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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라는 글자는 별거 없어요. 덕을 쓸 때는 이렇게 쓰잖아요. 그냥 간단하게 할 게요. 덕이라는 것은 그냥 길, 이것뿐이어요. 이건 없어도 되요. 이건 뭐냐? 길 사거리예요. 길의 사거리에 눈이 있고 지표가 서 있어요. 그게 덕이에요.
우리가 쓰는 덕이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 덕이 있어서’라는 건 참 이상한 표현이에요. 감은 있는데 뭔지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현재 서 있는 자리예요. ‘그 사람은 덕이 크다 적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덕이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어요. 덕은 그 사람이 서 있는 이상에는 누구나 다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스님들을 뭐라 그러죠? 한자식 표현으로 대덕(大德)이라고도 표현하죠. 큰 덕이라고, 유덕(有德)이 아니고 대덕이라고요. 이 사람의 지표가 크다는 얘기죠. 자기가 무언가를 향해 살 것 아닙니까? 길을 바라보고 살 것 아닙니까? 도교식으로 표현하면 도(道)일 거고, 그렇게 살 것 아닙니까?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딘가 현재 내가 이 사거리에 와 있을 거 아니어요. 현재 이것을 추구하는 내 삶의 현재적 좌표예요. 내 삶에서 현재화되어 있는 내 길의 모습이에요. 길 가는 현재 내 사거리의 모습이에요. 그게 덕이에요.
(2022 박현 선생님 서화전에서 德)
그러니까 <대학>이라는 글에 그렇게 나오죠. 대학지도(大學之道)가 있고, 대학지덕(大學之德)이 있고, 대학지민(大學之民)이 있어요. 대학지도(大學之道)는 뭐죠? 명명(明明)이예요. 분명한 것은 분명하다고 하는 거예요. 밝은 것을 밝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 덕(德)은 재신(在新)이예요. 따라서 늘 바뀌고 있는 거예요. 늘 새로워지고 있는 거예요. 이 좌표가 여기에 머물러져 있으면 꼰대인 거죠.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계속 가면 다음 사거리 또 나오겠죠. 그때 내 지표를 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정상에 있어서의 나의 삶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덕이라는 건 새로워져야 만 덕인 거죠. 그리고 그런 것을 추구해가는 사람은 지극한 선(善)을 추구하는데 본색이 있다!
대학이라는 게 도덕민(道德民) 이 3강령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在明明)하고, 대학지덕(大學之德)은 재신(在新)하고, 대학지민(大學之民)은 지어지선(止於至善)이거든요.
명덕(明德)이라는 말은 없어요. 명덕이란 말은 성리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예요. 밝은 덕이 어디 있어요? 덕은 그냥 크고 작고 그 사람의 좌표예요. 좌표가 밝고 어둡기는 뭐가 밝고 어둡겠어요? 내 삶의, 내가 어떤 사람의 벗으로서, 또는 그런 추구하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추구하는 내 삶의 현 좌표를 말할 뿐이에요.
이것은 자기 삶에서는 가장 큰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큰 덕이라고도 번역을 해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 공동체의 좌표가 두툼해질 것이다. 두텁다는 의미는 뭐죠? 무너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고, 오래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바탕이 될 것이라는 거죠. 공동체의 좌표가 아주 두터워질 것이다! 튼튼해질 것이다! 이 정도 봐도 되죠. 그걸 두텁다고 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후덕(厚德)이라고 그러는데, 덕이라는 게 자기 좌표이고 자기가 뭔가 생각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잖아요. 후덕재물(厚德載物)이라는 말을 쓰는 데 덕이 뭐죠? 자기 마음인 거예요. 마음이 정말 두툼하면 물질을 움직인다는 뜻이예요. 재물을 실어 나르는 게 아니고요. 후덕재물(厚德載物)이라고 하여 수레로 실어 나른다고 했는데, 이 물(物)이 재물이라는 얘기가 어디 있어요? 그냥 물건이에요. 사람의 정신적인 좌표가 그 물질을 움직인다는 거예요.
