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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왜 싸우는가? 16~21장
16장. 팔라비 왕정, 무너지다 : 이란의 이슬람혁명
1979년 1월 무함마드 레자 샤는 이란을 떠났다. 팔라비 왕정이 무너졌고 이란혁명은 성공했다. 이란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민중혁명이었다.
(시아파 위계조직의 발달) 통치자의 권위를 존종하는 수니파 울라마들과는 달리 시아파 종교지도자들은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김. <꾸란>과 <하디스>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종교적 유권해석 할수 있는 권위를 부여한 이를 법학자(무즈타히드)라고 함. 시아파 법학자 서열 : 호자톨레스람(이슬람의 증거)<아야톨라(신의 가호)<아야톨라 우즈마, 마르자에 따끌리드(모방의 원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철권통치와 이란의 근대화) 무함마드 레쟈 샤는 미국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도움을 받아 비밀경찰 사바크를 창설해 반대세력을 억압. 1963년 ‘백색혁명’이라 불리는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 발표(토지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여성 참정권 허용, 문맹 퇴치) 1인 GNP 1963년 200달러에서 1979년 2,000달러 상승.
그러나 아주 적은 농지배분에 분노한 서민과 경제성장의 과실이 집중된 부유층에 대한 불만 등으로 반정부 시위 확대. 1970년대 초반 반정부 운동의 중심은 마르크스주의 세력 또는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혼합한 저항단체들임.
(호메이니의 반정부 활동과 탄압) 1963년 반정부 메시지 설교 “샤 왕정은 부패했다. 그들은 가난을 구제하라는 <꾸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의 이교도들과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호메이니 체포에 시위 규모가 커지자 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해산시킴. 이에 저항하던 수백명의 시위참가자가 사망함. 1964년 호메이니 국외 추방. 호메이니는 터키와 이라크를 거쳐 1978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지를 옮겨다니며 반정부 운동의 중심인물이 됨. 호메이니가 생각하는 반정부 투쟁의 전선은 ‘반민주 대 민주’가 아니라 ‘세속왕정 대 이슬람 신권정치’였다.
(이란혁명) 1977년 미국의 카터 행정부 출범에 따른 인권 개선 요구로 샤 왕정은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발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적 요구들 분출. 이런 사회적 요구를 일부 수용해 헌법을 되살리고 의회정치를 열었다면 이후 이슬람혁명으로 번진 파국을 막았을 수도. 1978년 1월 호메이니를 비난하는 보수 성향 일간지 사설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시위대 중 20명 이상이 경찰에 쏜 총에 사망함. 아슈라 당일인 12월 11일 테헤란에서 100만명이 시위. 군부도 샤를 거부하고 미국의 카터대통령도 샤의 하야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전달.
이란혁명 성공후 혼란한 사회 수습을 위해 이란 국민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인 호메이니를 원함. 호메이니는 환영하기 위해 모인 군중은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을 외치고 일부 군중은 시아파에서 12번째 이맘이후 그 누구도 이맘의 칭호를 받지 못했음에도 ‘호메이니, 오 이맘이시여’라로 연호함.
(구체제 청산과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 혁명위원회는 팔라비 왕정의 간부들을 체포해 혁명재판을 통해 처형함. 혁명위원회는 각 지역의 이슬람법학자들을 지역책임자로 임명함. 이란 북서부의 쿠르드족은 이란혁명을 분리독립의 기회로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란 정부군에 의해 즉시 진압됨. 호메이니는 정규군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친혁명 군대인 혁명수비대(이란어로 파스다란)를 만듦. 1979년까지 약 60%의 정규군 병력이 축출됨. 이는 훗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중 하나가 됨.
외형적으로 혁명헌법은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 지방자치 등 민주공화정의 형태를 나타냄. 그러나 이제도들은 12명의 성직자와 재판관으로 구성된 혁명수호평의회의 통제을 받고 이란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혁명수호평의회 구성원의 절반인 6명을 임명한 권한을 가지며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을 승인하고 혁명수비대 대장 및 기타 군사조직의 수장을 임명할 권한도 가짐. 사실상 공화정 위에 새로운 샤가 군림하는 셈. 다만 새로운 샤는 세속주의 원리가 아니라 이슬람의 원리로 통치하며 세습하지 않는다는 것이 차이점.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이슬람주의 운동이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이끔. 1979년 사우디아라비에서 대모스크 점거 사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이슬람주의 전사들의 참전 등에 영향을 줌.
