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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혈맥
다쓰야와 다투고 헤어진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요코에게는 마음이 무거운 나날이었다. 강의를 들을 때도, 친구와 얘기를 나눌 때도 다쓰야의 화난 표정이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요코는 그렇게 헤어진 것이 서로를 위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마음이 쓸쓸했다.
비가 창문을 적시고 있었다. 건너편 집 뒤쪽에 서 있는 포플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요코는 푸른색 블라우스 위에 흰 카디건을 걸치고 세계 미술 전집을 펼쳤다.
오른팔을 해골 위에 얹고 알몸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여인의 그림이 있었다. 풍만한 가슴과 늘씬한 다리가 아름다워 보였다. 해설을 읽어보니 프랑스 미술 사상 처음으로 그려진 나체화라고 적혀 있었다. 요코는 포동포동 한 팔 밑에 있는 해골을 눈여겨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징그러운 것을 그렸을까?’
요코는 미인과 해골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아름다운 여자도 언젠가는 해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멸망해 버린다는 뜻일까?’
요코는 이런 생각도 했다.
언젠가 도오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난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있으면 두려움이 느껴져. 이 꽃도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이상하게도 멸망을 생각하게돼”
그 말을 떠올리니 요코는 문득 도오루를 만나고 싶었다. 다쓰야의 출현 이후로 요코는 도오루와 자신은 절실히 남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었다. 다쓰야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은 확실히 도오루에 대한 애정과는 달랐다.
요코는 책장을 넘기면서 새삼스럽게 도오루와 자신은 핏줄이 이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 앟을 수 없었다.
“미쓰이 싸라는 남자분이 현관에 와 있어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미쓰이 씨요?”
요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나서 가 버린 다쓰야가 찾아온 걸까? 요코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안해요. 곧 내려갈게요.”
하숙집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요코는 비에 젖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6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요코는 카디건의 옷깃을 여미고 일어났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순간 망설였다.
그렇게 다투고 헤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만일 사과하러 왔다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되돌려 보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렵게 사과하러 온 것이다. 가볍게 화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요코는 당장 다쓰야를 반갑게 맞으러 뛰어 내려갈 것 같은 자신을 억누르고 방안에 서 있었다.
아래층에서 뭐라고 말하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요코는 그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다쓰야가 화를 내도 하는 수 없다. 이대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코는 결심했다. 만일 얼굴을 마주치면 어이없게도 쉽게 화해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쓰야는 자주 하숙집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요코는 책상에 기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와 하숙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방의 배치를 잘못해서 복도와 계단이 어둡거든요…..”
요코는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요코 양,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내가 모시고 왔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네. 하지만……”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코는 결심을 하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미쓰이 씨.”
“실례합니다.”
퍼머를 한 것처럼 아름답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이마에 살짝 흘러내린 청년이 문 앞에 서서 요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코는 순간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해요. 지난번에는…….”
청년의 뒤에서 다쓰야가 얼굴을 내밀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오늘은 형과 함께 왔어요. 혼자라면 방에 들여놓지 않을 테지만 두 사람이라면…….”
다쓰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쓰야의 형 기요시라고 합니다. 다쓰야가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서……..”
기요시는 요코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빠구나, 저 사람이……..’
“처음 뵙겠습니다. 쓰지구치 요코라고 해요.”
두 사람에게 방석을 권하는 요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때, 형? 어머니를 많이 닯았지? 내가 거짓말 한 거 아니지?”
다쓰야는 으스대며 말했다. 요코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쓰야,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이거 죄송합니다, 쓰지구치 씨.”
요코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어째서 실례란 말이야, 형?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말했을 뿐이야, 난.”
다쓰야는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쓰지구치 씨, 다쓰야는 아직 어려서 이래요. 쓰지구치 씨가 어머니와 꼭 닯았다고 언제나 집에서 귀찮게 떠들어요. 오늘도 나더러 꼭 함께 오자고 해서…..이거 갑작스레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쾌활하고 꾸밈없는 목소리였다.
