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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이유와 목적
요한복음 1:1~18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서두에서 예수님을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사도는 로고스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존재 이전부터 계신 자존자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만물을 친히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지어진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시기에,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그로부터 나와 생명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나무와 식물이 살 수 없듯이 빛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사람은 참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참 생명의 빛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둠의 압제 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참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들에게 다시금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으니, 그가 곧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8:12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르신 말씀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하신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어 영생을 얻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어둠에 떨어진 사람들이 빛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본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니요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분이신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를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인카네이션’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영원자이신 그리스도, 로고스가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함께 거하는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이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요 그 후의 33년 동안의 공적 생애의 사건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서 함께 하였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 중 하나가 아니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바 된 존재라고 이 요한복음 서문에서 확고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하신 말씀이 그러한 강조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이 볼 수 없는 충만한 영광의 빛 가운데 계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 품속에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과 감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의 이 증거를 그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영광의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과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영생과 장차의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성경의 핵심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이라는 이 진리의 터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단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하고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본래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라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모든 것들은 모래 위에 지은 기초 없는 집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은 본래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천년 전에 저 팔레스타인 땅 갈릴리에 사는 다윗 왕가의 후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처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천사가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보호자 요셉에게 계시한 대로 성령으로 태어날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예호수아’ 혹은 ‘예수아’라는 이름은 헬라어식 이름으로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아담 이래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빠진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천사가 이름을 알려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그대로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시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구원하려는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냥 하나님으로서 구원하시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요?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 방식을 취해야 할까요? 이는 죄인인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자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 제도 속에 구원의 원리를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원리는 반드시 속량, 구속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구약 율법에서 기업 무르는 율법 제도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업 무르는 율법 제도는 사람이 빚을 져서 갚지 못할 때에 기업으로 받은 자기의 논밭을 팔고 나중에는 자식까지 종으로 팔고 자신조차 팔아넘겨서 빚을 갚아나가야 할 때에 그는 그 곤경에서 구출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이 자기 빚 때문에 자기 소유의 논밭이 넘어가고 자식도 넘어가고 아내도 넘어가고 자기도 넘어가서 남의 종이 된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그 수렁에서 그를 구출해내어 아내를 되찾고 자식을 되찾고 논밭을 되찾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업 무르는 제도입니다. 이 ‘기업을 물러 주는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업을 물러주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자가 ‘고엘’인데, ‘고엘’은 반드시 그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야 합니다. 가까운 형제나 가까운 친척 삼촌이나 사촌이나 오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친한 이웃이라고 해도 그는 고엘의 의무와 권한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친척은 그러한 권한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모압의 효녀 룻이 남편과 시아버지를 다 잃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더불어 고향 땅 베들레헴에 왔을 때 이미 빚 때문에 집안이 폭삭 망했습니다. 이삭을 주어서 연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족의 가까운 친척인 보아스가 룻의 집안의 고엘의 권한과 책임의 자리에 있었는데, 기꺼이 그 집안을 살리기 위하여 그 모든 빚을 청산해주는 기업 무르는 권한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룻의 가족을 빚더미에서 건져내어 그 집안을 다시 세워주었습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다 온 후손들이 채권자인 마귀에게 다 채무자가 되어 재산이 넘어가고 사람의 생명도 넘어가고 영원한 영혼의 지옥의 불구덩이 수렁에 던져지게 되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깊은 수렁에서 구출받는 한 가지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의 친척이 되는 존재가 그 모든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빚을 진 자의 가까운 친척이 그 빚을 대신 갚아줄 때에 구원을 받고 해방을 받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자격이 안 됩니다. 천사도 자격이 미달입니다. 오직 타락한 인간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과 동일한 체질인, 혈육을 가진 인간만이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요 사람이여야 하기에,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야 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 이하의 말씀이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그렇습니다. 