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 강제이주의 길을 따라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20일 01:00: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옅은 잠을 깨워 미처 못 챙긴 짐을 정리 02:00 즈음에서 집에서 광주 시청으로 향한다.
새벽 공기는 아직 까지는 후덥지근하여 늦여름을 느끼고 순환도로를 따라 시청 주차장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들 이미 나와 있다.
02:40: 전세버스가 도착 짐을 싣고 인원 점검 후 출발 운암동 문예회관 앞에서 정찬용 전 수석님을 비롯, 일행을 태우고 다소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03:00: 김용수 단장님의 인사말 그리고 출발
06:00: 송산 포도 휴게소에서 아침을 재빠르게 해결하고 인솔자 권정희 씨의 여권회수를 마치고 달리는 차 밖은 서산쯤 일 것 같다.
이미 비는 세차게 내리고 화성 부근에서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공항이 가까워지면서 바다 위를 질주하여,
07:10: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여전히 분비는 공항 내부에는 어디론가 가고 오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고 북적인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답사”사단법인 문예교류진흥협회가 주관하고, 전남일보가 후원, 하며 전남일보 기자단, 광주mbc 탐사담당 기자들, 호남대 신방과 교수와 제자, 이 모든 분들의 취재 열기가 시작되는 가운데 단체 촬영을 구호와 함께하고,
일련의 수속을 마치고 선물용 술 두병 담배 두 케이스를 사고,
10:25분 탑승 10:45분 이륙.
우리 앞 자석의 벽안의 모녀가 매우 다정스럽게 보이고 이국적이다.
고도 10000m가 넘게 올라있는 비행기는 2시간 10분 정도 나르면 블라디보스토크(블라디미르는 정복하다, 보스토크는 동방이란 뜻)에 도착하며 오늘은 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자주 흔들려 안내 멘트가 자주 나온다.
잠시 프랑스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12:50분:(이곳시간13시 50분)한 시간 빠르다 (편의 상 이후 시간은 한국 시간이다). : 곧 도착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산들이 그 줄기가 매우 높아 보이고 우리 산의 아기자기함 보다 웅장하고 넓어 보인다.
산이 매섭지가 않고 늘 푸른 정원처럼 끝이 없어 순천의 정원과 비교해본다.
이제는 심하게 산을 갈 수가 없으니 그저 눈으로라도 쫓아가야만 하지만 그래선지 자꾸 눈은 산으로만 간다.
비행장이 군용과 같이 사용하는 듯 헬기와 전투기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여기는 러시아의 동쪽 끝 왜놈들에게 쫓겨 우리 선조가 정착했던 땅이고, 스탈린에게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했던 곳이다.
13:00:비행기는 멈추고 입국 수속은 까다롭지 않고 생각보다 간단하게 마치고 유심 칩을 바꾸고(이것보다 차라리 일당 9900원 짜리 로밍하는게 나을 듯) 여긴 분명 사람들의 모습이 서양인이여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공항에서 일련의 행사를 마치고 따가운 햇볕 속에서, 우측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전철역이 보이고, 저기서 부터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시발점인 모양이다.
우리는 버스로 시내로 이동한다.
14:41:극동교회 김동익 선교사님께서 안내 겸 해설사로서 동참하여 같이 하기로 한다.
이곳에서 16년 동안 사역하신 분이다.
창가로 보이는 넓은 초원은 푸른 나무와 들과 파란 하늘이 어색하게 어우러져 이국의 정취가 한결 느껴지는 오후의 뜨거운 햇빛을 빗겨 우리 차는 시내로 달려가고 있다.
당시의 어렵던 이 민족의 입국 심사와 지금은 간편해진 심사로 우리의 위상이 높아짐을 알리며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주지시키고 이번의 탐사목적을 겸익과 겸손 속에서 행동하기를 주지시키는 등 일단의 연설을 마치고 선교사님은 오페라하우스로 안내를 한다.
가는 길에 현대와 기아차의 로고가 스치고 지나간다.
“1860년 이후 러시아가 차지한 연해주는 황무지였으나 이곳에는 두만강을 건너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한인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완전 이주하여 그 수가 20만에 육박 대부분이 농업이민으로, 나중에는 항일독립전쟁의 근거지로 이들이 일궈낸 쌀과 야채가 극동 러시아 전역에 공급되어, 농업의 전파로 카레이스키라 부르며 우호적이었다.그러나 러시아혁명 이후 1921년 자유시 참변과 1937년 스탈린의 일제스파이란 명목으로 한인 지도자 2500명을 제거하고 강제이주를 시켜 추위와 굶주림에 20%가 죽고,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한인은 이듬해에 7000여명이 그 이듬해는 4800여명이 죽었으나 맨손으로 일궈 농사에 성공하여 이례적으로 생존력을 발휘한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음”
우리 차는 드넓은 극동러시아의 황량한 들판, 가끔씩 보이는 숲속에 드문드문 집들이 있고 지나는 자동차는 운전대가 왼쪽 오른쪽이 뒤섞여 있고, 1시간여를 달려오니 시내가 보이는데 숲과 어우러진 도시이다.
15:26:블라디보스토크 중심지 오페라하우스 가는 중에 부동항을 지난다.
오페라하우스에 도착 러시아산 자두를 두 개씩 먹고 금각교가 바로 밑으로 보이고 모차르트의 “마적”을 관람하려는데 잠이 부족하고 피곤한 몸에 과연 제대로 음미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시간 동안 관람으로 갑갑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고 오랜만의 감동이 저 밑바닥에서 부터
온몸에 젖고 피로했던 모든 부분이 가볍게 풀어준다.
기립박수로 보답하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19:16:차에 올라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준비한 킹크랩과 김치 된장찌개를 준비해 두었단다.
이국에 나와서 이런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다음에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단지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또 베풀어 달라고, 고려인들을 더 이해해 달라는 부탁인지도 모르겠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락원관”이라는 한글 간판을 발견하는데 혹 북한의 식당이 아닌가 싶고 이곳에는 북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20:19:선교사 사모님의 정성스런 저녁으로 보드카를 곁들리니 긴장된 몸이 저절로 풀리면서 차에 올라 이제 부터는 먼 곳에서 고향을 그리다 쫓겨난 동포의 아픔을 그리면서 내일 부터는 그 길을 가야한다.
20:24:식사를 마치고 차를 달려 전망대로 가는 도중 사모님이 이곳은 고등학교까지 국비이며 의사하고 교사가 힘든 직업이라 하며 모두가 투 잡을 한다고 한다.
200여m을 올라 전망대에 오르니 바다와 어우러진 극동 최첨단의 야경을 바라보며 사모님이“4자 돌림으로 술은 40도 이상 온도 영하 40도 이하 그리고 가는 길이 400k 이상의 길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직도 부조리가 많은 나라 관료의 폐단이 박혀있는 나라, 다양성과 분리적인 것은 허용하지 않고 일관성과 직관적인 것만 허용 한단다“
20:58:현대호텔 도착
고 정주영 회장이 지은 호텔이란다.
여기에서 다시 새로운 수속을 밟고, 아침식사가 끝나고 09시에 만나기로하고 각각 배정된 방으로 헤어진다.
수면이 부족한 하루, 씻고 그대로 골아 떨어진다.
8월21일 06:20(07:20)분
깊이 잠이 들지 않은 나이여서 오래 잠이 들지 않은데 어제는 피곤한 관계로 깊이 잠이 드는 듯하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고 아침 공기가 서늘하고 이층 식당에는 다른 여러 한국인이 있고 김치 깍두기 미역국이 나온다.
09:20:12시에 체크아웃 하기로 하고 간단한 짐을 들고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안 원활하지 못한 소통으로 한 시간여 공백이 생겨 책임 소재로 다소간의 소란 속에서 로비가 어수선하다.
우리 일행 중 김 율리아나 님이 크림 반도에 살고 계시면서 광주 광산구 흑성동 고려인 마을에 계시는 사실을 알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이분이 앞으로 통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의 일정을 권정희 인솔자로 부터 문화 행사를 겸한 고려인의 이곳 생활과 활동을 알려주므로 이번의 기획을 했던 분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도보로 탐사하려 한다.
10:04:아르바이트 거리에서 해양공원으로 출발하려는데 비가 내린다.
해서 계획이 급변하여 호텔 차라리 체크아웃 하고 차로 이동하기로 한다.
11:00: 현대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살짝 흩뿌리다 만 비는 간데없고, 취재팀은 별도 차량으로 이동하고 우리는 다시 여권을 받아들고 극동교회로 옮긴다.
가까운 곳에 있어 금방 도착하고 한 건물에 여러 직종이 있어 일 이층을 지나 삼층에 아담한 교회가 있다.
유럽 콩쿠르에서 1등을 한 젊은 바이올린이스트(고려인)와 피아니스트(현지 음악학교 선생님)가 시간이 없어 한곡을 선사하고 피아니스트의 독주, 우리 일행 중에 침술에 능통하신 임효진 님의 침술과 선교사님의 간단한 이곳의 정착과 고려인 이주 역사 등 강연을 듣게 된다.
내일부터는 고려인 이주 경로를 따라 가면서 고려인 이주 생활상을 기억해달라는 당부의 말씀 그리고 호남대 연주 팀의 연주를 듣는다.
예술 보다는 현실에서 직접 답사를 즐기는 입장에서 이번의 탐방 중 지금까지의 예술에 접하는 시간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 책으로만 보고 배운 얄팍한 상식을 비웃는 듯 직접 음악이 다가온다.
11:45:식당으로 이동
그루지아 식당 그루지아는 스탈린의 고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곳으로 러시아 맥주에 양고기로 배불리 먹고 한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에서 건물들이 중후해 보이고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으로 간다.