17장. 승자 없는 8년 전쟁 : 이란 이라크 전쟁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 호메이니와 사담 후세인 모두 야망이 꺾이고 말았다. 혁명을 수출하려든 호메이니의 야심은 그의 체면이 구겨지면서 막히고 사담 후세인 역시 아랍권 리더가 되겠다는 포부를 접어야 했다. 8년 동안의 전쟁은 이라크를 전 아랍권에서 가장 황폐한 국가로 만들었다.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분쟁) 이란 이라크 전쟁은 시아파 이란과 수니파 이라크 간의 전쟁이자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간의 오랜 역사적 투쟁의 일부. 이슬람혁명을 통해 신정국가 체제를 이룬 이란과 세속주의 국가인 이라크의 충돌이기도 함.
1937년 영국에 의해 이라크와 이란 간의 국경이 정해짐. 이라크 영토에 편입된 남부 지역 국경인 샤트알아랍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해 페르시아 만을 향해 흐르는 강으로 석유 수송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 1969년 이란의 샤는 1937년 국경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란 선박이 샤트알아랍을 통해 이동하도록 조치함. 1968년부터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족 간의 격렬한 유혈분쟁이 진행. 자국내 쿠르드족의 독립요구로 받고 있음에도 이란의 팔라비 왕정은 이라크 내의 쿠르드 족을 지원. 1975년 알제협정 : 샤트알아랍 강의 중간선을 양국의 국경으로 인정하는 대신 이란의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지원 중단.
(전쟁 전 이라크 상황) 오스만 제국 해체 후 영국은 인구가 적은 수니파인 하심 가문의 파이잘을 국왕으로 삼아 이라크를 건국. 영국이 인위적으로 정한 이라크 국경 내에는 남부지역은 시아파, 북부는 쿠르드족, 중부지역에는 수니파가 거주하여 언어, 인종, 종교가 다른 부족들이 섞임. 1933년 파이잘 국왕 서거 후 내전 상태에 빠짐. 1958년 군부 쿠데타로 이라크 왕정 몰락. 혼란스런 정국을 장악한 세력은 사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바트당. 바트당을 이끄는 핵심세력들은 티크리트 출신들이고 새로운 최고통치자가 된 알 바크르와 바트당의 행동대장으로 제2인자인 사담 후세인의 고향. (후세인은 2006년 미국에 체포된 후 반인권행위와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함)
1979년 알 바크르 대통령 사후 후세인이 대통령에 취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 이후 이어져온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 자리를 얻기 위해 이슬람혁명 이후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이란을 주시함.
(전쟁 전 이란의 상황) 혁명을 일으켜 팔라비 왕정을 몰아낸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권력자가 됨. 1979년 11월 이집트에 망명해 있던 레자 팔라비 샤가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 일부 대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외교관을 인질로 잡음. 호메이니가 이 사태를 지지. 그는 이 사태를 이용해 혁명 열기를 지속시키고 반대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함. 인질은 1981년 1월 석방했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심각해짐.
지나친 군부 숙청으로 혁명전 28만명이 넘었던 이란의 정규군이 이란 이라크 전쟁 발발 전 10만명 수준으로. 시아파가 주도한 이란혁명에 자극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등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한 국가에서 시아파들의 시위 발생. 특히 시아파가 거의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이라크의 경우 상황이 더욱 심각. 1980년 4월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군과 인민들을 대상으로 바트당 정권을 타도하라는 메시지를 내놓음.
(이라크의 침공) 1980년 9월 이라크 정부는 ‘1975년의 알제협정은 무효이며 샤트알아랍은 이라크의 영토’라고 선언. 이라크의 선제공격에도 이란의 주력부대는 쿠르드족 소요사태 진압에 동원. 남부전선에는 혁명수비대 투입. 1981년 9월 이란의 정규군과 혁명수비대는 이라크군을 격퇴. 1982년 5월 이란 영토에서 철수.