혈과 육을 가진 인간만이 우리가 범한 죄의 무서운 결박에서 우리를 구출해낼 구속자의 권한을 가진 자, 고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1 말씀에서 이르기를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에 보면, 여기서 ‘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자면,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결과를 얻었으니 죽은 자로부터 부활 역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자의 자격이 죽을 자가 되기도 하고 다시 살아날 자가 되기로 할 자 곧 사람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나 천사도 자격이 안됩니다. 오직 구원자는 우리와 동일한 혈육을 가진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만 하기에,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여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고 사람의 몸에 잉태되어 출생 과정을 거쳐 우리와 동일하게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 곧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이 왜 절대적으로 필요했는가를 보았는데, 이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왜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냥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가 본래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셔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강조한 것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계시던 독생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라고 사도 요한이 증거한 바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인간의 이해가 닿지 못하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서신을 쓰는 서두부터 썼을까요? 사실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중간 중간에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으로 증거하신 점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공중 설교하실 때에 자기를 죽이려는 반대자들 앞에서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 드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반응의 이유에 대하여 요한복음 5:18 말씀에서 이르기를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음이러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길 만큼 자기를 특별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자기를 표현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0장 30절 말씀에 이르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고 말씀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왜 돌을 들어 자기를 치려고 하는가 하고 그 이유를 묻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돌을 들어 치려는 이유는)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8:33)
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증거하였노라고 유대인들이 반응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난 자라고 자주 증언한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가 장차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실 자이지만 그는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러번 증언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14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처녀 곧 남편 없이 숫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는 기적적인 출생을 하게 될 터인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될 터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9:6 말씀도 동일한 예언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서 보면, 태어난 아기 곧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5:2에서도 그리스도의 출생지 베들레헴을 예고하면서 선지자는 이르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태어나실 이스라엘의 영원한 목자, 지도자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들처럼 남녀의 결혼으로 인하여 자연적인 출생이 존재의 시작이 아니라 태초, 영원, 상고에서부터 존재하시게 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 중일 때에 예수님 자신의 존재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노라고 밝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8:56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가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몸을 입고 사역하실 당시가 아브라함이 있을 때보다 이천년 후가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육신의 나이가 삼십 세를 갓 넘겼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미 죽은 지 이천년이 지난 아브라함이 나기 그 이전부터 자기가 존재하고 있노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증거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분노하여 그를 돌로 치려고 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급인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했기에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몰아가서 결국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굳이 감추지 않고 밝히심으로 인하여 죽으셨고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 만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 구원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관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하신 사람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시라야 죄가 없어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 이래로 그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파괴력과 전염력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느끼지만 유전자의 힘이 놀랍지 않습니까? 외모, 성격, 재능, 지능, 기질, 습관 등이 부모님을 참 많이 닮지 않습니까? 아담의 원죄로부터 우리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발하고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이 뿌리가 깊고 죄악의 감염력이 아담의 후손들의 모든 내면 세계와 사회 구조 속에 뿌리 깊게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3:23 말씀처럼
“구스인이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고 하신 말씀 그대로 인간 중에 그 누구도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의인 욥도, 사무엘도, 다니엘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일 따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의 잣대로 재어볼진대, 모든 인간은 구더기와 벌레와 같고 흙덩이처럼 더럽고 비천한 기질과 체질의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르시기를,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음식물이 더럽지 않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1~23)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 마음 안에는 종종 악과 더러움, 욕심과 시기, 교만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혈통을 타고난 모든 인간은 절대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 중에는 그 누구도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인 전혀 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완전한 의 그 자체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죄 없는 사람이 되어서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죄값을 완전히 대신 짊어지시고 인간의 사망의 죄 값을 지불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온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안에서 죄인 된 인간들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실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정결한 피를 흘려 죽으셔서 구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이 되시는 성육신을 해야 하였던 것입니다. 이 길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는 구원자가 강한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업 무르는 자 고엘은 유력한 자라야 했습니다. 가까운 친척이라고 고엘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빚을 져서 논밭도 다 팔리고 자식들도 아내도, 그 자신조차 종으로 팔아넘긴 그 무거운 채무를 다 갚아주고 그 수렁에서 건져내주기 위해서는 그 고엘의 자리에 있는 형제 친척이 유력해야 합니다. 세력도 있고 부유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약하면 마음뿐이지 남을 도울 수 없기에 형제의 기업을 물러줄 수 없습니다.