“형은 걸핏하면 날 어린애 취급해요.”
다쓰야도 쾌활하게 요코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역시 어린앤가봐요. 지난번에는 정말 미안했어요. 어제 저녁에 식구들 앞에서 말했어요. 잠깐 방을 보여주는 게 뭐 어때서 그럴까 하고 말이에요.”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포트를 콘센트에 끼웠다. 비록 아버지는 다르지마,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은 틀림없는 자신의 오빠와 동생이다. 요코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어머니는 어린애 같은 소리 말라며 웃었지만, 아버지한테서는 야단을 맞았어요. 무례하고 몰상식한 녀석이라고 말이죠. 아버지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거든요. 혼났어요. 어쨌든 사과 드릴게요.”
다쓰야가 솔직히 사과하자 요코도 냉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쌀쌀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좋았어. 이제야 화해를 했네요. 난 앞으론 댁한테 말도 못 붙이나 해서 좀 울적했어요.”
기요시는 다쓰야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요코를 슬쩍 바라보았다.
“덕분에 댁의 방을 볼 수 있게 됐어요. 정말 방이 깨끗하군요. 꿈으로 가득찬 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담배가 떨어졌군. 다쓰야, 가서 담배 좀 사다 줄래?”
기요시가 방을 둘러보는 다쓰야에게 말했다.
“오케이!”
다쓰야는 기요시가 건네 주는 천 엔짜리 지폐를 받아 쥐고 곧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요코는 기요시의 시선을 느끼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다 왠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아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기요시가 말했다.
“쓰지구치 씨, 실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무슨 말씀인데요?”
“우리 어머니와 당신의 오빠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요?”
요코는 가슴이 철렁하여 기요시를 바라보았다.
“저희 오빠하고요?……아는 사이인가요?”
엉겁결에 요코는 이렇게 되물었다.
“모르고 계셨나요? 그래요……..?”
기요시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실은 작년에 어머니가 다카기 씨 댁에 조문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일으켜 입원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 당신의 오빠가 그 다음 날 병원에 문병 온 적이 있었어요.”
기요시는 눈치를 살피는 듯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네, 조문을 하고 돌아가시는 길에 사고를 당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다카기 아저씨를 대신하여 오빠가 먼저 찾아뵈었다고 하더군요…..그 분이 바로 댁의 어머님이셨군요?”
요코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애써 시치미를 떼야만 했다.
“다카기 씨의 대리였나요? 그랬군요. 내 눈에는 어머니와 직접 알고 있는 사이처럼 보였는데요.”
기요시는 비에 젖은 창문을 잠시 바라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오빠가 문병 온 직후에 다카기 씨가 오셨기 때문에 나하네는 대리로 생각되지 않았어요……뭐 아무러면 어때요.”
“…………”
“갑자기 이런 무례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다만 나로서는 마음에 걸렸어요. 당신과 우리 어머니는 아주 닮았어요. 그런 당신의 오빠와 어머니가 아는 사이다, 아니 아는 사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다카기 씨라는 공통의 친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요코는 왠지 추궁 당하는 느낌이었다.
“저도 어쩐지 불안해요, 혹시……..”
요코의 말에 기요시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실례했어요. 쓰지구치 씨도 잘 모르는 일을 자꾸 꼬치꼬치 물어 봐서….제가 실수를 한 것 같네요. 그래요, 쓰지구치 씨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어요. 미안합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기요시의 이마에는 땀이 솟아 있었다.
“아니에요.”
한시름 놓은 요코에게 기요시가 말했다.
“미안해요. 방금 내가 한 말은 다쓰야에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석은 아직 당신과 당신의 오빠 사이를 모르고 있어요. 녀석은 상상력이 비상한 편이라 이상한 생각이라도 품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이상한 생각이라뇨?”
“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배웅하는 오빠를 삿포로 역에서 본 이후로……”
“무슨 뜻인가요?”
