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그 시절의 노래
시간은 가끔 낡은 인화지 위에서 걸음을 멈춘다. 누군가의 서랍장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었을 이 몇 장의 사진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귓가에 맴도는 한 곡의 오래된 노래와도 같다. 지지직거리는 유성기 판의 잡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투박하지만 다정하고, 고단하지만 끈질겼던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노랫가락이다.
빛바랜 흑백 사진에 옅은 채색이 입혀진 풍경 속으로 가만히 시선을 던진다. 그곳에는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가 있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난전이 있으며,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진 백의(白衣)의 사람들이 있다.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장터의 풍경이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어깨를 맞댄 거리 아래로, 하얀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그 시절의 장터는 그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팍팍한 삶을 이고 지고 나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한숨을 나누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거대한 생의 축제였다.
장터의 바닥에는 질박한 삶의 도구들이 널려 있다. 누군가는 거친 손으로 정성껏 엮었을 둥근 나무 체와 함지박들이 켜켜이 쌓여 주인을 기다린다. 나무껍질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그 투박한 그릇들은, 쌀을 일고 나물을 무쳐내며 수많은 가족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을 것이다. 물건을 흥정하는 두 남자의 진지한 표정 사이로, 단돈 몇 푼이라도 아끼려는 치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아는 넉넉한 인심이 동시에 읽힌다. 이들의 오가는 말소리는 장터라는 교향곡을 구성하는 가장 활기찬 리듬이었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 한 가족, 혹은 장꾼들의 모습을 본다. 흙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나무 목판 위에는 탐스럽게 익은 주황빛 감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흑백의 무채색 같은 삶 속에서, 저 붉은 감결은 얼마나 눈부신 색채였던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아낙의 얼굴에는 삶의 피로가 옅게 배어 있지만, 그 곁에서 감을 한 입 베어 무는 사내의 모습에서는 일상의 작은 여유가 느껴진다.
떫고 차가운 세월 속에서도 가을볕은 공평하게 내리쬐어 열매를 달게 익혔다. 입안 가득 퍼지는 홍시의 달콤함은, 뼈빠지는 노동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자연의 위로였을 것이다. 그 단내 나는 위로 하나로, 그들은 다시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갈 굽은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길바닥 한편에 거적을 깔고 앉은 여인의 앞에는 마른 풀뿌리와 약재, 혹은 다듬은 나물 무더기가 수북하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허리를 굽혀 물건을 살피고, 여인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시멘트조차 깔리지 않은 맨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의 주름진 얼굴과 마디 굵은 손은, 비바람을 견뎌낸 억센 들풀을 닮았다. 그녀가 팔고 있는 것은 단순한 나부랭이가 아니라, 산과 들을 누비며 흙투성이가 되어 캐낸 생명력 그 자체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그 질긴 생명력이야말로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부르던 소리 없는 저항가(抵抗歌)였다.
가장 이채로우면서도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 한가운데를 유유히 걸어가는 누렁소 떼의 모습이다. '미용실', '양복점', '냉면' 등 제법 현대적인 활자가 적힌 간판이 내걸린 서양식 건물 앞을, 농경사회의 상징인 소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통과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기묘하게 얽혀 있던 과도기의 풍경이다.
양복을 입은 사람과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 기계충 돌아가는 소리와 소의 워낭소리가 한 공간에서 부딪힘 없이 공명하던 시절. 소들은 마치 시간의 속도를 늦추려는 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사람들은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것이 급변하기 시작하던 시대였지만, 적어도 저 길 위에서는 사람과 짐승,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사진은 말이 없으나, 풍경은 노래가 되어 가슴을 때린다.
장터의 웅성거림, 감을 파는 아낙의 나직한 한숨, 마른 약초에서 풍기는 쌉싸름한 흙내음, 그리고 신작로를 울리던 둔탁한 소의 발굽 소리.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그 시절'이라는 이름의 서글프고도 장엄한 합창을 만들어낸다. 물질적으로는 한없이 빈곤했을지 모르나, 세상을 향한 원망보다는 오늘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데 집중했던 정직한 땀방울의 시대. 사진 속 그들의 옷차림은 낡고 투박했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를 견뎌내는 두 어깨만큼은 그 어느 시대보다 단단하고 숭고했다.
이제 저 장터는 매끈한 아스팔트와 대형 마트로 바뀌었고, 길 위를 걷던 누렁소의 자리는 매연을 뿜는 자동차들이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빛바랜 사진 속에서 들려오는 그 시절의 노래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팍팍한 시대를 억척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건너온 그들의 피와 땀이 바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이 풍요로운 땅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밤, 오래된 사진첩을 덮으며 그 시절의 굽이치는 노랫가락을 가만히 흥얼거려 본다. 고단했지만 찬란했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부르던 생(生)의 찬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