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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묵상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매일 평화로이 십자가를 지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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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매일 평화로이 십자가를 지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한국 순교 성인들의 축일에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 손안에 있기에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가 들었는데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그래서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면 여기서 고통이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과 함께 있어도 고통이 있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성인이 그랬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우리 성인들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그것과 다릅니다.
고통을 주지 않고 받지 않아서 고통을 겪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줘도 받지 않거나 받아도 겪지 않는 그런 고통을 말함일 겁니다.
우선 박해를 받으면 온갖 고문이 있고,
그래서 육신의 고통을 피할 수 없지요.
사실 이 고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안락사 방식으로 순교시킨다면 배교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박해 시대 때 많은 분이 고문의 고통으로 어쩔 수 없이 배교하였고
독재시절에는 다른 민주화 운동 동지의 이름을 대는 배신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박해 시절 고문을 받을 때 육체만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같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이로 인해 온갖 고뇌와 번민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마침내는 주님 안에서 고통을 겪지 않게 된 것이고,
이런 것들을 다 통과한 다음에 갖게 된 평화로운 고통을 말함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도 시험과 단련을 얘기하고 불사의 희망을 얘기하고 평화를 얘기합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박해를 하느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단련을 받은 분들이며
끝까지 불사의 희망을 놓치지 않은 분들이고 마침내 평화롭게 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은 고통을 겪지 않은 분들이 아니라
평화로운 고통을 겪은 분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평화는 고뇌와 번민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같은 것들이 사라진 마음의 평화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품 안에서의 인격적인 평화이고 사랑의 평화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독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도 있는 것들을 다 열거하며
이 가운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는지”
물은 다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라고 아주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그러니 박해자들의 평화는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낸 승리의 평화이고,
하느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온순해진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 순교가 아니라 일상의 순교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순교는 우리의 성인들처럼 마지막의 영웅적인 순교가 아니라
매일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평화롭게 지는 거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매일 평화로이 십자가를 진다!
이것이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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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입니자.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부 떼르뚤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륵 <복음>에 말슴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참된 삶은 긴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
이토록 제 자신을 바치는 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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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면서 진정 친인척 관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영적 관계를 맺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관계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보면, 출가함으로써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홍가브리엘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이, 젊은이들을 위한 ‘천사의집’과 ‘미리네 초등학교, 중학교’를 20여 년 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비문제로 3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매일 매순간 과테말라에 있다.”고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곳을 떠날 수가 없어 지금도 그들과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180여 명의 어린이와 봉사자들은 신부님의 참 가족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혈연관계에 집착하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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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운 것도 지나가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곤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즐겁고 행복한 것도 지나가면 한 여름 밤의 꿈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진인사대천명’하라고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2019년 8월 21일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일입니다. 의욕을 가지고 신문을 홍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워싱턴, LA, 밴쿠버’로 신문 홍보를 하기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겪었던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가게도 문을 닫았고, 신문홍보도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순교자 대축일 미사도 중단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힘들고 암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쉼표를 찍은 것이지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퀸즈 정하상 성당은 사제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우드사이드, 롱아일랜드, 베이사이드 그리고 평화신문의 사제들은 자주 모여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자전거를 함께 타기도 했고, 캠핑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제에게는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김상균 다니엘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못해서 부득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에서 제게 주일 미사를 부탁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미사를 도와드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드리기로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도 길어졌고, 부르클린 교구의 요청도 있어서 2년이 넘는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제게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사제들과의 친교와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의 만남은 제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시련과 고통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앞에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축복과 은총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겸손과 감사들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총을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며 교만하게 지내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웃의 시련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언제가 기뻐하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도해야 합니다. 3년 만에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함께 봉헌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국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련과 고통 그리고 순교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박해’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들판에 새싹이 피어나듯이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서 신앙의 꽃이 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84년 성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3위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그때 교회를 박해했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풀잎 끝에 맺혀있던 이슬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성당들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퀸즈 성당은 정 하상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비록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국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성인품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순교자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 나에게 시련과 고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고가면 좋겠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은총과 축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그리고 은총과 축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 쉼표를 찍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박해도, 위험도, 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맺어진 하느님과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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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가 본당의 어느 어르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누구 만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어제는 왜 늦게 사제관에 들어왔냐고 물으신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는 이 어르신께 대한 불편함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왜 스토커처럼 본당 신부에게 집착하실까요? 이 신부가 자기 아들 같아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이란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입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도 자기 관점에서 나오는 ‘배려’라는 이름일 뿐입니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알아서 해주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됩니다. 때로는 답답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진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알아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고 간섭하고 싶지만, 우리를 위해 꾹 참으며 말없이 함께하실 뿐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짜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도 불의의 폭력을 저지르는 박해자들을 벌하지 않는 주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주님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며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진짜 사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를 외치면서 기쁘게 순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순교자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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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 절망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하인츠 구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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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적 삶, 주님의 전사
-희망의 이정표-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6)
9월 순교자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의무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날이 되면 저는 19년전 2003년 9월 20일 미국 미네소타주 소재한 성 요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머물 때, 미사후 축하 받았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많은 미국 수도자들로부터 한국 순교 성인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였습니다. 참으로 하나인 교회, 하나인 믿음의 가톨릭교회 공동체임을 절감한 날이었고, 한국 순교 성인들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19세기 박해시대, 한국에서 1만여명이 순교하기는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매일미사책에 나온 영문으로된 오늘 한국 순교들에 대한 짧게 요약된 소개는 전 세계 교회 사제들이 읽을 것이며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은 축일은 19세기 수 차례에 걸쳐 목숨을 바친 한국 순교자 103명을 기념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첫 한국 사제였고, 성 정하상은 평신도 선교사였다. 3명의 주교와 7명의 사제들 외에, 전 그룹이 모든 연령층에 걸친 영웅적 평신도들로 이루어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사도적 여행중 이들을 시성하였다.”
