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먹통아
매월 17일은 교육공무원 급여일이다. 군인은 이보다 앞선 10일인 것으로 안다.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는 사람은 국민의 머슴이다. 국가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나라살림을 운용한다. 교단에 선 이후 월급은 한동안 현금으로 받았다. 이후 시대 변천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현금 수령이 아닌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경제관념이 무뎌 내가 몇 호봉인지, 월 수령액이나 연봉에 대해 관심이 없다.
총각시절 재형저축이 있긴 해도 월급을 어디에다 어떻게 썼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결혼 후는 집사람이 집안 살림을 맡아 살았으니, 내 이름으로 통장이 개설되어도 입출금이나 잔고 내역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내핍을 하긴 해도 우리 형편에 그리 넉넉한 구석이 없었을 것이라는 헤아림이다. 이러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이 해는 서산으로 걸쳤다.
내 수입이 빤한 처지에 집사람 몰래 딴 주머니는 생각도 못하고 산다. 정액 급여 말고 보충수업 지도 수당이 몇 푼 있다만 이것조차 급여계좌로 몽땅 쓸어 담기에 비자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일주일이나 열흘 간격으로 집사람한데 몇 만원씩 타 쓰는 용돈으로 버스 교통카드를 먼저 채워 놓는다. 어쩌다 예상하지 못한 경조사비가 나갈 때면 가끔 찾는 막걸리도 꾹 참고 굶어야한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은행 창구까지 가지 않고도 금융거래를 척척 해결한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뱅킹으로 해결하고 집안에서 텔레뱅킹으로도 해결한다. 이러면 은행 창구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고 시간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 하다못해 은행 자동화코너에서도 간단한 조작으로 몇 가지 금융거래는 가능한 것으로 안다. 나한테는 이 모두가 그림 속의 떡이다.
금융 거래를 은행 창구서만 해결해야 하는 나는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다. 인터넷뱅킹이나 텔레뱅킹은 생각조차 못하는 처지다. 은행 자동화코너에도 여러 기능이 있다만, 단 두 가지 기능은 사용할 줄 안다. 카드를 넣고 현금을 뽑는 일과 통장을 넣은 다음 정리하는 두 가지는 할 줄 안다. 나머지는 무슨 기능이 있고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거나 알려하지 않았다.
고3은 먼저 개학하고 1·2학년은 다음 주초 개학을 앞둔 팔월 중순이었다. 아침나절 출근해 수업을 두 시간 끝내고 집으로 왔다. 점심 식후 베란다를 정리하고 농협지점 창구로 가서 후불제가 가능한 교통카드 발급을 신청했다. 창구에서 일을 보고 자동화코너에서 볼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집사람이 급여 통장을 안겨주며 통장정리를 해 보고 오라고 했다. 마침 월급이 나온 날이었다.
은행 자동화코너에서 내가 할 줄 아는 단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통장정리다. 통장을 펼쳐 자동화기기 틈새에 끼우니 몇 차례 쪼르륵 쪼르륵 하더니 뚜껑이 열리면서 통장이 튀어 나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통장을 꺼내 집으로 돌아와 집사람한테 통장을 건네주었다. 집사람은 통장을 펼쳐 한동안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했다. 뭔가 통장정리가 바로 안 된 느낌이 들었다.
자동으로 계자이체가 되는 아파트관리비를 비롯한 몇 건이 빠져 가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급이 입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업무를 보는 사람이 조금 늦게 입출금 시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마음 걸려 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집사람은 통장을 앞뒤로 요모조모 살펴보더니만 정색을 하고 나를 질책하는 것이렷다. 통장정리도 못하는 남정네를 믿고 살아야 한다나.
통장 맨 뒤 양면은 아직 빈칸인 상태였다. 그 바로 앞장 맨 아랫단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한 장 더 넘겨 맨 뒷장을 펴 넣었더니 앞장에 채울 마지막 한 줄만 읽고 작업은 종료되어 버렸다. 아랫단 한 줄이 비었으면 그 면을 펼쳐 끼워주어야 했는데 그 다음 장을 읽으라고 했으니 통장정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기계는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했는데 내가 무식한 탓이렷다. 어휴, 먹통아. 1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