“아니, 기분 상할까봐. …….좀 묘한 생각이 들어서요.”
“기분 나빠하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럼 기탄없이 말하지요. 나에겐 외삼촌 한 분이 계셨는데 독신으로 지내다가 전사하셨대요. 어머니를 꼭 닮았었대요. 사진으로 보아도 진짜 많이 닮았더군요. 그래서 난 처음엔 쓰지구치 씨가 그분의 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어머!”
요코는 웃으려고 했으나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외삼촌이 입대하신 것은 1941년이고 그 이듬해에 바로 전사하셨으니까 햇수가 맞지 않았요.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혹시 당신이 우리 어머니가 낳으신 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기르기가 어려웠거나 다른 어떤 사정이 있어 병원에서 그대로 남의 손에 넘겨 준 것이 아닐까….그러니까 다쓰야와 당신은 혹시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죠.”
“어머, 만일 제 어머니가 그 말을 들으면 화내시겠네요. 힘들게 절 낳아 주셨는데…..”
“그러니까 묘한 생각이라고 말한 거예요. 쓰지구치 씨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 자신도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느꼈어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기요시는 이마의 땀을 닦고 요코가 내놓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현관문이 덜컹 소리를 냈다.
“동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방금 한 얘기는.”
기요시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쓰야의 홍차를 준비했다.
“자, 담배.”
문을 열자마자 다쓰야가 말했다.
“수고했다.”
기요시는 담배를 받아 들고 겉 포장을 뜯었다.
“비가 오는데 수고했어요.”
홍차를 내놓으면서 요코가 말햇다. 그러나 민감한 다쓰야는 어딘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를 했죠?”
“얘기는 무슨……”
“그럼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다쓰야는 탐지하듯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야.”
“흥, 난 또 담배를 사러 보내 놓고 무슨 중요한 얘기라도 나눈 줄 알았네……”
“다쓰야, 넌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탈이야.”
기요시는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내심 당황했다.
“참, 쓰지구치 씨에게 줄 초콜릿을 사 왔어요. 감자와 호박이 아니라서 안됐지만…….”
다쓰야는 좋아하는 음식이 감자와 호박이라고 했던 요코의 말을 기억하고 농담을 했다.
“어머, 고마워요. 초콜릿도 좋아해요. 먹어봐야지.”
요코는 초콜릿을 세 조각으로 쪼개어 두 조각을 다쓰야와 기요시 앞에 놓았다.
“형, 아까 담배 가게 앞에서 바로 그 녀석을 만났어.”
다쓰야가 거스름돈을 기요시 앞에 내놓으면서 말했다.
“그 녀석이라니?”
“아니, 왜 작년 여름에 어머니가 입원했을 때 문병 왔던 녀석 있잖아?”
“글쎄, 그땐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그때 다카기 씨 댁에서 왔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이 어머니의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이름이 뭐더라?”
요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다쓰야를 바라보았으나 곧 시선을 돌렸다.
“글쎄, 그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얼떨떨해서……”
기요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였다. 다쓰야가 말했다.
“사실 나도 기억이 안 나…..그래도 그때 죄송하다고 한 말, 형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어?”
“아, 생각난다. 네가 죄송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었지, 아마?”
“아, 그 녀석 말이야?”
“하지만 그건 쓰지구치 씨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잖아? 나중에 이야기하자.”
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요코는 금방이라도 도오루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여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쓰지구치 씨,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세요. 실은 어머니가 작년에 교통사고를 냈는데, 어머니를 문병하러 온 젊은 청년이 느닷없이 죄송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교통사고를 내고 다쳐서 누워 있는 어머니께 말이에요. 죄송하다는 인사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조금 전에 기요시가 도오루와 게이코의 관계를 물어왔을 때 요코는 난처했었다. 그런데 다쓰야에게서 또다시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게이코의 죄가 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그런데 그분은 대체 무엇이 죄송하다고 한 걸까요?”
