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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로새서 3장 15절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5-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러분은 감사를 잘 표현하는 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감사를 잘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실지 몰라도 사람은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감사를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로도 해야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베푸는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 은혜의 가치와 사랑의 깊이를 느끼게 되기 전까지는 감사의 마음을 갖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 그리고 청년들이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는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요즘은 사람들이 카톡을 통해서 감사를 많이 표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감사를 다양한 글로써 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동지라고 팥죽 그림을 올려놓는다든지 복날이라고 삼계탕 사진을 올려놓는다든지 하면서 좋은 날이 있으면 그림이나 글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올려 놓아봐야 받는 사람은 먹을 수도 없는 사진에 불과합니다. 그뿐 아니라 올리는 사람은 아무런 부담도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마음의 부담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감사와 같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립니까? 말로만 감사드립니까? 아니면 헌금을 하거나 아니면 여러분들의 몸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대로의 감사를 드리십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간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응답하셨다고 해봅시다. 그것을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경우에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나중에 이루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말씀으로만 끝내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씀하시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입으로만 감사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감사는 감동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진정한 감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언제 나오든지 간에 반드시 밖으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을 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날에 배우는 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의미를 알고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통해 가르치시는 감사에 대하여 몇 가지가 나옵니다. 우선 레위기 22장 29절을 보면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감사하는 자의 기쁨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받는 대상의 기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너희가 감사 제물을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너희가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은 기쁨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드리라고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뭔가 감사할만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크게 기뻐할 만한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뭘 기뻐하는지는 생각도 안해보고 무조건 자기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행하는 감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좀 배워서 나와 함께 동행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7장 12-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이렇게 표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를 밀가루로 드리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12절의 시작을 보면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것은 화목제물을 이여기합니다. “화목제물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만을 부분적으로만 읽으면 “아 하나님은 감사제물을 항상 누룩을 섞지 않은 밀가루로 받기를 원하시는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앞부분만 본다면 그런 오해를 가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뒤쪽을 보면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제물과 함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화목제의 감사제물은 가축을 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로 돌릴지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밀가루에서 피가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화목제물로 가축을 드리면서 무교병과 유교병을 함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얻기 위해 일천 번제를 드렸었는데 하나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에 감격한 솔로몬이 하나님께 감사의 화목제물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1-15절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자신에게 지혜와 부귀영화를 주신다는 말씀에 감격한 솔로몬은 번제와 감사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을 위해 잔치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전체를 보실 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레위기를 통해서 가르친 것은 이제 앞으로 보내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제사법을 제정하신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을 어떻게 제사를 통해 표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법과 또 다른 법들을 볼 때 여러분들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써 여러분들이 그 그림자가 시작되는 부분을 가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랐던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가르침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과가 되어 여러분들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함께 감사를 같이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이 될 뿐만 아니라 감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음이 불안한데 감사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이 평강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평강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과 삶은 영원한 나라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은혜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여러분은 성령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으며 성령께서는 여러분들을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감사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범사”는 국어사전적인 정의로 “갖가지 모든 일”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만나는 갖가지 모든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들은 좋아보이는 일이 있고 어떤 일들은 안좋아 보이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항상 좋아보이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슬프고, 괴롭고, 힘든 일들도 일어납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도 감사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편지할 때는 그들이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하면서 데살로니가교회가 많은 환난을 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을 겪게 될거라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게 먼저 가르쳐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4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축복만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게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될거라는 가르침을 미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마태복음 24장 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하고 계십니다. 이것입니다.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환난에 넘겨줄 때 여러분들이 짓지 않은 죄로 거짓 증거를 하면서 여러분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마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면서 죽일 마음을 가지고 빌라도에게 고발하며 넘겨준 것처럼 여러분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다보면 그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환난에 넘겨줌을 당하고 온갖 고난과 고초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미리 증언하고 계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크게 이야기해서 억울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억울한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였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난과 죽음이 임박하면 자신의 무죄함을 이야기하면서 항변합니다.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마땅히 전해야할 말씀만 전하고 침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한 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인해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지금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됨으로 인해 주변에 여러분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고통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입니다. 그 길 끝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온갖 고초는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비결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환난에 파묻히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역시 알수 없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환난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이 환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또한 사람에게도 역시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주님께 나와 자기들을 고쳐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 올 수도 없어서 멀리 서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고 깨끗하게 된 것을 확인하고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상대방의 얼굴이 치유받는 것을 보고 자기의 몸도 역시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제사장에게 확인하기 위해 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에서 되돌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큰 소리로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5-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 정도로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왔고 나머지 아홉은 제사장에게로 가서 확인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나음받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신 것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돌아오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왔다고 증거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하나님께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를 보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의 선물까지 덤으로 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도 감사를 모릅니다. 남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아내도 있고, 아내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남편도 있습니다. 형이나 동생에게 잘해주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형제나 자매들, 그리고 남매들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아들 딸들도 있고, 자녀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잘해주는 친척들이나 어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목회자 부부들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아름답기는커녕 황폐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높여주고 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러분들을 위해주고 높여주고 올바로 세워주려고 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쓰러뜨려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그제서야 조금씩 자신을 사랑함으로 섬겼던 사람들에 대한 감사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낮춤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이 평탄할 때보다 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솟아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삽니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조그만 것으로 채워줘도 크게 감사합니다. 그의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헤아립니다. 자기에게 선을 베푸는 크기가 크냐 적으냐를 보기보다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선이라도 크게 느끼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웬만큼 크고 비싼 것을 주지 않고는 감사의 마음을 절대로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는 감사했을지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자기의 필요를 채워줄 대상을 찾거나 전에 자기에게 선을 베풀었던 사람에게 더 큰 것을 바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터진 웅덩이와 같아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다주어도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감사지수는 얼마나 높습니까?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서 난 호의를 당연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마음의 변화를 받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을 알고 낮은 자리에 있어야 알맞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즐겨 쓰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당한 많은 겸손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염려하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기뻐하는 자신을 보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의 섬김을 받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진실하게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하여 크게 감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은혜의 마음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사람들을 섬깁니다.
여러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돕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 오늘 본문말씀을 같이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