어지간한 도시에는 모두 붉은 광장이 있다는 이 도시 붉은 광장을 지나 독일기술로 건축 한 건물들이 즐비하고 적어도 130년을 넘은 건물로서 잘 다져지어 재건축이란 없고 리모델링해서 사용한다.
주고프 원수(거의 도시마다 있음) 동상을 옆으로 돌아 예배당에 도착하여 경전 안에는 경건함이 대단하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 제1의 종교로 신자가 아니어도 출입이 허락되고 남자는 모자를 벗고 여자는 스카프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이 곳을 나와 지금 까지 거리에서 경적 소리 한번 들이지 않고
13:38:신한촌에 당도한다.
신한촌은 우리 민족이 1860년부터 정착한 곳으로 기념탑 앞에서 각자 회한의 한마디를, 이제여기 와서 느끼기에는 너무 먼 옛날이지만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돌아가서 주위에 옆에 있는 고려인 마을도 찾아보고 만나보며 고국이 잊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 시키고 이들의 생활상을 마음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다.
공식 행사가 진행되고 헌화 묵념 애국가 제창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데 하도 오랜만에 부르는지라 가사가 기억나지 않고 언제부터인지 이 노래를 부르는 행사가 없어졌다.
이제 우리는 한 시간 반 정도 가야하는 고려인 문화센터를 향해 출발이다.
거리는 이름표를 받고 거리를 통과하며 거리는 자연스러운 풍경이 좋고 특히 너덜너덜 한 전선이 없어서 궁금하기는 하는데 인공적인 시설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좋아 보인다.
여기는 화장실 사용 시 100루블, 이제 우스리스크로 달린다.
자다 깨다 좌우로 거의 비슷한 모양의 밀림을 사이에 두고 질주하는 길에는 가끔 건축물이 보일 뿐 인적은 없다.
들과 하늘이 맞닿는 끝이 없는 지평선에는 구름만 흘러간다.
16:00 삼거리 잠시 경찰의 건문을 받고 좌회전 숲이 우거진 전원도시를 지나 드디어 우스리스크(비가 오면 늪이 형성되어 늪지대라는 뜻) 에 도착한다.
이곳에 동포들이 약 20000명가량 살고 있으며 소련이 무너질 때 무법도시이고 그때 선교사님이 신학생시절에 이곳에 왔고, 우리나라 회사에서 농장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16:27:고려인 문화센터에 도착한다.
“고려인 문화센터”오랜만에 한글을 볼 수 있고 고려인 역사관에 들어가니 한복 입은 선조들의 생활상이 옛 시절 우리의 생활상 그대로다.
이곳의 이주민들은 모두가 항일전쟁과 연결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최재형 중심 항일 전쟁이 전개되고 결국 최재형도 총살되고 스탈린의 소수종족이주 형식으로 보내지고 황무지에서 옥토로 변모시킨 고려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비디오로 보여준다.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충혼비가 세워져있다.
17:10:어째 지휘체계가 허술하여 출발이 자꾸 지연되는데 아마도 인솔자가 전문가가 아니고 일반인이기에 그런 것 같다.
최재형 의사의 가옥은 옛 시절 이곳에서 독립자금을 모았던 곳이고 독립전쟁의 기초가 되고 이곳이 상해임시정부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금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어 훼손의 가능성도 있어 보존 가치를 위하여 나라에서 소유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으면 한다.
이상설님의 묘소로 이동하면서 이 넓은 땅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냥 그대로 버려두는 그저 빈 땅이다.
17:46:이상설 님의 묘비에 온다.
가족과 아이들을 버리고 홀로 단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다 먼 이국땅에서 산화하시어 재를 수이문 강에 뿌려진, 님은 1870년 충북 진천 출신으로 선교사님께서 오늘의 이국땅에서의 이분들을 찾아보는 마음이 진실성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예전에 배웠던 “헤이그 밀사사건”이후 이상설님의 그 후의 행적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각인할 수 있어 부끄럽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또한 이곳 수이문강 주변이 발해의 유적지로 지금도 그 유적의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남쪽의 유적 물과 같은 것이 출토되고 있어 옛적 발해의 땅으로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18:00: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간직하고 오늘의 일정을 마치면서
식당으로 가서 고려인이 즐겨 먹었다는 국수를 먹어본다.
약간의 향이 가미되어 있으며 그 향은 우리의 진피 향 맛 같으며 맛있게 먹고 강행군으로 피로해진 몸을 맥주 한잔으로 달랜다.
우스리스크 역으로 향한다.
브라디미르 죠의 공연이 있기 전에 레닌 동상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다섯 명의 북한인이 있다.
우리 기자가 다가가 말을 붙여보니 대꾸를 하는데 어찌나 말들은 잘하는지 외우고 다니는 듯하고 담배를 권하니 자기 담배가 최고라며 사양하고 사진 찍는 것도 거절한다.
오늘 현실 모든 것이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쪼잔한 생각을 하는 것이 배배꼬인 사람들의 집단임에 틀림없었다.
22:30의 기차로 우즈베키스탄에서 비행기로 모스쿠바 까지 간단다.
역사 안에서 양해를 얻어 브라디미르 죠의 공연이 시작되고 아름다운 선율이 호남대생 들과 협연으로 감동으로 역사 안을 채우고 모든 여행객들의 박수가 울려 퍼지고 공연이 계속되면서 은근 슬쩍 북한인들이 시간표를 보는 척 공연을 훔쳐본다.
“에이 바보들아 당당하게 들어도 돼 잘나지도 못한 것들이”
공연은 이어지고 역사 안은 감동으로 물결을 이루고 마지막으로 아리랑으로 마무리를 한다.
블라디미르 죠와 선교사님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드리고 역 경비원들이 너무나도 좋은 음악이었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우리는 00:50분의 열차를 기다린다.
10:47:시간이 많이 남아 쇼핑과 사우나를 마치고 이제는 이곳을 떠나 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72시간을 기차 속에서 지내야한다.
8:22일 00:50:열차를 타고 오르니 아직 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객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짐정리를 하고 있는 사이 열차는 이미 출발을 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경험 없는 정리를 마치니 이것이 이름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다.
이때 하필 은하 철도 999 생각이 난다.
객실은 4인실로 우리부부는 위아래 교장선생님 부부는 맞은 편 위 아래로 같이 72 시간을 가게 되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 곳에만 이해한다고 세상을 다 안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은 사람은 내치는 무례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힘주어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함부로 술 한 잔도 못하고 산다면, 그는 인생을 살아왔던 방법도 분명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주 타협적인 사람이 되어있겠지.
그래도 그렇지 않고 같이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들면서 고약한 생각으로 열차에 몸을 맡기고 편한 마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제부터는 무엇이 정답인지 항상 해 왔던 고민을 해야 한다.
08:31:밤새워 달리던 열차는 어느 듯 밤을 지나 아침으로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
여전히 덜커덩 거리며 달리는 우리 열차는 다리를 건너고 들판을 가로 질러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다.
벌써 일어나서 시끄러운 소리에 슬쩍 내려 화장실로 향한다.
달리는 열차는 언뜻 탱크를 보고 더러는 찌그러진 자동차를 보고 멀리 끝도 없는 지평선 위로 하늘은 하얀 구름들이 흩어진다.
쉬임 없이 달리는 동안 우리 열차는 하바로브스키역에 가까워지며 인부들이 보이고 제법 큰 역으로 진입초기부터 도착할 때 까지 거의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것 같다.
별로 자랑 할 것도 없는 화장실은 그나마 고장으로 사용금지 다른 칸의 화장실을 기웃거려야 한다.
이곳은 고장 나면 고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금지시켜 버리니 우리나라 같으면 민원사항이다.
그리 보니 우리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인가?
식사는 먹고 싶을 때 미리 나눠 준 전투식량과 미리 준비한 깡통(깻잎 고추장 토화 젖 김 김치 등)으로 오래 전부터 만난 것처럼 되어버린 교장선생님 내외와 먹고 마신다.
사모님께서는 병치레를 많이 해서 이번 탐방 길에 부정적이었으나 건강 확인과 모험적으로 참가 하셨다.
스쳐 가는 주변은 벽으로 길게 벽화가 그려져 있고 옆 궤도에는 화물 열차가 지나가고 멈출 듯 하던 열차는 계속 진행하고 마을 길 오래된 집들이 시골풍을 풍기며 흘러간다.
마을 집에는 알 수 없는 열매들이 매달려 시선을 끌고 러시아의 8살 먹은 꼬마 얘가 자동차 놀이를 하며 우리 곁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어디나 어린애들은 마찬가지 평화롭다.
09:50: XABAPOBCK역에 도착 역가가 고풍스럽게 제법 근사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여기서는 40분 정차한다.
잠시 밖으로 나가보자.
화장실이 역사 안에 있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 역사 정문으로 들어 화장실 앞에는 우리 식구들이 여럿이 있다.
사용료는 20루블 공짜가 없다 특히 화장실은, 대충마치고 호대 교수님에게 약 4000원 짜리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서둘러 열차에 올라 10:40분 열차는 다시 출발한다.
10:42:엄청나게 커다란 강인지 호수인지 넓은 곳을 철교를 타고 달리고, 이쪽과 저쪽이 합쳐진 합수 점, 하바로브스키 도시 바로 옆 아무르 강을 통과하면서 많은 역사들이 생각 속을 스치고 강주변의 늪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저 지나가며 보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점심 먹는 시간 이곳은 경비원의 경비가 삼엄하여 식사 중에 혹여 술이라도 먹다 걸리면 경을 칠 일이다.
사바사바 하면 모를까 이들은 그걸 좋아한다.
그래서 밥상과 술상을 차려 먹는데 교장선생님은 전혀 술을 못 먹고 아내와 둘이서 두어 잔 마시니 어느새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한 잔치가 벌어진다.