(이란의 반격) 호메이니는 전쟁을 국내 반대파 숙청의 기회로 이용. 이라크와의 휴전협정에 대한 호메이니의 요구 1.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이 물러날 것 2.전쟁 배상금 1,000억달러 지급 3.알제협정에 의거한 국경 인정 4.사담이 추방했던 10만명의 시아파 난민들의 귀환 보장 5.이 전쟁이 이라크의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 1982년 7월 이란 정부는 ‘이라크 내의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를 점령하기 위해 이라크 영토로 진격할 것’이라고 선언. 이란에서 카르발라로 가는 길은 이라크의 유전지대인 바스라를 통과.
미국 대사관 점거사태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란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무기 수입 루트가 막힘. 반면 이라크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무기를 대폭 사들임. 병력은 우세했으나 무장상태가 열세인 이란군은 혁명수비대는 물론 종교적 열정에 고취된 12~18세 소년들이 중심인 바시즈 민병대까지 동원. 바시즈 민병대와 혁명수비대를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광신. 훗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 국가’ IS(Islamic State)가 젊은이들을 자살 폭탄테러로 내몰며 종교적 순교의 이미지를 동원한 것과 유사한 행태가 이미 30여년전 이란에서 등장함.
사담 후세인은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기 함. 이라크의 화학무기 공격은 이란인들의 복수심을 더욱 자극했으며 이로 인해 양측이 타협할 여지가 줄어듬.
(휴전 그리고 그후) 전세는 서서히 이란에 불리해져 1988년 4월 바스라 인근에서 이란군은 이라크군에게 궤멸 수준을 타격을 입음. 1988년 7월 이란군은 이라크 영토에서 철수. 1988년 8월 20일 휴전. 전쟁 시작후 8년만.
호메이니로서는 굴욕적인 상황. 이란은 8년 전쟁동안 사망자 45~73만명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은 약 690억달러. 이라크의 사망자는 15~34만명. 1,590억달러의 경제적 피해. 사담 후세인은 이런 상황을 단기간에 만회하고자 휴전 후 3년 뒤 또 다시 쿠웨이트를 침공함. 이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들이 걸프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됨. 이라크는 휴전 후 쿠르드족에 대한 집요한 복수를 함. 1989년 1월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과 화학무기 공격으로 무려 15~20만 명에 이르는 쿠르드인이 사망함.
18장. 팔레스타인의 저항 : 인티파다
(점령)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가들과 치른 ‘6일 전쟁’의 승리로 넓은 영토를 갖게 됨.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웨스트뱅크(요르단 강 서안),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을 추가로 얻음. 전쟁전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는 이집트,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은 요르단, 골란고원은 시리아의 땅이었음.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통해 ‘6일 전쟁’ 패배로 추락한 이집트의 위신을 어느정도 회복하고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음. 그러나 유엔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분할해준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의 경우 이스라엘은 ‘소유주 부재 토지법’을 제정해 주인이 돌아오지 못하여 비어있는 토지 소유권을 유대인들에게 넘기는 정책을 시행함.
요르단에서 1970년 체제 전복을 시도한 ‘검은 9월 사건’(이집트 카이로 소재 호텔에서 요르단 총리가 암살당한 사건. 이들은 2년후인 독일 뮈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테러함)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연루되자 요르단 국왕은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일체의 지원들 중단하는 등 아랍국가들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함. 서서히 팔레스타인 해방은 팔레스타인들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입어 무장투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무장조직 ‘파타’를 조직함. 1964년 아랍 정상들은 카이로에 모여 이스라엘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칠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함.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는 PLO의 핵심정당.
(점령지의 현실) 이스라엘 정부는 점령지를 실질적으로 개발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음. 1980년대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50~60%에 달함. 운 좋게 취업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로 이스라엘에서 ‘3D업종’에 종사.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하거나 기존 노조에 가입하는 일 모두 법적으로 금지. 1980년 중반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서 매일 10건 이상의 폭력시위 발생.
(인피파다의 시작) 인피파다infifada는 아랍어로 반란, 봉기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 이스라엘 저항운동을 의미. 1987년 12월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로 넘어가는 검문소에서 이스라엘의 탱크를 운반하던 차량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를 들이받아 4명의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사망. 희생자 장례식이 거친 시위로 발전하고 17세 소년이 이스라엘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짐. 튀니스에 망명해 있던 아라파트 PLO 의장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이스라엘의 공격’이라는 성명서 발표로 1차 인피파다 시작. 초기 인피파다의 목적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요구였을 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과 같은 정치적 목적은 뚜렷하지 않음.
