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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두툼한 옷을 입고 입김을 불며 맞는 것이 제격입니다. 이제 설 연휴가 시작되었는데 날씨가 설답군요. 아무튼 미세먼지 없으니 좋기만 합니다. 쨍한 추위라지만 빛나는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설을 지내고 나면 진짜 새해를 달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지요. 정치판을 보노라면 희망을 지지고 볶는 느낌입니다만 일단 접어두고 우리 각자 갈 길을 가면 됩니다. 이 나라를 언제는 정치인들이 지켰습니까? 우리 힘없는 백성이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곧 희망입니다. 여기밖에는 있을 곳이 없는, 갈 곳이 없는 백성, 그래서 죽기 살기로 여기서 버티는 것입니다. 저 놈들은 배 터져 죽고 우리는 배곯아 죽는다 해도 죽으면 어차피 고깃덩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냥 사는 겁니다.
이 설 연휴 지나고 나면 어느덧 새해 한 달도 금방 지나갑니다. 시작이 반, 나이 깎아준다고 하지만 나이 먹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가고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문제는 나이 값을 해야 하는데, 이게 항상 숙제지요. 나이 들수록 양기가 위로 올라간다고, 입만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정치판 이야기는 접어두고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을 찾아봅니다. 나도 그런 이야기 속의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하고 만들어가려 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몸이 맘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도 앉아 있느니 지팡이라도 의지해서 걷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이 좋은 설 연휴에 뭔 구실렁거리는 소리나 하고 있는지, ㅋㅋ 추운 날씨 건강하게 행복한 명절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
2023년 1월 2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 : 17)
<스위치>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부러 불행하자고 사는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수도사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합니까? 많이 가지면 행복할까요? 그러면 세상 모든 부자들은 당연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아무리 봐도 부자라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꽤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나 국빈소득이 최고인 나라 국민들이라고 해서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 독신 가구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곧 전체가구의 1/3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나이 들어 홀로된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젊은 층에서도 늘어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어쩐 일이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있어도 안합니다. 불편한 일 없고 오히려 편하답니다. 아내의 잔소리, 남편의 간섭이 없어서 좋기는 할 것입니다. 더구나 경제적 자립능력이 있으니 먹고살 걱정도 없습니다. 나아가 먹여 살릴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예, 아주 편합니다. 눈치 볼 가족이 없으니 ‘내 천하’일 수 있습니다. 내 좋은 취미생활 맘껏 누릴 수도 있습니다.
인기 짱 천만 배우라는 ‘박강’이 성탄절 전야를 맞았지만 이렇다 할 다른 계획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그 자리를 떠나면 세상에 남겨진 ‘홀로’입니다. 그나마 단짝이라 할 수 있는 매니저와 거나하게 술 한 잔 하였지만 가정을 가진 매니저는 일찍 돌아갑니다. 따로 갈 곳도 없으니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탑니다. 대단한 배우라는 사실을 아는 택시기사가 말을 걸어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묻습니다. ‘행복하십니까?’ 행복? 인기 좋고 돈 많고 가진 것 많아서 행복한가? 이럴 때 오래 전 헤어진 옛 연인이 생각납니다. 출세하려고, 인기가도를 달려보려고 헤어졌습니다. 일단 세상에서 출세해보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는.
‘선택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렇게 박강은 뜻하지 않은 성탄절 선물을 받습니다. 잠깐 조는가 싶었는데 깨어보니 두 남매와 아내가 있는 집입니다. 아빠가 깼다고 아이들이 덜려듭니다. 이게 무슨 일? 내가 왜 여기? 여기가 어디지? 아직도 술이 덜 깼어? 여기가 자기 집이지 어디긴 어디야? 아내의 일침이 날아듭니다. 아니, 내가 언제 결혼을 했어? 이게 도대체 어쩐 일이야? 뭔가 착각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입니다. 도망치듯 집을 나와 본래 자기 집으로 달려갑니다. 경비실에서 쫓아내느라 야단입니다. 어찌어찌 집 앞까지 와서 번호를 누릅니다. 웬 남자가 나와서는 누구 찾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내 집인데 무슨?
함께 연극배우 생활을 했던 단짝 친구 ‘조윤’이 매니저였는데 지금 그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조윤이 천만 관객 인기배우가 되어 있고 자신은 쪼들리는 연극배우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도움을 받아 그의 매니저로 일하게 됩니다. 마냥 놀고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아내가 쉼 없이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있음을 알고는 그냥 미친 척 버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끔 조윤 덕에 빈자리 생기면 대타로 정식 배우 자리를 메우기도 합니다. 아이들과도 정이 붙고 생계를 함께 걱정하기도 하며 현실 삶에 최선을 다해 적응해갑니다. 그 열심 덕에 영화감독의 눈에도 듭니다. 다시금 인기도 생깁니다. 낯설었던 아내와의 사이도 진짜 부부로 발전합니다.
