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運)
26년만이다. 처음에는 그의 뇌혈관에 생긴 꽈리(동맥류)가 터져서, 이번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와 내가 만났다. 과거에는 그를 수술해서 소생시킬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힘들 것 같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운인데.
다섯이 가기로 약속했었단다. 한분은 주소지를 촌으로 옮겨 그곳으로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서 참가하지 못했고, 두 분은 아침 일찍 보건소에 가서 주사를 맞고 참가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운전하고 한명은 조수석에, 두 명은 뒷좌석에 앉았다고 했다.
산행을 가던 중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힘든 산 오르기를 포기하고 동해바다 횟집으로 차를 몰았다고 했다. 가는 길은 단풍이 한참이어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무엇에 ‘꽝’ 부딪치고 그리고 운이 갈렸다고 했다. 운전자는 약간 찰과상을 입었고, 조수석 탑승자는 사망했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환자는 혼수상태로 되었고, 환자 옆자리 탑승자는 멀쩡했다고 한다.
‘예방주사를 맞고 무리하게 산행을 하느냐’고 말리는 부인의 말을 환자가 들었었다면, 횟집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고 처음 계획대로 산행하는 쪽으로 차를 몰았었다면, 환자가 옆자리 분과 자리를 서로 바꾸어 앉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의사 생활을 하다보면 잘 치료된 많은 환자에 대한 기억은 금방 잊는다. 그러나 결과가 나빴던 소수의 환자들에 대한 기억은 평생 가슴속에 품는다.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수술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치료 했었더라면, 장애인으로 살아가도록 살린 것보다는 차라리 사망하도록 수술하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회한이 남고, ‘수술을 승낙하지 않아서, 수술을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치료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치료하다가 환자가 사망하면, ‘왜 그때 수술을 강력하게 권유해서, 왜 그때 과감하게 수술을 결정해서 치료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
낙엽이 지고 있다. 어떤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고 어떤 나뭇잎은 아직 나뭇가지에 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무영의 단편 ‘제 일과 제 일장’, 법정 스님의 수필 ‘거꾸로 보기’에서처럼 가랑이 속에 머리를 처박고 거꾸로 보니 낙엽은 지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훌훌 털고 아름다운 몸을 휘두르며 태생의 기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운전자 옆의 사망한 분은 이미 승천한 몸이며, 환자는 승천을 준비하는 흔들리는 낙엽이며, 화를 면한 세 분들도 언젠가는 결국 떨어지는 낙엽이 될 것이다. 어찌 죽고 삶이 인위적으로 조절되겠는가? 어찌 환자가 치유되었다고 하여 의사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겠는가?
신경외과를 하려고 하는 이유
며칠 전에 신경외과수련의 선발시험이 있었다. 경쟁이 치열해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쳤다. 교수가 지원자와 면접을 해서 점수를 주는 과정이 있었다. 이 점수는 전체 선발 시험의 점수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수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순간에는 지대한 역할을 할 점수였다. 면접에서 모든 지원자들한테 꼭 물었던 질문이 하나 있다. “왜 신경외과를 지원하여 신경외과 의사가 되려고 하느냐?” 이었다. 다양한 대답이 있었다. 한 지원자의 대답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제가 인턴을 하면서 신경외과를 돌던 중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는 많은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을 왜 치료하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모두가 금방 돌아가실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식물인간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하나, 둘, 의식이 돌아오고 회복해서 중환자실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깨달았어요. 저 나무토막처럼 무의식상태로 누워 있는 그들의 몸속에도 희망의 싹이 숨어있는 것을. 불쑥 그 희망의 싹을 찾아내서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경외과를 지원했습니다.”
그래, 신경외과 의사들은 그런 조그만 희망에 매달려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간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누워있던 환자가 어깨를 꼬집었을 때 얼굴이라도 찡그리면 우리들은 기쁨으로 몸이 풍 뜨는 듯한 느낌을 얻는다. 문득 환자가 스스로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발견이라도 하면 그 환자가 틀림없이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힘이 불끈 솟기도 한다.
그래, 신경외과 중환자실은 분명히 희망이라는 단어가 부족한 공간이다. 부족하다고해서 희망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다. 아무리 희망의 새싹들이 연약하다 하더라도 우리 신경외과 의사들은 그것들을 키우려고 밤잠을 설치고 고민을 하는 그런 곳이다. 솔제니친 이 쓴 ‘암병동’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암병동에서 살아나오면서 “아흔아홉 사람이 울고, 한 사람이 웃는 곳에서 왔다”라고 외치듯이, 신경외과 환자들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나오면서 “아흔아홉 희망의 싹이 말라죽고 하나의 싹만 살아나는 그런 곳에서 살아왔다”라고 외칠 수도 있는 그런 곳인 것이다.