잔치라야 별개 있겠느냐 만은 그래도 달리는 열차에서 주거니 받거니 20여년 넘는 후배들과 밥상이라는 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여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행복이고 모여 얼굴보고 앉아 있는 시간들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비록 강제 이주 길을 가고는 있지만 마음 까지 우그릴 수는 없다.
13:09:헬기 하나가 지나가는 뒤로 영락 무등산 같은 산을 보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비슷한지 서석대-안양산 쪽 뒤쪽으로 담양으로 내리는 줄기가 연상되고 오후의 열기가 마치 한 여름처럼 뜨겁고 까다로운 경비들의 간섭 속에 서서히 적응해 가는 자신에게 감사하고 조금씩 피로해지는 몸을 가누기 위해 침실에 누워본다.
다행이라면 언제든 자고 일어나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고통의 이주민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픔을 조금이라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한다.
16:00:약 10분간의 휴식 시간에는 전원이 밖으로 나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뜨거운 햇볕에 실내는 무척 덥다.
유난히 이곳 사람들은 담배를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즐기는 듯 시종 빨고 있다.
그늘 속은 시원하고 해 빛은 뜨겁다.
열차 안의 더위가 장난이 아니고 우리일행의 다양성이 증명하듯 가끔씩 만나 나누는 이야기의 무게들이 제각각 더러는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생각들로 어우러져 여러 이야기로 긴 여정을 지루하지 않으려고 노력들을 한다.
낮 동안은 무척 덥고 밤에는 추운 전형적인 시베리아의 온도를 체감하며 질주하는 열차 속에서 너무나도 한결 같은 밖의 풍경에 지루해질 무렵부터 우리의 몸은 스스로 적응해 가고 있다.
18:35: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다.
떨어지는 해를 어떻게 잡겠느냐?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둬라 잡으려 하지 말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자. 그러면 우린 내일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19:34:저녁상을 보고 오늘은 술을 자제하고 누룽지 컵라면 햇반에 토화 젖 깻잎 멸치조림 등으로 상을 차리니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다.
저녁을 먹고 나니 더 이상 바랄게 없고 어두워지는 옆 들판을 보면서 지금까지 7-800k 달려 오고 아직 24시간도 채 달려오지도 않았다.
오늘 저녁은 가급적 자제를 하고 책이나 좀 보면서 그 나름 새로운 탐방의 의미를 새겨 보기로 한다.
20:22: 어느 듯 비가 유리창을 때리면서 이틀째 밤을 맞이하고 오늘은 다른 객실도 자제를 하고 쉬려는 듯 실마다 모두가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조금씩 이분위기에 적응해 가고 동토의 땅 불곰 미사일 007기, 기억 속에 과거들이 되살아나지만 급변해버린 세계정세 속에 한반도의 위상이 여러 곳에서 높아지면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23일 00:20:있어야할 사람과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엄청난 괴리를 형성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능력으로 생각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론을 또는 지식으로 현실을 이해하며 그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맡겨진 기본적인 의무에 충실하고 살았는지,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륜으로 또는 상식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좀더 남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하는데 모르겠다.
나는 혼자 산에 가는데 누가 이 이유를 알겠는가?
그래도 이대로 살 수 밖에 없기에 이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나이 먹으면 고루해지고 어리면 진취적이라 할 수 있지만 서로가 존경해주고 그것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08:58:쉬지 않고 우리 열차는 어제처럼 자작나무 늘어진 들판을 같은 속도로 달린다.
언제부터 일어났는지 교장선생님 부부는 활동을 하고 다른 방의 동료들은 여전히 시끌시끌 돌아다니며 차 드실 분 차드실분 하며 지나가고 밝은 햇빛이 이미 창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밤새 서늘했던 온도를 올리고 있다.
아내 역시 부스럭 거리며 일어나 양치를 하고 이제 또 하루가 시작된다.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할 수 없는 생활이 이틀째 시작되고 아직도 이틀은 더 달려야 이르쿠츠크에 도달하고 그 곳에 가서야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열차에는 샤워 시설이 있다고도 하지만 우리 열차는 전혀 그런 시설이 없고 예약도 샤워시설과 식당 칸이 있는 열차로 예약했다지만 예약이 어긋나고 그 쪽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오로지 우리만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 나라는 합리적인 게 안 보인다.
이런 것만 봐도 한국은 이들보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듯 하지만 분단의 현실이 안타깝고 남쪽마저도 친일 잔존세력 때문에 갈등이 많지만, 이런 것이 청산된다면 우리도 세계 으뜸으로 올라 설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유명하다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이 모양이라니...
우리가 아직 까지도 남을 침략하거나 노략질을 하지 않고 선교활동 구호활동이 적극적이니 가능성은 확실히 많다고 할 수 있겠다.
가는 길은 되돌릴 수는 없고 현실에 부딪쳐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적응하면서 가야한다.
10:25:열차가 20분 동안 정차하여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밖으로 모두 나가지만 모두가 담배를 물고 잡담을 한다.
벌써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승무원과 친해져서 같이 사진도 찍고 통하지 않은 말이지만 한 두 마디하고 웃고 상냥해진다.
여기는 열차가 쉬는 동안은 승무원이 문 앞에 내려 지켜보고 있다.
40대의 우리 사나이(이홍주)는 옆방 러시아 8살 아이와 친해져서 안고 달리고 부여잡고 마치 아버지와 아들마냥 친해졌다.
엄청 덩치 큰 얘 엄마는 가만히 지켜보며 담배를 피우고 우리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잠시 지루함을 잊는다.
날씨가 약간은 서늘해진다.
점점 온도차가 나고 다시 탑승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 옆의 방들은 가볍게 맥주를 한 잔씩 한다.
여기는 술을 먹으면 안 되며 왜 그런지 모르겠고 사바사바로 먹을 수가 있다.
지루한 긴 열차 여행을 술마저 없다면 매우 어려울 건데, 지들은 알바 아닌가?
15:31:우리 칸에는 러시아인 두 가족이 있어 조금 적은 아이는 우리 일행과 친해져서 귀찮아질 정도로 장난치며 열차 안을 뛰어 다니고 한 어린애는 제법 쉬운 영어를 할 수 있어 율리아나 선생님의 러시아 어 통역으로 선심성 희망을 주어 어린애에게 약속에 대한 희망만 주어서 걱정이 된다.
술 바람으로 가급적이면 삼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고 그런 것 때문에 얼굴 붉힐 이유야 없겠지만 원래가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과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현실적인 사람들이 있어서 인간간의 사이가 나빠질 수가 있다.
어느 정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초콜릿으로 마음을 달래며 한 시간 정도 연착을 각오해야 한다.
17:30:계속된 똑같은 풍경으로 움직이고 있는 열차는 더러는 언덕이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고 가끔씩 이주민의 강제이동 과정에서의 상황을 생각하지 만 지금 우리가 어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멀리 가면서 세계가 좁아졌다는 현실을 실감하고 어느 역 에서는 비가 내린 듯 촉촉이 젖은 곳에 우산 쓰고 서 있는 러시아인 모습이 옛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열차 안의 우리 방은 끊임없는 인생사에 점철된 사실들이 하도 많이 불러와서 심심찮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먼 길을 가고 있다.
밖에서 환호 소리에 밖을 보니 강물이 불어 넘실거리고 비 방울은 한층 굵어진다.
어느 지점 인가 가면서 자동 로밍이 되어 서울과 같은 시간이 되기도 한다.
앞자리 사모님은 피곤한 듯 건강치 못한 몸으로 어려운 여행을 택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교장선생님의 아내에 대한 헌신적인 모습에 내 아내는 어떤 생각일까?
마을을 지나가면서 저녁을 알리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라 모든 세계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인 것 같다.
24일 00:03: 이렇게 또 하루가 가면서 남다른 세계에서 갈 곳을 향해 꾸준히 가고 있는 열차는 차라리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꿈틀거리는 인간을 비웃듯이 지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서 시베리아 그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시베리아에 갔다 왔어요, 라는 것이 혼자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같이 가는 이들이 있어서고, 지금 같이 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우리라는 의미를 이해 할 수 있는 순간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없으면 감히 이곳 까지 올 수 없습니다.
더불어 내 아내는 언제 어느 때라도 나를 위해 나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이곳에 나는 올 수 없고 이렇게 행동 할 수도 없습니다.
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내일 또 봅시다.
08:00:이 열차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맞이하고 달리기만하는 열차는 이르쿠츠크 까지 약 1000k를 남기고 밝은 하늘에는 맑게 흰 구름 떠가고 끝없는 초원길에 조금씩 어제보다 더 서늘함을 느끼고 고도 900여m를 달리는 열차는 피로도 모르고 달리고 우리는 지쳐가는 모습으로 열차에서 사일 째를 맞는다.
바이칼 호에 가까이 가고 있다.
일어나 보니 러시아 인들은 모두 내리고 잠깐 동안이라도 정들었던 아쉬움이 남는다.
들판에는 뛰어 노는 소, 양 떼들이 무리지어 풀을 뜯고 동네는 영역표지가 나무통으로 엮어 경계지고 띄엄띄엄 보이는 마을은 한가하지 못해 외로워 보이는 광경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들판에 빨간 꽃이 피어있고 아마도 여기는 몽골 위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000k쯤 왔겠다.
09:51:7-8분 후 킬힐록 역에서 15분 정도 정차 한단다.
가끔씩 이렇게 정차 할 수 있어서 내려 걷고 공기를 마실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부터는 긴팔을 입어야겠고 이제껏 지루하게 보였던 자작나무는 침엽수가 대체하고 강물은 꾸불꾸불 길게 흐르고 먼 곳에는 높고 길게 산맥이 구름 속에 흘러간다.
