10대가 주류를 이룬다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10대가 가장 많은 조회수를 올려주고 가장 많은 물의를 일으킬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10대가 인터넷의 주인이고, 인터넷은 10대의 전유물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가?
이러한 오해가 빚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에 있다. 직장일과 가사에 바쁜 부모는 인터넷을 모른다. 그러나 10대의 자녀들에게는 컴퓨터를 사주고 망을 깔아 주었다. 그래서 10대는 인터넷을 할 줄 알고, 기성세대는 잘 모르는 가정이 많다. 10대는 뭐가 좋은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밤새 웃고 낄낄대는데, 기성세대는 행여 키보드를 잘못된 순서로 누르면 컴퓨터가 터져 버리거나, 주의 없이 가까이 가면 컴퓨터 바이러스가 자신에게 옮아 병이 걸리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10대만이 인터넷을 한다는 환상과 공포를 낳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가정 내의 문제만이 아니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이러한 인터넷의 확장을 자신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범접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초 테크놀로지의 확산으로 생각한다. 하다못해 기성의 문학 비평가들도 인터넷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이것을 자신의 기존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겁에 질려 스스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인터넷은 10대가 아니라, 모든 이용하는 자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10대, 혹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 적인 인상을 주며 붙은 "인터넷 소설"이라는 호칭은 절대로 부적절하다. 물론 '인터넷 소설'을 주로 10대가 소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0대가 좋아하고, 열광한다고 인터넷이라는 전반적 매체를 마치 10대의 전유물인양 판단하여 그런 명칭을 붙일 수는 없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명칭은 부적절한 것만이 아니라, 이로 인해 수많은 환상 과 오해, 몰이해를 낳게 할뿐더러, 명칭의 모호함으로 인해, 가령 인터넷 소설이 문제성을 지니게 될 때는 다른 장르의 - 단순히 인터넷 연재만 하는 전혀 다른 장르의 소설들 - 까지도 그러한 의혹의 눈길을 받게 만든다. 즉 이름부터가 문제성 많은 명칭이다. 그래서 온라인 상에서는 '외계어 소설' 이나 '이모티콘 소설'이라고도 많이 불리는데 오프라인 상에서는 굳이 '인터넷 소설'이라고 부른다. 부르려고 애를 쓰는 것인지, 그냥 부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가정을 해본다. 극 소수의 인터넷 지식을 가진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얻은 이니셔티브를 잃지 않으려고 인터넷 망 자체 에서 뭔가 특질을 찾으려 한다. 아까 예를 들었지만, 인터넷의 문화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문화가 특질로서, 소설 자체의 내용적인 특질을 지니게 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 그런 특색을 유니크하게 드러낸 소설군은 보지 못했다. 몇몇 작품이 나왔더라도, 최소한 작품군은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물론 존재할지 모르고 찾아내어 합당한 해석을 거치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논리를 갖춘 작품군은 탄생되지 못했다. 그래서 섣불리 이모티콘 이나 외계어 등의 인터넷의 외향적 특질만을 덮어 쓴 작품 군을 '인터넷 소설'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본인의 생각에 도구로서의 인터넷이 인간생활을 변화 시킨 것은 자동차와 핸드폰이 인간생활을 바꾼 것을 합한 정도의 위력밖에는 없다. 인터넷의 위력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나 핸드폰도 그만큼 인간생활 자체를 바꾸었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하게(?)도 자동차나 핸드폰으로 소설이나 문학장르를 결정지으려는 시도는 본 적이 없다. 자동차 문화도 있고, 핸드폰 문화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생활이 그로 인해 달라지고, 가치관과 개념이 달라지게 만든 요소들이 많이 있다. 물론 인터넷은 정보라는 매체의 양이 많기 때문에 문화로서의 영향력도 더 크다고 볼 수는 있다. 허나 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최소 소설이라는 면에서 문화적인 새 탄생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인터넷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도구로나 사용되었다. 간혹 생활 속에서 인터넷 사용장면 등이 묘사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도구로서의 쓰임으로 부분 인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헌데 지금의 인터넷 소설의 명칭이 왜 문제가 되는가? 아직 많은 인터넷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뭔가' 엄청난 것으로 오인되기 딱 좋기 때문이다. 모호하고, 정의내릴 수 없으면서도 무언가 첨단적이다. 더구나 문화적이기까지 하다.
인터넷을 잘 이용하지 않으면, 인터넷에 정의를 내리거나 찾아보려고 하기 쉽다. 자동차는 타고 가는 것이고, 핸드폰은 걸면 되는 것인데, 인터넷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내리지 못한다. 에디슨은 전기의 원리가 뭐냐는 질문에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있으니 쓰십시오."라고 말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의 존재나 그 깊은 원리는 앞으로 탐구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이것은 그냥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누구도 인터넷이 무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판단에 의하면 인터넷의 양상은 물리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하다. 표본을 관찰하려고 아무리 작은 자극을 가해도 그 자극 때문에 표본 자체가 변화하며, 표본을 조사하고 관찰 하는 사이에 표본자체가 변질되어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차라리 인터넷을 연구하려면 물리학적 통계적 이론을 적용해야지, 무슨 철학적 정의를 내려 하나로 압축시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칙주의와 철저한 고증정신, 거기에 곁들여서 "알지 못하면 건드리지도 논하지도 못한다"는 정도적인 사고에 입각한 기성세대의 지식인들은 그것들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성의 상식 하에서 뭔가 정의를 내려 하나로 몰아붙일 궁리만 하기 쉽다. 전문가라는 자존심이 함께 작용하는지도, 혹은 "저것도 못하면 안돼, 어떻게든..."라는 강박관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거나 우스갯거리 밖에 안되는 것도 그렇게 보지 못하고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 깊은 뜻이 있는 것 아닐까? 뭔가 나중에 대단한 것으로 발전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런 것을 내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을까?" 라고 겁을 먹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모르니까, 이해하지 못하니까 겁부터 먹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가령 컴퓨터나 부품을 샀을 때, 좀 쓸모없는 100V전원코드나 씨피유의 플라스틱 보호덮개등이 부수물로 나온다. 조립과정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본인으로서는 그것들은 그냥 버리면 되는 쓰레기일 뿐이다. 혹은 귀찮아서 방바닥에 버려두는 경우도 있다. 기계에 대해 백지인 본인의 처는 그런 부품을 주우면 "이것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혹시 중요한 부품이 빠진 것 아닐까? 이로 인해 뭔가 고장나는 것이 아닐까?" 라고 고민한다. 아는 내가 보기에는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본인의 처로서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과 아주 똑같은 양태의 해프닝이 무수히 일어나는 곳이 인터넷이다.