(저항 운동의 발전)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단체들의 영향력이 큰 반면, 가자지구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저항을 주도함. 훗날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중심세력이 된 하마스도 가자지구에서 성장. 웨스트뱅크의 ‘전국봉기지도부연합UNLU’의 요구사항 1.점령지에서 이스라엘군 철수 2.계엄령 해제 3.유대인 정착촌 건설 중단 4.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서 민주적 선거를 치르도록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
인피파다가 진행되면서 가자지구에선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지부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인 하마스가 급성장. PLO가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조직이라면 하마스는 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운동 조직. 1970년대 이후 PLO가 저항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자 이를 약화시키고자 이스라엘 정부는 전략적으로 이슬람주의 세력을 지원.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전기와 통신선을 끊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수가 25% 이상 줄어듬. 이츠하크 라빈 국방장관은 초강경 진압정책을 실시. 일명 ‘뼈 부러뜨리기’ 정책으로 시위 해산을 목표로 삼지 않고 진압봉으로 시위 가담자를 직접 가격해 부상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음.
인피파다 발생 후 18개월 동안 체포된 팔레스타인 사람은 5만명.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은 정치학교로 수감을 통해 시위가 줄어드는게 아니라 저항운동이 더욱 정교화되고 이념화됨. 인피파다 후 1년동안 모두 311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사망하고 526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이 철거됨
(저항의 결과) 당시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시민권을 취득한 아랍인 비율은 17%. 한때 이들은 이스라엘 통합정책의 성공사례로 여겨짐. 인피파다 후 이들은 동조 파업을 벌이고 점령지에 식량과 의료품을 제공하고 해외에 있는 PLO 계좌로 후원금을 보냄.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집압과 반인권적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짐. 1989년 77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점령지 복무를 거부해 투옥되는 등 이러한 여론의 변화로 1990년대 초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평화 논의 시작.
1차 인피파다가 종료된 1993년 9월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인피파다로 인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100명 이상 이스라엘인도 군경과 민간인을 합쳐 160명 사망함.
(오슬로 평화협정과 불완전한 이행) 걸프전 승리로 고무된 미국 부시 대통령의 중재로 오슬로에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PLO 지도자 아라파트 사이에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테러를 포함해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폭력적 공격을 포기할 것.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정부 수립에 동의할 것. 이 모든 절차는 1993년 12월부터 5년안에 마무리 될 것”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음. 이스라엘군은 철수했지만 웨스트뱅크에서는 오히려 유대인 정착민이 증가함. 또한 새로 들어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함. 오슬로 협정을 이끌던 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극우파 손에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자지정부의 통제를 거부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자살폭탄 테러를 저지름. 결국 2000년 9월 이스라엘의 우익 리쿠드당의 지도자 샤론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2차 인피파다가 일어남.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강경보수파 샤론이 총리가 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서는 하마스가 자치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세력이 됨.
19장. 압둘라 오잘란 체포되다 : 쿠르드노동자당의 투쟁
(기구한 쿠르드족의 역사) 1999년 2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쿠르드 민족운동을 지휘하다가 시리아에서 추방된 거물급 국제 지명수배자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이 체포되어 터키로 압송됨.(PKK : 1978년 압둘라 오잘란이 만든 무장단체로 쿠르드족만의 민족국가를 수립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으나 대부분 서방국가들은 이 단체를 테러조직으로 간주) 20여 년에 걸친 터키와의 싸움에 마침표를 찍은 것.
현재 쿠르드족은 중동에만 약 3,000만명 이상 거주. 가장 많은 쿠르드 인구가 사는 나라는 터키이며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수백만의 쿠르드족인 살고 있음.(421page 쿠르드족 밀집지역인 쿠르디스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중동의 국경이 정해질 때 쿠르드인들의 터전은 독립된 국경을 부여받지 못함.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많은 석유가 매장. 더욱이 터키의 경우 쿠르디스탄 지역이 유일하게 석유가 생산되는 지역. 또한 쿠르드인들이 독립국가 건설에 실패한 데는 오랜 분열이 한 몫함. 과거 오스만제국과 사파비 왕조가 전투를 벌일 때 적대적 분열이 이어져 중동 국경 설정시 쿠르드족만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
이 가운데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완전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성공 사례. 모술과 키르쿠크 등 이라크 북부 지역에 자치정부를 세우고 별도의 군대도 보유.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협조한 공로로 자치정부를 세울수 있었음.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시리아 내전 상황에서 쿠르드족이 미군을 대신해 IS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보상으로 자신들의 거주지역인 로자바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획득함.