롯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 가족의 고엘의 자리에 있었던 보아스는 자기 친척인 롯의 가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고 큰 부자였습니다. 논과 밭이 많았고 남종과 여종도 많았습니다. 그의 모친은 여리고의 믿음의 여종 기생 라합이요 그 아버지는 유다 지파의 족장 중 하나인 살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은 유다 지파 베들레헴 거주자들 중에서 아주 유력한 자였기에 몰락한 친척 집안인 룻의 가정의 기업을 너끈히 다시 물러주어 그 집을 다시 세워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 이래로 원수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영혼의 도적질을 당하고 저주 아래 고생하며 죽게 되고 지옥불에 떨어지는 무서운 굴레 아래 떨어진 인생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는 정말 유력하고 힘이 있는 고엘이 필요했습니다.
인간의 죄악의 그 깊고 무서운 힘에서 인간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무시무시한 마귀와 귀신들의 권세에서 건져내야할 강한 자라야 했습니다. 사망의 무서운 권세에서 건져내야 할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과연 사망과 싸워 이길 자가 있습니까? 유명한 정치가, 장군, 철학가, 지혜자 그 누가 죽음과 맞서 이겼습니까? 죽음의 권세처럼 막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죽음의 권세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를 위하여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삼켜버려야 할 위대한 생명의 능력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또 저 영원한 심판의 유황불 지옥의 권세와도 싸워 이길 자라야 합니다. 이 모든 권세와 힘에 끌려가서 종이 되고 알거지가 되어버린 친척을 구출해기 위해서는 참으로 강한 자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무서운 자들에게 잡혀간 인간을 구출하고 건져낼 만큼 유력한 자는 하나님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또 한 가지 더 인간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요한 자라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르신 “온 천하를 얻고도 그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라고 이르신 말씀처럼 사람의 영혼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의 철창 권세에서 구출하여 내려고 한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드는 값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에 대하여 시편 49:6~8 말씀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비싼 값이 지불되느냐면 이 온 세상 전부를 팔아도 불가능합니다. 그 값은 너무 엄청나서 그 어떤 부자도 한 영혼도 건지지 못합니다. 한 나라를 팔아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딸 한 사람도 결코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값은 엄청난 부자만이 지불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요하신 하나님일지라도 죄인의 목숨 값이 얼마나 비싼 지 하나님의 목숨 값을 지불해야 우리 인간의 영혼을 죄와 사망의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목숨, 하나님의 생명의 값만이 죄인인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살려낼 수 있기에, 영원하신 하나님. 독생하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사람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그렇게 십자가에 피 흘려 생명을 내어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구속을 받아 죄사함과 영생과 천국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에 이 너무나 큰 죄의 빚을 다 청산하고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가 대신하여 죄인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 십자가 대속의 역사적 사실만이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본질적 사실입니다. 죄인을 죄와 그 모든 저주와 사망과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 진리를 믿고 이 진리를 믿고 이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무신론,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심지어 천주교도 이 진리를 핵심적 진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들 인간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드리워진 무서운 슬픔과 고통과 숙명적 어둠은 스스로 구원하기에는 너무 큰 빚입니다. 그 빚을 인하여 달려드는 빚쟁이들 곧 마귀와 사망과 지옥의 영벌의 권세와 맞서 우리를 건져낼 자는 우리 인간 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나 천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의 목숨을 지불할 때에 우리가 이 영원한 속박에서 풀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이천년 전에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육신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만세 전에 작정하셨고 그 일을 결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원하신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를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깊은 수렁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너무나 복된 날입니다. 너무 감사한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이 깊은 사랑을 인하여 한없이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깊은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온 세상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를 인하여 온 천지에 임한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함께 경축하고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탄생하신 이 성탄의 소식에 담긴 죄인 구원의 복된 소식을 우리가 더욱 힘써 온 세상에 소리 높여 전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