만났다 흩어지는 강줄기는 보이는 듯 사라지고 수풀 우거진 눈이 아프도록 녹음 속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여기는 사람들은 시베리아라고 부르지만 나는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고 그저 그렇구나 할 뿐 어쩔 수가 없다.
계절이 맞지 않아 없는 눈과 추위를 가져 올 수는 없지 않은가.
세모 다섯모 난 건물은 지붕이 스레트와 양철지붕으로 전형적인 유럽 시골풍이다.
고도는 700여m 습도는 920 mb로 건조한 편이다.
12:16:푸른 초장에 더러는 마을들이 있다가는 없어지고 굳은 날씨가 어느 듯 밝은 햇빛을 비추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이 길게 늘어져 조그만 싹을 틔우고 이쪽 기후에 맞는 농작물을 키우려면 농경지는 엄청나게 많은데 수송수단이나 일손이 없어서 못할 것 같은 곳에, 이 곳의 작물은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고 넓은 초지에 달랑 한 마리 말이 풀을 뜯고 있고 고개를 돌려 옆을 봐도 마냥 같은 형태로 햇빛을 받으며 달린다.
14:40:길게 멀리 산불로 타버린 나무들 위로 또 다시 불이 나서 잘라낸 위로 누렇게 변해버린 나무들이 몇k를 이어지고 삼각형 지붕의 마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염소 떼와 무언가를 나르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가 또 다시 그만한 나무들이 이어지고 동토의 시베리아에 반팔로 견디고 있고 교차하는 열차는 대부분 화물열차로 가스 목재를 운반하고 무려 74량을 달고 엔진 통이 세 개를 붙여 달리고 있다.
15:00:울란우데 역에 도착 한 시간이 늦어졌다(현지시간 14:00)
여기에도 고려인이 살고 있고 브리아트 족이 많이 살고 있단다.
여기에서 호남대 공연 팀이 공연을 하려는데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사가지고 온 음식으로 맥주 한잔하고 가도 가도 길고 긴 길이여서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도 끝나지 않은 그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에도 능숙해져버린 곳을 오랜 시간 달리다 보니 풍경에 대한 풍미와 정취가 무디어져 버렸다.
가끔씩 승무원이 방들을 청소해주는 것은 이 나라가 긴 여행 동안 익숙해져 버린 모습인 것 같다.
다시 자작나무가 보인다.
17:43:밖에서 함성소리 들리고 바이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바라보는 호수는 바다인 듯 파도치듯 물결이 밀려오고 밀림이 막고 보이다 말다 바로 앞으로 오다가 멀어지고 이름 모를 역에 잠시 정차 중에 호수에서 잡은 말린 고기를 가져와서 판다.
19:45:저녁 준비를 하는 중 오구탁 선교사님이 삼위일체 설명을 듣고 이분은 20여 개 국에서 선교 할 동을 하시다 은퇴하신 분으로 담양군 대덕면에 아내와 두 분이 사신다고 한다.
김 교장은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 질문으로 급 관심을 보인다.
옆으로 보이는 우뚝 솟은 기다린 산맥은 혹시 우랄산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28:해는 저물어 가고 다시 옅게 구름이 덮이고 1단계 시베리아 횡단으로 이르쿠츠크 역을 세 시간 남기고 서서히 준비를 한다.
밤은 점점 깊어 가면서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짐 정리하느라 수선스럽고 이미 정리 한 분 이제야 하는 분 모두 빨리 빨리 한국인답게 서둘러 정리하고,
23:40: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한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에 있는 도시이며 인구는 60만 정도로 기계(전기 공작기) 목재 가공 모피 식료품 등이 발달했으며 수력전기에 의해 알루미늄 제조업이 번성한 곳이다.
급하게 내리면서 빗방울이 한 둘 내리는 어두운 밤 줄지어 담배 피우는 사이를 뚫고 지하도를 지나 기다리고 있는 권 정희 씨를 만나 시동이 걸려있는 차에 탑승 앙카라 호텔로 바로 출발 배분된 과일을 깨 물으니 맛이 그럴 듯하다.
71시간 35분 동안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반쯤 지나오면서 어색한 감동 속에 1단계 정착지,
25일:00:30:숙소에 도착 334호를 배정 받아 씻고 누우니 덜커덩 거리는 기차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몸은 흔들거리는 듯하다.
07:30:기상
아침 기온이 싸늘하고 충분한 취침이 안돼서 어지러운 머리에 그제부터 편두통이 심해 두통 약을 먹곤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다시금 머리가 아파온다.
03:00부터 시작된다는 식당에 서양인과 중국인이 있는데 입에 맞는 음식은 없고 소시지 몇 개와 달걀 후라이로 적당히 때우고 방으로 들어 와 시간이 남아 잠을 청하려한다.
하늘은 구름이 가득하고 바람은 고요한데 밤중에 비가 온 듯 땅은 축축하고 니얼거리는 뱃속을 달래느라 평소에 잘 먹지도 않은 커피 한잔을 창가에 앉아 마시는데 구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간다.
커피 한잔으로 뱃속을 위로하고 09:00에 집합하기로 하여 내려와 있는 몇몇을 보며 인사하고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임패리얼 호텔에 분산하여 투숙했던 젊은 사람들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비가 와서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아내는 다시 방으로 올라 우산을 가지고 오는 동안 화면에 나오는 가수의 그림을 보는데 이곳의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더 재미없는 그림이 나오는 것이 우리의 걸 그룹의 새로운 모습으로 춤추는 것이 이곳에서도 인기가 있는 것은 그만큼 새롭게 다가오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시내투어를 위해 차에 오른다.
비는 그쳤다.
지하철역이 보이고 도로는 넒고 잘 뚫려 있으며 교통은 번잡하지 않다.
마리라는 현지인이 안내를 하는데 한국어 전공으로 이르쿠츠크 대를 졸업하고 한국 조선대에도 유학도 하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어는 유창하지 못해 어려운 말을 힘들어 한다.
10:14:인근에 있는 앙가라 강이 있는데 이 강은 유일하게 바이칼 호에서 나오는 강이고 이는 흑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난다.
이곳에는 지나는 택시는 없고 콜택시와 대기(대절) 택시 밖에 없다.
이곳에는 아직도 전차가 있어 버스와 같이 지나간다.
10:38:카란 교회(러시아 정교회)의 입구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보이고 정원에 꽃들이 향기를 내는 뜰을 지나 예배당에 들어서니 거대한 내부에는 엄숙하고 사진은 허용하지만 정숙을 요한다.
옆으로는 각종 새들과 짐승들을 기르고 있고 다른 팀이 몰려와서 자리를 비켜주고 전통가옥을 지나는 나무 건물의 거리 지나는 길에 “kim chi”라는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BABR”이라는 이 지방의 전통 전설의 호랑이 상이 크게 있다.
아르바트 거리를 돌아보면서 호텔로 돌아가 체크아웃하고 이제 바이칼 호로 옮긴다.
12:12:이 거리는 반바지 입은 사람과 파카 입은 사람이 공존하는 거리, 고층 아파트도 보이고 여객선 강을 지나 수풀이 멋들어진 곳을 지나 북경반점도 보이고 기름 값은 우리의 절반정도라 한다.
커다란 자작나무와 길쭉길쭉한 나무가 숲을 이루는 지대를 지나며 속도를 한층 높이고 표지판이 보이고 샛길로 귀우 뚱 낑낑 거리며 헛바퀴를 돌다가 펜션 같은 오층 건물을 지나 리프트 카 정류장에 도착한다.
13:20:옷깃을 단단히 추겨 세우고 ‘KA CCA TIKETS“을 받고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고 아내와 같이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먹구름 몰아치는 전망대를 내려오는 중국인과 손 인사를 하고 10여분 오르니 전망대 정상에 오르니 물안개 가득한 곳 바다 같은 호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바이칼을 바라보며 이국의 광대함을 느끼며 갑자기 왜소해지는 조국의 영토, 그나마 두 쪽 난 현실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얼마나 욕심들이 많으면 이 넒은 영토를 두고 다른 곳을 욕심을 내는지 아마도 이 세상은 합리적인 세상이 아니다.
밑으로 100여M 내리니 보기 좋은 전망대 어디나 마찬가지로 표지기들이 나풀거리고 살짝 올라 내리니 바로 밑으로 선착장 보이는 물줄기는 앙가라 강의 출구라고 한다.
여러 포즈로 사진들을 찍고 이쯤해서 다시 돌아 와 스물 스물 밀려오는 찬 공기에 내려오는 내내 추위를 느끼고 내리니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있고, 오고 가는 차들이 많다.
러시아의 정겨운 모자가 직접 담은 보드카를 선물 받은 이윤선 교수가 내 놓으니 한잔에 쌀쌀한 공기에 몸이 훈훈해진다.
차에 올라 내려오는 길은 반대 방향으로 바로 옆으로 바이칼을 바라보고 내려온다.
가장 많은 생물이 살고 있는 “지구의 눈” 옆을 따라 우주에서 바라 본 지구의 보고, 브리야트족이 40만이 살고 한민족의 유전자적 요소가 옮겨 닮아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4:55:선상에 도착하여 배들이 많은 가운데 “호남대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앙상블”의 공연이 이국 땅 바이칼호수에서 공연을 하고 제법 관중이 모인 가운데 짜자자장 —앵콜송
바이칼 호의 선상 투어를 위하여 배위에 오르고 점심도 준비되어 있다.
엄청나게 파도가 치는 흔들거리는 바이칼 위를 달리고 갑판에 못 있게 해서 안으로 들어가 준비된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보드카를 한 두잔 마시고 나니 광대처럼 즐거워지고 바라보는 눈빛이 그냥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먼 곳 바이칼에서 우리끼리 앉아 노래 부르고, 스스로를 절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름답고 재밋다.