그러나 터키의 경우 무스타파 케말이 건국한 순간부터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음. 케말이후 오랫동안 터키공화국에서 쿠르드인을 지칭하는 용어는 ‘산악 터키인’ 이에 맞서 1925년 이후 세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약 100만명 이상의 쿠르드인이 사망하거나 터키 국경 밖으로 쫓겨남.
(쿠르드노동자당과 쿠르드 민족운동의 급진화) 터키에서 쿠르드인의 존재를 처음 인정한 이들은 터키노동당으로 1965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은 터키노동당이 창당될 때 다수의 쿠르드 지식인들이 참여함. 이후 터키 내에서 쿠르드 민족운동이 당시 열악했던 쿠르드인의 생활 수준등과 관련되어 급진 사회주의와 연계되기 시작함. 이 과정에서 쿠르드인의 민족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고 이들중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인 젊은이가 압둘라 오잘란임. 이후 그는 1978년에 PKK 창당함.
1980년 9월 터키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군사정권은 대대적으로 쿠르드 분리주의 운동을 탄압하고 대표적인 표적으로 PKK를 지목함. 오잘란을 비롯한 핵심 PKK 지도부는 터키 정부와 사이가 나빴던 시리아로 도피함. 이후 오잘란은 18년간 시리아에 머물면서 PKK의 투쟁을 지휘함.
이후 10년간 PKK 공격으로 터키에서 발생한 희생자만 1만 2,000명에 이름. 터키 관광산업에도 막대한 지장을 주었고 터키 정부가 반군 소탕에 든 비용만 연간 70억 달러에 달함. 1990년대 초 무려 20만명에 달하는 터키군이 쿠르디스탄에 상주. 쿠르드 언어사용 금지정책 강화. 1990년대 들어 터키는 EU 회원국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 등 소수민족에 대한 터키 정부의 인권탄압이 유럽의 인권 기준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여의치 않음.
(짧은 평화) 1991년 1월 터키 정부는 쿠르드어 사용을 합법화하는 조치 발표하고 이라크 내의 양대 쿠르드 정당인 쿠르드민주당과 쿠르디스탄애국동맹과의 관계도 정상화함. 이는 쿠르드인들에 대한 유화조치이기도 했지만 이들로부터 PKK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함. PKK는 이슬람 수니파가 대다수인 쿠르드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이슬람을 수용하고 분리독립의 기존 입장에서 터키와 쿠르드자치국가의 연방제를 제안함. 그러나 이는 ‘단일한 터키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주장한 케말주의에 반하는 것.
1993년 4월 쿠르드족에게 유화정책을 펼치던 외잘 대통령의 사망과 PKK와의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암살과 죽음등으로 짧은 평화는 끝이남. PKK는 1996~1999년까지 3년간 터키의 군대와 경찰을 상대로 수백건의 폭탄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작전을 지휘하는 PKK 지휘부가 터키 국경 밖에 존재했기 때문.
그동안 터키 정부의 추방 압력에도 오잘란을 보호하던 시리아 정부는 자신들의 후원세력이던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이 1991년 걸프전 승리로 초강대국의 위력을 발휘하자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베카 계곡의 쿠르드 훈련캠프를 폐쇄함. 이에 PKK 지도부는 북부 이라크의 쿠르디스탄으로 본부를 옮김
(오잘란의 체포, 그리고 PKK의 변화) 터키보다 군사력이 열세임을 알고 있는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오잘란을 터키에 넘기는 대신 국외로 추방하고 시리아에서 PKK 활동을 금지함. 이후 오잘란 망명 행로:러시아=>이탈리아=>그리스=>케냐=>나이로비에서 체포. 오잘란 체포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터키 정부, 그리스 정부, 미국 CIA등이 상호협조함.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PKK는 더 이상 터키로부터 분리독립을 추진하지 않는 대신 쿠르드 지역의 자치권 확대와 쿠르드인의 평등한 권리 확보를 요구함. 지금까지 4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터키와 PKK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
20장. 지하드, 미국을 습격하다 : 알 카에다와 9.11 테러
(사우디로 건너온 무슬림형제단) 이집트의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운동단체들을 가혹하게 탄압함. 당시 나세르와 갈등을 겪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은 이들에게 도피처 제공. 요르단에서 급진 이슬람주의 이념을 설파하던 이슬람주의 사상가 압둘라 아잠도 그의 사상을 위험하게 여긴 요르단 정부의 추방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 사우디의 압둘 아지즈 국왕의 최측근으로 건설업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가진 오마마 빈 라덴은 제다에서 압둘라 아잠과 무함마트 쿠틉의 강의를 들으며 이슬람주의에 심취함.
