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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ей Зён 5시간 ·
아직도 돈바스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뻘소리하는 인간들이 있어 재업해본다.
돈바스 지역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드릴까 한다. 꼭 가보지도 않은 것들이 헛소리들을 하길래 다시 정리해본다. 돈바스라는 이름은 쎄베르스끼 다녜쯔(Северский Донец) 강에서 유래되었다. "북쪽의 돈(Дон)"이라는 뜻으로 이 강은 다녜쯔 강이라고도 불렸다. 이 강은 벨고로드 북쪽, 중앙 러시아 고지대에서 발원해 우크라이나를 지나서 러시아의 돈 강과 합류하는 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강과 돈 강 사이의 평지를 다녜쯔끼(Донецький) 분지, 우크라이나나 영어권에서는 도네츠 분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돈바스(Донба́сс)의 용어는 이 다녜쯔끼 분지를 축약하여 만들어진 혼성어 개념으로 보면 된다. 이 지역은 키예프루스 시기에 키예프의 지배권보다 아조프 해 바다와 접한 킵차크, 하자르, 페체네그 족 등 투르크계 유목민들의 오랜 지배를 받아왔으며 몽골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18세기 예카테리나 대제 때 러시아에 통합되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이곳을 경작하기 위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돈바스 지역에 코사크족들을 파견해 정착하게 했다. 이곳의 코사크 농노들은 로마노프 귀족들의 착취를 당하면서 보흐단 흐멜리츠키, 스텐카 라친, 푸가초프 등의 코사크족들이 농민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역사적 풍파를 겪으며 돈바스 지역은 코사크의 후예들인 우크라이나 인들과 러시아 인들이 섞여 살았지만 어느새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인들보다 코사크 후예들이 유형을 많이 오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의 도시들로 초석이 다져진다. 게다가 1869년 웨일스의 사업가 존 휴즈(John Hughes)가 이 곳에 금속 공장을 설립하면서 중화학 공업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서자 스탈린은 이곳에 러시아인들을 집단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돈바스 지역에 방대한 양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수많은 러시아 인들이 왔으며 소련의 경제 개발 5주년 계획을 실행할 때 돈바스 지역은 스탈린이 농업화에서 공업화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소불가침 조약이 파기되면서 나치 독일의 폭격을 받아 석탄 채굴 공장과 광산 등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독일의 목적은 아조프 해와 카스피 해 유역에서 채굴되는 석유 유전의 확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한 흑토 지대를 장악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였다.
결국 돈바스의 석탄 광산도 독일에게 파괴되고 이곳에 유태인들이 끌려와 석탄 채굴의 노동이 강요됨으로써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방대한 양의 석탄이 나치 독일에 넘어가게 된다. 결국 소련이 돈바스를 탈환했고 전쟁이 끝나게 되면서 이곳은 다시 소비에트의 새로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돈바스 전 지역의 꼼비나뜨(Комбинат)화를 위해 다시 석탄이 채굴되기 시작했다. 1991년에 소련에서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틈을 타서 소련이 붕괴되자 발트 3국은 일찍 떨어져 나갔고 다른 카프카스 3국과 중앙아시아 4개국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만이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력이 이들 국가들을 받쳐주지 못하니 결국 독립을 하게 되고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끄랍추크(Леонид Кравчук)에 의해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하여 어떻게든 러시아에 의지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그리 녹록하지 못했고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초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등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러시아의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하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관계보다 서방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친러 네트워크들과 돈바스 지역의 친러계 및 러시아계 주민들을 반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소련 시대 때 경제 개발 5개년 및 대규모 꼼비나트화를 위해 넘어왔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가 독립했을 때 자신들과 독립에 관해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독립을 선포한 것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은 돈바스에 살고 있지만 직계든 부계든 자신들의 친척들은 모두 러시아 국민이자 형제들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끄랍추크의 독단적인 독립 선포가 이들을 갈라놓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90년대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이들의 불만이 단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2004년 오렌지 폭동이 발발하고 친(親) 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돈바스 지역에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소련이 붕괴되어 러시아 연방이 들어섰을 때, 혹은 90년대 두 나라의 왕래가 자유로울 때 왜 돈바스 러시아계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련 스탈린 시대 돈바스 지역에 자리 잡아 오랜 기간 생활하던 사람들이 십수년 내에 정리하고 돌아간다는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리고 90년대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우크라이나를 감당하지 못해서 독립시킨거나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들이 90년대 러시아에 돌아갔다해도 돈바스에서의 삶보다 못했음 못했지 더 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며 공식 관용 문서에 러시아어를 빼고 우크라이나어만을 공식 언어로 지정하겠다는 것은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을 소수민족화 하여 러시아어를 소수민족의 언어로 지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도 돈바스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을 보면 크림 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이 일어났던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하리코프도 우크라이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이 동부에 꽤 있지만 그것은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러시아로 귀속되고 싶어했다. 유로마이단이 발생하고 이에 반발한 친러계 주민들은 친러계가 주로 분포한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포르셴코의 과도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개입하여 주민투표 끝에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합병되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는 2014년 5월 12일 정부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분리 독립 투표를 치러 가결하였다. 이후 이들은 '노보러시아 연방국'으로 통일을 선언했으나 도네츠크 측은 연방국가라는 입장, 루한스크는 국가연합이라는 입장에서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주민들의 투표로 인해 독립했다는 것은 합당한 부분이다. 그러나 돈바스 지역 중 마리우폴이나 하리코프 같은 경우, 크림반도처럼 주민투표도 붙였지만 포르셴코 정부는 이를 일방적으로 탄압했고 이 지역에 발생한 돈바스 의용대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현재 노보러시아 연방국이라 불리는 돈바스 인민공화국들은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사진 : 쎄베르스끼 다녜쯔(Северский Донец) 강