좀 예시가 길었는데,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도 3시간만 배우면 인터넷에 접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다고 3시간 배웠는데 어떤 부분이 잘 파악이 안된다고 "나는 바보였어"라는 착각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필요 없는 것은 과감하게 무시하고 몰라도 되는 게 인터넷이다. 1000가지 요리가 차려진 부페에 가서, 모든 요리를 먹어야만 한다는 투쟁의식을 불태운다면 미련한 짓이다. "모든 맛을 보아야 하는게 아니고 그냥 입맛대로 골라 먹으면" 그만이다. 인터넷도 그와 같다.
인터넷은 하나의 수단이며, 이용하면 된다. 겁을 먹거나 초월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터넷 공간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의 군집체와 똑같다는 점만 인식하고 익명성이나 무분별성에 빠지지만 않으면 즐겁고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러한 인터넷을 모르거나 끙끙 앓던 사람들은 대번 그것이 '인터넷'이 지닌 거대한 힘과 영향력과 복잡한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십상이다. 그때문에 많은 오류나 비판이나, 검증 과정들이 자연스레 생략되고, 오히려 칭송되어지고 예찬되어졌다고 믿는다. 최소한 인터넷 소설은 정식으로 문학적으로 비평되고 검증된 경우가 드물다.
대중문학은 물론 비평되기가 어렵지만, 비평을 받지 못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터넷 소설은 그 과정을 간단히 건너 뛰었다. 온라인 상에서는 단순한 개성이고 유희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오프라인으로 나오면서, 정상적인 비평이나 평가를 받지 않고 무조건 옹호되었다. 나는 오프라인에서의 인터넷에 대한 몰이해와 이름이 갖는 영향력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러한 행운(?)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검증이나 여과과정이 없었고 오히려 옹호성 여론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와 의견 불일치가 더 확산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여긴다.
비평을 차치하고라도, 인터넷을 모르는 부모님들이 '인터넷 소설'이라는 제목을 볼 때, 다른 것보다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겠느니 생각하고, 인터넷 소설이라고 하니 그 굉장하다는 인터넷에서 인정한 뭔가가 있겠거니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나도 주변에서 그런 예를 심심치않게 찾을 수 있었으니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결국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은 전혀 본질을 대변해주지 못하고, 근거가 박약하며, 다만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기대어 내용과는 상관없이 인터넷이라는 환상감을 불러 일으키는 덕을 보려는 상술에 기인한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명칭이라 하겠다. 더구나 이 명칭은 많은 피해를 주었다. 현재 '인터넷 소설'의 소비층은 주로 인터넷을 아는 10대 층이므로 이름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름을 그렇게 닮으로써 인터넷에 환상이나 관심을 가진 소비도 부추겼을지 모른다. 뭐, 이것은 넘어가더라도, 문제는 부정적 영향의 확대에 있다. 인터넷 소설이 현재와 같이 문제가 된 상황에서는, 단순히 인터넷에 '연재'만 하던 다른 작품들까지 물고 들어간다. '인터넷에 연재되던' 역사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이 '아, 인터넷소설아냐? 그거 안 좋다던데?'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름의 대표성 때문이다.
이번에는 외계어와 이모티콘이 지니는 한계와 이 요소를 부적절하게 사용된 현재의 글들에 왜 내가 (감히) 소설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지 설명하겠다. 물론 여기서의 소설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근거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현재 제기된 한계와 가능성을 논하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외계어에 대해 다뤄본다. 분명히 말하건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과 달리 통신어체와 외계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한데 합쳐 논할 수 없다. 많은 외계어들이 통신어체를 다시 외계어 적으로 풀어 쓰기 때문에 두 가지가 혼용되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 그 둘은 아예 근본적으로 다른 발상에서 출발하는 형식이다. 통신어체는 인터넷이 나오기 이전 접속시간당 요금이 부과되는 통신시절에 처음 등장했다. 요금의 압박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전달하고자 했던 통신인들은 그러한 목적때문에 다음과 같은 원칙하에서 글쓰기를 변조시켰다.
자판구조상 치기 편하게, 또는 받침을 배제하거나 소리나는대로 적는 식의 편법을 거친 것이다. (가령 안녕하세요 보다는 안냐세요, 반가워요 보다는 방가 등으로. 안녕히 계세요 -> 바이바이-> 빠 등으로.) 그러다가 그러한 말투에 재미를 붙인 통신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말들도 소리나는대로 적는 일종의 유희를 즐김으로써 통신어체가 발전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가령 see you later 를 C U later식으로 표기하는 것도 영어 통신어체의 예라고 본다. 다만 알파벳 음소로 구분된 영어구조보다는 자모음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세계에 3종 밖에 존재하지는 않는 조합형 어구 체계를 가진 한글에서 더 많은 가능성이 연출되고, 더 많은 변조가 있었다. 이는 언어와 맞춤법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사용 한계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굳이 문화현상으로서의 인터넷 등이 언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면 여기에서 예시를 찾을 일이다. 내 견해로 통신어는 부정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온라인에서만 사용된다면 아주 심하고 이상한 것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당수 용인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그것도 맞춤법의 준칙을 지킨다기보다는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허용한도는 있어야 하며, 오프라인이나 실생활에로 번져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 논란도 있을 수 있다. 단 무조건 적인통신어체는 역시 반대하며 통신어체는 아무리 허용이 가능하다 해도, 오프라인으로 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조어나 재미있어 보이는 단어나 몇몇 표현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용인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통신어체의 과도한 사용은 나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나, 언어의 형태적 변화나 유기적인 특색이 나타날지도 모르므로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외계어체는 이와 완전 구분되는 다른 형태를 지닌 언어파괴행위이다. 많은 경우 통신어체로 이미 한 번 변화의 과정을 거친 말들이 다시 외계어체로 표현되기 때문에 혼돈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령 예를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Øどじギ∽㉧!!¿♪♬♬ヲヲヲヲ
이것은 안녕 ㅋㅋㅋㅋ 라는 말을 외계어체(?)로 표기한 실사례이다. 알아보기 아주 어려워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전체적인 윤곽에서 잡아내야 할 것이다.