그 지원자는 아마 합격하여 앞으로 힘든 신경외과 수련의 과정을 겪어나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지원자한테 진심으로 꼭 부탁할 말이 하나 있다. 신경외과 의사의 업을 놓는 그날까지 신경외과를 지원하면서 한 말을 잊지 말라고. 버려진 나무토막에도 맛있는 버섯이 솟아 나오도록 하는 포자(胞子)가 숨어 있듯이, 나무토막같이 혼수에 빠져 누워있는 그들한테도 희망이라는 포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수술실 의자
내 수술실에는 내가 앉아서 수술하는 의자가 있다. 수술현미경을 가지고 수술할 때 사용하는 의자다. 20여 년 전에, 그때로써는 거금인 이백만원을 주고 샀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마련해준 것이다. 비싼 의자라 하여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은 것은 아니다. 수술할 때 손이 움직이지 않도록 팔을 얻을 수 있는 팔걸이가 양측에 있고, 수술현미경의 조작으로 내 몸의 높낮이를 바꿀 필요가 있으면 지렛대 같은 것을 발로 밟아 의자의 높낮이를 변하게 하는 그런 의자다.
이 의자에 앉아 많은 환자들을 수술했다. 장시간 수술함으로써 궁둥이가 아파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몸통을 들었다 놓았다 한 적도 많다. 그때마다 의자도 약간은 지겨운 듯 조금씩 움직이고 삐거덕거린 적도 있지만, 대체로 지금까지 큰 불평 없이 내 몸의 하중을 잘 견디어내 주었다. 생명을 구하는 모습도, 유명을 달리하는 환자들도 보았겠지만, 한번도 수술실 안의 환희와 슬픔에 대한 것을 말한 적도 없다. 오직 자기 등을 내밀어 내 궁둥이의 하중만 말없이 견디며 살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평생 살다가 다리가 부러져 혹은 등이 터져 사라질 것이다.
문득 의자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높은 신분을 나타내고자 ‘의자’를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태생의 기원이 신분의 높이를 나타내려고 생겨난 몸이라고 하지만, 또한 내 의자는 비싼 가격으로 수술실로 팔려 온 몸이지만, 한번도 남의 등을 오르지 못하고 내 가볍지 않은 체중을 묵묵히 평생 지고 오고 있는 것이다. 명예와 부와 영광을 모두 나한테 넘긴 채 말없이 등을 굽혀 삶의 하중을 견디며 불평도 아픔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이렇게 묵묵히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어찌 이 세상에 수술실 의자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으랴. 한번도 남의 등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 남의 부와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등을 굽혀 삶의 하중을 지고 견디며 살아오다가, 어느 날 문득 등이 아프고 무릎이 저리다 하고 울먹이고는, 마침내 등을 꺾고 무릎을 꿇는 이웃이 없으랴. 그렇지만 그들은 안다. 평생 자기 등을 타고 살아왔던 사람들도 자기들과 똑같이 자기 등을 굽혀 지고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도 나이가 들면 자기들과 똑같이 어깨가 처지고 허리가 굽고 그리고 그런 곳들이 쑤시고 아프다고 호소한다는 것을. 앉았다 일어서면 없어지는 것이 자리이고, 쥐었다 놓으면 껍데기만 남고 사라지는 것이 명예와 부와 영광이라는 것을, 내 수술실 의자 같은 사람들은 알고, 그래서 그들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말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음 조각(彫刻)과 마른 꽃
그렇게 시작했다. 환자들 몸에 부착된 감시 장치들에서, CT나 MRI에서, 수술중인 마취기계에서 이상 작동이 일어나 환자한테 치명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고 손에 땀을 쥐고 2000년을 시작했었다. ‘밀레미엄 버그’라는 단어 하나로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쪽으로 초침이 옮겨가는 순간, 우리 의사들은 두 손에 땀을 쥐고 초침을 보고 분침을 보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2천년이 2010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10년이 흐른 것이다. 뒤돌아 그 10년이라는 통 안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깨끗하다. 백지다. 머릿속은 진공 같다. 참으로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그 동안 무엇인가 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간을 뒤돌아보는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기억되는 것이 없다. 결국 나는 그 10년 동안에 무엇을 했단 말인가?
얼음 조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앞발을 높이 쳐들고 산등성이를 향해 미친 듯 힘차게 달려가는 말의 상을, 말의 머리 쪽으로는 내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를 닮은 아름다운 별들을, 하늘 저쪽 끝에는 다 다른 부모님의 손톱 같은 그믐달을 새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문득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 사라진 것이다. 녹아내린 얼음 조각 같이.
그렇다. 이제 앞으로 다가 올 10년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화려하고 싱싱한 꽃을 피우려는 젊은 꽃이 아니라 늙고 시들어가는 마른 꽃이 되려고 한다. 허브 농원에서 보았던, 곱게 마른 몸으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런 마른 꽃말이다. 문경 새재 박물관에서 보았던, 조선 중기부터 500여년을 버티면서 몸을 줄여왔던 미라처럼, 몸에서 기름을 빼고 물기를 빼고 근육의 무게를 줄이려고 한다. 은퇴로 야기되는, 뿌리 잃은 갈증도 참고 굶주린 배도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거꾸로 매달려있는 것과 같은 고통도 견뎌내면서, 바싹 마른 몸으로 청초함을 유지하는 그런 마른 꽃이 되려고 한다.
첫댓글 ?신문 모? 주재(아신 듯 싶어서) 기자가 그러더군요. 교수님에 글을(의창)을 읽으면 가끔 눈이 토끼처럼 벌개(충혈)? 진다구요. 토론회 작품 글도 잘,보았습니다. 건강하신 것 같아 좋아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