물론 나이가 있다고 하지만 이런 즐거움은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
물위에는 물새가 두둥실 바다 같은 호수, 아쉬운 마음을 품고 이제 바이칼 위에서 둥실둥실 추억을 안고 깊이깊이 간직하며 짧은 시간 안녕 바이칼의 바다여---
내려 와 선착장에서 두 쌍의 신혼부부를 본다.
현대 기아차에 꽃장식한 여기나 우리나 격식은 똑 같다.
어딘들 결혼은 축복이고 설레이는 행복의 시발점이 아닌가? 축복과 행복을 빌어준다.
16:25:올 때와는 달리 기온은 올라 따뜻하고 맑은 물위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넓디넓은 바다 같은 호수를 이제 이별하자.
신의선물로 보석 같은 이 곳을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또 다시 횡단 열차를 타기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19:37:한 시간여 오는 내내 졸다가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한다.
18:20:열차에 올라 이번은 31 시간을 노보시비르스크 까지 간다.
이번 열차는 지난번 보다 더욱 환경이 열악하다.
원래 여건이 이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등급에 따라 차등 열차라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이미 결정 되어 있고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모르는 곳에서 더구나 탐방 길에 무슨 잔말이 필요하겠는가?
간다. 열차는 달리고 아무튼 다시 우리 방에는 이야기 거리가 생기고 전번 교장선생님 내외와 같은 객실로 만나고 선교사님이 오셔서 다시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한 오랜 기간 선교사 활동에 감동을 주고, 뱃속의 느끼함에 커피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고 변화 없는 생활 속에 열차는 불평 없이 앞으로만 달린다.
10:51:밤이 조금씩 깊어 가면서 잡을 수 없는 하루가 간다.
우리 곁을 지나가는 일행들은 습관처럼 이방 저 방을 기웃거리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라 각자가 모든 게 다른 이 나라에 적응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아픔은 항상 아픔을 더 잉태시키고 고통은 고통을 만들어 내기에 가능하면 더 이상 조그만 것을 깊이 생각 않으려 했는데, 항상 그것이 현실생활 이라는 단순한 논리에 매번 어긋난 생각을 그렇지 않다고 삭혀 버리는 못된 습관이 배어 버렸다.
8월26일:05:20:어김없이 또 하루는 지나가고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 속이 쓰림을 느낀다.
잠시 쉬였던 열차는 속력을 내어 달리고 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구름마저 잔뜩 끼어 있어서 저녁 동안 딱딱 거리는 소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더 누워 있으려니 주변이 소란하다.
7박 8일 째 계속되는 탐방 길은 조금씩 지쳐오고 비좁은 객실 침대는 삐그덕 삐그덕 정북을 향해 달린다.
가져 온 컵 라면으로 속을 달래고 오늘 부터는 2시간이 빨라져서 지금 시간이 08:54:(여기시간 06:54)서쪽 멀리 산봉우리에 간신이 걸쳐있는 구름이 운해를 이루어 장관이다.
깨어나 지금 까지 주변은 온통 안개로 가려있고 마을은 보이지 않고 할 일 없이 그저 쏟아내는 이야기는 두서가 없고 행여 새로운 풍경이라도 찾을라치면 금방 도 안개로 가려버려 가시거리는 짧고 오늘은 아직 까지 햇빛을 보지 못했다.
젊은 시절 조금 더 활동할 수 있는 나이 때 이런 길을 다니며 살아보았으면 눈 높이가 달라졌을 텐데 예전에는 이곳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공산국가의 종주국으로 위험한 시대였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우리의 위상이 높아져 세상은 좁아지고 문명의 발전으로 수송능력도 좋아져 보다 쉽게 갈 수 있다.
허나 일모도원 이라더니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나이 탓 보다는 생각의 부족함으로 탓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라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여정을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흐르는 물처럼만 흘러가지 말고 거슬러도 가보고 다소 고단한 삶일지라도 부딪쳐 봐야하지 않겠는가?
앞에 교장선생님은 물고 살았던 담배는 금연한지가 10여년 됐고 술은 체질상 먹을 수 없는 것 같고 신앙도 깊은 듯하다.
12:55분 크라스나고르스키 역에 45분간 정차하고 당연히 화장실은 잠겨있고 해서 계단으로 올라 철길위로 육교를 넘어 밖으로 나가 우로 돌아 역으로 들어가서 아래로 내려가서 대합실 우측에 승무원에 물어 화장실을 찾으니 우리 일행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도로 바로 통과해서 이곳에 와 있다.
역사 앞은 굉장히 큰 광장이 있다.
이곳의 날씨는 따뜻하고 사람들의 행동은 민첩하다.
매점에는 여러 가지를 파는데 마땅한 게 없고 우리나라 귤 같은 게 있는데 5개에 230루블이라 그냥 온다.
열차는 다시 출발을 하고 집행부가 사가지고 온 물건 중 맥주 한 캔을 하고 물건을 파는 역무원에게 잘 봐주십사 300루블 상당에 물건을 사준다.
15:19:점심 식사
다행히 이 곳에는 식당 칸이 있어서 이동한다.
식사시간 동안에 강연이 있을 거라고 하고 여러 칸을 지나 도착한 식사는 먼저 빵과 오이피클과 국물은 매우 느끼하고 떠있는 순두부 같은 것은 마요네즈 같고 점심이 늦어 억지로 집어 넣고 맥주(staropramen)에 보드카로 현실을 잊고 여기는 술은 부족함이 없다.
밥이 나오고 박용수 단장이 고려인 이주에 대한 강연이 이어지는 동안 창밖으로 하늘은 구름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지평선과 마주한 언덕에 길이 보이는 우리 하늘과 닮았다.
각자 테이블마다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 교장선생님은 자신은 먹지 못하면서 부족한 술을 거두어서 우리 테이블로 가져와 다시 우리 테이블은 술이 남아있는 동안 정찬용 전 인사수석의 좋은 말씀 이어지고 술기운이 오른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시간에 취기는 오르고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비틀거리는 열차에 억지로 몸을 맡기고 외국인의 역겨운 냄새를 피하며 비교적 맑은 공기의 우리 객실로 돌아오니 집에 온 것 같다.
18:30:밖에서 소란 속에 일행 중에 누군가가 열차 안은 금연인데, 담배 피우다가 적발되어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여러 번 담배 때문에 경을 칠 일이 있을거라 생각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적발되어 새별 양과 강차장이 해결책을 모색하고 여권을 돌려받고 반성문을 쓰고 해결한다.
10:03:해가 저물 무렵 우리 열차는 이쪽으로 저쪽으로 태양을 쫓아가기라도 하듯 방향을 옮기며 간다.
김치라면 밥과 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햇반으로 저녁상을 차린다.
전투식량으로 집행부가 준비 한 것으로 이런 환경에서는 요긴하게 먹을 수가 있다.
벌써 여러 번 먹었으나 아직 까지도 먹을 만하고 여기에 깻잎 새우젓을 곁들이니 한 상 가득하다.
이쪽 시간으로 20:30:인데 이제야 어두워지고 앞으로 머리 위로 초승달이 보이고 해질녘 낙조 빨갛게 물들어 가고 또 오늘 하루가 저물어 간다.
27일 00;30:막 잠을 청하려는데 강차장이 와서 다음 열차는 3등 칸으로 가서 있다가 검표가 끝나면 2등 칸으로 옮겨준다고 한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번거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말도 글도 모르는 나라에서 한 번에 목표를 향해가는 것도 정신을 곤두세워야 하는데 한번을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가않다.
매끄럽지 않은 운영에 화가 나기도 한다.
아내가 말리고 참기로 한다.
00:50:노보시비르스크 역에 도착한다.
시베리아 최고 도시 인구 150만 우리나라 대전 정도에 위치해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두 도시가 자매결련을 맺었다고 한다.
기다리고 있는 목사이면서 영사님이신 분을 만나 내일 일정을 안내받고 숙소로 이동, 높은 빌딩들을 지나 아지못 호텔에 도착한다.
와이파이 비번을 받고 자고 11:30(이곳 09:30분) 까지 집합이다.
자는 둥 마는 둥 08:30(여기 시간은 06:30분) 분이다.
좀 더 많이 잤으면 좋으련만 일찍 일어나 서성이며 맑은 하늘 좋은 공기를 마시며 한정된 풍경만 기계처럼 둘러보고 와이파이가 회복되어 국내 뉴스 검색을 하는데 오늘은 “국민의당” 대표 경선이 있고 가아는 6연패 뒤에 겨우 일승을 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제부터는 이 곳의 발전상을 둘러보고 다시 열차로 알마티 까지 이동이다.
마지막 32시간을 열차에서 보내면 130시간 이 넘는 열차로 이동하게 된다.
동토의 시베리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계절이 여름이여서 눈은 없고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춥다.
한 겨울에는 영하 40도 까지 내려간다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은 현실이다.
겨울에 다시 오면 모를까.
10:30: 쏘시지 몇 조각 달걀 후라이 야채 고기 정도로 입에 맞지 않은 조식을 마치고 평소에 좋아하지 않은 커피로 배속을 달래고 퇴실 준비를 한다.
지금 온도는 10도c 정도 되는데 오후 되면 20도c 까지 오른다고 하나 영사(목사)님께서 긴찰을 입고 가자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분다고,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큰 짐은 두고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 탐방을 위해 11:30(09:30)까지 집합한다.