じナじ┧┃、大구∫∞ぎじノ♡늼의 小설읊¸¸ⓔㄺㅓじㅏ、ばちじ!¿¿ 위의 문장은 "너네 대 귀여니님 소설을 읽어나 봤니!??"라는 문장이라고 한다. 본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실제로 사용되던 문장이다. 이 외계어체는 한글의 음소구조를 파괴하고 전이, 대치한다는 면에서 한글 파괴의 일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언어적으로는 언급을 같이 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그래픽적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보조적으로는 위에 언급한 통신어체에 이 외계어체가 결들여지면서, 나타내기 어려운 글자들을 더 심하게 바꾸어 (가령 위의 예에서는 님 대신 늼, 을 대신 읊 을 사용) 언어형태를 더욱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데, 이는 보다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로 바꾸려는 그림적 작업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언어형태의 특색으로 볼 수는 없다. 굳이 언어형태적인 특색을 찾는다해도 통신공간 내의 한정된 특정 집단에서의 특색 밖에는 없다.
예를 들기 위해 다들 알고 있을 비슷한 기호형태를 찾아보자. 모르스 부호는 외계어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하고 완벽한 체계이며 언어의 대용품이다. 그러나 모르스 부호로 소설을 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주 특이한 경우, 모르스 부호를 쓰는 상황 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모르스 부호는 모르스 부호를 배운 사람만 읽을 수 있다. 모르스 부호 자체는 유명하지만, 그리고 _ . _ _ _ . _ 이라고 쓰면 모르스 부호를 썼구나고 알아볼 사람은 많겠지만, 이것을 문장과 혼용하여 쓰면 누구도 그것을 새로운 형식을 지닌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모르스부호는 언어로 약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모르스부호로 애써 소설을 만든다 쳐도, 어차피 언어로 번역하여 읽어야 한다. 그러면 번역품은 결국 언어로 된 것이므로 모르스 부호로 구성된 소설이란 것은 특색도 못된다. 구체적인 언어지만 다만 언어를 풀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특색은 인정받을 수 없다. 외계어도 마찬가지다. 보기 어렵게 장식은 했지만 그냥 언어를 풀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외계어체는 근본적으로 글자의 형태를 특수문자, 아이콘 등으로 변조하여 알아보기 힘들게 장식(?)한 것 뿐이며 어떠한 언어적인 대별성도 외계어체라는 안에 포함될 수 없다. 언어적인 특색이 있다면 이는 외계어체가 아니라 통신어체에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언어적 형태가 아니라 미술적 형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원래는 "외계어"라는 명칭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 "외계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것이나 그나마 법칙성 조차 전무하며 매일 같은 사람이 사용하여도 나날이 달라지는 일종의 유희일 뿐이다.
전위음악의 창시자라는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음조를 없앤 무조음악 이론을 만들었다. 음악이 아름답기보다는 소음으로 들리는 음악파괴 형식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도 의도적으로 음소파괴, 문법 파괴를 행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의도가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배경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위와 같은 외계어체 사용의 유희 등은 절대로 그 근간에 무슨 이론적 근거나 숨은 의도나 법칙성과 논리가 내재한 것이 아니다.
본인은 지금 5살 먹은 딸이 있는데, 한글의 자음 모음을 플라스틱으로 찍고 자석을 박아 글자를 배우게 한 장난감 세트를 3살 때 사주었다. 그 아이는 그것으로 글자를 배우다가 심심하니까 그것을 흩고 쌓고 장난을 쳤다. 기이한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혹은 식탁에 놓인 접시와 젓가락 한 짝을 보고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유아적 유희와 똑같은 사상근거밖에 갖지 못한다.
아무리 문화적 근거나 10대의 양식, 하다못해 놀이문화라도 대별한다 쳐도, 외계어는 언어적으로 볼 때는 나쁜 문화밖에 될 수 없으며, 언어 수호 측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비판의 대상이다. 예술적이거나 정황적인 가치를 인정하려 한다면, 일단 온라인이라는 환경 하에서나 논의가 시작 가능하다. 예술적인 가치가 인정되려면 근간이 되는 의식과 사상을 논리적으로, 최소 설명으로라도 따라 붙어야 한다.
본인은 이런 장난성 유희가 만들어진 배경을 짐작해본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군가가 이러한 장난으로 글을 썼는데, 사람들의 (특히 기성세대의) 눈에 띄었다. 안그래도 인터넷이라면 겁을 먹고 있던 판에 이러한 파격적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시도를 보고 그들은 겁을 먹은 것이다. 그냥 "장난 하지마" 하고 엉덩이 한 번 때려주면 다 끝날 일이었는데, 배운게 죄라고 콩깍지가 씌어, 이것에서 "고등적 언어파괴"의 가능성 같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말을 붙여댔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한마디로 우스운 일이다.