이전의 인기도 삶도 잊게 되었습니다. 그냥 지금이 행복합니다. 잔소리는 하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아내와 귀염둥이 자식들, 아직은 전셋집이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하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냥 여기가 좋습니다. 그래, 세상에서 이름 날리고 많이 벌고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하냐? 혼자 멋대로 구르며 살던 그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싶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내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아이들 말썽 없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으니 뭐가 부족합니까? 그냥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게 또 성탄절을 맞습니다. 이제는 함께 할 가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 마치고 집으로 향합니다. 택시를 탑니다. 그런데 그 택시네요.
어땠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아니, 안 돼요. 그냥 놔두세요. 그러나 삶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 있든 행복은 나 스스로 만들며 사는 것입니다. 오, 안 돼!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혼자 살던 호화 아파트입니다. 그리고 매니저 조윤이 깨우러 왔습니다. 전해주는 소식이 있습니다. 옛 애인 ‘수현’이 국내 들어와 전시회를 연다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달려갑니다. 설마 일부러 나를 보러 온 거야? 뻔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재밌고 따뜻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미스 와이프’의 남성 버전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스위치’(SWITCH)를 보았습니다. 알아도 재밌는 것은 배우들의 힘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납니다. 전부해서 66권입니다. 시작은 창세기요 끝은 계시록입니다. 나무로 비유해서 창세기가 씨라면 계시록은 열매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성경들이 나무가 자라는 과정이고 열매를 맺는 과정입니다. 잘 아는 대로 성경은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도 아니고 한 시대에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약 40 명에 달하는 기록자들이 있었고 약 1,6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나무가 그만한 나이를 먹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의 손을 빌려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이 완성되는 자체가 이미 하나의 비유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도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 백성의 역사 속에 비유로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그 백성의 행한 일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는 처음부터 나무가 아니지요. 땅에 씨를 심으면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서 줄기로 자라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 속에는 역시 씨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와 씨는 하나입니다. 열매가 씨이고 씨는 열매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씨라면 계시록은 열매입니다. 창세기를 심어서 오랜 세월 자라나 계시록이라는 열매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와 계시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씨를 보아서는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전문가가 아닌 이상 분별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눅 6 :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씨를 봐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보아서는 성경의 중요한 내용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들이 계시록에 대하여 오랜 세월 거의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어쩌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에 소홀하였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씨와 열매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이기도 합니다. 씨를 알면 열매를 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열매를 알면 씨를 알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열매를 풀면 그 씨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계시록이 바로 그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성경들은 그 비밀을 풀어주는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6 :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마지막의 사건을 처음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까지 다짐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비밀을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옛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누가 이런 예언을 했답니까? 시 78 : 1 - 3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그러므로 이 시편 기자의 이 말은 당대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장차 이룰 예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약 천 년이 지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이 비유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천국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이란 말은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열매를 알면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열매 안에는 씨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알면 나무를 아는 것이고 씨를 아는 것입니다. 사실 그 모습들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이지요. 씨든 열매든 나무이든 같은 족속입니다. 창세기의 답이 성경의 답이고 계시록의 답입니다. 모두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것이 먹기 편하고 맛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계시록이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랐습니다. 사실 계시록을 알면 나무 즉 과정을 아는 것이고 그 출발인 창세기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 지나와서 계시록에서 멈춘다면 정작 먹어야 할 열매는 제쳐두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한심한 일 아닙니까? 기껏 달려와서 비로소 먹어야 할 열매를 포기하다니요. 그러면 여태 뭐하려 달려 왔다는 말입니까? 사실 열매를 모르면 나무도 모르는 것이고 당연히 씨도 모르는 것이지요. 마 7 :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먼저 열매를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5 :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여기서 예수님 당신 자신이 포도나무라 하셨으니, 나무는 곧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농부시랍니다. 그러면 무슨 농부십니까? 바로 사람 농사짓는 분이시지요. 열매가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실 성경 66권은 사람 창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창 1장부터 사람 창조가 나오지요. 그리고 성경 66권이 사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등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농사하여 얻고자 하시는 것도 열매 즉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성경 역사 속에서 보면 그 열매들이 하나님 얻고자 하시던 참 포도나무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사 5 : 1 - 2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예, 그랬습니다. 좋은 포도를 바라셨는데 맺힌 것은 들포도였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이고 성경의 역사입니다.
잘 아는 대로 모세의 율법 아래 신앙하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의 미래를 보셨던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도 그 장래를 보셨습니다. 신 31 : 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하니라” 아멘! 모세를 통하여 이미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아멘! 내가 너희의 원한을 풀어주려 한들 말세에 너희 가운데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말씀이지요. 결국 믿음 없는 백성으로 끝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영적 이스라엘도 그렇게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포기하셨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필요 없는 일이겠지요.
