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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말씀: 갈라디아6:14
제목: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
복음의 중요성은 강조하면 할수록 십자가에 집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십자가 복음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성도들이 있다면 본질에서 벗어나 형식만을 추구하는 곁데기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갈라디아에서도 십자가 복음에 대한 핵심 된 내용을 벗어나 율법으로 구원을 강조하는 거짓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상황들이 나타납니다. 갈6:14 본문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처음에 ‘그러나’로 시작하는데요, 12절과 13절의 반대내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할뿐이라’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복음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희석시키고 오염시키는 자들이 슬그머니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는 것은 좋지만, 더 명확하게 믿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한다,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리스도인들이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 로마가 유대인들에게는 박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믿음이 워낙 강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종교에 시비를 걸거나 방해를 하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반란이 일어나고 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체적으로 유대교를 믿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거부하면 로마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동시에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다는 말이 이들에게는 큰 유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상기시켜 주기는 것이 바울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관점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면, 이 세상의 삶은 형상적으로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올바로 봐야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보는 것은 분명히 달라야합니다. 왜냐하면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심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인생은 심고 거두는 삶입니다. 도덕적으로도 행한 대로 책임을 져야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난 후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시인합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며, 몸으로 행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의 삶이 우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생각과 십자가 밖에서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시간 안에서 생각과 시간 밖에서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니까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유가 낳고, 낳고 또 낳고 하는 시간의 개념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도 ‘영원히 살면 얼마나 지겨우냐.’이렇게 생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시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생각을 하는데 천국은 시간이 없는 곳입니다.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서 보는 것과 십자가 밖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십자가 밖에서의 시각은 육신의 생각과 이생의 자랑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런 것처럼 이 땅에서 심는 대로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영적으로 심고 영적으로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삶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쾌락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죽음 후에 이 땅에서 심은 것을 거두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 땅에서 그냥 대충 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명확해진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에 사는 것이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왜 복입니까? 천국이 우리의 목적지이고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데 빨리 가면 좋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여행도 빨리 가면 좋은 것처럼 그 나라에 빨리 가는 것이 좋은데 왜 오래 사는 것이 복 이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받을 열매를 즉, 상급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은 가장 심각하며, 삶은 살아가는 거대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삶의 결정이 바로 육체를 심느냐 성령을 심느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깨닫고 발견해야할 것은 어떻게 성령을 심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과 오는 영원한 세계에서 기쁨과 행복과 평강의 축복을 거둘까 하는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요 육적으로 심는 것은 세상에서 심으면 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심는 것은 세상에서 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옥토는 구원 받고 난 후의 삶에서 나타나야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나타나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나, 보혈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며 침례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죽고 영적으로 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삶의 영역이 우리의 삶의 영역이요 생명을 뿌릴 수 있는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혈을 지나지 않고는 구원이 없고 보혈을 지나지 않고는 천국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혈을 지나지 않고는 신앙이 무엇인지 조차 모릅니다. 그 이유는 보혈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나라를 위해 심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위해 먼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쏟아 문설주에 바르고 이스라엘백성들의 장자가 구원을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 이제 광야로 나올 때 비로소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종의 신분,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한 후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구원 받고 난후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갈라디아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육신의 삶을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서로 상충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학자들에 따라서 교리가 상충되고 목사님들에 따라서 설교가 상충되는 일도 많습니다. 희석된 복음, 가짜 복음, 인본주의적 복음, 율법적 복음, 변질된 복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성도들이 혼란스러울 정도인데요, 지금 이 시대가 갈라디아교회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복음을 희석시켜서 무조건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백성이다. 이 구원을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이런 교리를 설파해서 지금은 교회를 안 다니면서 ‘나는 구원 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이렇게 생각하고 본인의 믿음이 확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분명이 이것은 십자가복음에서 크게 벗어난 삶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무엇인가 잘 못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육체의 삶을 사는데도, 그들을 십자가복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철저히 거룩함과 신령함의 삶으로 초대하지 못하고 예수만 믿으면 천국가고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이렇게 심각한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동반되어야합니다. 그 행동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그러면 바울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 육체의 것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저번 주에 말씀드렸지만 바울이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율법학자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화생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자랑할 것이 많은데 이 모든 자랑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보니 이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이것이 바울에게 유일한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유일한 답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이외의 것은 바울이나 사도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기독교메시지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무엇이며, 초대교회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분명한 것은 사도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이나 철학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기독교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사도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가를 알면 됩니다. 초대교회 메시지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어느 때 이든지, 십자가 복음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십자가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의 복음은 전혀 인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를 받게 함은’그것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전하면 핍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 것이라고 바울이 묘사할 정도입니다. 1세기 때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누구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싫어하고 인기가 없었는데도 사도들은 십자가만 전했을 까요? 이일로 인해 고난도 당하고 순교도 당했는데 말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며 충돌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교훈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이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교훈적으로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듣기는 좋고 편안하고 부드럽습니다. 복음의 교훈이 철학보다 위에 있고 가장 위대한 종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상한 신앙인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을 윤리적 가르침으로만 생각하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고 이렇게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자, 정직하게 살자, 말씀의 교훈대로 살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일차적인 부분이 아니고 복음의 핵심도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이 복음이 우리의 삶의 핵심이 되어야합니다. 왜냐 하는 상세한 설명은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하겠습니다. 그 앞 사건을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기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베드로가 엄청난 고백을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시인하고 고백하는 상황인데요, 이 아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신앙을 점검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각종 병들을 고쳐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나라에서 이 땅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왕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원리와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이 땅에서는 가진 자, 권력자, 힘 있는 자가 대우를 받고 높임을 받지만 그 나라에서는 낮은 자, 섬기는 자가 대우를 받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최후 만찬에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취하여 떼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또 잔을 나누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이것은 내 자신을 주는 것이요 찢겨질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주님의 가르침 속에 명백히 십자가의 복음이 핵심 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 산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와 무엇을 논의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주님의 십자가가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쓰여 졌고, 신약에서는 얼마나 상세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기록했느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망치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이 핵심이었습니다,. 이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전도에 중심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도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모든 서신서의 대주제입니다. 고린도전후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기독교 복음전도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나, 어떤 성직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피를, 갈보리십자가에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이요,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우리가 일차적으로 선포하고 전하는 것은 그의 교훈이나 가르침 이전에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기념하라고 한 것은 이 죽음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이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 이 점이 가장 놀라운 요점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전한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밝히 보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극적인 방법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가 복음전도의 핵심이요 중심이기 때문이요, 이것을 통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잊으려고 하거나, 이상화시키거나, 상업화 시키지 말아야합니다. 십자가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이것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마십시오. 목걸이해서 걸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믿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사건이 바로 구원사건이기에 우리가 전하는 가장 핵심 된 내용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 외에 전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원을 위해 십자가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는 구원이 이루어졌으며,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를 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이미 우리의 죄가 사해진 증거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의 확인이며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권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고, 십자가를 외면할 이유가 없고 십자가를 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 십자가를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