“바로 그거예요.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어머니의 교통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는게 분명하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직감이라니? 다쓰야, 그런 엉뚱한 일로 남을 의심해서는 안 돼. 그래, 다카기 씨 대신 왔다고 하지 않았니? 다카기 씨 댁에 조문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당한 사고니까, 당연히 죄송하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렇죠, 쓰지구치 씨?”
“글쎄요, 그렇다면 죄송하다는 말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요코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든 오타루의 친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니, 쓰지구치 씨는 현장에 없었으니까 잘 모를 거예요. 그때 어머니와 그 녀석의 표정은 아주 절박했어요. 형은 직감을 무시하지만 난 순간 느꼈어. 뭔가 분명히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벌써 지나간 일이야, 다쓰야. 그런 얘기는 아무려면 어때? 쓰지구치 씨도 너무 시시하지요?”
기요시는 면목이 없는 듯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쓰지구치 씨, 방금 난 그 녀석을 다시 만났어요. 그 녀석도 나를 보자 얼굴을 홱 돌리는 거예요. 흔히 거북한 상대를 만났을 때 얼굴을 외면하게 되잖아요. 난 일부러 말을 걸었죠. 어머니의 교통사고 땐 고마웠다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녀석은 당황하여 아, 그땐 어쩌고 하면서 도망치려고 하잖아, 형.”
기요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쓰야는 도오루가 요코의 오빠인 줄도 모르고 이러헥 말하고 있지만, 요코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불쾌해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왜 도망치느냐고 따졌어요. 그러자 녀석은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어쩌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거동이 미심쩍었어요.”
다쓰야는 등지고 있던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다쓰야, 그건 마치 불량배나 하는 짓 아냐? 이유야 어찌됐든 그건 실례야.”
“실례를 저지른 건 그쪽이야. 얼굴을 홱 돌렸으니까. 그 녀석도 날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어, 형.”
요코는 다쓰야의 컵에 다시 홍차를 따랐다.
기요시는 요코의 흰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도 정말 끈질기구나. 이제 그만해 둬, 그 사람 얘기는.”
“그만해 두라니? 형, 그렇게는 안 돼.”
마시려던 홍차를 손에 든 채 다쓰야는 잘라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형, 어머니는 다행히 석 달 반 만에 퇴원하고 후유증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만일 불구라도 됐더라면 난 그 녀석의 정체를 끝끝내 밝혀내고야 말았을 거야.”
기요시는 자신도 모르게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쓰야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도 이젠 예전처럼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그렇게 흥분할 것 없잖아.”
“하지만 아까 녀석이 또 도망치려고 하는 꼴을 보니 이름쯤은 알아두고 싶었어.”
“쓸데없는 소리만 해서 쓰지구치 씨가 웃겠다.”
다쓰야는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추켜 올리고 잠자코 있었다.
“제 동생이 너무 소란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기요시는 요코에게 사과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한 도오루를 생각하면서 요코는 말했다.
요코는 다쓰야에 대한 감정과 도오루에 대한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느껴왔었다. 그러넫 지금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다고는 하지만, 도오루에 대한 다쓰야의 비난 비슷한 말을 듣고 있자니 어렸을 때부터 정답게 지내왔던 도오루와의 오랜 관계가 회상되어 요코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형.”
양쪽 무릎을 껴안고 잠자코 있던 다쓰야가 말했다.
“뭐가 말이야?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 둬, 제발.”
기요시가 약간 초조한 듯이 말했다.
“형, 어머니는 교통사고가 난 이후로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별로 변한 것 없어.”
“그럴까? 때때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 계실 때가 있어.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야 후유증 같은 것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응, 언젠가 어머니에게 아까 만난 녀석의 이름을 물었더니 사고 당시의 일은 깨끗이 잊어버렸다고 하시는 거야. 기억 상실이라고 했던가? 그땐 나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던 것 같아.”
