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촐하다
홍 해 리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
* 감상 :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은 11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슬픔을 슬픔으로 치유하는, 슬픔에 잘 듣는 응급처방시(詩)란 뒤표지 광고문구가 시집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 「촐촐하다」는 표면상으론 슬픔의 무게나 색조를 살짝 덜어낸 느낌을 주면서 술술 잘 읽히는 시다. “촐촐”이란 어감에서 뭔가 조금씩 넘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데, 시인은 얄궂게도 술을 생각하고 입맛이 도는 모습이다. 막걸리를 밥으로 여기고, 풋고추 날된장에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홍해리 시인의 일면을 그려보는 사람이라면 슬며시 웃음도 짓게 되는 장면이지만 편하게 웃을 순 없다. 정신을 놓고 몸이 아픈 아내가 시인의 팔베개에 겨우 잠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가벼운 술상조차 꿈이 된 게 시인이 마주한 현실이란 걸 알아차린다면 더욱 그렇다.
젊은 날, 난(蘭)과 시와 술에 집중하는 사이 아내를 혼자 둔 적이 많았다는 시인은 아내가 아프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 바깥출입을 최소화해오고 환후가 깊었을 때는 옆을 지켰다. 어떤 인생이든 자기 뜻대로 살아지는 경우는 없다. 주변에 아픈 사람이 생기거나 예상치 못한 그늘이 드리울 때 그 슬픔의 무게나 누적되어 오는 피로도란 것은 상상 이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그렇게 두더라도 「촐촐하다」에서 보여준 시인의 태도처럼 짐짓 엉뚱한 상상 혹은 딴 생각으로 촐촐 넘치는 마음결을 슬며시 보일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은 좀 더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으로 촐촐한 저녁을 맞는다.
- 이동훈(시인)
첫댓글 나도 항상 촐촐합니더!
부엌에 들어가 보시지요!
낯선 소리 하나를
시 대접에 담아놓으시고
취하고 싶은 마음인양
누룩향기를 띄우시는
막걸리 담그는 방법을 익혀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