순전히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용단에 의해 교황청 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시성식의 전통을 깬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과 같은 각별한 은총의 시성식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장충동 분원에서 청원자 신분으로 공부할 때 였고 여의도 행사장에 참석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리하여 한국은 세계 가톨릭 교회내에서 제3위의 성인 숫자를 보유하게 되었고, 즉시 연상된 것이 산티아고 순례자 숫자였습니다. 2014년 제가 산티아고 순례시 매년 한국 순례자들은 1위내지 3위 사이를 맴돌고 있었고, 알베르게 숙소마다 설명문은 유럽어 아닌 말은 유일하게 한국어 하나뿐이었습니다.
참 대단한 보석같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성인들 숫자와 산티아고 순례자 숫자의 순위가 비슷한데서 한국인들의 구도求道적 열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성지순례 코스의 순교유적지를 봐도 한국은 전국토가 거룩한 성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퇴장 성가시 부를 성가 283장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순교자 찬가는 언제 불러도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합니다.
1.“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 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 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1절만 인용했습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3절까지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내용에 곡입니다. 가능하면 오늘 순교성인 대축일에 3절까지 꼭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용사로, 주님의 전사로 살다가 전사戰死한 우리 순교자들은 우리를 부단히 분발케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만25세 꽃다운 나이에 순교의 월계관을, 성 정하상 바오로는 만44세 한창 중년 나이에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고, 저는 이분들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으니 더욱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순교자들은 우리 모두 나태함을 분연奮然히 떨처버리고 벌떡 일어나 주님의 전사로서 늘 새롭게 영적전투의 파스카 삶을 살게 합니다. 얼마전 노인들을 돌보는 자매로부터 들은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90세 초반의 미신자 할머니라 합니다.
“갈 길을 모르겠어, 어디로 갈지 갈 길을 모르겠어.”
죽음을 예견하지만 어디로 갈지 답답하고 막막하다는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목적지를 가리키던 곳곳에 있던 무수한 이정표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중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는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삶의 이정표가, 희망의 이정표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잊고, 혼란 중에 갈 길을 잃고 뿌리 없이 방황하는, 표류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주님을 믿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에게 매일 미사보다, 또 오늘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순교성인들보다 더 좋은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도 없을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한국 순교 성인들 대축일에 우리는 순교적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한결같이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 까요?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항구한 샘솟는 사랑이 자발적 기쁨으로 항구한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만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의로운 이들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난중에도 내적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 바로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믿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은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들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세 개의 대신덕對神德 신덕, 망덕, 애덕에다 사추덕四樞德인 지덕(현명), 의덕(정의), 용덕(용기), 절덕(절제)가 더해진다면 최상급의 주님의 전사에 아름답고 훌륭한 순교적 삶이 될 것입니다.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항구히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열정의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언제 읽어도 백절불굴의 힘을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고 알기에 비로소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하고도 한결같은 순교적 사랑이, 순교적 삶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순교적 삶을 살라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들 예외없이 적용되기에 ‘모든 사람’이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시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구원의 길은, 생명의 길은, 진리의 길은, 참 삶의 길은, 성인이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우리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언제나 우리 앞서 가시는, 우리와 함께 가시는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 사랑의 힘이 이기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운명의 십자가를,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하루하루 날마다 끝까지 자발적 기쁨으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각자의 고유하고 유일한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에 우울하거나 어둡고 심각한 것은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기쁨, 평화와 희망, 겸손과 지혜가 넘쳐야 합니다. 온갖 유혹의 탐욕, 분노, 질투, 나태, 허영, 교만, 원망, 절망, 실망은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를 가능하게 하며,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합니다. 제 사랑하는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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