“쓰지구치 씨, 다쓰야는 이래서 탈이에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둬. 쓰지구치 씨하고 아무 관계도 흥미도 없는 일이니까. 그건 실례야. 넌 오늘 여기 대체 왜 온 거야? 지난번의 실례를 사과하러 온 게 아냐?”
기요시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쓰야를 타일렀다.
“그렇지, 참.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이상해, 난 쓰지구치 씨가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인지 뭐든지 쓰지구치 씨에게 말해 버린다니까. 사촌 남매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상 위에 있는 건 무슨 책입니까?”
기요시는 마음이 놓인 듯이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이거 미술전집이에요. 보시겠어요?”
기요시는 요코가 내미는 두툼하고 커다란 책을 양손으로 받아 들고 그것을 펴 보았다.
“그림을 좋아하시나 보죠?”
“네.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요.”
“아냐, 잘 그려, 형. 나 쓰지구치 씨하고 터치가 비슷하다고 선배로부터 칭찬을 받았어.”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창문 너머로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다쓰야가 고개만 돌리고 말했다.
“그래? 너하고 쓰지구치 씨하고 터치가 비슷하다고?”
“미쓰이 씨도 그림을 좋아하세요?”
마음속으로는 움찔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요코가 물었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음악 쪽을 더 좋아해요.”
“무슨 악기를 다루시는데요?”
“피아노를 조금….하지만 난 레코드를 듣는 정도예요. 재주는 없지만 많은 걸 탐내는 부류지요.”
기요시가 웃으면서 초콜릿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앗! 형, 저기 좀 봐. 아까 말했던 그 녀석이 걸어가고 있어.”
창 밖을 내다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다쓰야가 큰소리로 말했다. 기요시는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옳지! 잘됐어. 저 녀석의 이름을 기필코 알아낼 거야.”
다쓰야가 벌떡 일어났다. 기요시의 얼굴이 금새 굳어졌다. 요코는 천천히 다쓰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쓰야, 어리석은 짓 하지 마!”
기요시는 얼른 문 앞에 막아섰다.
“왜 어리석은 짓이야?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잖아? 비켜, 형!”
요코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다쓰야의 귀여운 면만 보아 온 요코는 그의 나쁜 일변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알아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실례되는 짓은 제발 그만둬.”
“실례는 저쪽에서 한 거야.”
“다쓰야,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 쓰지구치 씨한테 실례야. 쓰지구치 씨가 싫어해도 괜찮아? 그렇게 멋대로 굴지 마.”
이 말을 듣자 다쓰야는 요코를 바라보며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코는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요, 쓰지구치 씨. 난 좀 이상한 놈인가 봐요. 금방 흥분하거든요. 그게 내 결점이에요.”
다쓰야는 의외로 솔직히 인정하고 나가는 것은 단념했으나 다시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도오루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쓰이 씨, 앉으세요. 난 침착한 사람을 좋아해요.”
“네, 알겠어요.”
다쓰야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멋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얼굴을 보자 요코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쓰야가 좀더 이성적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미쓰이 씨, 나하고 친구가 되려면 좀더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미쓰이 씨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아요.”
“그건 곤란해요.”
다쓰야는 다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것 봐. 내가 뭐랬니? 쓰지구치 씨, 잔소리 좀 해 주세요. 내 말은 도대체 듣지 않았요.”
“글쎄요. 너무 감정적인 사람과는 우정을 오래 지속하기 힘들 거예요. 미쓰이 씨는 감정을 금방 얼굴에 나타내는데, 오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점은 고쳤으면 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형, 쓰지구치 씨는 자기 스스로 귀가시간을 정해 놓고 그걸 엄수하는 사람이라니까. 자신에게 아주 엄격해.”
“그래요, 난 엄격해요. 친구라고 해서 아루렇게나 행동하는 건 싫어요. 친구란 서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미쓰이 씨?”
“이거 야단났는걸.”
다쓰야는 조금 전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말했다.
“아, 그래. 생각해 보니 굳이 빗속을 뛰쳐나가 이름을 물어 볼 필요도 없었어. 다카기 병원에 물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