(지하드의 현장, 아프가니스탄) 1979년 12월 소련은 쿠데타로 집권했으나 이슬람세력의 반란에 직면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함. 소련 침공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들은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움. 아프칸 ‘무자헤딘(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의 소식에 주변 이슬람 국가들이 지하드에 동참하기 위해 몰려 들었고 제다에서 압둘라 아잠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빈 라덴도 파키스탄 내 아잠의 캠프에 합류함. 이 훈련캠프는 훗날 서방세계에 악명을 떨친 ‘알 카에다’로 발전함.
1989년 아잠이 의문의 테러로 죽자 그가 지녔던 영향력과 인적 네트워크 상당 부분이 오사마 빈 라덴에게 흡수됨. 1989년 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갔고 빈 라덴은 아프간 전쟁이 끝나자 예멘에 아프간 무자헤딘 훈련캠프를 본 따 만든 지하드 전사 양성소를 설치하고 알 카에다(토대라는 의미)라고 명명함. 1992년 빈 라덴은 알 카에다 본부를 수단의 수도 하르툼으로 옮김.
(걸프전과 미국의 사우디 주둔)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쿠웨이트 왕정은 사우디로 망명. 사우디 왕가는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아랍 공화정이 아랍 왕정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함.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 파병을 요청. 와하비 울라마들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미국 파병 반대에 힘입어 빈 라덴은 사우디 국왕에게 알 카에다 요원들을 쿠웨이트에 투입하겠다고 제안함. 그러나 결국 미국이 페르시아만에 54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 동맹국까지 합치면 80만명. 전쟁은 ‘사막의 폭풍작전’을 주도한 미국의 일방적 승리.
사우디의 와하비 울라마들은 파흐드 국왕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을 두고 ‘이슬람 성지를 품은 땅에 십자군이 들어오도록 허락했다’며 비판. 이슬람 근본주의 관점에서는 같은 무슬림인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이교도인 미국이 진짜 적이기 때문. 사우디 내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함. 1979년 다란에서 폭탄 트럭이 미군 시설로 돌진해 19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370여명이 부상함. 1996년 알 카에다는 ‘이슬람 성지를 침범한 미군을 이슬람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지하드를 시작한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
(탈레반과 알 카에다, 그리고 9.11 테러) 소련이 물러간 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에 휩싸임. ‘탈레반(학생 또는 제자라는 의미)’이라고 불리는 파슈툰족 출신 이슬람 근본주의자 집단이 아프간 남부의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급성장함. 탈레반은 북부 반군세력까지 물리친 후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세력으로 입지를 굳힘.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자 물라 오마르(탈레반의 근거지에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겼다는 이유로 미국과 크게 대립함)는 철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아프간 전체가 신의 법에 따라 살아갈 때까지 투쟁할 것’을 탈레반의 목표로 삼음.
물라 오마르를 만나 의기 투합한 빈 라덴은 수단에 있던 알 카에다 캠프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기고 알 카에다는 탈레반의 보호를 받으며 전사들을 양성했고 탈레반 역시 알 카에다를 통해 정예병사들을 훈련시킴. 2001년 9월11일 19명의 아랍인이 4대의 미국 민간 여객기를 공중에서 납치함. 이 테러로 2,996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함. 단일 테러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 비행기를 납치한 19명 가운데 15명이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탈레반에게 빈 라덴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 미국 부시 정부는 2001년 10월 아프카기스탄을 침공함. 전쟁 개시 약 한달만에 카불을 함락. 2011년 5월1일 미국 특수부대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은신해 있던 빈 라덴을 사살함.
(이라크 전쟁과 판도라의 상자) 미국 부시 대통령은 ‘미국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나라에 대해 선제공격을 할 것’이라는 독트린을 발표하고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 개발과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인권 탄압을 명분으로 삼아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 선제공격을 개시. 사담 후세인은 고향 티크리트 인근에서 체포되어 2006년 12월에 사형에 처해짐.