그 좌표에 따라서 물질이 움직인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내 삶만큼 내 주변을 살고 있는 환경들이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이야기예요. 그냥 후덕재물 하면 쉽게 그것도 속류화시켜서 후덕재물이죠. ‘덕이 두툼하니까 재물도 많이 생기시겠죠’ 이런 의미로 쓰는데, 전혀 상관없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자를 쓰는 사람 중에 저 밖에 없는 것 같은 게 문제입니다. 다 재물을 움직인다고 쓰고 있으니까요. 원 뜻은 그런 건 아닙니다. 거기에 재물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럼 후덕재재(厚德載財)라고 그랬겠죠. 후덕재보(厚德載寶)라 그랬던가요. 민덕(民德)은 공동체의 좌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동체! 그 삶의 좌표는 아주 두터워질 것이다! 뚜렷해진다는 의미도 되죠. 그리고 그 뚜렷한 좌표를 움직일 힘이 있다는,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도 되겠죠.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10장입니다. 자금이라는 제자가 자공에게 묻습니다.
제자들끼리 좀 서열이 높고 나이도 좀 있는 제자에게 젊은 제자가 묻습니다. 부자(夫子) 선생님께서, 지어시방야(至於是邦也) 시방(是邦) 즉 이 나라에, 이 공동체에 오셨으니, 필문(必聞) 여기서 문(聞)이라고 하는 것은 참여하다는 의미로 과거에 많이 쓰였어요. 필문기정(必聞其政)! 이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정사에 대해서 참여하실 건데요. 이거는 공자께서 즉 선생님께서 구하신 겁니까? 아니면 누가 그런 기회를 준 겁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선생님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니예요?” 하고 오래 따라다니는 제자한테 물어본 거죠. 그랬더니 자공이 얘기를 해요. 부자 즉 선생님께서는 온(溫) 하시고, 지난번에는 제가 이 온(慍)과 이 온(溫)을 다시 같은 걸로 봐서 溫을 푼 거예요.
“인부지이불온(君子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로 할 때 이 문자를 원래 다 똑같이 썼으니까요. 溫자 자체는 어쨌든 데워주는 거예요. 밖에서 이렇게 데워 주시고, 거꾸로 여기서는 데워주시지 않으면 안 움직이시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오시면 늘 밖에서, 누가 이렇게 되는 기회를 주신다는 얘기죠.
양(良)
양은 우리가 선량하다고 그럴 때 양을 쓰는데 양도 마찬가지예요. 良은 뜻이 뭘까요? 우리가 어질 양자로 많이 쓰는데, 그냥 이 글자만 보면 이해가 금방 되실 거예요. 이렇게 상하의 선이 있고, 여기에 가운데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나요? 그러면 졸졸~졸졸~ 물이예요. 물이 흘러요. 위쪽에 땅이고 아래쪽에 땅이 있겠죠. 그 사이 여기에 물이 흘러요. (주변에) 이게 다 물이예요. 그 사이에 징검다리 하나 놓아 놨어요. 누군가가 길을 건널 수 있게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것, 그게 良이예요.
良을 ‘사람이 어질다’고 번역하는데, 가다가 보니까 바지를 걷고 건너야 되는 거예요. 다음 사람도 그럴까 봐, 여기 이렇게 징검다리 튼튼하게 놔주는 거예요. 물 위에 징검다리 하나 놓아주는 것, 이게 나중에 어질 良(양)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 뒤에 올 사람을 위해서 다리 하나 놓아주는 것! 또는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죠.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죠.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다리 하나 놓아주시는 그런 성품이시다는 것이예요. 공손하다 뭐 이렇게 보통 해석하지만.