그 결과로 그것을 만들어낸 당사자나 다른 10대들조차" 야 이게 정말 뭐가 있나보다. 나는 천재인가 봐" 생각하여 앞다투어 그것을 양산하고, 유희를 즐기며, 나아가서는 자랑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기자들은 난리를 치며 "과연 세상이 빠르긴 빠르구나. 무섭긴 무섭구나. 저런 어린 애들이 벌써 그런 고등구조를 안다니" 라고 대서특필하고, 행여 그들에게 누가 될까 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에 어떤 흠이라도 잡힐까봐 전전긍긍하며 일을 부풀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내 딸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다. 내 딸은 비록 5살이지만, 내 딸이 피아노를 가지고 장난삼아 퉁퉁 쳐대는 것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쇤베르크나 불레즈의 12음기법의 무조음악 이론으로, 존 케이지의 무작위성 이론으로 해석하여 모짜르트를 능가하는 재질을 지닌 것으로 미화해볼 수 있다. 내 딸이 종잇장에 끄적거린, 아빠의 눈 코 입이 비뚤게 몰려 붙어 있는 얼굴을 피카소 적인 입체구성의 원리를 깨우쳤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찰흙으로 사람을 빚으려다가 망쳐서 길쭉, 늘씬늘씬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자코메티의 조각에 비유할 수 있다. "엘루루루.."하고 입술을 튕기며 장난치는 것을 언어 음소적 파괴와 현대의 비사회성을 강조한 희곡작가의 역량과 비교하여 재능이 있다고 뻥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비록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어도, 그 애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한 것"일 뿐이며, 그 아이에게 그러한 이론이나 논리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의도된 예술 형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내가 그렇다고 티브이에라도 나가서 자신있게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으리라. 그 아이가 평소의 내 태도의 영향을 받아, 그 아이가 사는 사회의 반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면 더더욱 웃다가 졸도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런데 그런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 이미 벌어져 있다.
"감히" 혹은 "몸 다칠까봐" 겁먹은 일부 그러한 현상을 구분조차 못하는 기성세대가 어린아이들의 유희와 작태를 굉장한 것처럼 인정하여, 앞장서서 칭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들도 앞장서서 (어른들이 치켜주니까) 이것이 대단한 뭔가가 있는 것이라고 코끝을 높이 들며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건국 50년 이래 문화적으로 이런 웃긴 해프닝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가니까, "난 그런 거 몰라요" 같은 말 마저도 깊은 상징성과 고도의 논리적 배경 하에서 나온 말로 알아서들 미화하고, 받아 들여졌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러한 변화나 파괴의 가능성을 예술의 이름하에 부여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러한 변화나 파괴를 행해야 하는 이유는 대야 할 일이다. 통신어체도 그렇지만, 외계어는 심각한 문제이다. 자연스럽게 흘러와서 현재에 이르렀다는 통신어체 만큼의 이유도, 발전과정도, 사용의 합리성도 없다. 시각적인 효과로서 외계어를 인용하려는 시도도 있을지 모르는데, 그 가능성은 굳이 부정까지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일단 소설에 시각효과가 부여되는 것이 정당하냐, 정당치 못하냐는 판정을 먼저 거친 후에야 그 양태의 하나인 외계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없이, 단지 단순히 '인터넷적인 특색을 부여하기 위해서' 온라인에서 행해지던 외계어가 오프라인으로 옮겨졌을 때, 문제는 비로소 터진다.
의도적인 면에서 하다못해 시각화의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쓰여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그런 효과가 필요하다는 요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10대가 온라인에서 쓰는 문화(나쁜 문화라고 이미 말했다.)가 단순히 10대의 트렌드로 삼기 위해서 자성이나 검증 없이 오프라인으로 끌어내어졌다면 그것은 단호히 부정되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 외계어를 손으로 구성하여 쓰라면 대단히 힘들 것이다. 그냥 미술이 되어 버린다. 외계어가 사용될 수 있는 이유는 온라인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판과 일정한 화면배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온라인에서 끌어내어 단순히 오프라인화 시키는 시도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단순한 트렌드로서의 이미지 획득의 욕구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소설 형식에서, 그러한 외계어 글쓰기를 주도하고 그것을 '개성'이라 생각했다는 것은, 저급한 수준에서의 의식 공유라는 개념으로 끼리끼리 뭉치려 했다는 정도의 가치관 밖에 획득할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인터넷을 설명한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러한 단순한 '옮기기' 시도가 대단한 문학적 개가, 나아가서는 인터넷 문화를 오프라인에 현실화시킨 양 침소봉대 되고 있으니 문제다. 옮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온라인에 근간을 두어야 할 것을 무작정 오프라인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 내용도 좋은 형식이 아니다. 언어 파괴, 한글 파괴라 불리는 것이다. 더구나 오프라인의 예술성 획득이라는 그 명제 때문에, 외계어 소설(소위 인터넷 소설)의 소비층에서는 외계어가 합리화 된 것처럼 착각되게 되었고, 이해하지 못한 사회에서의 실수발언이 계속 유도된다.
외계어가 시각적 면에서의 예술형식이 될 수 있다고, 내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나에게 당사자가 직접 내게 그러한 체계의 합리성과 예술적 독창성을 논하고 증명하라. 그러면 그런 부분의 외계어 사용은 납득하려 해보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리고 모르지만.. 재밌잖아요?" 나 "이게 우리 예술이라구요! 누구누구도 예술이라 한다구요" 라는 변명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냥 장난이다. 그리고 내 판단이지만 현재의 소설 중 90%이상은 그런 의식 없이, 다만 열광하는 10대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쓰이고 있다. 근거 없는 언어파괴를 조장하는 외계어가 이제는 그런 눈길끌기 용도로 쓰인다면 거의 범죄이다. 마** 교수 등이 괜히 고생을 치른 것은 아니다. 예술의 자유를 인정하고, 근거를 댔어도 문제가 커졌다. 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고, 이해되는 선에 달하면 공권력이 개입될지도 모른다. 금지령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때는 누가 피해를 볼까? 두말할 것 없이 외계어 사용에 깊숙히 물든 10대들이다.
