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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갑옷과 투구가 나왔다 하여 이름 붙혀진 마갑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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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차창 밖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다. 뻐꾸기 소리를 희롱이라도 하려는 듯 간혹 꾀꼬리 소리도 들린다. 얕은 주름을 또르르 말고 있는 무논에 슬며시 내려앉은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두둥실 피어오르고 있다. 부지런한 농민의 삽날에 의해 잘 다듬어진 논배미 곳곳에는 빠알간 뱀딸기가 턱을 치켜든다.
저만치 오랜만에 보는 백로 서너 마리가 무논에 담긴 뭉게구름을 동그랗게 밀어내며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먹고 있다. 백로의 긴 목을 타고 꾸울꺽 삼켜지고 있는 저것은 아마도 개구리가 되기 위해 꼬리가 마악 짧아지고 있는 올챙이일 것이다. 먹고 먹히는 세상. 그래.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면 어차피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지 않겠는가.
"삼국에 비해 철기나 토기의 생산력이 결코 뒤지지 않았던 가야국이 멸망하게 된 것도 소국연맹체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알기로는 김수로왕이 여러 자식들한테 일정한 지역을 나눠주면서 통치권까지 내 준 걸로 알고 있거든."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야국의 중심국가이던 금관가야가 소국들에게 그렇게 자치권을 내 준 것이 더 민주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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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갑총은 아라가야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대변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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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산과 들이 푸르게 푸르게 자라는 오월, 나의 여행 길라잡이 김호부 선생과 함께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아라가야(안라국)가 있었던 함안으로 간다. 아라가야는 가야국의 뿌리이자 6가야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뒤 고성의 대가야와 더불어 후기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을 쥔 나라였다.
아라가야는 통치지역만으로 보면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대등한 외교관계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철 제련능력과 토기 생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함안군청 뒤에 볼록볼록 솟아나 있는 도항 말산리 고분군과 그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마갑총도 당시 신문배달을 하던 소년이 흙더미 속에 묻힌 철편들을 바라보고 무심코 지나쳤더라면 그대로 사라질 뻔했지." "그렇다면 이곳에 마갑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신축 아파트 공사를 시작했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것도 아파트 뼈대는 다 들어선 상태에서 배수관 설치작업을 하던 도중에 그 사실이 확인되었지. 그때도 이 무덤의 뒷부분과 말갑옷 한쪽 부분은 포클레인의 삽날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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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입구에 드러누워 있는 마갑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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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함안군 도항리 103-4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는 마갑총은 함안 네거리에서 함안군청 쪽으로 100m쯤 가다보면 진주선 철로 옆에 우뚝 선 해동아파트 입구에 드러누워 있다. 언뜻 보면 아파트에 달린 작은 놀이터처럼 보이는 마갑총은 5세기 초 아라가야가 안정된 사회기반과 강력한 무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하긴, 가야연맹체는 이미 1세기부터 철기를 기반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당시 가야연맹체의 철 제련능력과 토기 생산기술은 일본보다 무려 500여 년이나 앞섰다고 한다. 그랬으니 이곳 마갑총에서 말의 갑옷과 투구가 출토된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마갑총은 대형 나무곽무덤(목곽묘 木槨墓)으로 피장자와 함께 말의 갑옷과 투구가 출토되었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1992년 발굴조사 결과 나무곽의 길이는 6m, 너비 2m30㎝, 깊이 1m 규모였으며, 말갑옷의 크기는 총길이 2m26㎝~2m30㎝, 너비 43~48㎝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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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갑총은 1992년 아파트 배관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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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4세기 말엽에서 5세기 초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갑총은 나무곽 가운데 시신을 눕히고 오른쪽 가슴부위에 길이 83㎝의 금판을 장식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이 놓여 있었단다. 그리고 그 양 곁으로 마갑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으며, 철제 재갈, 철낫 등 금속유물과 함께 목긴 항아리 등 여러 가지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간혹 말갑옷이 출토되기도 했으나 그 예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말갑옷들은 함안의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갑옷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갖춘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발굴현장에 있었던 고고학자 조유전씨는 <경향신문>(2003년 12월 8일자)에 "이 무덤의 주인공은 최소한 수장급(首長級)으로 추정된다" 면서 "AD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 때 수입된 게 아니냐는 분석을 할 수도 있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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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반듯한 길이 나 있는 마갑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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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지금 마갑총은 빼곡한 고층아파트 입구에 조그마한 안내표지석을 자동차 번호판처럼 매달고 드러누워 있다. 아니, 어찌보면 마갑총은 아파트 입구에 줄줄이 주차되어 있는 여러 대의 자동차처럼 이곳에 잠시 주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네모 반듯한 마갑총 한가운데에도 반듯한 길이 나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갑총 위를 걸어다녔으면 저리도 반듯한 길이 났을까. 그래. 어쩌면 이 아파트에서 사는 호기심 많은 꼬마들이 지금도 철망을 넘어 마갑총 위를 마구 뛰어다니며 술레잡기를 하며 노는지도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