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와 한국은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다. 8261㎞. 시차는 7시간.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더욱 더 실감난다. 당연히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먹거리도 다르다. 모든 게 다른 체코와 한국은 딱 한 가지, 지정학적 공통점이 있다. 체코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에 끼여 있다. 한국은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4개국에 둘러싸여 있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놓였다는 사실로 인해 한국과 체코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운명을 겪어 왔다. 640여년 유지된 합스부르크제국 시절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백 년간 강대국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로 있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체코와의 조우(遭遇)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뤄졌다. 체코 군대는 192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 독립군에 최신형 무기를 헐값에 넘기며 유럽행(行) 선박에 오른다. 김좌진 등이 이끄는 무장독립군이 청산리전투(1920년 10월)에서 정규군인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한 것은 바로 체코제 신형 무기 덕분이었다. 이 지점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왜 체코 군대가 ‘러시아의 섬’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러시아와의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은 대부분 식민지 슬라브인들이었다. 이들은 같은 민족인 러시아인과의 골육상쟁을 거부하며 제정러시아 편에 선다. 전쟁의 와중인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다. 체코 군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공산군인 적군(赤軍)이 장악한 우크라이나를 통과할 수도 없고. 그래서 선택한 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선박 편으로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기 중이던 체코 군대는 한국의 처지를 전해 듣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무기를 지원하게 된다.1918년 10월, 민주공화국 체코가 독립했다. 그러나 평화는 독일의 침공으로 20년 만에 깨어졌다. 체코 레지스탕스가 간간이 저항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처참한 보복이 돌아왔다. 영화 ‘새벽의 7인’에 그 일단이 나온다. 독일이 패망한 게 1945년 5월. 체코는 소련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다. 1946년 5월 치러진 체코 총선에서 공산당은 다수당을 차지한다. 나치의 폭정(暴政)이 너무나 생생했기에 체코인이 공산당에 대해 온정적 시선을 보낸 결과였다. 대통령은 영국 망명에서 돌아온 자유민주주의자 베네쉬, 수상은 스탈린주의자 고트발트. 유럽 최초의 좌우합작 정권이 출범했다. 그러나 유약한 지도자 베네쉬는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알지 못했다. 고트발트는 2년9개월간 공갈, 협박, 폭력, 테러로 좌우합작 정부 내의 자유민주주의 인사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고트발트는 1948년 2월 25일 구시가광장 골즈 킨스키궁전 발코니에서 공산혁명의 성공을 선포했다. 이후 체코는 고요한 무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