배웠다고, 잘났다고 으스대며 어깨 힘주어왔던 사람들을 모조리 바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그 애들은 기성세대를 통렬히 비판하기는 했다. 그리고 오히려 피해자는 그 아이들이다. 기성세대는 반성하고 혀라도 깨물어야 할 일이다. "그런 짓 하지 마. 나뻐. 알았어?" 하고 꿀밤이라도 한 대 주었으면 끝날 일을, 문화현상으로 만들고 이제는 한글 보호운동까지 해야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 의견을 제시하고 만의 하나 이슈화가 된다면, 앞에서 옹호하던 비겁자들이 과연 양심적으로 정당하게 나올지, 자기들의 잘못을 덮고 숨기기 위해 역공격으로 더 드세게 나올지 모르겠다. 진정한 한글파괴자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겁먹고 웅크렸던 그들이다. 해결법은 간단하다. 그러한 언어 구사를 하는 당사자들을 공식적으로 불러 놓고, 자신의 세계에 대해 논리적, 심층적으로 해석하여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기회를 주어 보라. 99%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일 것으로 예상한다. 그 말에조차 뭔가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 바보군요! 배운 바보에요!"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현재의 상황을 옹호해줄 것만은 아니다. 아마 그 분들은, 외계어 사용에도 가능성이 있으니, 이렇게 싹을 꺾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혹은 이렇게 한 번 질타를 받아 꺾이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된다 걱정하시는지도 모른다. 기우라고 말하고 싶다. 외계어일지라도 진정 대변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지니고 예술적으로 제시된다면 언제든지 인정이 가능할 것이다. 나중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혼란이나 역효과가 큰 상황을 그냥 용인하려는 태도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부당성을 일깨워주고, 그 한계를 명확히 한 다음, 조심하여 실험적으로 써야 한다고 여긴다. 가급적 쓰지 않기를 바라며, 외계어로 된 소설만은 소설이라 인정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외계어로 된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믿는다. 문학도 아니라고 믿는다. 소설은 문자와 언어의 가능성을 넓히는 예술 형태이다. 섣부른 외계어와 같은 시각화 말고라도, 언어만 가지고도 충분히 묘사나 효과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소설의 길이다. 섣부른 시각화 효과를 외계어 같은 것으로 대치하려는 시도 자체가 좋다고 보지 않는다. 외계어가 가진 시각효과도 그리 광범위하지도 않다. 더구나 텍스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림에 비하면 표현력도 엄청나게 떨어진다. 그렇다고 조형성이 좋다고 보는가? 그림과 언어의 결합을 원한다면 만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좋은 장르도 있지 않은가? 굳이 새 형식의 창조에만 집착하여, 표현력 떨어지는 시각적 그림 형태인 외계어를, 언어적 가치로 씌어져 오고 있고, 앞으로도 잘 써져 나갈 소설에 들이미는 이유는 무엇인가? 혁신적 시도의 탈을 쓴 얼치기 잡종으로 눈길을 끌고, 새 장르의 개척이라는 허풍을 떠는 일은 이미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것이 보다 발전되고, 가치를 가지고 뻗어나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의 순수한 추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토끼를 쫓아 다 잡는 일은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뭐, 두 가지의 결합은 고사하고 이미 스크리아빈 같은 음악가는 음악, 시, 미술에다가 냄새 및 촉감까지 동시에 체험하는 종합극을 20C 초반에 시도해 본 바 있다. 물론 그런 시도가 계속 성공 못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일단 내려진 결론은, 뜻이 고상하다 해도 받아 들이는 인간 자체의 감각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동시에 여러개가 접수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전달하려는 것을 어느 한 분야의 순수한 추구로 정화시켜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20C초에 감각 등에 관해 행해질 수 있는 시도는 다 행해져 보았던 것으로 안다. 결국 20C에는 영화나 만화 같은 하이브리드 매체가 나왔다. 그러나 소설 등의 문학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별로 행해지지 않았다.
시는 비교적 적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음악적 특성인 운율이 중요한 장르이다. 그래서 기호나 표현도 소수 사용된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러한 시도는 이루어졌을지언정, 그러한 효과를 제대로 거둔 작품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왜 없는가? 소설은 분량에 제한이 없다. 풍요로운 언어 사용을 보장한다. 그리고 언어로는 거의 모든, 사물 자체부터 동작,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모조리 포용할 수 있다. 아주 폭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사랑'을 그려보라. 혹은 '이별'을 음악으로 표현해보라.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언어로는 아주 쉽다. 아예 개념이 정의된 경우도 많다. 소설은 그러한 가능성을 '묘사'로서 할 수 있게 열어 놓았다. 덕분에 다른 장르를 굳이 첨가 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표현이 가능하고 예술성을 전달 할 수 있다. 앞으로의 가능성도 무한하다. 더 절제되고 더 완벽한 묘사, 겉모습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것까지 전달하는 묘사, 거기다 대사라는 수단도 있다. 굳이 다른 매체를 접목시키지 않아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표현수단의 접목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본이 잘못되었다. 외계어로는 끌어낼 수 있는 폭이 극히 적으며, 온라인 기반이라는 한계까지 있다. 그런데 끌어냈다. 사상이 의심스럽다. 모르고 그랬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소설을 잘 쓰려고 하지 않고, 외계어에 무조건적인 근거를 두었다는 사실은, 그 글이 소설이라는 자격을 상실하게 만든다. 소설로서의 추구는 글로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수단이 강구되는 이른바 형식 파괴가 이루어지는 것은 글로 이끌어 낼 수 없는 표현을 다른 수단으로 이끌어내거나, 좌우간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마땅하다. 소설의 정의를 누가 내릴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파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라고 부르면서, 소설로서의 기본적 양식도 없었다. 힘든 묘사를 하기보다는 그냥 외계어로 두리뭉실하고 넘어가려 했다. 소설은 언어로 추구되는 것이 최소한 출발점인데, 출발점부터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나갔다. 소설이라 자칭하기는 하지만, 소설로서의 자각조차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아닌 것이다.