공(恭)
그럼 공(恭)은 뭘까? 위에 무언가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손으로 그걸 받들어요. 그럼 이게 恭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다 나중에 이 마음 심(心)까지 넣어 놨어요. 마음은 붙여도 그만 안 붙여도 그만인데요. 위에 있는 무언가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그 자체예요. 이게 뜻이 뭐냐? 이게 공(共)예요. 공산(共産) 할 때 공(共)이죠. 함께 共자죠. 이 함께 공(共)자는 힘을 모으는 것이고, 힘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것이 공(公)인 거죠. 이 공(共)은 힘을 모으는 하나의 공정이고 모아서 만들어진 기준이 공(公)인 거죠.
그래서 이렇게 힘을 모아갈 때, 그냥 뭔가 일을 할 때, 같이 분배를 할 때는 공분(共分)이라고 할 수 있고 같이 생산하면 공산(共産)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것이 뭐가 이익이 되고 뭐 하고 하면 이게 이 공(公)자로 쓰는 거죠. 여러 사람이 버스를 공공(公共) 교통수단으로 타요. 그때 공공(公共)의 공은 엄밀하게 이 공(公)이예요. 여러 사람이 타니까, 이 공(共)도 같이 쓰는 거예요.
아무튼 공(公)은 만들어진 결과물이거나 기준이고, 이 공(共)은 함께 해나가는 행위예요. 그런 공(恭)이에요. 이 밑에 마음(心)을 갖다가 붙인 거죠. 이렇게 마음 心자가 변해서 이렇게 공(恭) 자로 오게 된 거죠. 선생님께서는 공(恭)하시고! 즉 늘 모나게 안 구신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어떤 것을 지적해서 그 지적이 아무리 올바르더라도, 그 지적으로 말미암아서 함께하는 흐름이 안 깨지길 바란다는 거예요. 함께하는 흐름 속에서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성품이시고!
검(儉)
그리고 검(儉)! 우리가 검소하다 그럴 때 많이 쓰지만, 이 인(亻)을 뺀 僉(첨) 글자에 집이 있어요. 집 밑에 사람이 이렇게 있어요. 이게 검(儉)이예요. 아래에 이 已 글자처럼 있는 것이 사람인데, 이것이 머리하고 이렇게 人人(인인)으로 나눠져서 됐죠. 위에 있는 것은 집이고요.
사람 亻(인)은 나중에 붙인 거예요. 이렇게 한 집에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이 검(儉)이예요. 한 집안이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둘이 먹고 살아요. 그러다 보니 아낀다는 의미도 돼요. 공존이라는 의미예요. 이것만큼 위험한 게 없어요. 그래서 부수만 싹 바꾸면 이게 제일 위험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튼 이 글자가 근본이고요. 앞의 글자는 그래서 공존이라는 의미에서 늘 협의하고. 이건 따라서 늘 협의하는 것을 말하고요.
양(讓)
그리고 우리가 양보하다 그럴 때 양(讓)자인데, 예전 시절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예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가 식의주 할 때 의식주라고 표현을 많이 하죠. 그가 입고 있는 옷이 그의 덕과 관련된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가 더 앞서가 있기도 하고, 또 과거에는 옷이 신분이기도 한 시대도 있었고 해서 의식주라고 더 많이 하는데요. 본능적으로 식(食)이 먼저겠죠. 그런데 食이 있으려면 뭘 해야죠? 일을 해야죠.
사람이 무언가 잡고 일을 해야 돼요(중간의 우측 모양). 뭔가 자꾸 일하는 모습이 있어요. 그리고 어쨌든 뭔가 이렇게 또 살펴야 돼요(중간의 좌측 모양).