이제 마지막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봅니다. 계 22 : 1 - 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아멘! 우선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던 것처럼 세상 끝에는 말 그대로 지구가 끝장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하시죠. 만국을 소성하기 위함이라고. 만국을 소성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입니다. 지구가 박살난다는 것은 사람이 생각해낸 상상,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사람의 계명’일 뿐입니다. 그런 해괴한 말씀을 전하는 목자는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마귀의 소속이고 그 전하는 말은 거짓이며 그 말을 먹는 자들도 생명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즉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둘 다 망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목자가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미래,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는 일입니다. 무조건 아멘, 아멘 하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 ‘생명수의 강’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요단강이나 우리나라 한강과 같은 것입니까? 성경을 그렇게 보니 지구가 박살난다는 엉뚱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4 :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우리 안에서 영생수가 된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물이 도대체 무슨 물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생명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요 그 말씀을 받는 우리 심령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우리 또한 샘물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 받은 나무들 즉 사람들이 생명나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먼저는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히니 즉 열두 지파가 창조되는 것은 이전 이스라엘 지파를 형성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혈통 중심의 육적 이스라엘이 망하고 다음 예수님을 통하여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세상을 구원하시려 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육적 이스라엘이 끝난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도 끝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이제 다시 영적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첫 열매인 영적 새 이스라엘 열두 지파 144,000입니다. 이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서 만국을 소성하는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계 7 :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그리고 그 다음 설명해줍니다. 각 지파에서 12.000씩이라고 말입니다(5 - 8절). 이들을 통하여 만국이 소성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셀 수 없는 많은 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9 - 10절 “이 일 후에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렇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 만국을 소성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사장 144.000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아담과 돕는 자 하와를 목자로 택하시고 분부하신 복이 있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 복을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 때 말씀하신 하나님의 주시는 복은 계시록에 와서야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세상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왜 기독교가 세상과 대립하여 다투고 있습니까? 성경 역사를 아무리 계산해도 6천 년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수십억 년 또는 인류의 역사조차도 수백만 년 또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수십만 년입니다. 기독교 학자들은 그럼에도 지구 나이를 6천 년이라고 고집합니다. 말이 됩니까? 세상이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말 같지도 않은 신화를 신봉하는 광신자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런 손가락질당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보다 뛰어나도 훨씬 뛰어나고 알아도 더 많이 알고 여기 함께 살아도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으로 살지만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렇게 무지한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무식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맡고 있습니다.(엡 2 : 2) 그러므로 마귀가 잡고 있는 그곳에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의 뜻도 영생이고 그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다름 아닌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사실과 사건을 빙자하여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기에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인 진리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영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면 엉뚱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발견한 과학적인 사실이나 진리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바보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우스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씨가 나무를 말합니다. 열매가 나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성경을 말하고 계시록이 성경을 말합니다. 창세기는 자연계 창조를 빙자한 영적 하나님 나라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부터 감추인 것”(마 13 : 35)입니다. “옛 비밀한 말”(시 78 : 2)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성경에서 세상 이야기를 찾으려 하니 이상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이제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흰 무리로 떼를 지어 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하나님이 마귀를 붙잡아 영원한 불못에 빠뜨려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20 :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 때는 거짓 선지자도 끝장입니다.
잠깐 창세기를 봅니다. 창 1 : 1 - 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아직 해 달 별이 창조되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 땅에 낮은 무엇이고 밤은 무엇인가? 저녁과 아침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이 빛은 무엇인가? 요 1 : 4 - 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빛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빛은 무엇이고 요한복음 1장에서의 빛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빛이 있으니 낮이고 예수님이 안 계시면 빛이 없으니 어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9 : 4 - 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빛인데 그러면 언제가 밤일까요? 빛이신 예수님이 안 계시면 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 1장에서 빛이 오기 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세상에 빛 된 생명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가진 목자가 등장하리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우리는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땅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 이야기,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빛 된 목자 곧 하나님 말씀을 가진 목자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역사를 펼치셨는데 잘 아는 대로 초장부터 실패가 나옵니다. 바로 생기(하나님 말씀)를 받은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뱀의 말을 먹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담 이후 여러 목자가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세상이 어떻게 되어버리고 그래서 다시 시작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렘 4 :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창 1 : 2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잘 아는 대로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모두 멸망당합니다. 빛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세상에 다시 빛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성경 ‘예레미야’는 선지서이고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 초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선포하셨습니다. 요 8 :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런데 잠시 머물다가 새 언약을 하시고 떠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없으니 다시 밤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 다시 오시면 낮이 됩니다. 다시 오시면 이제는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에 천국도 하나님도 내려오시기 때문입니다. 계 21 : 2 - 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렇게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계 22 :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끝을 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결론이고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이 이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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