섣부른 표현시도를 했다고, 소설로서의 작가이나 추구도 없이, 마음대로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글들을 무어라 할까? 나는 지금 작품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못썼다고 소설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소설로서 출발을 했다고 보기 어렵기에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형식의 출발이 근거 없고, 단지 편해서, 그냥 재미있어서 붙인 것이라면, 그것은 소설로서의 최소한 지켜야 할 양식선을 아무 생각없이 넘어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소설'이라고 인정 해 줄 수는 없다. 뭐, 개인 의견이지만, 작품성 유무를 떠나, 아무 생각없이 소설의 형식을 마음대로 부수면서도 그것을 창의성인양 한다면, 절대 소설이라 불러줄 수 없다. 소설이 아니라 할 수 밖에 없다. 작품성이 논의가 되건 안되건, 많은 사람들이 소설이라 하던 안하던, 최소한 나만이라도 절대 소설이라 불러 줄 수 없다.
아울러 외계어의 사회적 책임도 생각해보자. 예술가 운운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순수 예술가인가? 대중예술가이다. 대중소설가이다. 그러면 누구보다 대중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외계어를 남발하여 가치관이 박약한 어린 학생들이 맞춤법을 틀리고 헷갈린다면, 최소 그럴 가능성만이라도 있다면, 그에 대한 생각은 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보통 대중, 특히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매체들은 항상 철저히 단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아주 이상하다. 왜 그냥 놓아두었을까 의문스러워서, 온라인이나, 10대 들 스스로가 자정운동을 하고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어른들은 다 무엇을 했을까?
바로 외계어나 이모티콘,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을 덮어썼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이해가 안되어서, 예술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어서 건드리지 못하고 주저한 것은 아닐까? 그게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닐까?
외계어가 난무하는 것은 아이들 만의 잘못이 아니다. 언어파괴, 한글파괴를 한 것은 그 애들이지만, 책임이 모두 그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 아이들을 범죄자로 만드는가? 그 애들은 재미있어 한 것 아닌가? 재미로, 장난으로 무슨 짓을 안해보는가?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장난 많이 했다. 그러나 그때는 어른들이, 말 잘못하고 잘못쓰면 혼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습관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문제가 되는가? 잘못이라고 말은 하는데, 또 어디선가는 그게 뭔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 애들에게 누가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는가? 누가 그런 행동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뭔가 있는 것처럼, 계속 해도 되고 해야 하는, 하다못해 트렌드로서의 명칭을 달아주었는지 찾아 볼 일이다. 매스컴 기록, 공식적인 견해 표출, 낱낱이 뒤져보라. 그들이 주범이다. 그들을 찾아서 갈기갈기 찢든지 말든지 할 일이다. 그 다음 아이들은 그냥 국어선생님께 맡기거나, 동생이나 아들 딸이라면 꿀밤 한 대 주고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을 적으로 삼아 내전이라도 벌일 셈인가?
역시 이야기가 좀 옆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이모티콘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모티콘 역시 기호이다. 발음도 되지 않고,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도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언어소재라고 말 할 수조차 없다.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특수상황, 즉 통신환경 사이에서 뿐이다. 문학에서 쓴다면 인터넷이나 통신환경을 묘사하는데 쓰일 수는 있다. 이모티콘은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대강의 동작과 표정을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본문을 만들거나 의사를 전달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아무데나 사용했다면 그것은 이미 소설이 아니다. 나는 소설이 아니라고 부른다. 왜 소설이 아닐까? 언어로 구사된다는 전제, 출발점이 언어의 추구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합당한 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온라인에서나 살아 움직이는 이모티콘이다. 오프라인으로 옮겨버리면 그냥 기호일 뿐이다. 이모티콘을 사용했기에 다 소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추구라는 기본 전제를 등한시 혹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소설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이모티콘을 논해보자. 물론 이모티콘, 대단히 특색있고 매력적인 수단이다. 허나 이모티콘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될 수 없다. 따라서 언어 소재로는 실격이다. 가령 내가 ^_^ 라는 이모티콘을 보냈을 때, 최소한 웃는 표정이라는 기호적 인정은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기뻐서 웃는지, 울다가 웃는지, 할 수 없이 웃는지, 슬프면서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인지 절대 구분하기 어렵다. 가령 그대로라면 모든 소설은 "나는 왔다. 나는 먹었다. 나는 울었다. 나는 웃었다" 정도의 표현의 나열로만 끝날 것이며, 모든 문장은 다 합해봐야 천개도 안되는 이모티콘의 나열로 끝나버릴 수 밖에 없어서, 어떤 가능성도, 독창성도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 앞뒤 구조로 미루어서 판단... 혹은 그것이 이중적 구조라고 하는데, 역시 배운 바보들의 소리이다.
이 부분도 외계어 부분과 같다. 묘사를 하면 되는데, 그러다가 정 특수한 이유나 정당성을 가지고 넣었다면 모르는데, 그냥 마구 넣었다. 이모티콘을 쓴 소설을 왜 소설이 아니냐고 하느냐면, 소설로서의 출발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새로 정정해 쓴다. 거기에 최소한의 타당성도 대지 못했다. 이모티콘을 목적성도 불분명하게 묘사를 대치하기 위해서나, 그냥 대강 상황을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 썼다. 온라인에서라면 그래도 이해한다. 오프라인으로까지 확신시켰으니 이모티콘 들이 다 울 일이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땅에 물고기를 심은 격이다. 역시 인터넷 공간이라는 특수성을 그냥 무작정 옮기기만 했다. 마구 옮기려니까 따옴표 안에도 들어간 듯 하다.
더구나 제약은 또 있다. 이모티콘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쓰는 사람 자신이 명확한 감정을 보내기 위해 송출하는 기호가 아니다! 이중적 의미가 내재된다면, 받는 사람은 그럴지 몰라도 최소한 그것을 쓰는 사람은 이중성의 의도를 지녀야 한다. 만약 쓰는 사람, 보는 사람 둘 다 별 의미를 갖지 않았던 것을 새삼스레 이중구조로 인식하려는가? 물론 특수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상황이라면 결국 그것은 대강 무의미하게 대강의 감정을 아주 흐릿하게 전달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것이 문학적으로 차용된다면 뭐 "기호낙서"나 "이모티콘 라이팅" 이니 하는 신조어를 만들면 몰라도, 최소 소설로는 봐줄 수 없다. 소설이라면 묘사라는 훨씬 강력하고 좋은 수단이 있다. 묘사보다 더 뛰어난 이모티콘 사용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소한 몇 장면에서는 잇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소재가 못된다. 그 이유는 앞의 외계어항과 동일하다.
