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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소요유적답사회(逍遙遺跡踏査會)에서 주관한 봉화(奉化)지역의 유교문화(儒敎文化) 유적(遺跡)을 답사하는 기회에 권오규(權五圭)와 류진환(柳進煥) 나 셋이서 참여하면서 답사한 내용의 글입니다
봉화유림의 요람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성촌 바래미(海底)마을 2012. 9. 1 조선시대에는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忠ㆍ孝ㆍ烈을 국시(國是)로 삼게 되었으며, 사대부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친족(親族)과 가문(家門)을 중히 여기는 문화가 지배하던 시에 봉화(奉化)는 안동과 버금가는 양반 문화(兩班文化)가 면면히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봉화의 유교문화를 답사한, 바래미(海底)마을, 가평리계서당(佳坪里溪西堂), 닭실마을과 청암정 그리고 충재박물관, 만산고택(晩山古宅), 경체정(景棣亭)을 소개한다.
봉화군 지도
봉화읍 시가도
바래미 마을은 봉화읍 소재지에서 영주쪽으로 약 2km정도 떨어진 해저리에 의성김씨 집성촌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 마을은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외관상으로 국도보다 낮은 곳에 있어 도저히 취락(聚落) 형성 조건이 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의 토질은 사토로서 물빠짐이 매우 좋아 배수가 잘 된단다. 그래서 주거할 수있는 마을이 형성되었든 것이다. 바래미 마을의 어원은 이곳 전체가 하상(河床)보다 낮은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다밑’인 바래미라고 불리게 되었단다.
해저마을 1
해저마을 2
의성김문(義城金門)이 1700년대 바래미 마을에 입향(入鄕) 후 200년동안 대과(大科) 16장과 진사19분 생원 44분의 소과(小科) 63장이 나왔다. 가히 그 학문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의성김씨의 충의(忠義)은 일제시대에 까지 이어져 독립유공(獨立有功) 수훈자(受勳者 )14분이 나왔으니 이는 바래미 마을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안동 내앞(川前)의 의성김씨 집성촌에서도 독립운동 유공자가 많이 배출되어 이곳에 독립운동기념관(獨立運動紀念館)이 건립 개관되어 애국정신과 충의의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의성김씨 문중에서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조상들의 충의(忠義) 정신이 대를 이어서 전수(傳受)된 것이 아닐까!
봉화해저팔오헌종택(奉化海底八吾軒宗宅) 봉화팔오헌종택(奉化八吾軒宗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45호로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34. 의성김씨 종중 소유로 되어있다. 김성구(金聲久, 1641-1707)는 파조인 개암 김우굉(金宇宏)의 현손이다. 부친 김율(金瑮)이 생활터전으로 잡은 봉화 호평(범들이) 마을에서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김성구가 해저마을로 옮겨 오면서 지은 집이다. 이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은 의성김씨 개암공파가 해저마을에 처음 마련한 생활터전이다. 당시 해저마을은 의령여(余)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살았는데,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이 여기 자리 잡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의성김씨 개암공파 일문의 세거지로 바뀌어져 나갔다.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은 총 2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의 사랑채이고, 다른 하나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안채이다.
100여호의 주민들이 식수로 썼던 해저리에 단하나뿐인 왕우물
해저리의 유래에 대해서 해설하는 권율 문화해설사
봉화해저팔오헌종택(奉化海底八吾軒宗宅) 팔오헌 종택 사당
팔오헌명(八吾軒銘)
김성구(金聲久)는 1692년(숙종 19)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봉직한 후 고향에 돌아와 자기 집 방문위에 <팔오헌(八吾軒)>이라고 써 붙이고 후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실천한 <팔오헌(八吾軒)> 즉「경오전(耕吾田), 음오천(飮吾泉), 채오전(採吾巓), 조오천(釣吾川), 피오편(披吾編), 무오현(撫吾絃), 수오현(守吾玄), 종오년(終吾年)」[내 밭을 갈고, 내 샘의 물을 마시고, 내 산의 나물을 캐고, 내 내의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펴내고, 내 거문고를 뜯고, 내 하늘을 지키며, 내 생애를 마치리]이라는 공의 인생관(人生觀)의 요체(要諦)를 담은 여덟 가지 명(銘)인 팔오헌명(八吾軒銘)을 지어 몸소 실천하시며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쓰시다가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봉화해저남호구택(奉化海底南湖舊宅)
봉화남호구택(奉化南湖舊宅)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385호로 2000년 지정되어 있으며 농산9聾山 김난영(金蘭永)이 조선 고종 13년(1876)에 지었고 아들인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1877∼1935)이 살던 집이다. 남호 김뢰식(金賚植)은 당시 경상도의 부호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인데, 일제시대에는 전 재산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軍資金)으로 제공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이곳 남호구택(南湖舊宅)의 사랑채에서 남호를 비롯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곤 했다.
남호구택 행랑채
남호구택 사랑채
남호구택(南湖舊宅)은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접하여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7칸의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좌측에서 세번째 칸에 다른 칸보다 돌출된 도장방을 두어서 공간이 연결되면서도 구획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이 마을에는 이같은 유형의 집이 몇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안채의 대청은 2x2칸으로 구성되었으며 열려진 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공간에 깊이감을 더하고 있다.
남호구택 안채
이 지방의 ㅁ자형 집은 사랑채가 있는 가운데에 중문간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은 측면에 중문간이 있다. 봉화해저만회고택(奉化海底晩悔古宅) 이 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金建銖)가 살던 집이다. 김건수는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縣監), 부사(府使)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수리한 바 있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余)씨에게 샀다고 전한다.
봉화해저만회고택(奉化海底晩悔古宅)
만회 고택 행랑채
만회고택 행랑채
3.1운동 직후 유림(儒林)들이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 파리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제출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또 1925년 유림단(儒林團)이 독립자금(獨立資金)을 모을 때 영남 북부지방에서는 이 집에 모여 논의(論議)하기도 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만회고택 판액
청풍헌
사랑채는 기단이 높아 위풍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전면에 넓은 마루를 가지고 있다. 누마루는 멋진 공간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된다. 바라보는 방향마다 다양한 풍경이 전개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 걸린 청풍헌(淸風軒)이라는 현판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느껴지게 하며, 누마루에 걸린 명월루(明月樓)라는 현판은 밤마다 누마루에 가득 찰 달빛을 생각하게 만든다.
명월루
백하-소백산과 태백산 아래라는 뜻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뒷쪽에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옛 경북지방의 ㅁ자 집 평면배치법(平面配置法)과 통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住宅硏究)에 좋은 자료가 된다.
만회고택 안채 1
만회고택 안채 2
우리를 맞이한 만회고택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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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택에 감상 잘 하였습니다.
윤중선생의 답사기가 진짜 공부가 되는것 같네....수고 많았고 항상 고맙게 생각하네....
봉화에 숨은 곳이 많군. 잘 봤습니다.
우리 하나산악회 때만 같이 하는게 아니고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답사를 하고 연구를 하고 있군!
열정이 대단하시다니깐.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