사담 정권이 붕괴되자 그동안 무자비한 탄압에 숨죽이던 이슬람주의가 깨어나기 시작함. 미국의 후원을 입고 세워진 이라크 신정부는 기존의 지배세력인 수니파가 배제되고 시아파가 주도하고 쿠르드족이 참여하는 형태. 시아파과 수니파 간의 내전에 빠져들게된 이라크 내에 알 자르카위(9.11 테러 사건이후 빈 라덴을 대신해 알 카에다 지휘)는 ‘알 카에다 이라크지부’를 조직하고 미군과 이라크 신정부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함.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철수. 침공 후 철수까지 8년 동안 4,500명의 미국이 사망하고 7,500억 달러 이상의 전쟁비용 발생. 같은 시기 이라크인 사망자는 적게는 수십만명에서 최대 200만명에 이름.
21장. 모든 정체성의 충돌 : 시리아 내전
(어떤 전쟁인가) 시리아 내전은 21세기 들어 발생한 최악의 참사로 2018년까지 50만명 이상이 죽고 200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 시리아를 떠나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이들도 500만명에 이름. 이 전쟁에는 시리아 외에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 이란, 터키, 영국, 프랑스 등 여러나라의 군대가 직접 공습이나 전투에 가담함.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도 참여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에 걸쳐 등장한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인 이슬람 국가IS로 마치 별개의 국가처럼 전쟁의 한축으로 등장.
시리아 내전에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온갖 정체성의 투쟁이 모두 등장함. 처음 시리아 사태는 세속 독재정부에 맞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시작됨. 아사트 대통령을 위시한 시아파 집권세력에 저항하는 다수 수니파의 싸움. 쿠르드족이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소수민족 독립전쟁. 이슬람국가 IS 발호로 이슬람 근본주의 대 세속주의의 전쟁. 또한 두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까지
(아사드 정부의 명과 암) 시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급조된 나라로 한때 자발적으로 나세르가 통치하던 이집트와 국가 합병을 원했을 만큼 국민들의 국가 정체성이 약함. 아랍인 90% 쿠르드인 10%. 다수인 수니파는 소수인 시아파와 여타 종파들을 탄압함. 프랑스 식민통치의 잔재로 의회주의와 정당정치가 발달하지 못하고 군부의 힘이 큰 권위주의 정치 문화.
1970년 11월 쿠데타로 집권한 하페즈 아사드 대통령은 2000년 사망시까지 강력한 독재정치를 펼침. 급진 사회주의 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철저히 억압함으로써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냄. 1982년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1만명을 학살하기도 함.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시리아는 반대 입장. 미국은 시리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함. 미국과 함께 시리아를 압박하는 이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해 시리아 정부는 레바논의 시아파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인 헤즈볼라를 지원함. 러시아, 터키, 카타르 등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를 극복하려 함.
(시리아에 상륙한 ‘아랍의 봄’) 시작은 튀니지. 노점상을 하던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의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튀니지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동참하여 결국 24년 철권통치를 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냄. 이후 이집트이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도 무너지게 됨. 이런 ‘아랍의 봄’이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시리아에서도 발생함.
경제개혁에 따른 수혜층인 중산층과 시리아 군부가 친정부 세력이었으므로 시리아의 반정부 시위는 알라위파 등 소수종파의 지배에 대해 다수 수니파가 저항하는 종파 분쟁의 성격이 컸음.
(내전으로의 확대) 시리아의 반정부 세력은 오랫동안 시리아와 앙숙관계인 터키에 자리를 잡음. 2011년 8월 터키 이스탄불에 반정부 투쟁을 이끌어갈 지도부인 ‘시리아국민회의’가 발족하여 2013년 3월에 ‘시리아임시정부’로 재탄생함. 2011년 7월 반군에 가담한 전직 시리아군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자유시리아군’을 결성. 2012년 중반 시리아 내 1,000여 개의 민병대가 활동했고 2013년 중반까지 4,000여개로 늘어남. 시리아 전체가 무법천지의 전쟁터로 변해감. 반군들이 기대했던 것은 미국의 군사개입.