그런데 이것도 이제 뭔가 있어야겠죠. 이렇게 (人) 하늘 밑에서, 그렇지 않고 (合)처럼 人 아래에 선이 있는 것은 집이고요. 이렇게 좌우로 된 하늘 밑에서 하늘 밑에서 뭔가를 살피는 모습이 있고, 우측에는 무언가를 살피는 모습이 있어요. 여기에 위의 것과 아래 것 사이에 끼워 놓은 거예요. 그럼 여기 합하면 이렇게 양(襄)이 돼요. 아래는 옷 의(衣)자예요. 옷을 벗어 제키고 일하는 것을 지금의 양(讓)이라고 그럽니다.
무언가 일거리가 있으면, 팔 걷어붙이고 일을 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때는 옷을 벗어 제치고, 웃통 벗어 제치고 그랬죠. 지금도 동북삼성(東北三省) 같은 데 가면 여름에 더우면 웃통 벗어 제치고 다니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게 나중에 팔뚝 걷는 걸로 바뀌지만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뚝 걷어붙인다는 게 일하려고 덤비는 건데요. 사람들이 괭이 찾으러 먼저 가지 않아요. 먼저 소매부터 벗어 제치죠. 그게 옷이 하나의 생활이 된 이후에 오래된 버릇인 거죠. 옷 이렇게 소매 걷어 제치는 거요. 서양에는 소매 걷어 제치지 않는 옷이 있고, 소매 걷어 제치는 옷이 있어요. 귀족들의 옷에는 리얼 버튼이 없어요. 옷을 걷어 제지지 않기 때문이예요.
유럽에서 성 밖에 살던 동네를 뭐라고 하죠? 프랑스에선 ‘부르그’'라 그러죠. 이탈리에서는 ‘보르고’라 그러죠. 그 부르그에 살던 부르조아들이나 이것을 열어 제치는 거예요. 부르그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조아죠.
성 바깥에 살다가 거기서 열심히 일해 가지고 돈을 끌어 모은 사람들이 나중에 성을 차지하죠. 그러니까 부르조아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부르그에서 소매 풀고 일하던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양복에는 셔츠뿐만 아니라 지금도 리얼 버튼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리얼 버튼이 있는 양복이 고급 양복이라 그래요. 알고 보면 리얼 버튼으로 만드는 것은 왕실이나 귀족에겐 금지예요. 내가 왜 이걸 걷어붙여! 나는 시키면 되는데, 그런 거죠. 그렇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의 복장에서 나타난 것이 현대 그리고 특히 군대 같은 데서는 이걸 걷어붙여야 총도 쏘고 할 거 아니예요? 군복이 현대 옷이 됐잖아요. 그래서 리얼 버튼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스트라파타(strappato)라고 하는 양복에 단추 3개 있고 4개 있고 하죠. 무조건 끝에 두 번째 것만 잠그는 거죠. 사실은 필요 없는 거죠. 그러나 실용적으로 할 때는 잠궈야 되잖아요.
그것들 귀족들에겐 필요 없는 거예요. 왕들은 1버튼이에요. 귀족들은 2버튼 1버튼이고요. 그 다음에 부르조아 이들만 3버튼이죠. 현대 양복이라는 게 부르조아와 그 부르조아들의 의무로 주어진 군대에서 온 옷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아무튼 이제 옷보다 옛날에는 이게 벗을 수 없어요. 벗어봐야 쭉 내려와요. 우리 소매 길잖아요. 그냥 벗어 제치는 거예요. 옷 벗어 제치고 일하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옷 벗어 제치고 일하는 것, 이게 양(讓)이에요.
양보(讓步)라는 게, 지금은 순서를 지켜서 뒤로 물러나는 것을 양보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느 날부터 유학이라는 것이 특히 성리학 시대에 와서 귀족들의 학문이 되면서 양보라는 것은 물러서 주는 게 양보가 됐어요. 원래 귀족화되기 전, 성리학 이전 시대에 이 사양할 양(讓)자는, 사양(辭讓)이 아니라 먼저 나서서 험한 일을 하는 것이에요. 적극적인 게 양(讓)이예요. 일거리가 있으면 내가 나서서 먼저 하는 것이 양(讓)이예요. 무언가 이렇게 좋은 게 있으면 뒤로 물러서는 게 양(讓)이 아니어요.
