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헌병
이순형
“서! 이 xx자식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여름날, 어슴푸레한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를 내달리던 나를 덩치 큰 남자가 가로막고 몽둥이로 핸들을 내리쳤다. 깜짝 놀라 자전거를 세우니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옆에 한 청년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 죽어가는 표정이었고, 그 옆에는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정도의 소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찬찬히 살펴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저수지 아래 수원성 밑에 사는 피난민촌 청소년들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는 병아리 깡패들이었다. 이런 소년들은 한국동란 직후, 피난민들이 많았던 시대가 낳은 상처이었고, 지금까지 가슴이 아린 기억이다.
1960년대에 수원성곽 밑으로는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 시절에는 산에서 가랑잎이나 솔가지를 잘라다가 난방연료로 팔기도 하고 아궁이에 때며 살았는데, 아침에 손수레를 끌고 올라와 나무를 해서는 저녁 무렵이면 싣고 내려갔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피난민촌의 청소년들은 부모를 따라서 우리 마을을 지나 광교산에 오르내렸으므로 내 또래의 아이들은 서로 얼굴이 익숙했었다.
사람 사는 곳이 대개 그렇듯 그런 아이들 속에는 꼭 막돼먹은 녀석들이 몇몇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학교 뒷골목에 숨었다가 하교하는 학생들 주머니를 터는 일이 다반사라서 훈육주임 선생님이 자주 순찰을 돌고는 하셨지만 우리들은 주머니의 용돈을 그들에게 빼앗길까 늘 불안하였다.
나의 자전거를 막아선 세 녀석들은 그렇게 삐뚤어진 청소년의 본보기였는데, 나도 가끔 그 청년에게 주머니를 털린 기억이 새로운데다가 어스름 저녁에 혼자여서 겁이 덜컥 났다. 다리를 절던 청년이 나를 보더니 금방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기가 몹시 아프니 자전거 앞에라도 앉아서 가겠다고 태워달라고 했다. 나는 자전거를 빼앗자는 것도 아니라서 흔쾌하게 앞에 타라고 친근감을 나타냈다. 아무래도 철봉에 불과한 자전거 앞자리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서 몹시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탄 그를 태우고 우리는 천천히 달려나갔고 나머지 두 소년들은 뛰어서 자전거를 쫓아왔다.
다리를 저는 청년은 달동네에서도 못된 짓은 도맡아할 정도로 고약한 녀석이었는데, 그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내 또래의 소년과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해서 형 뒤를 따라다니며 말썽꾸러기의 재능을 배우는 동생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3명이나 되는 애송이 깡패들과 함께 가는 컴컴한 길이 껄끄럽기 짝이 없어 긴장되기는 하였지만 앞에 탄 청년이 나와 친한 척하여 말을 붙였다.
“아니 왜 다리를 다치셨어요?”
나는 억지로 존댓말을 쓰며 말을 붙였다.
“상광교 논두렁 헌병들에게 당했어. 이 새끼들이 지게작대기를 들고 휘둘러서 그대로 당하고 말았어.”
그 순간 상황이 대충 짐작되었다. 상광교라는 곳은 우리 마을에서 조금 더 가야 하는 산 밑 막다른 마을인데, 청년들 숫자가 많은데다가 혈기가 왕성하고 단결이 잘 되기로 유명했다. 그런 동네에 들어가서 싸움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가게 앞에 동네 청년이 한 명쯤 있었겠으니 거칠 것 없는 나이의 말썽꾸러기들이 세 명의 위세로 싸움을 걸었을 것이다. 좁은 동네에 금방 시끄러운 소리가 퍼져나가자 십여 명의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었고, 청년들은 어린 녀석들이야 그냥 두고 대장 격인 녀석만 흠씬 두들겨 패서 쫓아낸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 얼마나 고소한지 깨소금 맛이었다. ‘아, 요 녀석들에게도 임자가 따로 있었구나!’ 우리들의 등하굣 길을 괴롭히던, 목구멍에 가시만 같던 녀석들이 두들겨 맞았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어서 짐짓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자전거 페달을 밟는 발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은근히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러야겠는데 화풀이를 내게 해댈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그 후로는 그 사고뭉치들을 볼 수 없었고 학교 다니던 길도 더욱 밝아졌다. 그 무렵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공장에 취직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지금쯤은 모두 기술자가 되어 있겠지 하는 생각만 세월과 더불어 꼬리를 물었다.
경찰서조차 변변하지 못하고, 파출소는 시내에나 몇 곳 있었으므로 산동네까지 치안의 힘이 미칠 수가 없었던 시절에 상광교의 논두렁 헌병들 이야기는 우리 마을에서 술자리의 감초였다.
그들은 어느 해 겨울 최씨네가 소를 도둑맞은 일로 청년들이 스스로 순찰대를 만들어 밤이면 야경을 돌고, 낮에는 동네를 배회하는 낯선 사람들을 쫓아내고는 해서 우리들은 농촌의 경찰들이라는 뜻에서 ‘논두렁 헌병’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물론 객지 사람들은 ‘논두렁 깡패’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한동네 사는 우리들에게는 정의의 방패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어 객지에 나와 살면서 명절 때면 시골로 간다. 그런 날 오후에는 어김없이 척사대회가 열리고 왁자지껄한 막걸리 판이 벌어지는데, 그 시절 헌병들은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있고 가장 ‘젊은 청년들’이 오십 대의 중년들이다. 물론 옛날처럼 학비가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고, 교통이 발달하여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배회하는 낯선 사람도 보기 힘들다.
정월 대보름날 척사대회가 벌어진 마을회관에서 들판을 내다보니 텅 빈 논두렁에는 쥐불놀이 흔적만 까맣게 남아있고 썰렁한 바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4년 · 상반기 제10호
이순형
경기도 수원 출생. 2010년 『계간수필』로 등단. 여행에세이 『서방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