내가 신형식의 추구를 부정한다고는 보지 말라. 그러나 최소한,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설 안에서 언어 이상의 합리성이나 필요성이 있어야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은 대중문학적으로는 뭐라 않겠다. 별 의미없이 써도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간섭 안한다. 그러나 새로 만들려 할 때는 잘 만들어야 할 것이라 본다. 이모티콘이 시각 + 언어 의 최초 시도는 결코 아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만, 나는 좀 회의적이다.
왜 내가 외계어, 이모티콘 소설을 소설이라 부르지 않는지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이해가 안간다면 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설이라 근거도 없고 소설을 쓸 생각도 아니면서 그냥 무턱대고 소설이라 이름 붙이고 들고 나오지는 마라. 소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라. 정 원한다면 하나 이름을 만들어라. 그리고 무슨 새로운 문학내지는 하이브리드 형식을 창출했다고 우겨라. 쌍방 모두 정확한 의미없이, 읽을 수도 없고 발음할 수도 없는 기호를 나열한 것을 특질로 삼아 뭔가 하나를 만들든지 해봐라. 더구나 미술과의 결합이니 이론적 체계도 세워야 할 것이지만, 난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모티콘은 한글파괴와는 별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모티콘으로 인한 한글 사용의 둔감화는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는 미술의 영역에 해당되므로 문학적으로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미술쪽에 가서 말해봐라. 문학에 사용하려면 미술지식까지 같이 좀 쌓고 정식으로 논리를 쌓은 후 행하라. 소설로서의 출발점은 지키고, 그쪽으로 애라도 써 본 다음에 소설이라고 자칭하라. 최소한도의 언어적 표현은 추구해야 잘썼건 못썼건 소설이다. 외계어, 이모티콘을 스스로 트렌드로 걸때, 이미 소설이라 부를 자격을 스스로 버린 셈이다. 소설이 언어로만 된다고 누가 정했냐고 딴지 걸지 마라. 언어 보다 더 나은 묘사를 하는 요소를 개발하여 보인 다음에야 논할 수 있는 이야기다. 동의하지도 않는 가능성 가지고 소설이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느니 하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소설이 언어로만 이루어져도 충분하고, 다른 요소를 집어 넣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 길이 넓고 무궁무진하다 생각하니까.
이모티콘은 분명 인터넷 매체의 트렌드이기는 하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이 소설에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냥 그게 좋잖아요 편하잖아요"같은 이유로 붙는 만행은 규탄한다. 인터넷의 트렌드를 왜 밖에 끌어내어 맘대로 팔아 먹으면서, 그게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가? 차라리 그냥 그림을 그려넣어라. 아니면 새형식이라 하거나. 언어적인 추구를 하지 않고, 그에 중점을 두지도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햇으면서 소설이라 부르라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인터넷 매체의 우월성이라고, 하나의 형식이라고 폼잡고 싶은 기분은 알겠는데, 대단히 보기 흉하다. 아울러 근거없이 사용된 외계어나 이모티콘을 가지고 이것도 소설의 한 형식이라고, 정당한 논리적 근거없이 부르짖는 사람은 앞으로 혼내주겠다. 언어적 추구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설에 넣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보조, 부수 역할까지는 그래도 모르지만 (대중문학에서는) 그래도 언어추구를 안하고 핑계만 대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착한 내 딸은 적어도 자기가 찍찍 낙서해 놓은 그림을 가지고 와서 "잘 그렸지?" 라고 묻는 일은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와서 "피카소 보다 내가 낫잖아? 안그래? 모른다면 아빠가 바보인 거야!" 라고 바락바락 대들지는 않는다. 바보짓을 하면서 최고라고 우기는 것도 불쌍한데, 거기에 맞장구치는 사람들까지 있는 판이니 이런 코미디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최소한 바보는 죄는 아니다. 허나 떳떳하거나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바보인게 자랑스러운 세상이 되어가려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후세에서 기록하는 이 시대의 트렌드가 되려나?
인간의 인권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라기 보다는 남의 인권도 존중한다는 일종의 "약속"을 지킨다는데 있다. 이것이 일종의 사회계약론이다. 그 때문에 남의 인권 -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살인범은 그 사람과 감정이 없는 사람 (경찰)이 잡아가 목을 매달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인간 사회에서 살려면 이러한 기본계약은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이름을 코에 걸고 싶다면, 합당한 논리적 사유도 없이 문학에서 정해져 있는 일종의 계약인 형식을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언어 추구를 하거나, 그 선에서 출발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소설 논법에 까지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시각적인 면까지 무작정 넣고 소설이라니? 정말 아무거나 다 소설인가?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변형을 가하거나 변화를 주는데에도 한계가 있으며, 그 선을 넘어가면 "파괴"가 된다. 그 파괴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파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 즉 예외조항을 인정받는 것은 기존의 계약과 가치 모두를 뒤엎을만한 근거와 논리, 밑바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생명을 존중한다는 계약을 어긴 자의 생명은 빼앗을 권리가 있다. 최소한 죄를 범한 순간부터 법원의 판결을 거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죄인이 된다. 법원은 죄의 형량을 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 "소설"의 기본 룰을 지키지 않는 작품은 자연스레 "소설"의 이름을 딸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인이 되는데에도 기본조건들이 있다. 그것을 다하지 않으면 한국인이 못되듯, 소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주욱 예를 들었듯, 외계어, 이모티콘을 남용한 그 무엇인가는 소설도 아니며, 문학도 아니다. 단순한 형식상의 특질이 왜 소설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지는 누누히 설명했다. 뭐, 소설이라고 우기고,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정의를 모든 사람이 받아 들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절대 소설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나중에라도 그런 면을 고치고, 겉멋에 들떠 이상한 시도를 하지 않고 착실히 언어로 된 추구를 행한다면, 시각적 시도를 하더라도 나름대로 설명하며, 자기 글이 왜 소설인지 확실하게 논증할 수 있다면 소설이라고 불러 주겠다. 최소한 기본소양 내지는 의식이라도 있어야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타자로 몇 자 주욱 글자를 나열해 놓은 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이 소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다. 형식상의 한계나 기타 확실한 목적에 의해, 스스로 정연하게 논리적 논증을 할 수 있는 구조에서, 그것이 인정받으면 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아니라고?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고 내 표현은 그게 아닌데 배운게 적어서 말로 못할 뿐이라고? 그럼 배운 다음에 말해라. 누가 말렸나? 말 못하겠으면 할 수 없지. 무조건 억울하고 이건 아니라니? 내가 그 사람에게 묻겠다. 나에게 1억원 만 줘. 왜? 그냥. 내 마음이 그래서. 이유가 뭔데? 목적이 뭔데? 그냥., 표현할 수 없을 뿐이야... 이게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앞서의 항변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뭐, 나 혼자 부르지 않는 것 뿐이지만.