비교적 부유했던 귀족들과 당시의 성리학을 주도했던 중앙이나 지방 정부 사람들에게는 먹을 게 많아요. 입을 게 많아요. 그럴 때 뒤로 물러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어요. 양(讓)으로 여겼어요.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는 험한 일이 앞에 있을 뿐이에요. 그때 먼저 팔 걷고 옷 벗고 나서는 사람의 그 자세가 양(讓)이예요.
양(讓)이라는 의미를 현재 성리학자들이 푸는 방식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나다’, ‘자리를 좀 이렇게 내드리다’가 아니어요. 적극적으로 하는 거예요. 만약 버스 탈 때 양(讓)이라 그러면 힘드신 분 있으면 모시고 올라가는 게 讓이에요. 모시고 올라가서 자리 다듬어 드리는 거예요.
지금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을 한걸음 물러나는 걸 讓이라 그래요. 험한 공동체의 일이 있고 함께할 일이 있을 때 먼저 앞장서는 게 讓이에요. 양보(讓步)라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 한 걸음 내딛는 것이에요. 무언가 내가 덜 누리기 위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게 讓이 아니어요. 원래 이것도 귀족들 손에 들어가니까 뜻이 바뀌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수많은 한자어와 유학의 교재들은 그런 관점에 의해서 단어들과 단어들의 해석이 바뀌어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자를 보면 그렇죠. 온(溫), 외부에서부터 늘 빛을 이렇게 받으시는 분이고! 언제나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다리를 놓아주시는 분이고! 그리고 늘 함께하는 도리를 어기지 않고 늘 협의를 하시며! 험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장서 하시는 분이시다!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그러니 ‘부자지구지야(夫子之求之也)’ 선생님께서 구하는 것이, ‘기저이호(其諸異乎)’ 여기서 저(諸)라고 읽습니다. 이 문장은 의문형인 與(여)자하고 앞에 其(기)자가 있어서 maybe나 perhaps 예요. “아마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구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러니까 뭘 구하더라도 선생님은 그렇게 억지로 구한 것 없고, 달라고 한 적 없다는 것이죠. 전체와 이렇게 협의를 해보니까 또 공동적으로 이렇게 해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죠.
어떤 스타일 혹은 매너라고 하죠. 공자는 그런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딘가 가면 늘 물어봐요. 그러니까 누가 욕하죠. “잘 안다고 그러더니, 맨날 물어보더라!” 그렇게 욕하죠. 그러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시대 정신이다! 이게 이 시대에 필요한 시대 정신이다! 이것이 예다!” 그러죠.
예라는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시대 정신이죠. 누구나 따라해야 되고, 누구나 거기에 동참해야 되고, 그 예를 중심으로 공동의 공동체가 굴러가는 거니까요. 그런데 어쨌든 나중에 나오겠지만 이것이 예다! 그렇게 물어봐요.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물어보는 것 자체가 함께 가기 위한 것이고 협의하기 위한 수단인 거죠. 그런데 그것을 서로 많이 아네, 적게 아네 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공자라는 사람은 늘 옆에 있는 제자들과도 협의하죠. 공자의 말을 보잖아요. 딱 두 사람한테만 말을 놓아요. 한자식으로 보면 <논어>에서 두 제자한테만 말을 놓죠. 하나는 자로(子路)예요. 자로가 너무 설치니까요. 그리고 자로는 엄청 뭐라 하면서 엄청 좋아해요. 그 다음에 염유(冉有)라는 제자가 있어요. 염구(冉求)라고도 불리는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한테는 자주 꾸짖어요. 이 ‘몹쓸 놈아!’ 하고 많이 자주 꾸짖어요.