먼저 이 도시의 발상지로 출발하여 알렉산드르 3세(이 분이 알래스카를 크림 전쟁 시 미국에 720만 불에 팔아넘기고, 해서 욕먹고 미국 국무장관인 월리암 H 슈어드가 사들이는 조약으로 사고도 욕먹고) 의 동상이 크게 서있는 곳, 이 나라는 동상이 많다 국민의 분열을 막으려는 듯,이곳은 모피(담비)의 원료인 담비를 구하기 위해 처음 사냥꾼들이 모여 들다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건설되어 도시가 발달 되고 전쟁을 피해 이곳에 공업이 발달되어 야금업과 금 제련은 거의 여기서 한다고 한다.
횡단 철도 건설도중 난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오보 강 철교를 반쯤 본보기로 놔두고 또한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공사도 매우 어려운 공사였다고 한다.
노보(새로운)시비리스크(시베리아)란 뜻이고 계획된 도시 평온한 도시 여유로운 도시 교통과 물류의 허브지역 시베리아 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시베리아 철도는 1893-1897년 건설되고 오브 강이 흐르고 주변에 조그만 벌레들이 달려든다.
오브 강은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흐르고 몽골 쪽에 46K의 댐이 있는데 길이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은 바다라 한다.
12:22:조그만 벌레들에게 쫓겨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로 옮긴다.
이 도시는 공산당의 세력이 센 그러니까 진보된 공산당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곳이다.
그래선지 광장 앞에는 러시아 중학생들이 춤들을 추고 있는데....
즉석에서 우리의 “케이 팝 ‘하이라이트의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에 맞춰서 춤을 춘다.
(이걸 광산 구청 직원이 유 튜브에 올렸다고 방금 아내에게서 화면이 온다.)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지? 이곳까지 케이 팝이라니....
이 먼 곳에서 러시아 중딩들이 우리 노래에 맞춰 춤추는 것을 보고 케이 팝의 인기와 문화의 위력을 실감하고 나도 덩달아 이 얘들과 사진 한 장을 남긴다.
13:06: 길 건너 보이는 향토박물관으로 이동 러시아의 발전과정이 시대적으로 진열되어있고 영사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인류는 종족에 상관없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으로 나와, 고려인이 운영하는 신라식당으로 가서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한국 음식에 보드카를 곁들이니 피곤이 잠시 떠난다.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변하지 않은 식품으로 선물을 준비하는데 비싸지가 않고 여기는 특히 물이 싸고 커피가 비싸다 상대적으로,
이쪽은 초콜릿이 맛있다하여 초콜릿과 달걀과자를 사고 남은 돈(루블화는 여기를 떠나면 카자흐스탄은 화폐가 탱개, 루블은 21:1 탱개는35:1로 바뀐다)으로 과일을 사서 돌아오니 아직도 시간이 넉넉하다.
잠간 조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흐르고 늦어 지각하고 영사님의 한민족의 소망과 희망을 위한 강연이 이어진다.
공산주의 치하 이 곳에서 종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지하에서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밤을 틈타 예배드렸기에 유지되고 러시아 정교는 이 나라 국교라고 한다.
호텔로 돌아오니 러시아 사람들이 귀한 사람을 환대 할 때 주는 빵을 선사한다고 한다.
18:38: 러시아 의상으로 곱게 차려입은 어여쁜 여왕(?)께서 국빈 대접 할 때처럼 격식을 갖추어 우리를 맞이하고 그 빵을 먹을 때는 소금을 찍어 먹는데 이곳에는 내륙지방이라 소금이 없어 소금은 건강의 상징이라고 한다.
여왕님과 우리 부부는 사진 한 장 남기고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32시간의 열차 여정을 위하여 모두 지정된 버스를 따라 오른다.
열차에 오르니 9호차 3등 칸이다.
젊은 친구들과 어른 다섯이 이쪽으로 밀렸다.
곧 2등 칸으로 바꿔 준 다고 했지만 학생들을 보니 미안해서 화가 난다.
잠자코 있는 사이 대표로 짜증을 많이 참아 가면서 부리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런 상황이 된다면 그리고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그대로 넘어가고, 다시는 안 오지 하는 것, 보다는 항의하고 고쳐 다음에 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21:19:일단은 2등 칸으로 옮겼으나 짐은 3등 칸에 놓고 여권을 주었다 돌려받고 더욱 더 열악해 지는 환경 속에서 고려인의 체험을 조금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위로를 한다.
옮긴 네 자리에 러시아 여인과 호대 교수님 그리고 우리 부부가 같이 가게 되었다.
이 교수님은 2년 전 MBC를 은퇴하고 호남대 신방과 교수로 있으며 이주기념 CBS의 다큐를 제작하고 있다.
여러 날이 지나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지처 갈 즈음 러시아인과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한 공간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활력이 될 수도 있고 예의를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한다.
마침 가축박사 우 명석님의 날아가는 통역으로 러시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4시간 후에 내린다하고, 4살 베기 아들을 보여주고 먹을 것도 나눠먹는다.
28일 00:48: 가만히 이제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며 내 생활의 일부를 회상한다.
제 멋대로 세상을 살면서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단지 올바르고 깨끗하게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며 조그만 잘못도 상처주고 이해 할 줄도 모르고 상황 파악도 못하고 그런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짓고 오래도록 살아온 나를 고칠 수는 없겠지만, 신앙마저도 멀리하고 내 자신의 방식으로 신앙을 가슴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아직도 철부지인가 보다.
08:15: 밤새 자는 동안 불상사가 일어났다.
담배를 피우다 꽁초를 버렸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고 그리고 이전 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찍어서 적발되어 여권 뺏기고 못 가게 한다고 하고 엄포를 하도 많이 해서 우리 돈 10만 원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이곳은 사바사바가 유행하는 곳이라 감수하고, 아침이 되니 여명이 멀리서 넓게 떠오르고 이름 모를 새들이 여명의 불빛 속으로 날아다니고 카자흐스탄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서 여권을 회수했던 것을 돌려받고, 간밤에 러시아 여인은 내리고 다른 러시아 76세인 여인으로 바꿨다.
열차는 쉬어가고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국경을 넘어 가기 때문에 러시아 입국심사서는 가져가고 여권을 돌려받고 세밀하게 검사하는 바람에 시간이 길어지고 매우 까다롭다.
테러가 빈번한 때문인지, 갈 곳도 중앙아시아 아랍권이라서 인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러시아 인과 대화는 잘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신상을 파악해서 한분은 남편이 복서였고 우리 앞에 분은 독일인인데 두 분 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두 분이 만나서 창가에 기대여 계속 이야기를 한다.
승무원의 검색은 매우 오래가고 전부 객실로 몰아넣고 출입을 통제한다.
10:04:이제 출발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면서 기후가 달라지는 듯 나무들이 바뀌고 시차가 세 시간이 늦어 07:04분이고 우리가 아침 식사를 하는 다음, 러시아 여인이 식사를 하는데 항상 준비되어 있는 듯 조그만 손수건에 오이 한 개 달걀 하나 과자 과일 물 한 병 으로 정갈하게 차려서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신다.
익숙한 솜씨이다.
우슈토베 역 까지 가면 우리 열차 여정은 끝이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서 온도는 오르고 열차는 입국 심사를 하느라 100분 이상을 지체하고, 객실 안에서 이동을 못하고 유심 칩도 바꾸고
12:40: 출발이다.
이쪽 벌판은 제법 농사를 지은 듯 트랙터도 보이고 끝없는 농토에 해바라기 농원이 길게 보인다.
우리 열차는 맨 마지막 칸 이여서 뒤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고 승무원을 잘 사귀어서 편의를 제공해준다.
이곳은 물이 부족하여 나무들이 크지 않고 옆으로 퍼져있다.
예부터 유명했던 말들이 멀리 들판에 몰려다닌다.
중국의 한 무제가 세계 대국을 이루기 위한 정책으로 서역을 개척하기 위한 그 곳이다.
훌륭한 말들이 많아서 중국으로 보내졌던 그 말들이다.
14:47:모처럼 강물을 볼 수도 있다.
두 줄로 내려오던 강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길게 다리가 있고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서 부연 연기가 나고 제법 큰 비행기가 활주로가 땅인 곳으로 착륙한다.
이쪽은 땅이 척박한지 아니면 가꾸지 않은지 땅 그대로 황량하다.
16:51:모두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칸으로 모여 간단한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이윤선 교수의 우리 민족의 기원 및 이동 방향에 대해서 특히 아리랑이란 우리의 대표적 음률에 대한 기원 민족에게 길게 전파되는 등, 율리아나 님은 크림 반도에서 살 때 항상 행사 모임에는 꼭 아리랑을 노래하고 할아버지께서도 일본과 독립전쟁을 치룰 때도 아리랑을 부르고 애환을 달랬다고 한다.
율리아나 님은 한국의 광주 월곡동에서 4년 동안 살고 있으며 오랜 전부터 한국에 사는 것이 평생의 희망이었으며 우리말은 어색하지만 (왼쪽으로 공동묘지가 성터처럼 이어지고) 율리아나 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선교사 오 구탁 님은 비 호남인으로서 호남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객실로 돌아오니 온도가 매우 올라서 에어컨을 틀어주고 남으로 내려갈수록 더위를 느낀다.
20:18:계속 남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곳은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요충지이고 끝없는 초지에 건초더미가 쌓여있고 검은 색 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자주 보이고 어느 곳에는 기름 냄새가 역겹게 나며 마지막 열차 여행을 아쉬운 지 시원한지 웃음소리가 들리며 마지막 저녁을 보내고 어디선가 러시아 말들이 석여 나오며
8월29일 01:30분(22:30분): 마지막 열차 칸 뒷문을 열어주어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진다.
요즘 이렇게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것을 우리 일행들이 감탄하며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한 밤중은 별들이 쏟아진다.
역무원과 의형제를 맺었다며 형님 동생하며 친해지고 부여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조금 있으면 열차 여정도 끝이 나고 이주민들을 만나고 행사도 이루어진다.