나 혼자 소설로 부르지 않는 것이 화나고 억울하면 이를 악물고 배우고, 공부하고, 논리도 쌓고, 타당성도 쌓고, 문법도 배우고 문체도 연구하여 언어적 문장 실력으로 나를 놀라게 해주어라. 혹은 자신의 근거와 타당성을 설명하라. 그러면 나도 비록 KO로 쓰러지더라도 기분좋게 웃으며 새로운 후배의 탄생을 축하해주겠다. 그러나 무조건 내가 옳아, 내가 맞아 떠들어대면, 행동이 어느 수준이면 꿀밤이나 한 대 먹이겠고, 좀 심각하면 회초리로 쳐주겠다.
대중작가인 나한테 맞으면 퍽이나 기분좋겠다. 행여나 바라겠는데, 고귀한 경지에 계신 분들을 행여 그런 일로 심려끼쳐 드리지 마라. 나는 이제부터 문지기가 될테니, 일단 문지기 부터 통과하라. 물론 문지기를 통과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지기 다음에도 천층만층 구만층 만큼 고수들이 있을테니, 건투를 빈다.
현재 나오는 많은 것들은 소설이 아니다. 가령 내 딸이 몇 글자를 끄적거린 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듯 말이다. 그것은 소설인지 시인지 수필인지 산문인지 구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런데도 뻔뻔스레, 소설이라는 이름을 이제는 아무나 막 붙인다. 이름부터 붙이지 말라. 한글 보호도 중요하지만, 소설 보호도 중요하다. 문학과 기호학과 미술의 얼치기 잡종 하이브리드라고 하면 모를까? 언어의 정제된 추구라는 기본전제조차 무시하고, '귀찮다'는 등의 이유로 그것을 얼뜨기 복합양식으로 대치하려고만 하는 그런 형식을 딴 것이 배운 바보들의 허세를 힘입어 "소설"이라고 불리는 것을 본인은 단호히 배격한다. 나는 절대 불러 줄 수 없다. 아울러 그런 이상한 뭔가를 양산해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부르는 일도 단호히 배격한다. 스스로 자칭하는 것을 막을 수까지는 없지만, 최소한도의 요건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바보짓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배운 사람들은 배운 바보가 되지 말고 못 배운 사람들은 못배운 바보가 되지 말자. 제발 이 코미디 판에서 다같이 좀 벗어나자.
(* 본문은 2003년에 작성된 것으로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다시 올린 것입니다. *)
출처. 혁넷 (www.hyouk.net) |
첫댓글 예전에 읽었던 거네... 길어욤!
가장 중심적인 주장을 보면 '현대 인터넷 소설의 명칭이 잘못 되었다.' '외계어와 이모티콘의 남용되는 소설류는 소설의 자격과 가치가 없다.' '이러한 현대 새로운 방식과 장치들에는 근거가 없고 용도도 없다.' 정도로 생각되네요.
외계어는 단연 소설의 자격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모티콘도 그냥 이 글에서 주장하는 대로 보면 분명히 쓰레기 수준에 지나지 않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데에 그 이유와 원칙을 부여하고 장치로서의 가치를 얻을 수만 있다면 사용이 가능할지 아닐지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어있지 않네요. 다만 요즘 유행의 문제점에서 이모티콘이 그런 원칙이 없다는 내용만 암시되어 있네요. 그렇다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토론을 해봐야 해결이 될 것 같군요;
그럼 애초에 스스로 자신의 글이 소설이 아니라고 밝히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소설 게시판에 소설이 아닌 글을 올리신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지요? 판타지 랜드는 여러가지 판타지 문화 - 음악, 그림, 영화, 연극, 시, 소설 등등- 가운데소 판타지'소설'을 주로 다루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현재 판타지랜드에서는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방식의 문학'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Rechido님의 글은 여기서 다루고 있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정말 여기서 이모티콘을 사용하신 글을 올리고 싶으시면 그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 왜 필요한지 이유와 원칙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시고, 담당 운영자께 게시판을 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말을 오해하셨습니다. 전 제 소설을 소설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모티콘을 남용하는 것으로 소설의 자격을 잃는다 하더라도, 이모티콘의 사용 그 자체로 자격을 잃는다는 말이 이 글에도 없을 뿐 아니라, 판랜에서도 그런 규제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또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방식의 문학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이모티콘이 금지되어 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생각합니다.
다루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금지합니까? 애초에 허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판타지 랜드에서 주로 다루고 있던 방식의 문학인 '소설'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는 전혀 다른 방식의 문학입니다.
그리고 자꾸 댓글 달지 마시고,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모티콘을 쓰는 문학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글을 올리세요.
다루지도 않는다는 말을 허용되어 있지 않다는 말로 생각하는 것도 똑같은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금지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모티콘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대라는 말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모티콘이 왜 쓰이면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모티콘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라면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논쟁과는 상관없이) 이우혁씨 너나 잘하세요-_-
네오맹덕님 말 그대로 이우혁 본인의 다른 부분, 그러니까 이우혁이 잘하지 못한 부분과 이우혁이 지금 하는 주장과는 전혀 연관이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