(공자성적도 중에서)
너무나도 아들 같았던 안회(安回)한테는 말을 안 놓았어요. 같이 갔던 제자 집단에게 함부로 말 놓는 분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해서 협의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잘못했다고 제자한테 빌어요. 싹싹 빌기도 해요. 그렇게 하면서 공동체라는 걸 지켰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문화는 결국은 후대에 와서 왜곡은 됐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그런 얘기를 쭉 드렸습니다. 이게 어떻게 쭉 꿰어 있는지 짐작해 보시면 짐작도 되시겠지만, 다음 여섯 구절을 하고 끼워놓도록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 하나를 푼 이유는, 이 글자들 자체가 왜곡돼 있기 때문인데요. 讓(양)자 뜻만 보면 그러잖아요. 옷 벗어 제치고 일하는 거예요. 이게 한 걸음 물러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양(讓)자가 적극적으로 험한 일이 있을 때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상상을 안 해요.
글자 하나 하나 풀어보는 이유
상상을 안 한다는 게 중국의 국가적인 용법을 보면 그래요. 讓이 중국 발음으로 ‘랑’이라고 그러죠.
전에 군인들이 하는 것을 한 번 봤어요. 여강고성 안에 관광객이 얼마나 많아요. 그 안에서 군인들이 줄을 맞춰서 들어가는데, 관광객들 때문에 똑바로 지나가는 데 방해가 되잖아요. 그러자 뒤에서부터 막 외치면서 와요. 비켜달라고! 이것을 중국말로 이렇게 쓰죠. 請讓一下! 그대로 하면 “청합니다. 讓을 해주세요!” 군인들이 오면서 한 부대가 ‘请让一下!’ 즉 ‘칭랑이샤! 칭랑이샤!’ 이러고 가더라고요.
여기서 讓도 그런 거죠. ‘비켜주세요!’ 이 거죠. ‘도와주세요’가 아니고 ‘비켜주세요’에요. 국가적으로도 이미 讓이라는 것 자체, 이 양보(讓步)라고 하는 자체가 물러나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이것을 험한 일을 내가 맞는 거라고 생각 안 하죠.
험한 일을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무언가 누릴 게 있을 때 물러서는 정신으로는, 물러난 사람의 청렴함과 그들의 자기 만족은 이루어질지 몰라도 공동체는 이미 방기된 거예요. 공동체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걸음 나서는 사람들이 해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공동체를 위해서 한 걸음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 나중에 공자가 얘기합니다. 이런 기준을 갖고 본다면,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이런 얘기를 오늘 좀 드렸는데요. 급하게 하다 보니까 오히려 시간이 빨리 갔네요.
다음 구절에 이제 예(禮)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요. 뜻(志)이란 말이 나오게 되고요. 고칠 개(改)자가 오늘 나왔습니다만, 이 고칠 改자에 대해서 다음에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갈 행(行)자, 우리가 행하다 그럴 때의 行 자도 풀어봐야 될 때가 있어요. 行 자와 우리가 행동(行動)할 때 동(動) 자는 다른 뜻입니다. 완전히 다른 뜻입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고칠 改를 썼는데, 이것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물탄개(勿憚改), 꺼리지 말라! 개(改)는, 왼쪽이 자기 몸(己)이고, 우측의 이건 뭐죠? 채찍이죠. 자기 몸에 채찍을 가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채찍을 가하는 게 고치는 거죠. 이렇게 하면 자기가 자기를 고치는 거죠. 그런데 이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게 있어요. 고칠 갱(更)이 있어요.
‘경’이라고 읽든 ‘갱’이라고 읽든, 更은 위에 있고 이렇게 있으면 돼요. 更은 무언가에서 왔을 때 한 번 끊어주는 거예요. 그냥 시간이 가면은 가만히 있어도 更이 되는 거예요. 옷 같은 것이 지금 몸에 안 맞아요. 그것을 고치면 改죠.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올해 옷이 내년에 가서 색이 바래죠. 그건 갱년(更年) 변화이죠. 경년(更年) 변화인지 갱년(更年) 변화인지, 어쨌든 가만둬도 바뀌는 건 更이에요.