03:40:
이제 약 한 시간 남기고 짐 정리를 하고 벼개잎 이불보 수건 등은 차장에게 반납하고 깜깜한 저녁 여기저기 부산하고, 여러 번 경험이 있어서 허둥대지 않고 질서 있게 챙기고 열차 여정을 정리하는 모습들이다.
앞에 있는 76세의 독일 출신 분과도 안녕을 고하고,
04:28:우슈토베 역에 도착하고 내리자마자 역내에 과일자판들이 즐비하고 거기서 사기도하고, 역시 담배피우는 사람 많고 이미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 숙소를 향해 1시간 정도 이동한다.
이 도시는 고려인들이 정착해서 성공한 몇 개 도시 중 한곳이며 이곳에는 지금도 많이 살고 있고, 꽃이 많은 집은 러시아인 집이고 풀이 많은 집은 카지흐스탄 들 집이고 텃밭이 있는 집은 고려인 집이라고 한다.
이곳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곳도 있고, 부정과 비리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역은 외딴 곳에 간이역으로 있다가 발전된 곳이어서 시내와 떨어져있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고 알마티에서는 담배를 제한한 곳이 많이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우리를 안내할 최 석 시인은 처음에는 돈버는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문화 사업을 한다고 하고 우리 통역 최 현상군의 아버지이다.
06:00:목적지 도착하고 3층으로 올라 방으로 들어서니 카페트가 깔려있고 고유의 향기인 듯 냄새가 나고 이곳은 카페트를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11:30분(08:30)까지 집합해야하고 씻고 나니 07:00 이니 기껏 3시간 정도 밖에 잘 수가 없다.
일정이 너무 타이트하여 몸 가누기가 힘들고 2-3시간 자고 11:00(08:00)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아침 햇살이 엄청 강렬하고 바람 없고 하늘은 맑으며 오늘은 온도가 엄청 오를 것만 같다.
12:00(09:00)분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바삐 움직여 겨우 차에 올라 출발 여러분이 행사 복장으로 갈아입고 오늘은 엄숙한 마음으로 중요한 날을 보내야한다.
거리에는 버드나무 같은 활엽수가 굵직굵직 크고 우리 젊은 학생 통역을 겸한 집행부 일원 중
차 성령 군과 최 현상 군이 교대로 코피를 쏟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느라 고단했던 모양이다.
우슈토베로 이동 고려인 최초 이주 정착지에 이어 고려인 묘지 추모식 가는 도중 우측으로 민둥산에 풀한 포기 나지 않은 황토 분지 산이 계속된다.
이곳은 알마티주의 수도이고 알마티는 특별시라 한다.
가는 길에 아스콘 공장인 듯 검은 연기를 내뿜고 목초지에 양떼들이 엄청 뛰놀고 하천에는 골재 체취가 한창이고 까마귀 같은 검은 새가 떼 지어 날고 있다.
말들이 많이 보이고 강은 길게 이어진다.
풍경이 숲으로 이어져도 멋지지만 끝없는 초원이 이어져도 아름다운 그림 그자체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적어 수로가 발달되어있고 물이 있는 곳은
늪이 있고 고려인이 까르딸강 유역으로 가장 먼저 수로를 계발하고 첫해에 풍년이 이루어 터전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1957년 이후는 국적취득과 이주를 허용하면서 고려인의 이주가 이루어져 젊은 층이 빠져나가 인구 공백기가 되어 우슈토베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거리에는 수양버들 소나무 살구나무 비슷한 나무들 스레트 지붕 들이 늘어서 있다.
전통시장이 아주 원시적이고 스카이라이프 식 전파수신기가 많고 고려인 묘지가 있는 곳을 가는데 운전자가 길을 두 번이나 잃어 약속된 시간을 많이 넘겨 기다리고 있던 차가 우리를 찾아 와서야 겨우 갈 수 있었다.
묘지 앞의 행사장에 기념탑과 비석에는“이곳은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10월 9일부터 1938년 4월10일 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는 서투른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한인 단장인 “브라드미르 조”가 이곳 이주정책들의 일반적인 사정을 설명하고 어떤 정책으로 해서 이곳까지 왔는지를 이제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죄스럽다.
도중에 곁에 있는 고려인 여인이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영하 40도의 강추위 속에 맨손으로 땅굴을 파고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 두더지 같이 연명하며 살았던 그들이 장군이 되고 학자가 되고 가수가 되어 살아간다.
고려인은 눈물을 싫어한다고 한다.
아리랑 제창이 이어지며 색안경 속으로 눈물이 고인다.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추모식”이 끝난다.
이 날을 위해 우리는 나무도 먼 길을 왔는데 그들은 10월이면 이미 추워지는 화물차에 죽으면 버려지고 이동 중에 노약자는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하면서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이곳에 안착하여 성공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조국이 한국이라는 것은 자랑으로 알고 살아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과연 동포로 인정하며 얼마나 편의를 주는지? 이제부터는 이들을 좀 더 애정을 갖고 보았으면 한다.
광주에만 40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묘지에는 1871년생인 조 응선 님 묘지 그 뒤로 여러분들의 묘지가 배치 되어있다.
약 3만 명이 이주하였으나 지금은 4000여명이 거주하고 이제 바슈토베 언덕의 묘역을 뒤로하고 식당으로 옮긴다.
김 에드바르드 이곳 시장님이 만찬에 참석하여 이곳 고려인으로 마음이 한결 가까워진다.
시장님의 환영인사와 단장님의 답사가 진행되며 이들은 박수를 좋아한다고 하며 감사의 금일봉과 선물을 전달하고 식사 중 고려인 2세이신 92세 노인께서 오시어 우리를 환영하고, 왜소하지만 강인해 보인다.
이제껏 러시아의 9일 동안 입에 맞는 음식으로 가장 많이 먹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전남일보 기자들은 기사를 송부하기 위해 손놀림이 빠르고 그들을 남기고 우리는 원동 마을로 간다.
원동마을은 현지인의 고려인 최초 정착지로 살아남은 이들이 고향(블라디보스토크)을 그리워 만든 마을 이름으로 행정구역이 아니고 상징적으로 만든 마을로, 학교에는 예전에는 고려인만 다닌 학교였으나 지금은 인구가 줄어 이곳 사람들도 같이 가르치는 학교로 지금은 방학이다.
17:50:이곳을 떠나 알마티로 향한다.
이 쪽의 특이한 것은 묘가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형태에 따라 빈부가 차별되고 고려인 묘지는 제법 형태를 갖춘 묘역이다.
알마티 까지는 약 5시간을 가야하고 버스는 절대로 과속을 하지 않고 길게 굽힘 없는 도로는 끝이 없고 왼쪽 오른쪽 모두 황량한 멀고 광대한 벌판이 이어지고 어딘지는 모르나 계획된 도시인 듯 높은 건물 신축현장이 보이고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앞으로 큰 산이 높게 올라있고 한번 올라가고 싶은 매혹적인 산이다.
협곡을 옆으로 두고 산과 산을 반 토막 내버린 도로는 아마도 터널을 뚫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20:00:언덕 위에 약간 후미진 곳에 화장실 좌우로 높은 황폐한 산들이 있고 달리는 옆으로 말들이 여기저기 노닐고 들판에 엄청난 호수가 보인다.
“카자프라다” 인공 호수라는데 1960년 완성되고 발전량, 카지노 도시로 해저에서 융기된 지역으로 잠간 쉬는 동안 주변에 함 초 같은 풀들이 지천이다.
비가 왔다 증발하면 백 꽃(소금 꽃)이 피어 있는 지역으로 길거리에는 카지노 건물이 즐비하고 희비가 엇갈리는 환락의 도시 점점 갈수록 늘어나는 카지노 건물들 과일 가게가 늘어져 있고 가끔씩 현대차가 보인다.
일본차와 독일차가 대부분이다.
갑자기 구름 속으로 보이는 산이 구름에 가리다 말다 햇빛에 반짝이며 앞으로 다가온다.
천산이다.
길게 높이 이어지는 천산산맥은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선이고 하늘을 닿을 듯 우뚝하게 하얀 만년설이 보이고, 또 하나의 고장차가 후진으로 밀고 간다.
시내가 가까워지면서 차들의 교행이 많고 교통체증 현상이 일고 지나는 시내버스에는 사람이 꽉 들어 차 있다.
열차에서 봤던 초승달이 반달이 되어있다.
전기로 움직이는 레일 없는 버스도 지나간다.
천산이 앞으로 우뚝 다가선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예향”이라는 식당 앞으로 도착하고 시내 한 복판에 우거진 나뭇가지 속에 왠 새들이 엄청나게 재잘되며 움직인다.
식당 주인은 광주 방림동 분으로 완벽하게 한국 맛 그대로의 저녁 식사이다.
불고기 생선 찜 배추김치 전 가지나물 배추 겉 저리 등 우리 동네 한식에 손색이 없는 음식이다.
노인분들이신 고려인들을 소개하고 북한의 아버지가 고위직이었던 분도 계신다.
정추 선생님과 독립투쟁을 같이 하셨던 유일한 생존자 이신 분도 계신다.
여기서 잠깐 정추 선생님을 알고 가자.
“광주 출신으로 차이코프스키 직계 4대 제자로 1961년 유리 가가린의 최초 유인 우주선 발사 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됐고 카자흐스탄 음악교과서에도 그가 작곡한 음악이 실렸고 구 소련 음악 사전에도 실렸다고 한다.
그는 23년의 일제와 남한 국민으로, 13년을 북한 인민으로 17년을 무국적자로 16년을 소련 공민으로 마지막은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살았으며 북한에서는 반 체재 인사, 남한에서는 월북인사로 낙인찍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오랜 망명기간에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1000편의 고려인의 노래를 발굴해 옮기는 작업을 했다고 하고 그의 음악은 한국인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았다고 한다.
