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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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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꿀뚝 스크랩 동래인 정행과 안동 송천동 모감주나무
으뜸빛 추천 0 조회 1 14.01.24 04: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석문공의 둘째 아들 정행이 1561년(효종 2)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하던 나무라하여 영양군 입암 자양산에서 캐와서 심은 모감주나무 

뿌리가 바위를 감싸고  있다. 신작로를 내면서 지면의 흙을 걷어낸 결괴로 보인다. 

석문 공이 20세 때 지은 것을 최근에 복원한 읍취정 

석문공 유허비 

모감주나무가 있는 곳의  앞을 흐르는 반변천 부근에 선어대가 있어 절경이다. 

 

동래인 정행과 안동 송천동 모감주나무

 

 

 

안동시(예천 일부를 포함)가 다른 시(市), 군(郡)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경북 도청(道廳)을 유치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문화재가 한몫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경주시가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질과 양면에서 단연 으뜸인데 웬 안동이냐? 따라서 선정위원회가 조사를 했더니 안동이 더 많더라는 것이다.

노거수를 살아있는 문화재라고 주장해 왔고 역사성이 있는 오래된 나무가 당국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꾸준히 지적 해온 나로서는 복음과 같은 이야기로 들였다.

이런 점에서 안동시 송천동의 모감주나무(경북도 기념물 제50호)는 안동시의 문화행정이 다른 시군보다 우수함을 나타내는 증표이자 심은 사람의 간절한 효심까지 간직하고 자라는 효자나무라고도 할 수 있어 더 감동을 준다. 1651년(효종 2) 석문 정영방선생의 둘째 아들 정행(鄭?, 1604~1670)이 심었다고 하니 350여 년 전의 일이다.

 

석문 정영방(1577~1650)선생은 조선 중기 유학자다. 윤선도(1587~1617)의 ‘보길도원림(명승 제34호)’과 양산보(1503~1557의 소쇄원(명승 제4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가(民家)정원의 하나로 꼽히는 서석지(瑞石池,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를 조성한 우수한 조경가이기도 하다.

 

본관이 동래로 1577년(선조 10) 예천 용궁현 포내 (현, 풍양면, 우망리) 에서 태어났다. 이모부였던 정정세로부터 학문을 배워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했다. 학문이 깊고 인격이 훌륭한 그를 아깝게 여긴 우복선생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했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로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정국(政局)을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윽고 터진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다시 시끄러워지자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첩첩 산중인 영양군 입암으로 거처를 옮겨 네제 아들 제와 함께 지내며 경정(敬亭)을 짓고 연못을 파 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곳이라는 뜻에서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소요하며 학문을 연마했으며 매(梅), 국(菊), 죽(竹)과 함께 소나무를 사우(四友)라 좋아했고 모감주나무를 사랑했던 것 같다. 모감주나무의 조경적 가치를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인정한 분이 아닌가 한다.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영양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20세 때 읍취정(?翠亭)을 짓고 안동 송천에서 살았는데 둘째 아들 행은 효성으로 아버지를 모셨고 1650년 (효종 1)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사실 때에도 또한 같았다. 그러나 천명은 어쩔 수 없어 그 해 향년 74 세로 이승을 마감하고 만다. 이듬해 행이 아버지가 살았던 영양군 자양산를 찾아가서 평소 아버지가 좋아했던 나무 한 그루를 캐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지금의 모감주나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 볼 때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송천동의 모감주나무는 원래부터 안동에서 자생하던 나무가 아니라 영양군 입암 자양산에서 자라던 나무다.

따라서 문화재로의 지정할 수 있는 기회는 영양군이 더 많았다. 그런데 영양군이 이 나무가 관내에 자생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나, 설령 알았더라도 그 가치를 지나치고 있는 사이에 안동시가 먼저 문화재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 만큼 발 빠른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자기 지역에 무엇이 있고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는지 일일이 찾아내 그것이 단지 나무 한 그루라고 하드라도 문화재로 지정하는 이런 공무원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결과적으로 도청 유치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지역 간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진다. 문화재가 많다는 것은 지역의 브랜드가치가 그 만큼 높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이런 점에서 노거수를 보는 지자체 공무원들의 시각이 개선되기를 촉구된다.

나무는 안동에서 영양으로 가는 국도변 반변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 선어대(仙魚臺) 부근 골짜기 입구에 있다. 뿌리 부분이 마치 난을 돌에 붙여 일부러 기묘하게 만든 작품처럼 힘겹게 버티고 있어 애처롭기까지 했다. 일제 강점기 신작로를 내면서 흙을 긁어 써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나무를 살려 둔 일이다. 수식자 행(?)의 깊은 효심이 작업 인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 것이다. 골짜기 더 안쪽에는 최근에 복원했다는 읍취정이 있다. 악조건 속에 자라면서도 수세는 비교적 좋았다. 주변에는 몇 그루의 모감주나무가 황금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모수(母樹)에서 떨어져 씨에서 돋은 것일 것이다.

석문가에서는 본인을 포함 4대가 문집을 남겼는데 6권 2책의 ‘임장세고(林庄世稿)’가 그것이다. 고종 연간 후손 정인목과 정흠관 부자가 엮어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책에는 석문의 ‘석문유고’를 비롯하여, 아들 정혼의 ‘익재유고’ 손자 정천요의 ‘눌재유고’와 정요성의 ‘수와유고’ 증손 정도건의 ‘천연대유고’, 정태래의 ‘송설헌유고’가 합편되어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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