(쿠르드족의 봉기) 시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쿠르드족 내부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할 기회라고 생각. 2013년 로자바 지역을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선포. 로자바는 석유가 나오는 유전지대인 동시에 터키와 국경을 맞댄 접경지역. 로자바는 부족해진 물자를 터키에서 들여오는 통로이며 터키로 밀입국하려는 피난민들에게 통행세를 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쿠르드족 뿐만 아니라 시리아 내전에 참여한 세력이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지역.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대한 거부감이 커 시리아 반군세력은 결국 쿠르드족을 끌어안는데는 실패.
(‘이슬람 국가’IS의 성장) IS의 흥망성쇠는 시리아 내전의 가장 독특한 부분. 시리아의 이웃 국가인 이라크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이 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 것. 이들은 전세계 지하드 그룹과 연계하고 뉴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세련된 방식으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함.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알 카에다 이라크지부’가 다른 이슬람주의 조직을 규합해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 Islamic State of Iraq)를 창설. 알 자르카위가 미국의 공습으로 죽자 알 바그다디가 조직을 이끌고 그는 시리아가 내전 상황으로 치닫자 이를 기회하고 생각함. 그는 알 줄라니를 시리아로 파견해 ‘알누스라 전선’을 만들고 알누스라 전선이 시리아에서 충분한 영토와 지지자를 확보하자 2013년 4월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를 세상에 알림. 알 바그다디의 선언 “칼리파가 통치하는 새로운 이슬람국(IS)를 건설할 것이며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를 칼리파로 추대한다”
승승장구한 IS는 2015년 중반까지 시리아 전체 영토의 거의 절반 가까이 영토를 넓힘. IS의 급성장에는 극도의 혼란상황에서 인간은 오히려 절대적인 도그마를 찾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줌. 이라크와 시리아의 반군 대부분은 수니파 무슬림. IS가 구체적인 목표와 보상을 제시한 것도 효과가 컸음. ‘새로운 칼리파 국가 건설’이라는 비전. IS는 이라크 유전지대를 손에 넣은 후 석유를 팔아서 번 돈으로 전사들에게 봉급을 주고 여성들을 강제로 IS 전사들과 결혼시킴. 또한 IS는 전사들에게 ‘성전을 통한 죽음이 곧 엄청난 축복과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념을 지속적으로 세뇌시킴. IS가 시리아에 집착한 이유중의 하나는 시리아와 터키 국경지대 작은 마을인 ‘다비크’ 때문. 이슬람 종말론에서 다비크는 기독교의 ‘아마겟돈’처럼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
미국이 이라크 정부군과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IS는 점차 밀리기 시작하여 이라크 정부는 2017년 12월 IS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고 선포하고 2018년 시리아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도 IS가 세력을 잃고 사실상 붕괴됨
(외세의 개입 : 주변 강국들의 대리전) 시리아 내전은 결과적으로 아사드 정권의 승리로 끝남. 시리아 반군은 미국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마당에 시리아에 또다시 개입할 생각이 없었음. 미국은 시리아 정부에 대한 경제조치를 가해 압박하고 반군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9월 ‘미군은 시리아 땅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참전 가능성을 배제함. 그러나 IS가 등장하면서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하는 대신 이라크와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이 IS를 퇴치하도록 대리전을 벌임.
가장 적극적으로 아사드를 도운 나라는 이란. 이란-이라크-시리아-헤즈볼라(레바논)로 이어지는 일명 ‘시아파 초승달 지대’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면서 시아파 초승달지대가 깨질 위험에 처하자 시아파의 맹주격인 이란은 특수부대 ‘쿠드스’를 급파해 위기에 몰린 아사드 정부를 살려냄. 러시아 역시 시라아 내전에 개입. 러시아 지도부는 시리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음. 시리아에서 IS와 같은 지하드 그룹이 승리한다면 이들이 체첸 반군과 러시아 내의 무슬림들을 자극해 분리주의 운동을 촉발시킬 위험이 있었음.
(끝나지 않은 전쟁) 아사드 정부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 보이지만 시리아 내의 다층적인 갈등 구조는 어느 하나 해결된 것이 없음. 100여년 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중동에 신생국가의 경계선이 만들어짐. 이들은 유럽식 국민국가라는 외피를 입었으나 실제로 그안에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국가 구성원인 ‘국민Nation’이 존재하지 않았음. 중동에서의 정체성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