2012년에는 광주 남구청을 방문하기도 하고 2013년 6월13일 13시 경에 향년 90세를 나이로 별세하셨다고 한다“.
이분의 음악세계를 제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 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운 내 조국 남한에 고향과 조상이 있는 동창생 친척들과 헤어져 역사의 소용돌이에 추운 도시로 떨어졌다.
6개월은 밤이고 6개월은 낮인 곳 무르만스크에 까지 쫓겨나서 지금은 여기에 있다는 김 종훈 님의 말씀에 가슴이 저며 온다.
이분도 공민권이 다섯 번(일본 남한 북한 소련 카자흐스탄) 바꿨으며 영화 촬영을 전문으로 했었다고 한다.
우리 동포가 러시아와 이곳 북방 쪽에는 50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때문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염원이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아마도 새로운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신분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며 한국에 있는 고려인부터 신분보장이 이루어지면 좋겠고, 더불어 러시아 등에 있는 많은 동포들 에게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국 통일을 위하여 서울 평양을 향상 걸었으면 한다” 고 건배사를 하셨다.
수석님께 건배사를 제안하자 조대 여학생에게 양보하고 이 분들에게 헌화가로 이윤선 교수의 호남 가를 불러드리고 아리랑을 부르니 동포들의 마음을 울린다.
강 태수( 20여 년 동안 유배생활과 가택연금 생활을 당하면서도 200여 편의 시, 단편 ,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한 소련의 대표적인 고려인 시인이자 작가로 1908년 8월26일 함경북도 이원군 출신으로 2001년1월5일 별세)시인의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은 어디에 있나 북한에도 없고 남한에도 없고 아리랑은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노래를 부르고 흥으로 페르시아 음악도 들려준다.
강 태수 시인은 아리랑을 만들고 10개월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어디가나 흥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겨하며 지금도 좀처럼 끝이 없이 노래가 이어진다.
최 석 시인의 농부가를 마지막으로 울려 퍼지면서 길지 않은 연회가 끝나간다.
“마지막 고향”의 봄으로 마친다.
고맙습니다. 살아주셔서 ......마치고
30일: 00:51(21::51)분 알마티의 카자흐스탄 호텔에 도착.
너무 많은 무리한 진행으로 피곤한 몸을 씻고 누우니 바로 취침.
09:00(06:00) 어제 사진들을 이것저것 둘러보고 삭제시키고 정리하니 10:00(07:00)가 지난다.
창으로 비추는 햇빛이 눈부시고 멀지만 가깝게 보이는 천산의 웅장한 거대한 모습이 바로 보인다.
역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고요한 좋은 날씨 이제 집으로 가야한다.
아침 식사시간에 만난 일행들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듯 얼굴들이 맑다.
마지막 호텔 로비에 슬금슬금 모이고 보드카는 상어 그려진 “벨루가”와 까마귀 그려진 것을 사라고 하고 전남일보 취재팀은 헤어지고 차 옆으로 수로에 물이 흐르는데 아마도 천산에서 오는 물줄기 인 듯하다.
고려극장(1932년 창설)은 연극을 공연하며 고려인의 자부심이 묻어있는 공연을 하는 곳이라고한다.
이곳의 고려인은 약 5만 명으로 고려극장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문이 닫혀 볼 수가 없다.
오늘이 이 나라의 명절이란다.
전통시장으로 찻길을 돌려 소매치기 조심하고 유별난 행동은 삼가기를 바란다.
이곳 돈 탱게로 환전하고 (1:35) 시장에 들러 꿀이 좋다고 500g에 1000탱게 차가버섯 1k에 2400 탱게, 석류 주스가 200탱게, 600탱게, 1200,탱게로 부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구경만하고 오디와 복 분자의 강제 배분으로 3개씩 먹는데 맛이 없이 독특하다.
서둘러 식당에 도착 하여 정 수석님이 제공하는 러시아 부페 식당으로 자리 잡고 처음부터 음식이 계속 나오니까 조금씩 천천히 먹으라고 하고 보드카에 고기로 음식이 계속 나온다.
술이 바꿔 약간 더 도수가 높아 맛이 다르고 음식은 계속 나오고 취기가 돌 때쯤 식당에서 나오며 진 불럭으로 이동한다.
천산의 곤돌라를 타기위해 차는 점점 깊이 산으로 들어 오르고 펜션 같은 건물들이 보이고 고도 1700여m를 올라가니 정류장이 위로 보이고 산악자전거가 오르고 있고 차는 요란하게 왕왕거리고 내리니 뜨겁고 따가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끔씩 노란 단풍이 보이고 힐끔 만년설이 우측으로 살짝 보인다.
이곳의 산의 모습이 우리 산의 300고지 정도로 한가롭고, 고지라고 생각할 수 없게 신흥사나 백무동 초입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곤돌라를 타고 오르며 일행 중 세 부부가 같이 오른다.
밑으로는 스케이트장과 펜션들이 보이고 자전거로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밑으로 배낭 메고 오르는 등산객이 보이고 산비탈에 비틀어 서 있는 나무들도 불끈 솟은 침엽수 같고 곳곳의 물줄기 있고 2000m 넘으면서 SAMSUNG의 심 볼이 크게 보이고 두 번째 곤돌라를 바꿔 타고 이제부터는 산 꼭 대기가 하얀 모래가 쌓여 밑에서 보면 백두산인 듯 보인다.
여기는 매우 높은 곳인데도 일반인들이 각자의 산행을 하는 듯 산 중턱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밑으로 야생화가 피어 있고 2700M 쯤에서 바꿔 타고 오르는 곳에 현대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고 등산객의 수는 줄었으나 오르는 사람 있고 이제 3200M쯤에서 곤돌라는 끝이다.
우측으로 만년설이 하얗게 쌓여있다.
공기가 폐부를 찌르니 오만가지 잡념이 빠져나가고 북동쪽으로 등산 코스가 있고 마치 두륜산 만일제의 모습으로 위는 가련 봉을 확대해 놓은 것 같다.
아내와 둘이서 밑으로 내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는데 술 때문인지 약간 머리가 어질하고 숨쉬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위에 봉우리를 오르려 한두 발 아래는 미끄러지는 흙이다.
조심스레 발을 옮기며 반쯤 오르다 내려오니 가슴이 뻥 뚫린다.
많은 사람들 각자 다른 말로 여기 저기 모여 사진 찍고 보이지 않은, 산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껏 폼을 내고 맥주 캔을 호루룩 마시고 사진을 찍는다.
곤돌라에로 오르려니 숨이 차다.
언제 또 기회 있을지 곤돌라 타지 않고 오르는 날이.
16:33:(13:33); 임산부도 찾아오고 유모차 까지 같이 오는 친밀한 산 이곳이 천산이로 구나.
극히 일부 맛만 보고 곤돌라는 오전 10:30분부터 오후 17:30:까지 운행한다.
그만 내리자.
내리는 길은 오르는 길과 느낌이 다름은 보였던 것이 안보이고 안보였던 것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차를 기다리는 동안 천산의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물맛을 보니 그저 그렇다.
선비 샘 물맛 같겠는가?
그러나 얼굴을 씻으니 시원하고 물 기운으로 피로가 풀린다.
흐르는 물 앞에서 두 여인이 물을 손으로 집어 삼킨다.
밑으로 늘어 선 나뭇잎은 노란 색깔로 물 드리고 여전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리며 저녁은 최 석 시인의 집에서 하기로 했으나 어제 이곳의 부정한 당국의 부당한 제제를 받아 그로 몸이 매우 좋지 않아 이미 최 석 시인과 현상 군은 집으로 갔다.
이 곳은 부정과 비리가 아주 많은 곳이라고 한다.
어제 갔던 “예향”으로 가기로 하고 시간이 많이 남아 공원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이제 곳 긴 여정의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많이 남아 이러저러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31일 24:00(21:00) 알마티 공항으로 출발한다.
이곳에서 공항 까지는 30분정도 가는 거리라고 한다.
일찍 도착하여 빨리 수속을 마치고 출발시간이 04:05분(01:05) 이어서 넉넉한 시간으로 보드카 몇 병을 사고 맥주로 잡담을 나누고 인천 까지는 5시간 거리를 탑승하여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08:50분 멘트가 이어지고 무사히 착륙 10:26:모든 수속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교장선생님 내외분이 안 보인다.
여권을 기내에서 빠뜨린 듯 약간 가십거리를 남기고 돌아온 우리나라는 역시 흐리고 가을은 아닌 듯 여름은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다.
11:20:여기에 거주하는 최창호님과 이홍주군은 보내고 출발한다.
오랜만에 바다 위를 질주하며 우리 바다를 본다.
그렇게 넓은 영토를 갖고도 천연자원에 의지하는 저들보다 영토는 적어도 조그만 것에서 큰 것을 만들어 내는 우리민족의 역동성을 감동적으로 깨닫고 새별양은 이서 휴게소에서 보내고 16:50:운암동 도착 여러분이 이곳에서 내리고 우리는 광주시청에서 모두와 이별하고
17:55분: 집에 도착 모든 일정을 마친다.
참가인원: 박용수단장 정찬용고문 오구탁 문태환의원 권정희 KIM ULIANA 이연수 엄미현
임효진 우명석 김갑수 나선희 김재훈 김경숙 전연수 정영희 이윤선 최창호 블라디미르 죠
이용규 노병하 배현태 강지원 이홍주 박천휘 이경찬 이경섭 김명은 김현미 최윤희 정종진
이세기 김지수 박성인 김수연 김진아 김기령 최종하 추민하 최현상 차성령 김새별 이외 블라디보스토크의 김동익 선교사님과 사모님 영사님과 최 석 시인의 호의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