그래서 가만두지 않으면 안 바뀌고 사람이 바꾸는 것은 개(改)예요. 그러니까 물탄경(勿憚更)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잘못 쓴 표현이죠.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돼야죠. 갑오경장은 가만히 뒀는데 넓어진다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무슨 얘기죠? 갑오경장은 그냥 “우리는 안 할 테니까 세상이 알아서 넓어질 거예요.” 그렇게 되잖아요. 그 세상은 누구예요? 일본이에요. 일본이 넓혀줄 것이 갑오년에 됐다는 것이 갑오경장이어요. 올해 일본이 넓혀줄 것입니다. 그게 갑오경장입니다.
그렇게 갑오경장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돼요. 정말로 가짜이고 힘도 없는 조선 왕실이 했을지라도 적극적으로 스스로 고치려고 했다면 改자가 들어가야죠. 개신(改新)이든지 해서 改가 들어가야지 更자가 들어가면 안 돼요.
갱은 자연 시간 발생 사이에서 저절로 변하는 거죠. 진화인 거죠. 개(改)는 엄밀하게 보면 혁명, 레볼루션에 가깝죠. (진화) 에볼루션이라는 것은 그 주력이 자기한테 있지 않고 그 책임과 그 주체성이 자기한테 있지 않다는 거죠. 전체적인 무언가 주어진 조건에 있다는 거죠. 그게 갑오경장이죠. 그런데 갑오경장이라는 이 표현을 지금까지 역사 쪽에서 안 고치고 있어요. 갑오경장이라고 하면 일본이 고쳐줄 것이라는 건데요.
어쨌든 물탄개(勿憚改)라고 했습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스스로 고치라는 얘기예요. 물론 가만 둬도 고쳐져요. 우리가 가만히 둬도 검은 머리는 흰머리가 되죠. 무장 해제가 되니까요. 검은 머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나오는 위장 색이잖아요. 이 위장색이 다 빠지고 나면 원래 색인 흰색으로 돌아가죠. 그리고 나중에 이도 빠지고요. 점점 갱년(更年)의 변화를 겪겠죠.
한편으로는 그게 내 삶이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또 한편으로 소소하게 그런 것도 살짝 담겨 있어요. 過則勿憚改!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기에 맞춰서 스스로 바꿔라! 가만히 있어도 바뀌긴 할 거다! 이건 ‘죽을래? 돼질래?’ 하는 말이거든요.
우리 말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 ‘되어지는’ 것인데요. 우리는 될 화(化)자라고 그러잖아요. 그 될 化(화)자를 번역하면 ‘돼진다’가 되죠. 마침내 ‘사람이 되어지는’ 것은 곧 ‘사람 됨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건 죽는 것과 또 다른 표현이죠.
죽는다와 되어지다
지금은 ‘죽는다’보다가 ‘사망한다’가 더 많이 쓰이지만, 어쨌든 ‘죽는 것’은 갱년(更年) 변화이고, ‘되어지는’ 것은 개신(改新)이나 개혁(改革)이죠. 우리 옛날에는 다 사람들 보면 ‘되어졌다’고 그랬는데요. 지금은 욕이 됐죠. 이상하게 한자어만 들어오거나 하면 우리가 원래 쓰던 말은 전부 다 격이 떨어져요.
지금도 예외는 아닙니다. 말 뜻을 몰라서 그렇죠. 아무리 우리 말 지켜도 안 지켜집니다. 뜻이 사라지면 말은 사라지죠. 뜻이 안 사라지면 세계인이 배워요. 오빠만 배우겠습니까? 강남 스타일만 배우겠습니까?
이런 ‘되어지다’는 말 뜻들이 살아 있으면 우리 그것으로 기여하는 거예요. 아무튼 뭐 잡소리고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1장 매듭을 짓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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